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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브이 포 벤데타 (12)

영화 속 슈틀러 총통의 전위조직들은 전제적인 통치의 견마와 수족이 돼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모두 슈틀러와 똑같이 생각하고 슈틀러와 똑같이 말한다. 슈틀러의 복제인간들이다. 집권당 ‘노스파이어’는 슈틀러 총통과 ‘당정 일체’가 돼 돌아간다. 아무도 슈틀러의 시정施政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대안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슈틀러 총통은 도미노가 쓰러지는 패턴을 구상한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세워놓은 도미노의 첫 패에 해당하는 ‘노스파이어’당의 대표를 쓰러트리면 모든 패가 일사불란하게 같은 방향으로 어김없이 쓰러져야 한다. 모든 게 슈틀러 맘대로, 형식은 단일대오다. 

‘당이 결심하면 우리는 한다’는 북한 조선노동당의 구호가 이곳에서 실현되고 있다. 당정이 단일대오를 형성하고 최고지도자의 구상대로 일사불란하게 넘어진 도미노 패들은 파시즘의 거대한 ‘F’자를 만든다.

영화 주인공 V의 꿈은 일사불란한 슈틀러의 전제정치를 타도하는 것이다. 영화는 그의 꿈을 놀랍게도 도미노 붕괴의 일사불란함으로 설명한다. V가 촘촘히 세워놓은 도미노 패들은 첫번째 도미노 패를 쓰러트리자 도화선에 불을 댕긴 것처럼 정해진 길을 따라 무너지면서 ‘A’자를 만들어낸다. 무정부주의(Anarchism)의 약자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V가 영국 국회의사당을 폭파시키자 그제야 런던 시민들이 V와 똑같은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쓰고 ‘내가 V다’고 외치며 하나둘씩 광장으로 나오기 시작한다. 슈틀러의 복제인간들과 V의 복제인간들이 한판 맞붙은 꼴이다.

강철 같은 단일대오를 형성한 그 무리가 점점 불어나 수백 수천의 ‘다수’임이 확인되자 그들을 진압하러 출동한 슈틀러의 계엄군도 비실비실 물러서고 만다. 계엄군까지 머리를 긁적이며 물러갔을 정도라면 아마도 영국 사회는 슈틀러와 파시즘이 물러가고 무정부주의 사회가 들어섰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자리잡은 ‘무정부주의’ 세상이 온전했을지 의문이다.

슈틀러 총통과 노스파이어당의 ‘F’자가 됐든 V가 완성시킨 무정부주의를 상징하는 ‘A’가 됐든 마치 쓰러지는 도미노와 같은 일사불란한 다수(majority)가 그려내는 글자들은 불안하다. 세상의 변화는 분명 ‘다수의 힘’이 이끄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다수’가 가기를 원하는 방향이 항상 옳은 건 아니다. 인간의 허망한 환상에 천착(穿鑿)했던 ‘현대극의 아버지’ 헨리크 입센은 “소수의 생각은 매우 드물게라도 옳지만, 다수의 생각은 항상 틀리다”며 ‘다수’를 향해 진저리를 친다. 소수와 소수의견은 대개 ‘자기 검증’에 충실하지만, 그 세력이 다수가 되면 자신들의 생각을 검증하지 않은 채 원하는 결론을 내기 위해 폭주하기 때문이다. 다수의 함정이다. 

톨스토이는 ‘인간들이 저지르고 있는 잘못 중에서 고쳐지지 않는 잘못들은 다수가 저지르고 있는 잘못들’이라고 진단한다. 인간의 진보를 막고 있는 것은 ‘다수’들인 셈이다. 그래서인지 「톰 소여의 모험」을 쓴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당신이 다수의 생각에 동조하고 있다면,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고 조언한다.

1960년대 엉뚱한 방향으로 달려가는 ‘다수’ 국민을 바라보던 케네디 대통령은 “가끔 다수란 모든 바보가 한편에 모여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라고 혀를 찼다.

우리사회 이곳저곳에서 정파와 진영의 ‘다수’가 모여 지도자의 손짓 눈짓 하나에 도미노 패처럼 일사불란하고 시원하게 쓰러지는 소리가 요란스럽다. 모두 슈틀러나 V의 복제인간들 같다.

그렇게 각 정파와 진영의 도미노 패들이 일사불란하게 쓰러지기는 하는데 무슨 글자를 그리려고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진보’나 ‘보수’도 아닌 듯하고 ‘국가’나 ‘국민’도 아닌 듯하다. 혹시 각자의 마음속에는 엉뚱한 글자들을 품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면서도 늘어선 도미노 패들의 행렬에서 벗어나 함께 쓰러져 주지 않는 ‘소수’를 향해서는 융단폭격을 가하고, 그 소수를 축출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다음 ‘총선 전쟁’과 ‘대선 전쟁’에 승리를 담보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1973년 10월 5일 이스라엘 안전보장회의는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를 이집트의 침공 가능성을 논의했지만 위원 9명 모두 ‘절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결론 내렸다. 바로 그다음 날 10월 6일 이집트는 전면공격을 시작했고 이스라엘을 국가존망의 위기까지 몰아갔다. 

그 이후 이스라엘 국가안전보장회의는 ‘10번째 사람 규칙(The 10th man Rule)’이라는 것을 신설했다. 본래 안전보장 회의 구성원 9명에 한명을 추가한 거다. 그 사람의 역할이 흥미롭다.

회의에서 합의된 ‘다수의 결론’에 무조건 반대하는 ‘소수 의견’을 내고 결론의 맹점을 공격하는 일이어서다. 도미노 붕괴처럼 도달하는 ‘다수’의 결론을 막는 역할이다. 어쩌면 케네디 대통령이 꼬집은 ‘바보들의 행진’을 막아줄 사람이다.

우리네 정파와 진영에서도 ‘열번째 사람’을 일부러라도 모셔왔으면 싶은데, 있는 사람들까지 내쫓지 못해 안달이니 딱한 일이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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