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브이 포 벤데타는 도미노가 붕괴하는 모습을 동원해 극적인 결말을 극대화한다. 주인공 V는 영국 국회의사당을 폭파할 날로 정한 D-day에 그의 지하 아지트에서 도미노 패들을 쓰러뜨린다. 수만개에 달하는 듯한 도미노 패들이 쓰나미가 몰려오는 것 같은 장관을 연출하며 쓰러진다. 그 쓰나미가 지나간 자리에 무정부주의(anarchism)를 상징하는 이니셜 ‘A’가 신의 계시처럼 드러난다.
도미노 패를 쓰러뜨린 V는 자신의 승리를 예감하는 동시에 죽음도 예감하고 있다. 지하 아지트 바닥 가득 펼쳐져 완성된 ‘A’를 굽어보는 V가 쓰고 있는 가이 포크스 가면의 ‘미소’가 참으로 신비롭게 느껴지는 장면이다. 환희 같기도 하고 처연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부처님의 미소처럼 평온하기도 하다.
도미노 패들이 일사불란하게 쓰러진 후 통행금지령으로 인적이 끊긴 어두운 런던 밤거리에 V와 똑같이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쓰고 망토를 걸친 시민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들은 이내 수십·수백명으로 불어나 런던의 밤거리를 점령한다. V의 아지트에서 도미노 붕괴가 완성된 것처럼, 런던 거리에서 시민들 하나하나가 기꺼이 한개의 도미노 패가 돼서 일사불란하게 하나의 그림을 만들어낸다. 곧 권력의 심장 웨스트민스터 사원이 폭발하고 폭죽이 밤하늘을 덮는다.
온 시내를 밝히는 폭죽 아래서 런던을 점령한 수많은 ‘가이 포크스’들은 가면을 벗고 런던 밤하늘의 폭죽을 바라본다. 이제는 더 이상 가면 속에 얼굴을 가릴 필요가 없다. 가면을 벗은 시민들의 얼굴은 폭죽 불꽃으로 환하게 빛난다. 그들의 얼굴에 무정부주의라는 대의에 동참했다는 기쁨이 번진다.
그러나 도미노 붕괴처럼 완성된 ‘무정부주의’가 영국 시민들에게 궁극적이고 항구적인 자유와 평등, 평화를 가져다줬는지는 모르겠다. 혹시 한순간의 화려한 불꽃놀이처럼 끝나고 또다시 캄캄한 하늘과 밤거리로 돌아갔을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선 ‘도미노 붕괴’ 현상이 끊임없이 발생한다. 1950년대 동남아시아 국가 정부들이 도미노처럼 연달아 쓰러지면서 공산화 현상이 발생했고, 반대로 민주주의의 도미노 현상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 도미노 현상은 나름의 ‘대의’에 동참했던 사람들에 의해 이뤄졌지만, 어떤 ‘대의’가 정말 역사 발전에 정의로웠는지는 물음표로 남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 도미노 현상이 반드시 ‘대의에 복무’하는 뜨거운 마음에서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많은 경우에는 ‘부화뇌동’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내기도 한다. 11세기부터 15세기까지 거의 400년간 유럽과 세계를 재앙으로 몰아넣었던 십자군전쟁은 ‘가짜뉴스’들이 만들어내는 무지막지한 종교적 열정과 막연한 동경에 사로잡힌 수많은 사람들의 ‘부화뇌동’이 만들어낸 도미노 재앙이었다.
막연한 불안의 도미노 현상은 멀쩡했던 은행과 기업들이 도미노처럼 쓰러지면서 어이없는 대공황의 그림을 그려내기도 한다. V가 이끈 웨스트민스터 성당의 폭파가 과연 ‘대의’의 도미노 현상으로 이뤄졌는지, 혹은 ‘부화뇌동’의 도미노였는지는 알 길이 없다.
보수와 진보라는 이름 자체마저 혼란스러워진 오늘도 보수와 진보의 대의를 외치는 집회가 요란스럽게 열린다. 모두 더 많은 사람이 자신들의 대의에 동참하고 복무해 보수나 진보의 도미노 현상을 일으켜 V가 그린 멋진 ‘A’자처럼 그들만의 멋진 문양을 완성하고 싶어 하는 모양이다. 어쩌면 자신들의 주장에 더 많은 사람이 부화뇌동하기를 원하는지도 모르겠다.
수십년간 우리 사회의 민심의 도미노가 이리저리 어지럽게 쓰러진다. 군정에 열광하기도 하고, 민주주의에 열광하기도 한다. 자신들이 뽑은 대통령을 자기들 손으로 끌어내리기도 하고 사형선고를 내리기도 한다. 감방에 보내는 것쯤은 일도 아니다. 정치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을 정치의 정점에 세우고 100일도 안 돼 못 참겠다고 아우성치기도 한다.
옆에 있는 말이 쓰러지면 나도 덩달아 쓰러지는 도미노 현상이 만들어내는 그림은 왠지 불안하다. 도미노를 쌓을 땐 하나의 ‘팁’이 있다고 한다. 쌓는 과정에 하나라도 쓰러지면 그때까지 쌓은 도미노가 모두 무위로 돌아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중간중간에 몇자리를 비워둔다. 방화벽인 셈이다. 그 빈자리들은 마지막에 채운다.
우리 사회에도 가끔씩 몰아치는 쓰나미 같은 도미노 현상의 방화벽이 있었으면 좋겠다. 옆의 말이 쓰러진다고 덩달아 쓰러지지 않을 만큼 주관이 뚜렷한 도미노 말이라도 좋고, 아예 자리를 떠나는 도미노 말이라도 좋겠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