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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브이 포 벤데타 (13)

V는 혈혈단신으로 영국 국영방송사에 난입해 방송실을 점거한다. 그곳에서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쓰고 앉아 전국에 슈틀러 정권 타도의 격문을 생방송한다. “이 정권 아래에서 지금껏 여러분의 이성을 파괴하고 여러분의 상식을 파괴하는 많은 음모가 벌어져 왔다. 슈틀러는 여러분이 원하는 질서와 평화를 약속하고, 그 대가로 여러분들이 침묵하고 순종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그다음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느닷없는 ‘방송사고’에 심드렁하게 슈틀러 정권의 홍보만 들어오던 시민들의 눈이 생기로 반짝인다. 시청자들은 자세를 고쳐 앉아 귀를 기울인다, ‘방송사고’가 끝나고 정규방송으로 돌아오고, 방송사를 점거했던 ‘테러범’이 현장에서 사살됐다는 속보를 자료화면과 함께 나온다.

이를 지켜보던 한 꼬맹이 소녀는 ‘아, 짜증 나…’ 하면서 일어나 제 방으로 가버린다. 시청자들 모두 테러범의 편이지 정부의 편이 아니다. 9·11 테러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다. 영화 속에서 ‘슈틀러 업무수행 지지도’ 여론조사 결과는 보여주지 않지만 시청자들의 반응을 보면 아마도 20%에도 못 미치는 모양이다.

통치에 대한 동의는 기본적으로 ‘계약관계’다. 슈틀러가 현재 영국시민의 ‘안전과 평화’를 확실히 지켜주고 있다고 체감하거나, 최소한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면 영국 시민은 침묵하고 순종할 것이다. 은행이 믿을 만한 이에겐 담보 없이도 돈을 빌려주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왠지 믿음이 안 가는 지도자가 ‘너희들이 나의 통치방식에 순종한다면 내가 너희들의 안전과 평화를 지켜줄 것’이라는 약속만으로 순종을 강요하면 대단히 망설여진다. 더구나 그 ‘약속’마저도 지켜지지 않고 있는 듯한데 침묵과 순종만 강요한다면 어이없는 일이 돼버린다. 한마디로 계약 위반이다.

국영방송사 방송실을 점거하고 ‘슈틀러 정권타도 격문’을 발표하기 전날, V는 영국 시민의 인권과 정의를 보호하는 대신 불의한 슈틀러 정권의 돌격대를 자처한 영국 형사재판소 건물을 ‘맛보기’로 폭파해 버린다. 
 

 

슈틀러는 사건 4시간 만에 신속하게 관계기관 합동회의를 연다. 이 자리에서 이들은 “형사재판소 폭파는 예정된 철거였으며, 폭파와 함께 있었던 화려한 불꽃놀이는 철거책임자의 즉흥적인 발상으로 보도하자”는 말도 안 되는 결정을 내린다. 

아울러 폭파 현장에서 울려 퍼졌던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1812년’을 금지곡으로 지정한다. ‘1812년’은 1812년 나폴레옹의 침략을 물리치고 해방된 러시아의 벅찬 감격과 기쁨을 담은 교향곡이다.

궁지에 몰린 정부의 발표는 대개 황당하기 마련이다. 당연히 영국 시민 누구도 정부 발표를 믿지 않는다. 이 황당한 대응으로 가뜩이나 바닥을 치던 슈틀러 정권의 신뢰도는 지하실까지 파고 내려간다.

이와는 반대로 V는 영국 시민이 함께 나서준다면 자신에게 슈틀러 정권을 타도할 실력이 있다는 것을 입증해냈다. 영국 시민은 ‘신용 없는’ 슈틀러와의 계약을 파기하고 ‘신용 있어 보이는’ V와의 새로운 계약을 저울질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V의 혁명은 시작된다.

‘신용거래’ 없이 현금거래만으론 사업을 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국민의 지지란 ‘신용거래’ 없이 통치를 할 수 있는 지도자도 없다. 권력자나 지도자가 신용을 잃으면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의심의 대상이 되고, 일일이 해명하고 설명해야 한다. 국민들이 지도자에게 발급한 ‘신용카드’를 빼앗아버리고 ‘직불카드’만 쓰라고 하는 꼴이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수렁에 빠져버린 미국 정부는 많은 것을 은폐한다. 이렇게 국민의 신뢰가 떨어지던 상황에서 미사일 오폭 사건이 발생한다. 그 비싼 미사일들을 허허벌판 사막에 발사하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사소하다면 사소한 사건이었지만 미국 언론들이 벌떼같이 달려들어 보도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둘러싼 근본적인 문제 제기가 일어나고 조지 부시 대통령을 향한 민주당의 공격도 거세진다. 미국 언론과 국민들이 부시 대통령에게 발급했던 ‘신용카드’ 거래를 중단시킨 사건이다.
 

 

정부가 입장을 발표해도 국민은 그대로 믿어주지 않고 사소한 사건도 넘어가 주지 않는다. 부시 대통령은 “미국 대통령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200만불짜리 미사일을 10불짜리 천막과 낙타 엉덩이에 박아버리지 않는 일”이라면서 진저리를 친다.

미국 방문에 나선 우리 대통령이 무심결에 ‘××’라는 말을 했느냐 안 했느냐의 문제로 온 나라가 뒤집혔다. 국회는 외교부장관 해임안을 통과시키고, 여당은 그 사실을 보도한 언론사를 검찰에 고발하고, 국어학자가 ‘××’의 문화ㆍ사회학적 의미를 고찰하고, 음성학자들까지 나선다. 이 ‘××’ 한 마디의 여부에 나라의 운명이 달린 듯하다. 부시 대통령 식으로 말하면 ‘한국 대통령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될 듯하다.

왜 이렇게 됐을까. 잘못이라면 누구의 잘못이고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대통령에게 ‘신용카드’를 내놓고 ‘직불카드’만 쓰라고 하면 어떻게 정치를 할 수 있을까. 이래저래 딱한 일이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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