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24일부터 26일까지 3일간 제주국제컨벤션센터에서 제주도와 지식경제부가 주최한 제1회 아시아 풍력에너지 박람회(WEA: Wind Energy Asia 2013)가 열렸다. 그리고 27일엔 제주도가 가시리와 김녕·상명리 등 6곳에 육상풍력발전 지구 지정을 예고했다. SK·현대·한화건설·두산중공업 등이 참여할 것이란 언론의 보도가 나왔다. 깊은 상념에 잠긴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며칠 전 제주도에서 교통행정과장을 지낸 이성구씨를 만났다. 그가 나에게 재미있는 얘기를 건넸다. 풍력에너지 박람회 행사를 담당한 제주도의 담당부서에 전화를 걸어봤다는 것이다. 그는 박람회 포스터에 나온 ‘대한민국 풍력발전의 발원지-제주도’란 슬로건이 유독 눈에 박혔던 모양이다. 그는 도청 담당공무원에게 “어째서 발원지인가? 발원지라면 그 발원지를 만든 사람은 행사에 초청해야 도리 아닌가?” 그렇게 따져 묻자 그저 머쓱한 답변만 들었다고 말했다. 아스라이 옛 생각을 떠올리게 만드는 대목이었다. 육상풍력발전지구 지정을 예고한 곳의 면면을 살펴보다 또 한번 답답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대형교회 몇 곳으로 삼무의 판로문제를 해결하고자 동분서주하던 2005년. 극동방송의 김장환 목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를 한번 만나보라는 것이다. 4월26일 서울의 순복음교회 본당으로 찾아갔다. 그는 나지막이 말했다. “3년 전 충남의 농민과 그런 일을 해봤는데 말만 친환경이지 진짜 상품을 보내지 않아 난감했습니다. 그래도 김 목사가 추천하면 우리 교인들도 회원가입하도록 제가 권유해 보겠습니다.” 일이 풀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며칠 뒤엔 서울 영등포구 오류동에 있는 평강제일교회와 선이 닿았다. 대한매일에서 기자로 재직했던 제주출신의 강승훈 선배가 다니는 교회다. 정원식 전 총리는 그 교회의 장로다. 주일예배 시간을 빌어 삼무에 대해 설명할 시간을 주겠다고 하길래 5월12일 그 교회로 가 열심히 삼무에 대해 말했다. 기독교TV에서도 반응이 좋았다. 극동방송 제주지사장으로 일했던 황영일씨가 부사장으로 재직 중이었고, 안면이 있던 터라 편하게 대해 주었다. 무언가 일일 착착 풀리는 분위기였다. 내친 김에 서울 강남의 사랑의 교회 옥한음 목사도 찾아갔다. 그들도 “돕겠다”고 약속했다. 되겠다고 생
적반하장으로 오명을 뒤집어 쓴 2002년 선거판-. 선거가 끝나고 나서도 어이 없는 선거법 위반 공판에 휘말린 신세-. 그저 정의를 도모하고자 애썼건만 황당한(?) 유탄에 맞서 반론을 펴야 했던 일들. 솔직히 지긋지긋했다. 그러나 도대체 누구를 위한 ‘법’인지 알 수 없는 그 ‘법’과의 악연은 내 인생사에서 아직 마침표와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 축협중앙회장으로 재직하며 농·축협 통합에 맞서 벌인 소위 ‘국회할복사건’은 2002년 선거 후에도 여전히 나를 옭아매고 있었다. 수년에 걸친 지리한 공판이 이어졌다. 국회할복사건과 관련, 난 2003년 5월14일 서울지법에서 마지막 공판에 임했다. 그 때 나를 기소한 검사의 논고는 “피고가 도저히 반성을 않고 있고, 국민경제에 해악을 입힌 데다 뇌물까지 수수했다”며 징역 10년에 30억원의 추징금을 구형했다. 국회할복사건으로 기소된 내 죄목은 업무방해·배임·국회모독·명예훼손·뇌물수수 등 무려 5건이나 됐다. 하지만 난 실감하지 못했다. “죄진 게 없는데 사람을
몹시 불편하다. 하지만 진실이다. 대법원 판결까지 가는 기나긴 세월을 지나 모든 사실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진 사안이다. 그러나 그 시절 난 한마디로 당했다. 솔직히 입에 담기도 싫은 사안이다. 그러나 분명한 건 난 2002년 지방선거 당시 이 ‘적반하장의 결정판’으로 무릎을 꿇었다. 가장 중요한 선거 패인(敗因)이다. 논란의 본질과 진실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따로 있는데 내가 오히려 죄를 뒤집어 썼다. 누명이 나에게 씌워진 것이다. ‘성추행 논란을 확대하고 부추긴 인물’이 바로 나라는 것이다. 그 시절 기가 막힌 적반하장의 실체를 이제 정리한다. 2002년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 나와 경쟁했던 도지사 후보는 다양한 방법으로 덮어 씌우기 전략을 구사했다. ‘신구범이 감귤을 파묻었다’고 주장한 것도 모자라 2002년 5월16일 KBS의 정책토론회에선 “지난 2월5일 신 후보가 ‘이번 선거는 쉽게 끝내는 방법이 있다’고 몇몇이 참석한 자리에서 말했다. 이미 진술을 확보하고 있다”고 떠들어댔다. 선거법 위반 재판과정을 밝
제주에선 감귤산업을 '생명산업이라고 부른다. 관광산업과 더불어 지금 이만큼이라도 먹고 살게 만들어준 기조산업의 핵심축이기도 하다. 한때는 감귤나무로 아이들 키우고 대학에 보낼 등록금까지 만들어 내 ‘대학나무’로 불리기도 했다. 뭍 지방 쌀농사 이상의 작목이자 제주경제의 버팀목이 된 우리 제주농민들의 땀과 꿈이다. 제주도와 농림부에서 잔뼈가 굵은 내가 그걸 모르는 바가 아니다. 제주에서건, 서울에서건 늘 내 머리를 떠나지 않은 건 “기필코 제주감귤을 세계시장의 반열에 올라놓아 우리 제주농민들이 떵떵거리며 살게 만들리라”는 다짐이다. 하지만 1998년과 2002년 두 번의 선거에서 이미 ‘정치작목’으로 변질된, 더 정확히는 감귤을 정책이 아니라 오로지 표를 얻기 위한 정치도구로만 악용해버린 상대방의 기가 막힌 속임수에 나도 도민들도 무참하게 표를 도둑맞았다. 내 상대방은 98년 “신구범이 감귤을 파묻었다”는 유언비어로 재미를 봤다. 그리고 2002년엔 감귤 매립현장을 굴착하는 ‘쇼’까지 보여주며 재탕의 단맛을 실컷 맛봤다. 감귤농가들의 정서를 자극하는 얕은
2002년 선거에서 낙선한 난 상대의 중상모략과 허위사실 공표 등 선거법 위반으로 분노를 삭이고 있었다. 그걸 바로잡고 제대로 된 선거문화를 구현하고자 고발이란 강수를 선택했지만 어이없게도 나 역시 선거법 위반 피의자가 됐다. 결국 나까지 피고인으로 법정에 서게 됐다. 그러나 그때의 재판과정을 지켜보면 흡사 ‘코미디’를 연상한다. ‘얼토 당토 않은’ 당시의 재판과정을 이제 말하고자 한다. 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나와 경쟁했던 지사 당선자의 선거법 위반 혐의는 6건이나 됐다. 그러나 그의 혐의 중 가장 죄질이 무거운 건 ‘허위사실 공표’였다. 그는 2002년 6·13 선거를 앞두고 도저히 가벼이 넘길 수 없는 ‘거짓말’을 했다. 두 가지였다. 하나는 내가 축협중앙회장으로 있을 때 대우채권을 사서 5100억원의 적자를 냈다고 한 것이다. 선거 전인 5월24일 제주MBC의 후보자토론회에서 “이게 경영시대를 열겠다는 도지사 후보인가”라며 나를 공박했다. 그걸로 그치지 않았다. 투표일 이틀 전인 6월11일엔 한라일보 1면에 ‘이런 사람은 절
검찰과 모진 인연을 쌓은 탓인가? 숱한 혐의의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된 지사 당선자와 함께 경쟁후보였던 나 역시 사전선거운동 혐의와 더불어 성추행 운운 발언에 무고란 혐의가 덧씌워져 재판정에 서게 됐다. 검찰에 의해 기소가 된 것이다. 두 건의 혐의 모두 인정할 수 없는 일이지만 불법과 왜곡, 허위사실이 판친 2002년의 선거문화를 바로 잡고자 나 역시 재판정에서 시시비비를 가리고자 했다. 내 시시비비를 가리다 보면 상대의 불법과 공작이 자연스레 드러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내 변호인의 조언과 검사의 간곡한 호소에 못이겨 피의자 진술조서에 서명을 해주었지만 그건 내가 비록 오명을 뒤집어쓰는 한이 있더라도 불법선거를 발본색원하려는 의지였다. 대선이 코앞에 닥친 시기였다. 재판에 임하는 것과 별개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에게 약속했던 선거지원 활동에 나서야 했다. 2002년 12월1일 제주를 떠나 경북 고령·성주를 돌기 시작했다. 축산인들을 규합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어 12월6일엔 이 후보의 제주유세 일정에 맞춰 그를 도왔다. 그러다 보니 그날 저녁 자연스레 이 후보와 저녁식사를 겸한 회동을 갖게 됐다. 그 자리에서 난 그에게 3가지를 건의했다.
또 졌다. 2002년 환갑의 나이에 선거패배의 쓰라린 맛을 또 봤다. 세 번의 선거에 도전, 단 한번을 이기고 98년의 낙선에 이은 또 한 번의 패배였다. 하지만 가슴 속에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를 길이 없었다. 상대의 후안무치가 그리도 역겨울 수 없었다. 흑색선전과 허위사실 유포가 선거판을 파고 들었고, 그 선거의 핵심쟁점이 돼버린 ‘성추행’ 논란은 오히려 내가 논란을 획책한 장본인으로 둔갑하는 상황으로 뒤바뀌었다. 그런 와중에 선거의 당락이 결론 난 것이기에 그걸 승복한다는 건 나로선 쉬운 일이 아니었다. ▲ 2002년 6월 선거를 앞두고 거리유세 도중 찍은 사진이다. 하지만 어쨌든 졌다. 6월13일 선거패배를 뒤로 하고 잠시 칩거하다 인사를 다녔다. 그래도 나를 도운 분들의 마음 속에 남은 허탈함과 원망을 씻겨드려야 했다. 감사와 미안함의 뜻을 이루 말로 다할 순 없었지만 여건이 되는 대로 한분씩 손을 잡아드려야 하는 게 내 도리였다. 그해 7월5일 TV를 지켜보다 채널Q의 한 프로그램을 보며 많은 상념에 빠졌다. <선생님의 유혹>이란 논픽션 프로그램이었다. 담임교사가 한 여학생을 성추행한 사건을 다룬 얘기다. 가만히
민선 3기 2002년 지방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한나라당 입당을 노크하고 있을 무렵. 풀리지 않는 응어리는 여전히 나를 괴롭혔다. 당시 현역이던 현경대 의원은 2001년 6월로 접어드는 시점에 양정규 한나라당 부총재와 김기배 사무총장에게 항의를 했다. “왜 신구범을 입당시키느냐”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동창이고, 내가 이탈리아 한국대사관에서 농무관으로 근무할 때 맺었던 인연도 있던 터라 서운함이 밀려왔다. 전화를 걸었다. “현 의원! 제발 이해를 부탁한다. 중견 축산인과 동반 입당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그걸 당과 얘기하는 중이다. 신구범 개인의 입당으로만 해석하지 말아 달라”고 양해를 구했다. 그러자 그는 대뜸 “너 이런 식으로 입당하고 도지사 출마하려는 거지. 이런 식으로 입당하면 나중에 어려운 일 생긴다”고 경고를 했다. 나 역시 발끈했다. “도지사 출마하고 안하고는 내가 결심할 일이지 당신이 결심할 일이 아니다”고 되받았다. 그해 6월27일. 우연히도 내가 민선 1기 지방선거에서 승리를 거머쥐었던 그날 난 축산인 135명과 한나라당 중앙당에 동반 입당했다. 내 일생에
성탄절이다. 제주에선 보기 드물게 내리는 눈이 마음을 심란하게 하고 자칫 우리 도민들이 피해나 입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겨울에 찾아오는 한파가 내 인생에서도 모질게 이어지던 시절이 있다. 지금이야 훌훌 털고 그저 지난 과거의 일로 생각하고 있지만 곱씹어 보면 회한과 번민이 있다. 야인으로 돌아가 검찰의 수사로 치도곤을 겪을 무렵 도무지 스스로를 묵과할 수 없었다. 좌절의 늪에서 그냥 고꾸라질 순 없다고 생각했다. 마음의 상처와 재기 욕구는 이윽고 도민들의 부름에 다시 응하리란 의지로 굳어져 갔다. 2002년 6월 민선 3기 지방선거를 전후로 벌어진 비화를 공개한다. ▲ 신구범 전 지사가 재임시절 개인택시기사로 깜짝 변신, 하룻동안 관광현장을 누볐다. 하루 15만원을 주고 차를 빌린 뒤 은밀히 혼자 관광실태와 부조리 현장을 찾아나선 것이다. 그를 알아본 이가 제주그랜드호텔 앞에서 그를 촬영한 사진이다. 2000년 9월26일 구치소에서 풀려났다. 단 6일만에 구속적부심에서 자유를 찾은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제주로 귀향했다.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도 않았지만 교래리 종중 땅 녹차밭을 일구는 것으로 하루 하루를 보냈다. 쓰라린 마음 한 구석에 울분과 분노가
마주할 일이 없었다. 적어도 도지사가 되기 전까진 그리 숱한 인연을 쌓을 줄 몰랐다. 검찰과의 악연(惡緣)은 나로선 불의에 맞설 수 밖에 없었던 나의 필연(必然)이었다. 그런 필연 덕택에 ‘국립학교’(?) 신세도 졌다. 도지사 직에서 물러나고, 이어 축협 중앙회장직도 사임한 뒤 제주의 초야에 묻혀 지내던 나는 그 검찰의 집요한 책동에 구치소행 신세가 됐다. 2000년 초가을 구속적부심으로 풀려나기까지 단 5일이었지만 그때의 경험을 잊을 수 없다. 국회 할복으로 몰아친 수사광풍이 국회모독죄를 벗어나 은혜재단 수사로 비화된 결과다. 그때의 아픔을 고백한다. ▲ 신 전지사의 구속이 검찰의 은밀한 뒷거래를 통한 표적수사임을 제기한 당시 대한매일 보도. 내 사건에 대한 첫 공판이 열렸을 때 재판부는 검사에게 이렇게 물었다. “신구범 피고가 30억원을 받았다면 이 뇌물을 준 한상훈도 입건했는가요?” “입건하지 않았습니다.” “왜 입건하지 않았는가요? 이 건 관련 제주지검 수사기록을 재판부에 제출하고 이 건에 관련해 한상훈을 어떻게 할 것인지 다음 재판기일에 보고하십시오.” 다음 재판기
검찰과의 모진 인연이 다시 시작됐다. 민선 1기 정권에 맞섰던 나에게 검찰의 수사가 따라 붙더니 민선 2기 선거에서 낙선하자 여지없이 검찰수사진이 들이 닥쳤고, 축협중앙회장으로 재직하며 정권의 ‘어이 없는’ 개혁에 반기를 들자 또 검찰의 수사 광풍이 나에게 몰아쳤다. 2000년 6월1일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는 재판관 전원일치로 “축협중앙회와 농협중앙회 등을 해산해 2000년 7월1일 새로 발족되는 농협중앙회에 통합되도록 하는 내용의 새 협동조합법의 관련 조항들에 대해 통합은 본질적으로 입법정책의 문제이고 이로 인해 기존 축협중앙회 등 이 사건 청구인들의 기본권이 과도하게 제한되는 것은 아니다”란 이유로 축협중앙회 등이 제기한 농·축협 통합법(새 농협조합법)에 대한 위헌심판청구 헌법소송에 대해 청구를 기각, 합헌 결정을 내렸다. 축협중앙회가 1999년 9월22일 제기한 소송이 마무리됐다. 축협중앙회장 취임 후 10개월23일간 벌였던 원칙을 향한 우리의 투쟁이 막을 내린 것이다. 헌법재판소의 ‘합헌’ 결정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동안의 투쟁이 무위(無爲)라거나 &lsqu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