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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36)

민선 3기 2002년 지방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한나라당 입당을 노크하고 있을 무렵. 풀리지 않는 응어리는 여전히 나를 괴롭혔다. 당시 현역이던 현경대 의원은 2001년 6월로 접어드는 시점에 양정규 한나라당 부총재와 김기배 사무총장에게 항의를 했다. “왜 신구범을 입당시키느냐”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동창이고, 내가 이탈리아 한국대사관에서 농무관으로 근무할 때 맺었던 인연도 있던 터라 서운함이 밀려왔다. 전화를 걸었다. “현 의원! 제발 이해를 부탁한다. 중견 축산인과 동반 입당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그걸 당과 얘기하는 중이다. 신구범 개인의 입당으로만 해석하지 말아 달라”고 양해를 구했다. 그러자 그는 대뜸 “너 이런 식으로 입당하고 도지사 출마하려는 거지. 이런 식으로 입당하면 나중에 어려운 일 생긴다”고 경고를 했다. 나 역시 발끈했다. “도지사 출마하고 안하고는 내가 결심할 일이지 당신이 결심할 일이 아니다”고 되받았다.

 

그해 6월27일. 우연히도 내가 민선 1기 지방선거에서 승리를 거머쥐었던 그날 난 축산인 135명과 한나라당 중앙당에 동반 입당했다. 내 일생에 다시 한번 정당을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민선 2기 지방선거를 앞두고 DJ정부 시절 국민회의에 입당하고 2개월 만에 ‘어이 없는’ 경선 실패로 몰락하던 때의 마음가짐이 아니었다. 그 시절이야 ‘엉터리 외투’를 걸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나라당 행은 이념을 따른 선택이 아니었다. 억울하게 망가진 축산업과 축협에도 기여하는, 다시 되살리는 ‘든든한 발판’을 만들겠다는 각오였다. 물론 현실적으로도 ‘비빌 언덕’이 필요했다. 입당 뒤 바로 다음날인 6월28일 오전 10시엔 한나라당 제주도당 지구당에서도 입당 기자회견을 했다. 고계추 전 농수축산국장(전 제주개발공사 사장) 등 1000명이 지구당에서도 동반 입당했다. 이제 한나라당 제주도지사 후보가 되기 위한 기초를 닦았다. 과거처럼 정치판을 몰라 ‘손 놓고 당하는’ 일은 만들지 않을 생각이었다. 도지사 선거전을 향한 행보가 본격화됐다.

 

그러던 그해 10월10일. 한나라당 제주도당 청년위원회(위원장 강완길)와 저녁식사를 겸해 간담회를 갖던 자리였다. 마침 이름을 날리던 제주출신 원희룡 한나라당 의원이 제주로 내려와 함께 자리했다. 그가 호기롭게 건네는 소주 한잔이 고맙기도 하고, 제주인의 기백이 느껴져 마음 속으로 “저런 젊은 친구들이 우리 제주를 이끌어가야 한다”는 대견스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기운찬 목소리로 내 곁에 다가오더니 이렇게 말했다. “형님! 내년 선거 제가 총대 매겠습니다. 제가 다 책임지겠습니다.”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 후 일을 먼저 말하면 그는 다음해 2002년 선거에 꼴도 비추지 않았다. 그 후로 사과의 일언반구도 없었다.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는 사람-. 그가 내게 진하게 남긴 인상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는 2002년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인 나를 지원하기 위해 김포공항까지 갔다가 내 상대방 측을 돕는 그의 고교동문 인사들의 만류로 되돌아갔다는 것이다. 물론 그에게서 이런 일을 전해 듣거나 양해의 말을 들어본 적은 없다. 다만 그리 신의가 없는 이가 지금도 정치의 현장에서 ‘소장파’, ‘개혁적’ 인사의 반열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걸 보면 좀 웃음이 나기도 한다. 나에겐 그저 ‘신의가 없는 사람’으로 보일 뿐이다.

 

그 시절 또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다. 사람이 무언가에 조바심을 내고, 목표에 집중하다보니 별 생각을 다할 때가 있다. 수년 전 제주에서 농협 제주지역본부장을 지낸 신백훈 씨는 2001년 내가 한창 선거준비를 할 때 농협중앙회 제주지역본부 노형지점장이었다. 물론 나와 가까운 사이다. 그해 11월30일 그 친구의 소개로 나는 애월읍 광령서당의 금곡(金谷)선생이란 유학자(儒學者)를 만났다. 신 지점장은 그 스승 밑에서 따로 유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그의 성화에 못이겨 그 분을 만나 뵜더니 그 분은 “손을 내밀어보라”며 손금을 보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그는 “당신은 사업을 했으면 크게 돈을 벌었을 거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사업가가 아니라 공직인 도지사였지만 나처럼 돈 없는 이가 드물진대 무슨 소리냐”고 웃었다. 아마 덕담이었으리라 본다. 하지만 그땐 그 말이 내 귀에 솔깃하게 꽂혔다. 그는 “신 지사 손을 거쳐 모든 돈이 제주도민에게 가는 것이다. 그 점에서 당신은 제주도민에게 아주 중요한 존재다. 그렇게 그냥 공직이나 해라. 그게 제주도민을 도와주는 것이다. 그게 당신 팔자다.”

 

덕담이었겠지만 그래도 힘이 났다. 그러나 그 ‘경조사 정치’에 매달리고, 쉼 없이 사람들을 만날 수 밖에 없었던 연유 탓일까? 그 시절 나에겐 뜻하지 않은 병이 생겼다. 해가 저물고 민선 지방선거가 예정된 새해가 밝은 2002년 1월9일 난 축산인 신년인사회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로 갔다. 목적지는 한국마사회의 마사공원. 그런데 가던 길에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입술이 마르고 갈증이 밀려왔다. 무얼 먹어도 배가 고프고 땀이 흘렀다. 어찌어찌 행사에 참석하고 난 뒤 제주로 내려와 집 인근의 내과를 찾았다. 당뇨라는 것이다. 고지를 앞에 두고 찬 바람을 맞으며 악전고투할 무렵 난 덜컥 당뇨병 환자가 됐다. 건강과 체력에는 자신이 있었는데 ‘할복사건 때문’이라는 등 주변에선 말들이 많았지만 어쨌든 나이 예순이 된 그 무렵부터 내 건강엔 적색 신호등이 켜진 것이다.

 

하지만 선거분위기는 서서히 내게 기우는 듯 했다. 연초부터 중앙지 여론조사에서 난 현직 지사의 지지도보다 10% 포인트를 앞선 27%의 지지도로 조사됐다. 기분 좋은 일은 이후에도 이어졌다. 2002년 2월7일 오전 10시에 제주시 용두암 부근 비경횟집에서 한나라당 제주시지구당 고문과 당직자 등이 참석한 오찬 회동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고문이었던 현임종 선배가 참석했다. 그날의 화해로 난 현 선배와 모든 걸 툴툴 털었다. 98년 6·4지방선거에서 “분명히 내 잘못이 있었다”고 내가 사과했고, 그는 나의 사과를 받아줬다. 그러한 화해의 결과는 한달여 뒤인 3월7일 제주시당 정기 대의원대회에도 정식 보고됐다. 그와의 갈등과 앙금이 공식적인 마무리가 된 것이다. 긴 터널에서 빠져나와 짓눌렸던 내 어깨의 짐을 풀어 놓는 기분이 들었다.

 

예상대로 함정은 꼭 등장한다. 짐을 내려놓았다고 생각할 무렵 현직 지사 측의 ‘옭아매기’가 시작됐다. 지금 생각해도 그들의 인신매도와 낙인찍기, 덮어 씌우기 전술은 참으로 절묘하단 생각이 든다. 선거에 이기기 위해서 상대방의 지지그룹을 마치 ‘빨갱이’ 물감을 칠하듯 한 마디로 재단하는 걸 보면 다른 건 몰라도 그들의 음해·공작 방식은 지금도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다. 그 때쯤 내 지지그룹을 통칭하던 말이 유행어처럼 나돌기 시작했다. 천기오축(天基五畜)! 천주교와 기독교 세력을 하나로 몰아 세워 불교도의 단결을 끌어내려 했고, 오현고와 축산인을 지목해 파괴와 척결세력으로 일갈하는 방식으로 오현고 출신 동문들을 무슨 ‘준동의 패거리’로 전락시켜 비(非) 오현고 연합전선을 꾀하고, 축산인들이 희생양이 되면 나머지 부문 1차 산업 종사자들의 환심을 얻을 수 있으리란 전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도민의 통합과 미래를 향한 비전과 정책은 그들의 안중엔 애당초 없었다. 오직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마치 ‘빨갱이’로 몰아세우듯 낙인찍기에 혈안이었고,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천기오축’ 그룹은 위축돼 갔다. 선거를 겨냥해 ‘패거리 준동’을 하는 이들이 오히려 미래를 고민하는 선량한 세력을 ‘패거리’로 몰아 세워 위축시키는 적반하장 작전이었다. 기가 찼다. 그런 선거전략은 2002년 지방선거에서 정책경쟁은 완전히 실종되고, 그 시절 최고의 화두가 됐던 ‘성추행’ 사건에 이르러선 ‘뒤집어 씌우기’가 절정에 이르렀다. 성추행 사건에 대해선 하고 싶은 말이 많다. 하지만 그 때의 일은 따로 다룰 일이다. 다만 여기서 할 수 있는 말은 그 시절 ‘성추행’ 사건은 2002년 지방선거 전 기간을 끌고 간 주제였고, 오히려 성추행 가해자가 사건의 전말과정에서 ‘이득’을 봤다. 난 오히려 ‘유탄’세례를 받았다. 오히려 피해여성에 이은 제2의 피해자가 됐다. 지금도 기가 막힌다.

 

비록 그 시절 난 ‘성추행’ 논란에 휘말렸지만 민선 3기 지방선거를 준비하던 내 입장은 철저히 정책경쟁으로 승부수를 던지겠다는 것이었다. 한나라당 제주도지사 후보로 확정돼 갈 무렵인 4월14일 한 네티즌이 내게 보낸 이메일은 그런 점에서 내 심장을 고동치게 했다. 일면식도 없던 어떤 이가 내게 보내온 이메일의 내용은 이랬다.

 

“어느 날 한 장례식장에 차려진 빈소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신구범’이란 사람이 열심히 문상하러 다니고 어느 날엔 결혼식 피로연에도 참석하는 걸 보았습니다. 왜 이리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을까요? 우리가 아는 신구범은 정책구상을 하고 일 추진에 정력을 쏟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곳에서 사람들의 환심을 얻고자 애쓰는 모습을 보며 너무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안타깝습니다.”

 

그 편지글을 읽다보니 가슴팍에 구멍이 뚫렸다. 허전과 공허감이 매섭게 가슴으로 파고 들었다. “쿼바디스!··· 도대체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 선거운동에 나와 도민들에게 죄를 짓고 있는 것 같은 내 모습을 돌아보니 한 없는 부끄러움이 밀려오지 않을 수 없었다.

 

선거를 두달여 앞둔 4월1일 한나라당 제주도지사 후보 선출대회가 열렸다. 경선이 아닌 말 그대로 선출대회였다. 현 의원은 막판까지 대안을 찾았다. 현직 김모 제주시장과 진철훈 서울시 도시국장(전 JDC 이사장, 2004년 도지사 재선거 열린우리당 도지사 후보)을 접촉, 후보로 내세우고 싶었지만 그들이 고사하는 바람에 단독 후보로 나서게 된 것이었다. 그 시절엔 진 국장도 변정일 의원에게 도지사 선거에 나설 뜻이 없음을 내비쳤고, 나에게도 연락이 와 “나서지 않겠다. 성심껏 돕겠다”고 말했다. 비록 선거에는 패배했지만 지금도 고마운 마음이다. 물론 현 전 의원과 지금도 갈등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지난해 4월 총선에서 여건이 되면 난 그를 돕고 싶었다. 비록 지난 대선에서 그가 도움을 요청했지만 해군기지 문제를 지적하며 도민을 돕고자 애쓰는 아들(신용인 제주대 로스쿨 교수)의 입장을 고려해 “애비가 돼 가지고 그럴 순 없지 않겠는가? 부자지간을 이해해 달라”고 그의 요청에 응하지 않은 게 미안한 마음이다.

 

정국의 시계바늘은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월드컵 열기가 한창이던 때였지만 그해 말엔 대선(大選)이 예정돼 있었다. 그해 4월20일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이 시작됐고, 5월20일엔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이회창 대표가 대통령 후보가 됐다. 지방선거는 대선을 앞둔 전초전의 성격이었고, 5월28일 난 한나라당 도지사 후보로 등록, 16일간의 선거전에 돌입했다. 일말의 소회가 있었다. 그 선거에 앞선 두 번의 선거에서 난 무소속으로만 선거에 임했다. 그런데 기호 1번이 된 것이다. 무소속 출마의 어려움만 겪었는데 한나라당 당원의 지원을 얻게 돼 마음이 든든했다. 그 선거에 나서면서 나에겐 꿈이 있었다. 보란 듯이 잘 사는 제주도-. 세계 초일류를 향해 달려가는 희망의 섬 제주도-. 그런 ‘그랜드 디자인’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출마하면서 내건 슬로건은 ‘자존과 번영의 제주경영시대 개막’이었다. ‘제주경영시대’를 알리며 제주형 국제자유도시를 이루고, 토종기업을 육성하며, 농산물 담보융자제로 1차 산업을 소생시키는 것은 물론 자산유동화증권(ABS)에 의한 도민자본을 조달하겠다는 부문별 목표를 제시했다. 대한민국 최고의 지역으로 거듭나려던 전략이었다.

 

그런 정책기조로 유세전에 들어갔다. 6월2일이 첫 한나라당 정당연설회였다. 장소는 서귀포시 중앙초등학교. 이회창 후보까지 유세지원에 나섰고 수많은 군중이 운집했기에 나로선 ‘희망의 빛’을 보고 있었다. 그 곳에서 골칫거리로 전락할 지 모른다고 우려가 제기되고 있던 서귀포의 월드컵 경기장을 경제기반화하기 위한 구상은 물론 경기장을 활용, 연 2회 면세엑스포(EXPO) 행사를 열겠다고 공약했다. 컨벤션센터에서 월드컵경기장을 잇는 구간은 디자인거리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그래서 '서귀포 인구 10만 시대'를 열겠다고 천명했다. 그런 정책들이 선거란 공간에서 토론감이 돼 우리 제주의 미래비전으로 자리잡히길 원했다. 그러나 기류는 엉뚱한 데로 흘러갔다. 상대방의 거짓과 억지가 판을 치며 선거는 정책논의가 낄 여지가 없는 반(反)정책선거로만 내달았다.

 

6월3일 장소를 바꿔 성산지역 유세현장. 현직 지사인 상대방은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의 후보가 돼 선거판에 나왔고, 성산지역은 그가 나온 고교(성산수고)의 본향이자 고향마을(구좌읍 종달리)이 이웃한 그의 텃밭이었다. 감귤농업의 회생방안과 농가부채 경감책 등 공약을 말하고 난 뒤 그 지역 주민들에게 “도지사는 잘못할 수 있지만 거짓말해선 안된다. 당신네 지역 출신 도지사가 이러고 있는데 이래선 안되지 않느냐”고 호소했다. 싸늘했다. 그런데 더 희한한 건 내가 한나라당 후보인데 현지 유세현장에 한나라당 당원도, 오현고 출신도 얼굴을 보기 어려운데다 정작 유세현장에 나온 이도 쭈뼛쭈뼛 적극적인 행동을 하지 못하고 꺼리는 눈치였던 것이다. 후일 귀동냥으로 들은 얘기지만 당시 그곳 분위기는 특정 학교 동문을 중심으로 “잘못 나서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으름장이 판을 치고 있었다. ‘신구범 편’으로 매도 당하고 낙인 찍히는 것이 용기를 내지 않고선 어렵더라는 얘기도 들었다.

 

무슨 4·3사건 무렵 토벌대와 무장대 간 ‘낮과 밤’의 역사를 되짚는 것도 아니고 지금의 시대에 이럴 수 있을까란 의심을 해 봤지만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도 있었다. 민선 1기 첫 선거에 나섰을 무렵 나 역시도 구좌지역 유세에 나섰다가 황당한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유세차량에 올라 유세를 할라치면 확성기의 전기코드를 꽂을 콘센트가 필요했고, 부근 가게의 도움을 얻는 게 필수적이었지만 어느 곳도 그걸 허용하지 않았다. 통 사정을 하고 어느 건물 2층 다방으로 전선이 올라가 겨우 유세를 할 수 있었는데 당선 직후 그곳을 가보니 그 다방은 문을 닫았다. 상대후보의 음해와 방해공작은 솔직히 지금 웬만한 도민들의 상상을 초월했다.

 

6·13선거를 나흘 앞둔 6월9일 이제 서부지역인 한림유세장으로 갔다. 그 날은 8개월 여 전 나에게 호언장담하며 지원을 약속한 원희룡 한나라당 의원이 지원유세가 예정된 날이었다. 그의 찬조연설을 지지자들에게 공언했는데 그는 오지 않았다. 실 없는 그의 행동이 못마땅한 것도 있지만 김포공항에서 납치하듯 그의 제주행을 포기하도록 만든 상대 후보 측의 ‘공작’은 지금도 놀라운 일이다. “정책선거를 꿈꾼 나는 여전히 선거엔 아마추어에 불과하구나”란 자책까지 들었다. 그러나 그런 자책으로 나 역시 그런 흑색선전과 비방전에 동참할 순 없었다. 선거 이틀 전인 6월11일 제주시 탑동에서 마지막 연설회를 했다. 그날 만큼은 진심을 알리고자 도민들에게 정성을 다해 호소했다. 1998년 지사 선거에서 낙선하고 나서 지난 4년간 어떤 반성을 했는지, 어떤 준비를 했는지, 도지사가 되면 제주의 역사를 어떻게 만들어 갈 지 상세히 비전을 설명드렸다. 그리고 그날 도민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쪽에는 돈이 모였지만 이쪽에는 사람이 모였습니다.“ 그런 외침으로 사실상의 선거운동을 마무리했다. 그 시절 제주의 선거판에선 ‘우갈비’란 말이 대유행하고 있었다. 그런 유행어를 뒤로 하고 6월12일 밤11시30분 현경대 한나라당 제주시지구당 위원장의 제의로 7명의 도의원 후보와 2명의 비례후보, 도지사 후보가 모두 제주시청 옆 어울림 광장에서 자유로운 연설로 파이팅을 외치며 대단원의 선거운동의 막을 내렸다.

 

하룻밤을 보내고 6월13일 진인사 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마음으로 투표결과를 기다렸다. 오후 6시 엇갈린 방송사의 출구조사로 놓고 볼 때 박빙의 승부가 예상됐다. 하지만 본 개표가 시작되고 오후 9시가 지날 무렵 난 패색이 짙어가고 있었다. 선거캠프에서 나를 도와 열심히 뛰었던 지지자들과 자원봉사자들의 눈물을 지켜볼 수 없었다.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삼키고 있는 그들의 어깨를 두드리고 한밤 나는 캠프 밖으로 나왔다. 밤 하늘의 별빛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다음날 새벽 확인한 최종결과는 참담했다. 13만5283표 대 11만9502표. 1만5781표 차로 난 또 다시 고배를 마셨다. 완벽히 진 것이다. 당일 오후 난 선거캠프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도민 여러분! 그동안의 성원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한나라당 국회의원과 자원봉사자, 그리고 지지자 여러분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 선거는 끝났습니다. 결과에 승복합니다. 도민 여러분의 준엄한 선택을 무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패자는 저 혼자로 족합니다. 이제 35년간 공직생활을 하며 고향발전을 위해 가졌던 꿈을 접겠습니다. 도민 여러분! 죄송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회견문을 읽어 내려가며 울컥 눈물이 흐를 뻔 했다. 많은 상념에 잠겼다. 그러나 6·13 선거 역시 수많은 불·탈법이 판을 치는 선거였고, 비록 내가 결과에 승복하더라도 그런 선거문화를 유지·존속하도록 좌시하는 건 도리가 아니었다. 회견말미에 한 기자의 질문을 받고선 “불법엔 추후라도 철저한 조사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엔 “꿈을 이제 접겠다”는 회견문을 읽어 내려가며 자괴와 분노·우려는 물론 서글픔과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사실 그 때 내가 밝힌 꿈은 오랜 공직생활을 거치며 진정 ‘자랑스러운 제주’로 만들고 싶어 다듬고 다듬은 내 삶의 기획이었다. 그런 기획은 사실 내 둘째 아들 용규의 손을 거쳐 새로운 제주를 염원하는 ‘그랜드 디자인’으로 설계됐다. 그 아이와 함께 공유했던 꿈이자 우리 제주의 미래세대가 ‘영광스런 제주’로 기억할 도전이었다. 그걸 ‘자존과 번영의 제주경영시대’란 표현으로 압축, 로드맵과 액션 플랜을 짰던 것이다. 그 비전을 완수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던 내가 그 꿈을 내려 놓자니 마음 한 구석에 휑하니 불어오는 찬바람과 도민들에게 송구스런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그 당시 우리 캠프의 선거공약과 비전은 사실 둘째 용규가 ‘제주 프렌들리 그룹’을 만들어 2년간 치밀하게 준비하고 기획한 산물이다. 둘째 아이는 어려서부터 나름 글로벌 감각을 키웠다. 일찌감치 어린 시절 내가 이탈리아 한국대사관에서 농무관으로 근무할 때 로마에서 미국계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귀국해서는 대학(고려대 경영학과) 4년 시절 외무고시에 패스, 나에게 기쁨을 안겨줬던 아들이다. 그 녀석은 6년간 외교관 생활을 하다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 시절 외교관 생활을 덜컥 버리고 미국의 와튼스쿨에 진학, MBA(경영학 석사)를 취득한 후 세계적 컨설팅사인 미국의 에이 티 커니(A. T. Kearney)사에 영입돼 컨설턴트로 일했다. 그 시절 만든 정책과 비전은 내 아들 혼자가 아니라 그 회사가 제주도를 잠재력 있는 땅으로 내다 보고, 컨설팅사 차원에서 아무런 돈도 받지 않고 만들어낸 것이다. 둘째와 2명의 핵심인력이 실무 및 총괄기획을 맡아 2년간 공들여 만든 ‘제주 그랜드 디자인 프로젝트’였던 것이다.

 

 

그 골자는 6가지였다. 지금 제주도가 특별자치도의 목표이자 비전으로 삼고 있는 국제자유도시를 ‘제주형’으로 새로이 다듬고 선언이 아닌 제도로 구체화는 것, 내수확대를 통한 제주관광 경쟁력 확보, 제주도의 핵심역량을 토대로 한 도민기업군 형성, 글로벌 환경에 부응하는 도민역량 배양과 인재육성, 도민이 주인 되는 토착자본 형성과 운영, 그리고 농업을 중심으로 한 1차 산업 정책의 실효적 운영을 담았다.

 

선거를 앞두고 2년간 치밀히 기획한 비전이었고 자신도 있었다. 물론 선거과정에서도 정책선거로 제주의 미래를 향한 치열한 토론이 이뤄지길 바랐기에 상대 후보에게도 세세한 내용을 담은 공약책자를 선거운동 기간 중 보내주기도 했다. 누가 도지사가 되든 제주도 발전을 위해 필요한 사안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꿈을 접어야 하는 괴로움이 가슴에 차올랐다. 그 비전에 대한 아쉬움은 물론 우리 제주도의 미래 세대를 위해 펼쳐야했던 비전과 설계를 거둬야 하는 안타까움은 지금도 내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10여년 전 접었던 꿈이다. 우리의 땅 제주도가 가슴 벅찬 희망의 땅이 되기를 염원한 설계이자 기획이다. 그렇기에 누군가는 그런 비전을 이 제주에서 실현해주길 아직도 염원하고 있다. 간절한 소망이다.<37편으로 이어집니다>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

 

=1942년생. 오현고를 나와 육군사관학교 4년을 중퇴, 1967년 5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자로 입문했다. 제주도 기획관, 주이탈리아 한국대사관 농무관, FAO(국제식량농업기구) 한국교체수석대표, 농림수산부 축산국장, 농업구조조정정책국장,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YS정부 시절인 1993년 12월 제29대 제주도지사로 취임했다.

 

이어 첫 민선 지방선거인 95년 6·27선거에선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돼 31대 지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98년, 2002년 두 번의 제주지사 선거에선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후 축협중앙회장을 거쳐 친환경 농업회사법인인 (주)삼무와 전시판매장인 삼무힐랜드를 운영했지만 지사 재직시절 뇌물수수사건에 휘말려 2년여 수감된 뒤 풀려났다. 삼무힐랜드는 수감기간 중 문을 닫았다.

 

제주삼다수와 관광복권,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제주교역, 제주세계섬문화축제 등이 그의 지사 재직시절 작품이다. 현재 제주생태도시연구소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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