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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44)

2월24일부터 26일까지 3일간 제주국제컨벤션센터에서 제주도와 지식경제부가 주최한 제1회 아시아 풍력에너지 박람회(WEA: Wind Energy Asia 2013)가 열렸다. 그리고 27일엔 제주도가 가시리와 김녕·상명리 등 6곳에 육상풍력발전 지구 지정을 예고했다. SK·현대·한화건설·두산중공업 등이 참여할 것이란 언론의 보도가 나왔다. 깊은 상념에 잠긴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며칠 전 제주도에서 교통행정과장을 지낸 이성구씨를 만났다. 그가 나에게 재미있는 얘기를 건넸다. 풍력에너지 박람회 행사를 담당한 제주도의 담당부서에 전화를 걸어봤다는 것이다. 그는 박람회 포스터에 나온 ‘대한민국 풍력발전의 발원지-제주도’란 슬로건이 유독 눈에 박혔던 모양이다. 그는 도청 담당공무원에게 “어째서 발원지인가? 발원지라면 그 발원지를 만든 사람은 행사에 초청해야 도리 아닌가?” 그렇게 따져 묻자 그저 머쓱한 답변만 들었다고 말했다. 아스라이 옛 생각을 떠올리게 만드는 대목이었다. 육상풍력발전지구 지정을 예고한 곳의 면면을 살펴보다 또 한번 답답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우선 눈에 띄는 게 제주도의 기업과 자본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제주바람이 진짜 바람난 것 같다.

 

 

내가 도지사로 재임하던 1996년 6월 어느 날. 미국의 풍력발전 사업자들이 지사 집무실로 들어섰다. “제주에서 풍력발전을 하게 해 주면 사업을 완벽하게 하겠다”는 제안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얘기를 가만히 듣다보니 그들이 생각하는 풍력발전 사업이 별게 아니란 판단이 들었다. 발전기 각종 부품을 들여와 조립만 하고 그냥 전력을 생산하는 구상이었다. 나로선 “미국과 우리나라는 전력공급 시스템이 다르다. 미국은 개인사업자가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시스템이지만 우린 한국전력이 전력공급을 독점하고 있다. 전기를 생산 해봐야 일반에 공급하지 못하고 한전에 팔아야 한다”고 에둘러 말하고 그들을 돌려보냈다. 하지만 “이거 아이디어다”란 생각이 퍼뜩 들었다. 곧바로 당시 에너지담당 사무관인 이성구 계장을 불렀다. 그에게 “풍력발전을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이 없겠는가”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대뜸 “조립사업입니다. 우리가 공적인 방법으로 충분히 해낼 수 있습니다”고 답했다. 한술 더 떠 각종 자료를 들춰 보이며 그는 제주에서 풍력발전이 가능한 여러 적합 후보지까지 펜으로 가리켰다.

 

“옳다구나” 싶었다. 면밀히 조사해보도록 이 계장에게 지시했고, 그는 4개 후보지 중 구좌읍 행원리를 막판 최적지로 지목했다. 풍력효율이 가장 높은 지역이라는 것이다. 우린 그 곳에 1만㎾ 규모의 전력을 생산하는 계획을 확정했다. 기왕 하는 거 국고의 보조도 받아내려 했고, 이 계장은 곧바로 산업자원부와 경제기획원으로 달려갔다. 두 부처의 입장 차가 있었다. 산자부에선 “우리나라가 풍력발전이 필요하긴 한데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입장이었고, 기획원은 “기술도 경험도 없는데 무슨 소리냐?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린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 썼고, 결국 국고보조사업으로 확정됐다. 그리고 1997년 8월 1단계로 600㎾짜리 풍력발전기 1, 2호기 공사에 착수했다. 그게 대한민국 최초 상용 풍력발전을 알리는 서곡이다. “제주가 대한민국 풍력발전의 발원지”라는 표현이 가능한 이유다. 당시 제주에서도 한림읍 월령 등지를 비롯, 육지에서도 풍력발전은 소규모 시험사업만 하고 있었지 상용화 한 사례는 없었기 때문이다. 현재 구좌읍 행원의 경우 15기의 풍력발전기 날개가 돌면서 9795㎾의 전력을 생산하고 있다. 제주의 풍력발전은 그렇게 시작한 것이었다.

 

그런 생각은 친환경 농업회사법인인 (주)삼무를 운영하고 있던 때에도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스토리다. (주)삼무가 창립 초기 농협 일도지구 하나로마트 한켠을 빌어 사무실로 쓰던 때였다. 2004년 가을이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한국전력의 남부발전(주)와 유니슨 등 4개 업체가 제주도에서 풍력발전 사업을 하고 있거나, 하겠다고 준비 중이었다. 아무리 이곳 저곳을 살펴봐도 제주도 자본은 커녕 제주의 공기업도 없었다. 과거 풍력발전을 추진하며 느꼈던 일도 있었던 지라 여러 경로로 당시 고계추 제주개발공사 사장과 김태환 제주도지사에게 “이런 일은 공기업 또는 제주도가 직접 나서야 한다. 우리 제주자본이 아닌 외지 대기업이나 개인기업에 우리의 바람 자원을 넘겨선 안 된다”고 수차례 고언을 했다. 하지만 마이동풍(馬耳東風)이었다. 시간이 흐르다 보니 “이거 이러다 풍력발전 최적지는 다 뺏길 것 같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래서 당시 현직 공무원인 이성구 과장을 다시 불렀다. 그 친구는 너스레를 떨었다. 나를 보자마자 “이 때쯤이면 부를 때가 됐는데” 하며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의 너스레에 웃음 섞인 타박을 던지며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운을 때 봤다. 사실 난 재임시절 그의 열성과 열의는 물론 언제나 연구하는 자세에 감복하고 있던 터였다. 그는 의외의 대답을 했다. “해상풍력으로 방향을 돌려야 합니다.” 육상풍력(On-Shore Windmill)의 시대가 가고 이제 해상풍력(Off-Shore Windmill)의 시대로 세계가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더욱이 해상풍력의 경우 육상풍력에 비해 공사비가 40% 더 들어가는 단점이 있지만 육상과 달리 주변 지형의 영향을 받지 않아 바람효율이 훨씬 더 높다는 말도 덧붙였다. 바다 쪽이 채산성이 훨씬 더 높다는 것이고, 어차피 대세는 바다라는 것이다. “해보자!” 그렇게 그의 손을 꽉 쥐었다.

 

아무리 전직 지사지만 그래도 그 시절엔 민간기업 대표에 불과한데 현직 공무원이 신바람을 내며 삼무의 해상풍력발전 사업을 거든 정도가 아니라 아예 주도하는 걸 지켜보며 그 고마운 심경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는 삼무의 해상풍력발전 사업을 계획단계부터 승인받는 단계까지 철저히 ‘서포트’했다. 어느 정도 구상이 마무리되자 삼무는 후보지 선정 작업에 들어갔다. 여러 데이터를 총동원, 다각적인 분석에 들어가자 해상풍력발전의 최적지는 한경면 판포와 금등·두모리 앞 해상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 지역 150~170m 앞 해상이 우리의 조사자료상 가장 높은 효율로 기록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세 곳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는데 놀라운 걸 알았다. 이미 기존 풍력발전 사업자인 유니슨이 판포 앞바다에 눈독을 들이고 마을 어촌계와 접촉을 하고 있던 것이다. 하루라도 서둘러야겠다고 판단했다.

 

우리의 구상은 그동안의 풍력생산 능력보다 규모가 더 큰 30㎿짜리 10개의 풍력발전기를 2.8km에 걸쳐 바다에 꽂자는 것이었다. 해수면 높이만 80m이고 블레이드(날개)길이가 90m나 되는 대형 규모다. 물론 그동안 아시아에선 한번도 해보지 않은 최초의 해상풍력발전단지를 기획한 것이다. 기획은 그럴싸 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자금조달이었다. 자본금 20억원에 불과한 농업회사법인 삼무가 이 일을 해낼 수 있을지 스스로도 의심스러웠다. 그 시절 우리와 함께 제주대 농과대에 개설한 벤처농업대학에서 강의하던 경영학 박사인 김동신 교수가 “‘프로젝트 파이낸싱’(PF; Project Financing)으로 충분히 가능하다. 기왕이면 지역은행인 제주은행과 손 잡는게 좋다“는 조언을 해줬다.

 

 

그해 12월 24일 제주은행 김국주 행장실로 찾아갔다. 삼무의 해상풍력발전 추진과 관련해 자금협력이 가능할 지 상의하러 간 것이다. 서로 얘기를 나누다 보니 직감적으로 당시 제주은행 입장도 적절한 프로젝트를 찾고 있는 중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이미 그 시절부터 제주은행은 신한금융그룹의 자회사인 위치였다. 김 행장은 “신한금융그룹 기획팀이 검토하도록 하겠다. 내년 2월까지 투자의향서를 제주은행 명의로 발급할 수 있도록 협력하겠다”고 합의했다. 일단 자금문제를 해결했다. 금융권이 투자의향서를 발급하겠다면 자금조달 1단계는 해결한 것이나 다름 없다. 해를 건너 2005년 2월15일 제주은행은 삼무해상풍력발전 사업 소요자금 500억원 중 400억원에 대한 지급보증 의향서를 우리에게 보내왔다. 사업이 본격화된 것이다.

 

삼무는 2005년 2월26일부터 사업대상지 어촌계의 동의를 얻고자 금등어촌계부터 순차적으로 두모, 판포로 이어지는 설명회를 가졌다. 하지만 그들을 만나면 결론은 결국 보상요구였다. 돈을 달라는 것이다. 지사재임 시절이 떠올랐다. 1993년 말 관선지사로 내려오자마자 제주개발특별법을 개정해 지역개발채권제를 만들었던 일이다. 보상 요구로 오히려 사업자와 주민들이 피를 말리는 시비가 붙고, 마치 우리 도민들이 구걸하듯 비춰지는 게 싫어 사업자가 특정액의 지역개발채권을 사면 제주도가 그 채권 매입액 가운데 20%를 따로 떼어 10%는 노인복지기금으로, 10%는 장애인 복지기금으로 적립하고 나머지 80%의 금액을 해당 개발지역의 공공자금으로 지원해주는 방식이 지역개발채권제다. 하지면 그 제도는 내 후임 지사로 넘어 가면서 특별법 항목에서 쏙 빠졌다. 다시 옛날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더욱이 그 시절 삼무의 해상풍력발전 사업은 마을 어장, 어촌계의 동의가 필요 없었다. 허가 필수조건이 아닌 사안인데도 주민들은 그랬다. 해상풍력발전기가 꽂힐 해역은 각 마을의 육지면에서부터 거리가 150~170m나 떨어진 곳이어서 마을어장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다 전직 지사가 나선 사업인데도 주민들이 막무가내로 돈을 달라고 매달리는 모습을 보니 처연하기까지 했다. 우린 “어르신들과 협력하며, 이익을 지역에 환원하고자 굳이 여러분과 어떤 합의를 이뤘으면 하는 것”이라고 호소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풍력단지가 들어서면 여기 계신 어르신들의 자손들도 일자리가 생기고, 더 나은 벌이를 만들어 갈 수 있다”고 했더니 판포에서 열렸던 설명회에 참석한 80대의 한 해녀는 대뜸 “우린 새끼 걱정할 틈이 없다. 먹고 살기 바쁘니 지금 주라. 돈이나 빨리 내라”고 득달같이 말했다. 사실 밝히긴 곤란하지만 그 시절 그들이 요구하는 보상액은 1회성도 아니라 매년 어촌계원 1인당 상당액을 내라는 것이었다. 거의 매년 공으로 벌겠다는 계산이었다.

 

 

제주도 개발을 얼룩지게 만드는, 비리의 온상이 될 요인은 사실 우리 제주도민들이 만들었다. 각종 개발사업을 할 때에 강도나 다름 없는 으름장과 무리한 요구는 우리 스스로를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다. 더욱이 그런 저해요인을 제거하고자 애써 만들어 둔 지역개발채권제를 없애 버린 제주도의 책임자와 관료, 일부 기업인들은 큰 사죄를 해야 한다. 물론 그들은 아직도 무얼 잘못했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현장에선 “이러지 말라. 합리적으로 생각하자”고 전직 지사가 말하는데도 “우리가 자식을 걱정하게 됐나? 내가 급하다”며 오로지 돈을 뜯어내는 게 급선무였다. 지역개발채권제를 잘 운영했으면 바꿀 수 있는 풍토였는데 다시 옛날로 돌아가 버린 현장이자, 답답한 현실이다.

 

주민들과 입씨름을 하느라 당초 계획보다 늦어진 3월5일 제주도에 해상풍력발전 개발사업 승인 신청을 했다. 이어 3월15일엔 제주도청에서 ‘아시아 첫 해상풍력발전 단지 조성 사업 착수’를 알리는 기자회견을 했다. 제주은행의 성기형 부행장 등이 자리를 함께 했다. 반응은 의외로 빨리 왔다. 물론 우리에게 물건을 팔 쪽이 우선이다. 주한 덴마크 대사관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 언론보도를 보고 돈데(Donde) 주한 덴마크 대사는 나를 만찬자리에 초청했다. 4월14일 서울로 갔다. 예상대로 저쪽에선 덴마크의 풍력발전기 제조사인 베스타스(Vestas) 관계자가 자리에 앉았다. 난 이성구 과장과 함께 자리했다. 솔직히 베스타스 쪽은 중요했다. 당시 세계시장 풍력발전기 시장점유율을 20% 이상 차지하고 있는 업체인데다 우리가 얻을 기술력이나 조언도 많았기 때문이다. 돈데 대사는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도울 일은 돕겠다”며 우릴 극진히 대접했다.

 

그때 해상풍력발전사업은 허가요건상 사실 어촌계 동의가 필요 없었다. 하지만 순조로운 사업을 위해 그들의 동의를 얻고자 최선을 다했다. 6월12일과 21일 잇따라 두모 어촌계와 금등 어촌계의 동의를 받아냈다. 하지만 판포는 끝까지 동의를 거절했다. 판포는 사실 그 후로도 두고 두고 우리를 괴롭혔다. 해당 마을의 개발위원장은 아예 대놓고 우리를 훼방했다. 그는 나와 도지사 선거전에서 경쟁했던 측의 그 지역 핵심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걸 신경 쓸 이유는 없었다. 사업신청 후 우린 또 다른 걸 주목하고 있었다. 문제가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해상풍력발전 사업의 인·허가 문제를 살펴 보니 전기사업법상 풍력발전 허가는 산자부 장관 허가사안이다. 산자부 장관이 허가하기 위해선 전기위원회 심의를 거쳐야 한다. 그러나 제주에선 특별법으로 산자부 장관과 협의를 거쳐 도지사가 사업을 승인하도록 돼 있었다. 절차가 달랐다. 그러나 어쨌든 산자부 장관과 협의를 거치는 게 도지사 승인에 준하는 역할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전기위 심의도 거쳐야 했다. 그런데 전기위가 또 말썽이었다. 자꾸 심의를 하지 않고 차일피일 시간을 미루는 것이었다. 답답했다. 여러 경로로 그 이유를 알아보니 “자본금 20억 농업법인이 이런 거대한 사업을 한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자금력 확보와 기술력이 의심스럽다”는 논리였다.

 

 

돌파가 필요했다. 제주출신 장명봉 국민대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시 전기위 위원장인 국민대 김문환 총장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10월31일 서울에서 그를 만났다. 가기 전 그의 면면을 살펴보니 그는 학자라기 보단 서울대 총장을 지낸 이수성 전 총리처럼 마당발 같은 사람이었다. 그와 점심을 하는데 그는 화통했다. 그가 “나 역시 실무자처럼 삼무의 자금력이나 기술력에 의문을 갖고 있다”고 그가 말하자 내가 설명했다. “아니 ‘땅 짚고 헤엄치기’ 식으로 돈 버는 사업임과 아울러 정부가 의무적으로 전력을 사 주는데 그런 사업 못 할 사람 있나요? 우린 그걸 치밀하게 분석하고 있다. 무슨 걱정이냐?“고 되물었다. 그러자 그는 호쾌히 ”그렇다면 협력하겠다“고 답했다.

 

그러나 그들의 협력 운운은 사실 말장난에 불과했다. 막상 전기위 심의를 거쳐 산자부 장관이 협의 의견으로 제주도에 보내온 공문은 “허가기준에 미흡한 측면들이 있기 때문에 귀 도가 승인시 업무에 참고하기 바람”이라고 적어 놓았다. 어이가 없었다. 솔직히 협의권만 있을 뿐 사업승인권이 없는 처지에 그런 표현은 권한을 벗어난 것이었고, 제주도지사로선 묵살해도 상관 없는 일이다. 그런 사정을 그 시절 김태환 지사에게 자세히 설명했다.

 

사업승인을 얻는 것과 아울러 해상이기에 공유수면 점용허가도 받아야 했다. 그런데 그걸 준비하는 단계에 이르자 아이디어가 속출했다. 1년여 전 제주에서 수력발전기를 만들어 수력 종주국인 노르웨이로 수출까지 한 장대현이란 사람이 있다. 그는 제주에서 사업을 하다 생각만큼 제주에서 호응이 없자 다시 부산으로 사업거점을 옮겼다. 당시는 울산에서 지엔비란 회사의 상무로 재직하던 그다. 그와 제주대 고유봉 교수(전 하이테크산업진흥원장), 김성근 해양대학 교수 등을 만나 자주 얘기하다 보니 아이디어가 샘솟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의 아이디어는 해상풍력발전을 하면서 외해양식을 그 해역에서 부가사업으로 해 보라는 것이다. 게다가 김 교수는 파력·조력발전 분야의 전문가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다. 그는 “해상풍력발전기가 들어서면 그 해상에서 조류발전이 가능하다. 조류가 바람보다 밀도가 더 높다. 상당한 전기를 부가적으로 생산할 수 있다”고 내게 조언했다.

 

꿈에 부풀었다. “풍력발전기만 해상에 꽂으면 일을 저지르겠다”는 직감이 생겼다. 그저 바다로 나가 해상풍력발전을 하자는 생각만 했는데 “오히려 바다와 바람을 묶으면 제주에서 대단한 복합산업화가 가능하다”는 판단은 어렵지 않다. 여기에다 난 한술 더 떠 난 해상 풍력발전기 중 어느 하나엔 80m 높이의 ‘해상 레스토랑’을 만들 생각도 했다. 풍부한 상상과 원대한 꿈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2006년 상반기 시간을 그런 일들로 채웠다. 어찌 보면 신나는 구상으로 하루 하루가 즐거움이었다. 그리고 그해 8월11일 드디어 제주도가 우리의 해상풍력발전사업을 승인했다. 이젠 사업 집행 단계로 가야 했기에 당장 자금문제와 공사문제가 현안으로 대두됐다. 하지만 일은 척척 풀렸다. 9월27일 동양종합금융증권(주)와 ‘삼무해상풍력발전사업 자금조달 협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9월29일 제주그랜드호텔에서 대림산업(주) 김윤 부사장과 삼무대림해상풍력발전 사업 시공자 선정 협약(MOU)을 맺었다. 이제 시공사도 선정됐고, 자금조달을 위한 주관사도 정해진 것이다.

 

 

그런데 슬슬 꼬이기 시작했다. 12월7일 대림산업과 동양종합금융증권, 삼무 3자가 마주 앉아 서울에서 협의를 하던 중 돌연 동양측이 ‘참여를 접겠다’고 밝혔다. 우리는 물론 대림산업도 당황했다. 어떻게든 사업을 진행시켜보고자 이번엔 대림산업이 나섰다. 자신들의 주거래은행인 우리은행, 삼성생명, 국민은행 3군데를 통해 자금조달 문제를 해결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대림의 적극성은 사실 ‘염불이 아닌 젯밥’에만 관심 있는 그들의 생리였다. 난 그걸 몰랐다. 2007년 초로 접어들며 대림과 삼무가 공사비 총액문제로 마찰을 빚었다. 우리가 생각한 총공사비는 800억원인 반면 그들은 1300억원을 제시했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그 간극은 메워지지 않았다. 더구나 대림은 시공사로 선정되면서 50억 자금을 먼저 지원하기로 했지만 질질 시간을 끌면서 그 것마저 내놓지 않았다.

 

점점 스스로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공사비나 따 먹으려는 기업의 속셈을 모르고 그들을 너무 신뢰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더욱이 일을 추진하다 보니 “이거 단순 조립사업이기에 하면 된다”고 밀어 붙이다 보니 정작 삼무란 회사엔 아무런 전문가도 없었고, 너무 쉽게 일을 추진한 것이 따지고 보면 ‘대표이사인 나의 책임이자 과실’이란 생각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믿을 만한 기업을 찾아야 했다. 그 일이 급선무 였다. 그 때까지 일은 모두 잊고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그 일에 골몰했다. 그러다 떠오른게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다. 3월23일 박회장의 서울사무실로 찾아가 그를 만났다. 박 회장과 나는 인연이 있다. 축협중앙회장 시절 정부 여당은 국민회의와 자민련이 야합하고 있었다. 내 국회할복사건을 부른 농·축협 통합 문제가 국회에서 처리되게 된 저간의 사정을 나중에 안 당시 박태준 자민련 총재는 불같이 화를 냈었다. 사건 이후 그를 찾아가 인사를 건네자 그는 “왜 직접 얘기하지 않았느냐”며 나를 위로해줬다. 그래선지 그는 내가 그동안의 경과를 말하고, “포스코가 시공사로 나서달라”고 하자 즉석에서 한수양 포스코건설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물론 박 회장의 성미는 급했다. 당장 가서 만나라는 것이다. 그 성화에 못 이겨 그날 바로 그를 찾아갔다. 물론 한 사장은 “조속한 시일 내에 협의를 시작하겠다”는 긍정적 답을 줬다.

 

그렇게 시일을 보내며 포스코 실무자와 삼무 간 공식 협의가 시작됐다. 그런데 이번엔 포스코가 고집을 부리기 시작했다. 사업승인을 받은 해역의 30㎿의 풍력발전 규모를 108㎿로 하자는 것이다. 그래야 된다고 고집을 부리는 건 그들의 마음이지만 그러자면 이미 받아둔 사업허가 계획을 다시 바꿔 새로 허가를 얻어야 할 판이다. “기존대로 30㎿로 하자”고 아무리 달래도 입씨름은 끝나지 않았다. 도저히 서로의 생각은 좁혀지지 않았다. 그런데 마침 그 시절 두산중공업의 소식이 들려왔다. 두산중공업이 3000㎾짜리 해상풍력발전기를 정부 협력사업으로 개발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걸 활용할 곳이 필요했다. 찬스를 놓칠 수 없었다. 더욱이 그 시절 두산중공업의 부사장은 제주출신 홍성은 씨였다. 2007년 11월 22일 그를 찾아가 정식 협약서(MOU)를 썼다. 2008년 초, 늦어도 2008년 8월엔 착공한다는 내용이다. 일을 풀어가는 와중엔 둘째 용규도 거들었다. 일을 제대로 하고 싶었기에 공기업을 끌어들일 요량이었고, 한국수력원자력(주)에서 호의적이었다. 한수원의 출자 협의가 끝나 이제 2008년만 맞으면 해상풍력발전기를 바다에서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11월30일 나는 서울고법의 판결로 감옥으로 직행했다.

 

삼무는 무너졌고, 삼무가 받은 해상풍력발전 허가권은 이제 우리 손에 없다. 말하자면 제주도민에게 없다. NCE(주)란 회사를 만들어 어떻게든 사업을 이어가려 했지만 그후 제주도정의 책임자는 바뀌었고, 그들은 우리가 이 사업을 진행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허가를 취소할 수 있다’는 으름장을 들었고, 사업허가권은 두산으로 넘어갔다. 두산과 손을 잡고 특수목적법인(SPC)을 만들어 사업을 완료하려 했는데 “삼무는 빠지라”는 지방정부의 압력으로 우린 떨어져 나갔다. 2011년 11월 말 ‘포스코와 두산이 맞잡은 국내 첫 해상풍력 기사’가 제주에서 보도됐다. 그 이면에 얽힌 얘기다.

 

몇 가지를 짚고 가지 않을 수 없다. 지난해 말 기준 제주에서 가동되는 풍력발전 전력총량은 106㎿다. 그러나 지방공기업인 제주에너지공사가 관리하는 건 내 재임시절 만들어 놓은 행원 풍력발전단지 전력생산량과 일부 2~3곳을 합쳐 29㎿다. 제주에서 생산되는 풍력발전 총량 중 겨우 27.4%를 우리 제주도가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예비후보를 포함해 5곳의 육상풍력발전지구를 또 지정, 예정지로 고시했다. 계획대로라면 165㎿를 풍력에너지로 더 생산하게 된다. 기존 풍력발전량과 합산하면 271㎿가 된다. 하지만 서두에서 말했듯이 추가되는 사업자에 도민자본은 없다. 결국 우리 제주도의 공공재산이자 도민자본이 될 수 있는 전력생산량 점유율은 전체의 10.7% 에 불과하다. 애초 50억원을 웃도는 돈을 출자, 참여했던 제주항공이 과연 우리 제주도민의 날개인가? 제주항공의 전철을 차근차근 밟고 있는 이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전력생산량만을 놓고 오해를 할 지도 몰라 조금 더 설명한다. 풍력발전은 조립사업이 맞다. 풍력은 한다고 하면 어디서든 돈을 가지고 올 수 있다. 예를 들어 '계통한계가격'이란 게 있다. 전력을 생산하면 ㎾h당 246원을 무조건 한국전력으로부터 받는다. 한신에너지건 남부발전이건 제주의 풍력사업자들은 이런 식으로 ‘땅 짚고 헤엄치기’ 식으로 돈을 벌고 있다. 매출액이 연간 491억원에 이른다. 그런데 정작 제주바람의 주인인 우린 고작 전체 매출액 중 27% 에 불과한 수입을 건지고 있다는 소리다.

 

조금만 더 수치로 말한다. 지난해 삼다수 매출액은 연간 1500억원이었다. 제주도내 풍력발전 매출액이 이미 삼다수 매출액의 3분의 1에 이르렀다는 얘기다. 여기에 제주도가 지정고시한 대로 5개 지구에 풍력발전을 더하게 되면 곧 연 매출이 삼다수와 맞먹는 1500억원에 이른다는 쉬운 계산이 나온다. 풍력만으로 삼다수 이상의 돈을 버는데 제주도가 직접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제주도민 기업에게 주는 것도 아니면서 이걸 왜 뭍 기업에 모두 팔아 넘기는가? 오히려 10배로 규모를 키워 1조5000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제주도민 풍력기업을 만들면 어찌 되겠는가? 그 시점에 이르면 청년 일자리 창출은 물론 아예 제주에서 풍력발전 만이 아닌 풍력발전기 제조업까지 할 수 있다. 이미 전문가들은 알고 있다. 구좌읍 김녕이 풍향과 풍속시험 최적지인 풍력발전기 제조기지가 될 수 있다는 보고도 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제주경실련이나 제주환경운동연합을 제외하곤 아무도 소리 지르지 않는다. 15년 전 퇴역한 전직 지사도 이 사실을 아는데 제금 제주사회에서 뛰고 있는 이들은 왜 소리를 지르지 않는가? 알기 위해 애를 쓰고, 소리쳐야 세상이 바뀐다는 사실을 그렇게 외치는 ‘민주’란 단어 안으로 묻어버릴 셈인가?

 

기왕 말이 나온 김에 더한다. 여객선인 카페리 문제다. 제주와 뭍을 오가는 카페리여객선 업체가 망한 곳이 있는지 묻고 싶다. 우리가 왜 할 수 없는가? 제주가 직접 나서서 하는 걸 누가 법으로 막는가? 카지노 역시 같은 문제다. 그리 돈 벌고 싶으면 법 제약 운운하지 말고 제주와 중국을 오가는 카페리를 띄우고 공해상에서 하도록 하면 된다. 어떤 법적용도 받지 않는다. 중국자본은 도대체 왜 끌어와야 하나? 아쉽게 손 내밀 필요도 없다. 중국이 하고 싶다면 우리가 큰 소리 치면서 땅이든, 건물이든 장기 임대조건 내밀고 큰 소리 치면서 대응할 수 있다. 그들이 우릴 더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진 자원은 바로 섬이다. 왜 이런 자원을 못 알아보고 제약요인이라고만 판단하는가? 아무리 도지사가 전권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 제주사회는 이런 판단을 할 사람이 진정 없다는 말인가? 우리 사회의 저력은 과연 없는가? 해보지도 않고 ‘감 내놔라 배 내놔라’ 하며 허송세월만 하면 우리 후손들은 어찌 되겠는가? 제주의 역사는 사실 원대한 꿈을 실현하는 도전의 역사였다. 우리는 성찰해야 한다. <45편으로 이어집니다>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

 

=1942년생. 오현고를 나와 육군사관학교 4년을 중퇴, 1967년 5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자로 입문했다. 제주도 기획관, 주이탈리아 한국대사관 농무관, FAO(국제식량농업기구) 한국교체수석대표, 농림수산부 축산국장, 농업구조조정정책국장,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YS정부 시절인 1993년 12월 제29대 제주도지사로 취임했다.

 

이어 첫 민선 지방선거인 95년 6·27선거에선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돼 31대 지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98년, 2002년 두 번의 제주지사 선거에선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후 축협중앙회장을 거쳐 친환경 농업회사법인인 (주)삼무와 전시판매장인 삼무힐랜드를 운영했지만 지사 재직시절 뇌물수수사건에 휘말려 2년여 수감된 뒤 풀려났다. 삼무힐랜드는 수감기간 중 문을 닫았다.

 

제주삼다수와 관광복권,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제주교역, 제주세계섬문화축제 등이 그의 지사 재직시절 작품이다. 현재 제주생태도시연구소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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