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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37)

또 졌다. 2002년 환갑의 나이에 선거패배의 쓰라린 맛을 또 봤다. 세 번의 선거에 도전, 단 한번을 이기고 98년의 낙선에 이은 또 한 번의 패배였다. 하지만 가슴 속에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를 길이 없었다. 상대의 후안무치가 그리도 역겨울 수 없었다. 흑색선전과 허위사실 유포가 선거판을 파고 들었고, 그 선거의 핵심쟁점이 돼버린 ‘성추행’ 논란은 오히려 내가 논란을 획책한 장본인으로 둔갑하는 상황으로 뒤바뀌었다. 그런 와중에 선거의 당락이 결론 난 것이기에 그걸 승복한다는 건 나로선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쨌든 졌다. 6월13일 선거패배를 뒤로 하고 잠시 칩거하다 인사를 다녔다. 그래도 나를 도운 분들의 마음 속에 남은 허탈함과 원망을 씻겨드려야 했다. 감사와 미안함의 뜻을 이루 말로 다할 순 없었지만 여건이 되는 대로 한분씩 손을 잡아드려야 하는 게 내 도리였다. 그해 7월5일 TV를 지켜보다 채널Q의 한 프로그램을 보며 많은 상념에 빠졌다. <선생님의 유혹>이란 논픽션 프로그램이었다. 담임교사가 한 여학생을 성추행한 사건을 다룬 얘기다. 가만히 TV를 지켜봤다. 단순히 성추행 사건을 다룬 얘기인 줄 알았건만 그 시절 내가 겪은 일과 오버랩이 되기 시작했다. 황당하게도 성추행을 당한 여학생과 항의하는 학생의 어머니에게 사회는 비난을 쏟아냈고, 그들은 사회에서 철저히 이단아로 매도됐다. 막판 정의로운 한 변호사와 어머니의 끈질긴 노력으로 학교는 학생을 보호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고 인정하도록 만드는 것으로 논픽션 드라마는 끝을 맺었다.

 

많은 생각을 했다. 하나의 교훈을 얻었다. 우리 사회엔 비난하는 수많은 다수가 엄연히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는 건 비난받는 소수다. 비난할 자격이 없는 이들이 비난하고, 격려의 박수를 받아야 할 이들이 어이 없는 공박을 당한다. 다수는 끊임 없이 소수의 좌절을 요구하지만 끝내 일어서는 소수가 결국 우리 사회를 이끌어 가는 것이다. 결국 한 사회가 변화하려면 변화를 인식하고 희망을 갖고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소수로부터 변화가 오는 것이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렀다.

 

사실 그 당시 선거는 부정이 차고 흘러 넘친 선거였다. 비리와 협잡, 음해와 사기·술수가 판친 선거였다. 흡사 ‘부정선거의 종합판’과도 같았다. 그러나 정당한 고발조차도 밀고로 오해하는 게 제주의 현실이었다. 제주의 지역정서가 너무도 답답했다. “손톱 밑에 가시 드는 줄은 알아도 염통 밑에 쉬스는 줄은 모른다.” 그렇게 가고 있는 게 지금껏 이어지고 있는 제주의 현실이다.

 

2002년 선거가 끝나고 한달여 뒤인 7월16일 서울로 갔다. 선거기간 중 벌어진 허위사실 공표 건 등에 대해 당시 한나라당은 이회창 대표 명의로 제주지사 선거에 나섰던 상대후보를 사법당국에 고발한 상태였다. 그 문제를 협의하고자 국회의원인 한나라당 김용균 법률지원단장을 만났다. 그리고 그와 3개항을 합의했다. 더 확실한 결과를 위해 당대표가 선거기간 중 고소한 상대후보의 허위사실 공표 건에 대해 후보 본인인 나 역시 사법당국에 고소장을 제출한다는 것. 둘째는 진실규명을 위해 한나라당은 노력과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이 김 단장이 직접 제주지검을 방문, 공정한 수사를 촉구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 합의는 내 요구가 강하게 반영된 것이다.

 

사실 선거 전후로 난 한나라당에 대해 몹시 서운한 입장이었다. 도지사와 4개 시장·군수 모두 한나라당 공천이 이뤄져 연합전선을 구축해야 하건만 당시 단체장 중 한나라당 공천자는 나와 작고한 신철주 북제주군수 뿐이었다. 그래서 선거가 끝난 6월19일 서울로 가 고위 당료들에게 감사인사를 하고 나선 “당에 유감이지만 지나간 일로 치겠다. 다만 제주지사 선거에서 벌어진 불법사안에 대해선 철저히 다뤄서 당의 의지를 보여주길 원한다”고 섭섭함을 토로했다. 그 시절 당사를 나오는 데 평소 격의 없이 지내던 한 중앙언론사 기자가 쫓아왔다. 그는 “신 지사님! 그거 아세요? 중앙당에선 애초 제주도지산 관심 껐습니다. 지원금도 C등급으로 줬구요. 낙선해도 괜찮다는, 흡사 버린 자식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

 

 

그 시절 한나라당은 마치 정권을 다 거머쥔 것처럼 들떠 있었다. 이회창 후보가 모든 여론조사에서 압도적인 1위를 달리고 있었기에 취해 있었다. 그러니 기껏 제주에서 벌어진 선거 뒷 처리엔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더욱이 나와 맞섰던 상대후보는 원래 한나라당의 전신인 민자당 출신이었다. 언제나 정권측 여당 간판으로 옷을 갈아입고 선거에 나서던 그였고, 98년 DJ정부 출범 초기 전광석화처럼 새정치 국민회의로 말을 갈아 타 지사에 오른 인물이 그였다. 그래선지 선거가 치러진 2002년 DJ정부 말기에 이르러서도 비록 야당이라 하더라도 그의 한나라당 인맥은 두터웠다. 그의 우호세력이 한나라당에 꽤 있었다. 그걸 반영하듯 고소고발 건에 임하는 한나라당 내 중진인사들의 움직임이 그 고발건을 자꾸 흐지부지 하는 방향으로 끌어갔다. 당시 한나라당 김진재 최고위원을 중심으로 “그거 뭐 굳이 그럴 필요 있냐”는 분위기였다. 지사 당선자인 내 상대방에게 그는 과거 신세를 진 게 있는 이였다. 잘못을 바로잡아야 하겠다는 나로선 그렇기에 김 단장과의 합의가 아니더라도 따로 고발장을 내야 했다. 당이 못 미더웠기 때문이다. 내려오는 길에 제주가 고향이 아닌 판사출신 김모 변호사의 도움을 얻어 상대후보를 한나라당 중앙당에 이어 재차 고발했다. 그를 법률분쟁의 대리인으로 맡긴 것은 제주출신 변호사 간 협잡과 불편한 분란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7월21일 한나라당 양정규 부총재가 만나자는 것이다. 그는 이전 선거에서 낙선했다. 권토중래를 꿈꾸던 그는 선거법 위반으로 장정언 의원(전 제주도의회 의장)이 낙마하자 본격 출마행보를 다지고 있었다. 8·8 재·보선이 예정된 때였다. 그때 그는 그렇게 말했다. “당 법률지원단의 판단으론 신 지사의 상대후보에 대한 이회창 대표의 고소 건은 확실한 케이스라고 한다. 선거법 위반이 확실하다는 것이다. 비록 신 지사가 이번 선거에서 아깝게 패배했지만 잠시 시간을 갖자. 더불어 이번 대선본부에서 수고해 달라.” 그리고는 그는 한가지 청을 해왔다. 내 지지자들의 서명운동을 잠시만 멈춰달라는 것이다. 그 시절 나를 지지했던 인사들은 검·경 수사당국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면서 ‘공정수사’를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걸 선거가 끝날 때까지만 유보해달라는 것이었다. 아마 그를 돕는 지사 당선자 진영의 부탁도 있었을 테고, 자신의 선거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했을 것으로 본다. 물론 그 역시도 나보단 지사 당선자와 더 인연이 깊었다.

 

받아들였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돕기로 마음 먹었다. 개인적으로 그는 고향(조천읍) 선배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그를 도우려고 한 게 아니다. 그 때만 하더라도 20여년 가까운 세월 양정규·현경대·변정일 의원을 제주가 키워냈고, 그들은 분명히 현실정치에서 비중이 있었다. 그런데 도지사로 재임하며, 그리고 그 이후에도 왜 서울에서 알아주는 그들을 고향인 제주에선 무시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반발심이 작동했다. 물론 내 경험에서 우러나온 면도 있다. 난 지사로 재직할 때 많은 답답함을 토로했다. 서울로 출장 가서 대정부 업무절충을 할 때는 그렇게 신이 나다가도 막상 김포공항에서 제주행 비행기만 타면 답답함이 가슴에 차올랐다. 그를 돕고 그 사람이 제대로 제주의 원로로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그게 처음으로 남의 선거에 관여한 계기다. 아무런 정치적 이해관계도 없었다.

 

그에게 협력의 뜻을 밝히자 그의 부인이 나에게 1000만원을 보내왔다. 아마 선거를 돕는 명목으로 활동비나 보태 쓰라는 것 같았다. 하지만 몹시 불쾌했다. 너무도 씁쓸한 마음이었다. 그가 제주를 위해 큰 뜻을 펼 수 있도록 돕겠다는 선의가 금전으로 매도 당한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그를 잘 알고, 나 역시도 가까운 고향의 후배를 통해 그 돈을 그대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아무런 대가 없이 나는 그를 적극 도왔다. 그는 8·8 재·보선에서 663표차로 힘겹게 신승했다. “신 지사 측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어려웠다”고 말하던 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우리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는 그의 감사로 무언지 모를 내 역할을 다했다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것과는 별개로 우린 치밀한 법적 대응전을 준비해갔다. 김계홍 전 제주시 부시장과 김성흡 전 도의회 사무처장, 고상윤 전 내무국장 등이 나서 김승섭 변호사의 도움으로 선거 후의 일을 도모했다. 그러던 차 그리도 말이 많고, 시끄러웠던 논란이 정부부처의 결정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해 7월30일 여성부는 선거 전부터 논란을 벌여온 지사 당선자의 ‘성희롱’ 논란에 대해 “성희롱이 명백히 맞다”는 직권조사에 따른 결정을 내리고, 피해자에 대한 배상과 기관차원의 후속조치를 취하도록 했다. 답답했던 체중이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오히려 ‘제2의 피해자’가 돼 선거과정에서 유탄세례를 받았던 내가 기뻐할 일도 아니었다. 오해와 정치적 음해로 고통을 겪은 직접 피해자인 K모 원장과 그 당시 진실을 밝히려고 애썼던 제주여민회에 우선 격려와 위로전화부터 걸었다. 물론 내 아내도 위로했다. 아내는 그 시절 선거과정에서 상대 후보 측의 흑색선전으로 큰 고통을 겪고 있었다.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에 대한 이후 사법당국의 조사를 지켜보면서 이제 내 삶도 서서히 다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녹차밭은 어쩔 수 없는 내 삶 터였다. 하지만 98년 낙선 뒤 막연히 녹차밭을 개간하며 꿈꾸던 일상의 농부가 아니었다. 그 시절 내 꿈도 나름 더 커져 있었다. 이런 저런 궁리로 알게 된 녹차농사의 가능성과 희망을 우리 제주농민들과 나누고 싶었고, 성공을 실현하고 싶었다. 나 혼자만 녹차농사를 하는 게 아니라 차제에 중산간 지역에 녹차벨트를 만들고 싶었다. 이것 저것 궁리를 하다 보니 한편으론 지하수 함양대인 중산간 지역을 지금처럼 난개발로 도륙이 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보존과 이용을 병행할 수 있는 길이란 판단이 들었다.

 

김태주 전 농촌지도자 회장과 축산인인 임광석씨, 그리고 문시병 전 제주시농협 조합장 등 7명이 뜻을 모았다. 한라다원 영농조합 법인을 설립하기로 한 것이다. 대기업인 태평양 처럼이 아니라 생산자인 농민이 중심이 된 녹차사업을 제주에서 일으켜 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교래리 녹차밭에서 일하며 그런 걸 만드는 일에 동분서주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젠 평범한 여인네가 된 집사람을 항상 데리고 다녔다. 아내는 직접 농사를 지어본 바가 없다. 그런 그 사람을 데리고 다니다보니 힘들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래도 아내는 열심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자니 마음 한 구석으로 애잔함이 밀려왔다. 늘그막에 밭돌을 훔쳐내고 녹차잎을 어루만지며 수확의 기쁨을 꿈꾸는 우리 스스로를 보자니 그저 마음 속으로 “그래 우리 쉽게 죽지는 않겠다”는 자신도 생겨났다. 그때 든 생각이 ‘자연과 인간은 본디 하나다’였다. 자연에서 일하는 게 창조주의 뜻에 따른 육체의 관리방식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렇게 일하다보니 체지방도 줄어드는 데다 고약하게 나를 괴롭히던 당뇨 증세도 많이 수그러들었다. 당연히 녹차밭에만 가면 난 기분이 좋았다.

 

 

그러던 때였다. 한라다원이란 영농조합 법인을 만들고자 두문불출하고 있던 8월 말 뜻을 모은 7명이 정례 모임을 끝내고 어수룩하게 2차를 곁들인 회식을 이어가다 우연히 제주양돈조합의 임원들을 만나게 됐다. 이사를 맡고 있는 이들이었다. 반갑게 서로 인사를 나누다 임원 중 한 사람이 며칠 전인 8월21일의 일화를 넌지시 나에게 꺼내는 것이었다. 그가 말하기를 지사 당선자와 양돈조합 임원들이 상견례를 겸한 회식자리를 가졌는데 너무도 황당한 말을 지사가 입에 담기에 역정을 냈다는 것이다. 그가 전한 사연은 가관이었다. 지사 당선자가 회식 도중 얼큰히 술이 오르자 “X달린 놈이 룸살롱에서 계집애 허벅지 못 만지는가. 암덩어리를 내가 왜 만지냐”고 말했다는 것이다. 기가 찼다. 사실인지 알 수 없지만 성희롱 논란으로 그렇게 고초를 겪고 있던 피해자였고, 또 그 당시 암투병중인 성추행 피해자를 지칭해 ‘암덩어리’라고 표현한 것이다. 참으로 인격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해들은 사연은 더 가관이었다. 그는 회식 말미에 “백수하고 8000억 짜리하고 상대가 되냐?”고 되묻기도 했다는 것이다. 백수는 나를 지칭한 것이고, 8000억 짜리는 자신을 지칭한 것이다. 8000억 도 예산을 주무르는 현직지사였던 자신이 기껏 백수 따위를 못 누르냐는 것이다. 양돈조합 임원들을 향해서 그는 이어 겁박과 공갈도 서슴지 않았다. “신구범이 다시 도지사 선거에 나오면 나도 나온다. 내편에 안 서는 놈은 끝까지 밟아 버리겠다.” 참다 못해 좌중에서 양돈조합 임원들이 항의하는 일까지 벌어졌다는 얘기를 전해들으며 마음이 참 무거웠다. 우리 제주사회가 이런 이를 지도자로 인정하고 있다는 말인가? 그 대목에서 난 말을 잊었다.

 

상대는 역시 간계와 술수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한나라당 법률지원단과 우리 변호사가 “이건 너무도 중대한 사안인데다 선거법위반이 너무도 명맥하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9월 초가 돼도 수사기관의 수사진척은 더디기만 했다. 도무지 수사를 하기는 하는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더욱이 당시 우리가 파악한 정보론 제주경찰청 안에서 고의로 수사를 지연시키는 여러 가지 정황이 포착됐다. 심지어 수사가 진행중인데 담당자가 교체되기도 했다. 제주의 중차대한 운명이 걸린 선거가 그렇게 엉터리로 치러졌고, ‘황당한 불똥’으로 마무리됐는데 그런 사안에 임하는 수사당국에선 일개 지방경찰청장의 힘으로 고의로 수사가 지연되거나 아예 불기소로 결론이 날 것 같다는 움직임이 속속 감지됐다. 도무지 묵과할 수 없었다.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는 경고성 메시지를 보내자 마뜩치 않은 듯 나에게 경찰의 출석요구가 전달됐다. 9월13일 제주경찰청 수사과장이 직접 고소인인 나를 조사한다는 것이다. 제주경찰청사에 들어선 뒤 나에게 직접 고소인 진술서를 받던 수사과장은 “내일은 피고소인인 현 지사를 부른다”고 말했다. 착잡했다.

 

“전·현직 도지사가 고소인과 피고소인으로 조사 받는 모습이 도민에게 어떻게 비쳐질까? 도민들이 오해할 것이다. 그러나 이 오해가 두려워 진실을 밝히는 과정에 가지 않는다면 제주사회는 지금처럼 죽음의 행진을 계속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제주사회가 침묵할 때 당사자인 나도 침묵한다면 오히려 내가 제주사회를 죽이는 살인행위를 저지르는 셈이 된다.” 기도문을 외듯 고소인 조사를 받으며 그 시절 머릿 속에 곰곰이 그린 생각이다.

 

사실 그 당시 선거를 치르며 난 수많은 허위사실 유포로 곤욕을 치렀다. 말도 안되는, 아무런 근거가 없는 일이 상대 후보자의 입과 그들의 측근에 의해 선거판에 횡행했다. 내가 지사 재직시절에 농민의 피땀 흘린 감귤을 다량으로 땅 속에 파묻었다고 하질 않나, 성추행의 배후가 나라고 하질 않나, 축협중앙회 재임시절 5100억원의 손실을 끼쳤다는 밑도 끝도 없는 막말이 쏟아져 나왔다. 심지어 제주도에 5343억원의 부채를 만들어냈다고 까지 상대 측에서 제기, 우리 캠프는 ‘너무도 막가는’ 그들의 행태를 보며 “저렇게 당선된다 한들 선거법 위반으로 낙마하는 건 시간문제”라며 은근히 조소를 보내고 있던 터였다.

 

9월25일 경찰이 고소인과 피고소인 수사를 전부 마무리하고 검찰에 사건내용을 이첩했다는 정보가 입수됐다. 그런데 황당했다. 우리가 애초 제기한 허위사실 공표 건의 여러 사례가 모두 사라지고 기껏 내가 축협중앙회장 시절 5100억원의 경영손실을 끼쳤다는 내용만 허위사실로 인정, 기소의견을 달고 검찰로 보낸 것이다. 우리가 고발한 5건의 사안 중 기껏 단 한건만 검찰로 ‘유죄’의견을 달아 수사를 마무리한 것이다.

 

하지만 선관위는 달랐다. 10월2일 언론에 “당선된 지사가 선거비용을 축소, 선거법위반 혐의로 수사중”이란 보도가 나왔다. 10월13일엔 중앙선관위가 “제주도지사 당선자 선거비용 축소, 선거법 위반”을 공식화했다. 경찰의 수사가 기가 찼지만 이후 검찰의 추가 수사과정에서 나로선 재론의 여지가 있고, 또 법률적 자문을 거친 명백한 증거를 확보하고 있었기에 그리 큰 염려를 하지 않았다. 게다가 내 고발사안과 별개로 중앙선관위가 선거비용 축소 문제를 들어 선거법 위반 혐의 수사를 의뢰했으니 그래도 사법당국에 의해 잘못을 바로 잡을 기회는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나로서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해야 했다. 애초 축산인을 규합, 대선국면에서 이회창 후보를 돕기로 했기에 이제 움직일 시간이 된 것이다. 10월22일 서울로 갔다. 이회창 후보 선대위의 축산선대위원장 자격으로 경기도 이천부터 그를 돕는 선거지원투어에 나섰다. 그런데 10월28일 제주지검이 나를 불렀다. 이건석 검사로 기억한다. 항간에 듣기로 그는 지금 검사복을 벗고 변호사로 활동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갸날픈 체구에 얌전한 서생처럼 보이던 인상이 기억에 남는다. 오전 10시부터 밤 10시30분까지 장장 12시간 30분여에 걸쳐 고소인으로서 조사를 받았다. 그는 알듯 모르듯 나에게 말했다. "언론에서 내일 현직 도지사를 허위사실 공표 건으로 조사한다고 하는데 사실 다른 건도 있습니다.“

 

 

그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난 그때 몰랐다. 다만 꺼림칙한 일이 마음 한 구석에 있었다. 10월2일의 일이다. 난 그 때 서울 무교동의 ‘다향’이란 식당에서 축산관련 교수와 축산업계 관계자, 과거의 축협 멤버들과 자리를 같이하고 있었다. 이회창 대선후보의 선거운동을 위해 모인 자리였다. 그때 우리가 내린 결론은 축협부활이 목표라는 걸 재확인했다. 그리곤 “힘을 이용하기 위해선 힘을 제공하자”며 축협 조직의 부활을 이회창 후보의 당선으로 활로를 찾고 있었다. 그런 얘기가 오가던 자리에서 제주도의 한 공무원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죽을 죄를 졌습니다. 선거기간 중 논란이 됐던 성추행 관련 얘기를 신 지사님이 오현동문 회합자리에서 말한 것처럼 얘기했습니다. 검찰도 그렇게 수사를 하고 있는데 사실은 지금 지사님의 핵심측근인 도청 간부 H씨의 사주를 받은 것입니다. 그가 쓰라는 대로 쓰라고 종이를 내밀었지만 차마 그렇겐 쓸 수 없어 머뭇거리자 그가 ‘이건 검찰에 보내는 게 아니라 우리 변호인들이 참고하고자 하는 거다’고 말해 할 수 없이 그의 요구에 따라 써줬습니다. 그런데 그 진술서가 나중에 보니 검찰에 넘어가 있었습니다. 죽을 죄를 졌습니다.”

 

말문이 막혔다. 나에게 전화를 걸어온 공무원은 내가 재임시절 영어능력자로 계약직 공무원으로 특채한 친구다. 그 시절 제주도정 발전에 필요한 적격자로 보고 그를 선발했고, 그의 성장을 지켜보며 은근히 대견한 마음을 갖고 있던 터였다. 그리고 그는 내가 98년 지사 선거에 낙선하고 플러스생활복지연구소를 꾸릴 무렵 나를 찾아와 “도울 일이 있으면 적극 돕겠다”고 말했던 친구다. 그런데 그가 ‘살아있는 권력’인 지사의 강권·압박에 못 이겨 허위진술서를 써 줬다는 소리였다. 내가 선거가 치러진 그해 2월5일 내 모교인 오현고 출신 10여명의 제주도 소속 공무원 모임에 참석, “쉽게 이기는 방법이 있다”고 공직자들에게 허세를 부렸다는 것이다. 물론 상대방의 공작 핵심은 바로 내가 성추행 논란과 음해를 획책한 뒤 그런 방법으로 선거전략을 짰고, 그걸 이용해 한참 전부터 공무원들을 규합한 결정적 증거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랬다는 추측의 유일한 증거가 바로 그 공무원의 진술이었고, 그 진술은 ‘기가 막히게도’ 자신들이 미리 정해둔 각본과 시나리오에 맞춰 진술서를 다 써놓은 뒤 힘 없는 하위공무원에게 날인을 강요한 것이다. 그걸 고소인인 나에게 맞서는 방법으로 택한 것이다.

 

난 그에게 말했다. “너희들을 이용하는 사람이나 세력이 나쁘지 너희들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그러나 언제라도 여건이 되면 네가 사실대로만 얘기를 해주면 좋겠다.” 언제라도 그의 진실에 근거한 증언이 나오길 고대했지만 이후에 돌아간 일은 딴판이었다. 그의 증언을 막기 위해 지사 당선자는 그가 아예 법정에 서지 못하도록 미국의 호접란 농장 사업관련 담당자로 해외근무 인사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그는 그후 꼭 한번 재판 증언대에 섰다. 그러나 생계와 직장을 잃을 우려 때문인지 법정에서 당당하게 거짓진술을 해댔다.

 

11월 9일 내일신문의 장명국 사장 부부가 제주로 왔다. 그는 서울상대를 나온 노동문제 전문가다. 축협중앙회장 시절 그와 진지한 얘기를 많이 나눴던 터였고, 나를 이해하고 협력해 줘 고마움을 느끼던 이다. 당시 한국기자협회의 세미나에 참석차 제주로 온 그는 기조연설을 마치고 나에게 연락을 했다. 지금의 신제주 더호텔에서 식사를 하며 회동한 자리에서 그는 “이회창 후보가 당선된다. 현 제주도지사는 지금의 고소·고발 건 외에도 선관위 수사의뢰로 중도하차한다. 그리되면 당신이 재·보선 에 출마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도민들이 ‘무언가 있구나’란 오해를 한다. 다만 신 지사는 잔여임기를 채우고 차기 선거에선 불출마하면 제주에서 좋은 원로로 남을 수 있겠다.” 많은 상황을 염두에 두고 고언을 한 것이기에 “마음 속 깊이 새기겠다”고 말하고 헤어졌다. 그의 진심이 고마웠다.

 

검찰의 수사가 피치를 올리는 듯 했다. 물론 나로선 상대방의 공작으로 거짓진술이 생산돼 고소인인 나까지 황당하게 엮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11월26일이었다. 이건석 검사가 또 나를 불렀다. 다음날 공식 수사발표와 기소를 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현직지사의 혐의가 허위사실 공표 건 외에도 선거비용 축소는 물론 후보자 비방, 유사선거사무소 설치 등 6건의 혐의가 인정돼 기소를 한다는 것이었다. 묵묵히 그의 얘기를 들었다. 그리곤 어이 없게도 바로 그 공무원의 거짓진술 사례를 들며 나 역시 픠의자 심문조서를 받겠다는 것이다. 그동안 고소인 조사를 하면서도 일체 거론조차 않았던 일을 기소하기 전날 돌연 나에게 들이댄 것이다. 정말 크게 분노했다. 말도 안되는 허위주장을, 그것도 도지사 권력에 못 이긴 하위공무원의 진술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검찰의 수사가 과연 정당한 공무집행인지 기가 찼다. 강하게 항의했다. 결코 인정할 수 없다고 맞섰다. “당신이 뭔데 마음대로 죄목을 들이대고 말도 안되는 죄명을 뒤집어 씌우냐”고 크게 호통쳤다.

 

 

그러자 이젠 검사가 나에게 통사정하듯 매달렸다. 제발 인정하는 날인만 해달라는 것이다. “불법으로 당선된 지금의 지사를 잡으려면 이 정도 협조는 해 줘야 한다”며 아예 간곡한 어조로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이건 기소해봐야 대한민국 재판에서 벌금 30만원 이상을 선고할 이가 없다”는 그의 사정에도 아랑곳없이 “우리 변호사를 부르라”며 물러서지 않았다. 내 법률대리인인 김승섭 변호사가 서둘러 검사실로 들어왔다. 사정을 전해들은 내 변호사도 생각은 같았다. 김 변호사는 “지사님! 우리가 이 정도는 협조하죠. 고작 그런 발언은 무죄가 될 가능성도 높고, 양형기준도 극히 얼마 되지 않습니다. 검찰 쪽의 모양도 이해해주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이 검사에 이어 김 변호사로 이어지는 설득에 결국 난 서명을 해주고 말았다. 물론 그 두사람의 얘기가 그땐 수긍이 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서명을 해준 게 빌미가 돼 이후 나로선 ‘말도 안되는’ 일에 직면한다. 선거법 위반 사건의 피의자가 돼 이젠 선거투쟁이 아닌 ‘재판투쟁’으로 지사 당선자와 재판부 법관들을 만나야 했다. 어이없는 대한민국 재판의 현주소를 목도한 사연이 그렇게 줄기차게 내 인생사를 채워가고 있었다. <38편으로 이어집니다>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

 

=1942년생. 오현고를 나와 육군사관학교 4년을 중퇴, 1967년 5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자로 입문했다. 제주도 기획관, 주이탈리아 한국대사관 농무관, FAO(국제식량농업기구) 한국교체수석대표, 농림수산부 축산국장, 농업구조조정정책국장,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YS정부 시절인 1993년 12월 제29대 제주도지사로 취임했다.

 

이어 첫 민선 지방선거인 95년 6·27선거에선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돼 31대 지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98년, 2002년 두 번의 제주지사 선거에선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후 축협중앙회장을 거쳐 친환경 농업회사법인인 (주)삼무와 전시판매장인 삼무힐랜드를 운영했지만 지사 재직시절 뇌물수수사건에 휘말려 2년여 수감된 뒤 풀려났다. 삼무힐랜드는 수감기간 중 문을 닫았다.

 

제주삼다수와 관광복권,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제주교역, 제주세계섬문화축제 등이 그의 지사 재직시절 작품이다. 현재 제주생태도시연구소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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