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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34)

마주할 일이 없었다. 적어도 도지사가 되기 전까진 그리 숱한 인연을 쌓을 줄 몰랐다. 검찰과의 악연(惡緣)은 나로선 불의에 맞설 수 밖에 없었던 나의 필연(必然)이었다. 그런 필연 덕택에 ‘국립학교’(?) 신세도 졌다. 도지사 직에서 물러나고, 이어 축협 중앙회장직도 사임한 뒤 제주의 초야에 묻혀 지내던 나는 그 검찰의 집요한 책동에 구치소행 신세가 됐다. 2000년 초가을 구속적부심으로 풀려나기까지 단 5일이었지만 그때의 경험을 잊을 수 없다. 국회 할복으로 몰아친 수사광풍이 국회모독죄를 벗어나 은혜재단 수사로 비화된 결과다. 그때의 아픔을 고백한다.

 

 

내 사건에 대한 첫 공판이 열렸을 때 재판부는 검사에게 이렇게 물었다.
“신구범 피고가 30억원을 받았다면 이 뇌물을 준 한상훈도 입건했는가요?”
“입건하지 않았습니다.”
“왜 입건하지 않았는가요? 이 건 관련 제주지검 수사기록을 재판부에 제출하고 이 건에 관련해 한상훈을 어떻게 할 것인지 다음 재판기일에 보고하십시오.”

 

다음 재판기일 때 검사는 대유실업(주) 한상훈 사장을 우보악 관광지구 지정에 따른 대가성 뇌물공여로 12 월21일 약식기소했다고 재판장에게 보고했다. 바로 지난 번 재판 때 재판장이 지적한 다음날 검찰은 한상훈을 약식기소한 것이다. 통상 뇌물죄는 뇌물을 받은 자와 준 자를 함께 기소한다. 그런데 검찰은 한상훈을 기소하지 않다가 재판장의 지적을 받고 나서 다급해졌던 모양이다. 하지만 서울지방법원은 한상훈에 대한 약식기소를 받아들이지 않고 이를 정식재판에 회부해버렸다.

 

나는 안타까웠다. 크리스찬으로서 선한 마음으로 아름다운 일을 해보려던 두 사람이 함께 재판을 받게 됐기 때문이다. 나야 ‘신구범 죽이기’ 작전에 걸려든 것이라 팔자소관으로 치더라도 한상훈 사장이 검찰과의 흥정으로 살아 남으려다 오히려 정식 재판을 받게 된 것이다. 나는 한 사장이 검찰과 흥정을 했다고 해서 그에 대해 분노하거나 서운한 생각을 가질 수가 없었다. 경위야 어찌됐든 간에 소위 정치하던 나 때문에 검찰의 협박과 회유로 고통을 받아온 사람이 아닌가. 내가 구속적부심으로 풀려난 후에 가까운 사이인 제주출신 K사장 등과 식사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 그들은 한 사장과 관련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2년 전 캐나다 여행을 한 적이 있는데 여행도중 법무부 장관을 지낸 K모 변호사가 우리가 제주사람이라는 것을 알고는 은혜재단에 대해서 물어본 적이 있지요. 그가 검사출신이기 때문에 아마도 검찰과 한 사장 간의 흥정을 주선했을 겁니다.”

 

검찰에서 구치소로 이송되자 교도관은 졸린 눈을 비비면서 인적사항을 확인했다. 그리곤 다 벗으란다. 신체부위의 특성이나 흉터 같은 것을 미리 확인해두는 것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검사를 끝내고는 팬티 외에는 전부 영치하라고 명령했다.

"아니 안경도요?“
“그래요 뿔테 외에는 안돼요. 자해할 지 모르니까.”

짝짝이 흰 고무신과 밥그릇, 수저를 주더니 따라오란다. 어딘지도 모르고 따라갔더니 “이게 당신 방이요” 하면서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방안으로 들어서자 밖에서 철거덕 소리가 났다. 나는 나도 모르게 이렇게 되뇌었다. “내가 창경원에서 동물원 우리를 본 적이 있지.”

새벽이라 잠이 올 턱도 없고, 방(?)이 지저분하기에 쓰레기를 쓸어 방구석에 있는 조그만 하늘색 플라스틱 통에 담고는 드러누웠다. ‘그래, 요셉도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거절했다가 감옥에 간 적이 있지. 그는 나중에 애굽 국무총리가 됐지.’

 

갑자기 밖에서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무슨 소리인지 몰라 가만히 있었더니 누가 내 방문을 걷어찼다.

 

“뭐 해!!”
“무슨 일이오?”
“식수 받으란 말이오!”
“어디에···.”
“방구석에 플라스틱 통 없어?”
“쓰레기 넣었는데···.”

내 말소리를 곁에 있는 다른 친구가 들었는지 “아니, 어떤 놈이야? 식수통에 쓰레기 처담은 놈이!” 하고 냅다 소리를 지른다.

 

“미안합니다. 처음이어서···.”

 

수형번호 ‘5상2 서울 0 3499’를 받고 수감생활이 시작됐다. 1.1평 짜리 독감방이 배정됐다. 적어도 6개월 이상 있어야 할 것이라고 예상한 나는 그곳을 내 삶의 공간으로 만들기로 작정했다. 제민일보 양병윤(梁秉允) 화백의 말처럼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기 때문이다.

 

양 화백은 언젠가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될 사태에 이르렀을 때 몹시 불안해 하다가 ‘감옥도 사람 사는 곳이다’ 하는 생각으로 마음의 안정을 찾은 적이 있다고 내게 말한 적이 있다. 그 후 그는 모든 게 제대로 밝혀지는 바람에 구속되지 않았다.

나는 음식 등 외부의 물품반입을 일체 거부하고 교도소에서 제공되는 음식과 물품에만 의존하기로 했다. 특히 식사는 주는 대로 100% 처분하기로 했다. 또한 1.1평이지만 팔 굽혀 펴기(push-up)로 건강을 관리하기로 했다.

수감된 다음날 전혀 예기치도 않았던 일이 벌어졌다. 제주북초등학교 동기동창인 오윤덕(吳允德) 변호사가 나를 접견하러 온 것이다. 내가 변호사 접견이 있다는 통보를 받았을 때는 당연히 구(舊) 축협중앙회의 변호사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오윤덕 변호사였다. 내가 그의 접견에 특별한 감사의 마음을 가진 것은 내가 그와 가까운 친구로 지낸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의 요청에 따라 나는 은혜재단의 설립동기와 내용, 제주지검의 내사 등을 구체적으로 설명했고, 그는 나에게 기대하지는 말라고 하면서 구속적부심에서 최선을 다해보겠다고 격려해 주었다.

 

변호사 접견이 끝나고 독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변호사 접견이나 면회를 끝낸 수감자들이 대기하는 방으로 갔다. 그런데 우연히 하얀 벽에 써 있는 낙서를 읽게 되었다. ‘적어두시오’라는 제목으로 ‘악덕 변호사 김00, 구00, 이00’ 등 6명의 변호사 이름이 적혀 있었고,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는 변호사로는 김영훈 변호사와 오윤덕 변호사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낙서를 읽으면서 나는 놀랍기도 하고 마음이 든든해지기도 했다.

구치소나 교도소도 양 화백이 말했던 것처럼 사람 사는 곳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러나 가능하면 피하고 싶은 곳이었다. 나는 구치소 안에서 모든 것을 견뎌낼 수 있었지만, 검사 심문 등을 위해 재판정에 나설 때의 수갑과 포승은 정말 싫었다. 그러나 견뎌야 했다. 십자가 위에서 온갖 멸시와 수모를 당하신 죄 없는,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이 수치의 고난을 주신 하나님께 오히려 감사 드렸다. “이기게 하옵소서.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하셨으니, 이길 힘을 허락하옵소서. 아멘!”

 

아내가 막내 용준이와 함께 면회를 왔다. 아내는 구치소 면회실 창구의 유리가 뿌옇기 때문에 내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없어 안타까워했다. 그 때 내가 해야 할 가장 시급한 일은 아내를 안심시키는 일이었다. 구치소 안에서도 부족함이 없어 잘 지낼 수 있음을 아내에게 확신시켜주고, 앙드레 말로의 『인간의 조건』,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그리고 하이예크의 『노예의 길』등 세 권의 책을 넣어줄 것을 부탁했다.

 

 

아내는 의연했다.
“당신 국회사건으로 돌아가셨으면 보고 싶어도 못 보잖아요. 면회만 오면 이렇게 당신 얼굴을 언제든지 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정말 기뻐요.”
아내는 내가 오랜 수감생활을 할 것으로 알고 안양소재 서울구치소에서 가까운 과천에도 방을 얻을 준비를 이미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아내에게 1.1평 공간에서의 삶, 잠을 잘 때도 불을 끄면 안 되는 공간, 팬티 외에는 모든 게 영치된 삶, 모든 시간이 얼어붙어 버린 삶에 대한 설명은 이 구치소를 나간 후에 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보단 나를 구치소로 보내신 하나님의 분명하신 뜻이 있음을 아내가 이해해주도록 애를 썼다. 그리고 “당신 학교 중단하면 안 돼. 나 여기서 주는 세 끼 밥 잘 먹고 운동 열심히 하고 성경박사 돼서 나갈 거야”라며 아내를 안심시켰다.

 

“내일 구속적부심이 있어요. 기도할게요.”
그런 아내를 두고 나는 면회시간을 초과할까봐 초조하게 차례를 기다리는 다음 수감자에게 자리를 넘겨주었다.

 

9월 25일. 구속적부심에 출석하기 위해 수갑과 포승줄로 완전 무장한 채 호송차에 올랐다. 내 옆자리에는 인천에서 조그만 사업을 한다는 젊은이가 앉았다. 버스 통로 맞은 편에 앉아 있던 한 수감자가 갑자기 소리치듯 나를 불렀다.

 

“신구범 회장님 아니십니까?”
“저를 어떻게 알지요?”
“우리 금융계에서 신 회장님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는 한빚은행 불법대출 사건으로 유명해진 이운영 상무였다. 그는 영웅(?)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그런 그는 내게 “승리합시다”며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기도 했다. “정말 제주도지사를 지내신 신 회장님이십니까?” 옆 자리에 앉은 젊은이가 물었다. 자신은 물품대금을 갚지 않는 채무자에게 폭언을 좀 한 것을 가지고 이렇게 구속까지 된 것이라면서 자기도 구속적부심 때문에 함께 가게 됐다고 했다. 그는 10월2일 결혼날짜가 잡혀있는데, 오늘 석방되지 않으면 큰일이라고 한숨지었다. 그러면서 내게 은단을 건넸다. 고마웠다. 그의 이름은 김경중이었다.

나를 호송한 교도관은 “구속적부심은 대게 10분 정도밖에 안 걸리지만 신 피의자인 경우는 중대한 사건이라 20분 정도 걸릴 것 같아서 맨 마지막 순서로 했다”고 귀띔해 주었다.

그러나 나의 구속적부심 재판은 무려 한 시간 20분이나 걸렸다. 구속적부심이 끝나자 교도관들이 투덜거렸다. “무슨 놈의 구속적부심이 한 시간도 더 걸렸담.”

 

 

오전 11시부터 시작된 구속적부심에서는 오윤덕 변호사, 백승헌 변호사 그리고 김승석 변호사가 각각 ‘은혜재단’, ‘축협고발사건’, ‘우보악관광지구 지정’에 관해 변론과 심문을 분담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오윤덕 변호사의 변론과 심문에 할애됐다. 내가 구속된 후 이틀밖에 시간적 여유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치밀하게 준비한 방대한 양의 변론과 심문조서를 보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그들의 열성에 감사와 존경이 뜻을 표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오윤덕 변호사는 지난 토요일, 일요일 이틀 동안 큰 아이 용인이와 막내 용준이의 도움을 받으면서 꼬박 밤샘을 했다고 한다. 사법연수생인 용인이는 아버지 사건을 통해 변호사 수습까지 톡톡히 한 셈이다.

서울구치소로 돌아온 나는 오후 내내 구속적부심 결과를 기다렸지만 소식이 없었다. 다음 날 오전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변호사들도 구속적부심에서 석방이 되는 것은 별로 기대하지 않고, 다만 검찰 측의 사건관련 조서를 미리 입수한다는 이점 때문에 형식적으로 구속적부심 요청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나는 생각했다. “그래! 구속적부심은 기대하는 게 아니라고들 하던데, 마음 흔들리지 말고 서울구치소에서 장기투숙(?) 대책이나 잘 세우자.”

 

그리고는 오전 11시까지 그동안 검찰이나 법원출두 때문에 미뤄두었던 신규입소자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교육을 끝내고 1.1평짜리 내 숙소(?)로 돌아왔더니 교도관이 아내가 면회 와서 기다리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나는 구속적부심이 부결돼 낙심하고 있을 아내를 어떻게 하면 위로하고 웃음을 찾아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면회실로 갔다. 아내를 보자마자 나는 구속적부심 결과는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아내가 이틀 전 넣어준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는 밝게 웃어주면서 “나 어때?”하고 물었다. 아내는 울지도 않고, 환한 얼굴로 아무 말 없이 웃기만 했다.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나에게 아내 옆에 가만히 있던 막내 용준이가 거든다.

“아버지 석방이에요”

 

어젯밤 9시경 석방결정이 났다는 것이다. 아내는 내가 석방결정을 알면서도 딴청 부리는 걸로 알고 웃기만 했던 것이다. “어젯밤 석발결정이라···. 역시 역사는 밤에 이루어지는 것일까? 구속도 밤에 결정되더니, 석방도 밤에 결정됐구나.”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오윤덕 변호사는 구속적부심 결정이 늦어지자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강의를 맡고 있는 카톨릭 의대로 가서 강의를 하는 도중, 아홉시 넘어 석방 결정 소식을 들었다. 그러자 그는 너무 기쁜 나머지 학생들을 모두 일어서게 해서 ‘선구자’를 부르게 했다고 한다.

 

면회를 끝내고 다시 내 숙소로 돌아왔지만 석방결정에 대한 정식통보가 아직 없었다. 나는 서울구치소에서의 마지막(?) 점심을 달게 먹은 후 운동하러 불려나갔다. 독감방 수감자들은 일반 수감자와 달리 매일 한 시간 동안 혼자서만 운동할 수 있도록 조그만 운동공간이 주어진다. 물론 운동기구는 하나도 없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아멘.”

 

나는 한 시간 동안 맨발로 뛰면서, 걸으면서, 미친 놈처럼 울면서, 찬송하면서,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감사 드렸다. 그리고 가족과 고향땅에 있는 지인과 도민들을 차례랄 것도 없이 기쁘게 떠올렸다. 오후 3시. 구치소로부터 정식으로 석방결정 통보가 있었고, 필요한 절차를 거쳐 서울구치소 문을 나섰다. 9월 22일 수감되어 26일 석방되었으니 닷새 동안 국가의 예산과 시설을 축낸 셈이다. 영치물을 찾는 곳에서 내게 은단을 건네줬던 김경중을 만났다. 그 역시 구속적부심으로 풀려난 것이다. 그의 석방과 결혼을 축하하면서 축의금 조로 10만원을 건넸다. 그리고 기도했다.

 

“하나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입은 저들의 인신(人身)이 부당하게 구속되지 않도록 이 나라의 사법부, 특히 검찰을 변화시켜 주시기 원합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우리나라 검사들을 모두 일주일 동안만 교도소에 넣어서 M·T시켜 주실 것을 참으로 원합니다. 아멘!”

 

 

서울 구치소를 나선 나는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오윤덕 변호사 사무실에 들러 감사의 뜻을 전하고 바로 제주도로 내려가기 위해 김포공항으로 달렸다. 제주행 비행기 속에서 아내는 두 손을 모으고 조용히 기도를 올렸다.

 

“···감당할 만한 시험밖에는 당하지 않게 하시고, 또 시험 당할 때에 능히 피할 길을 내사···.” 나는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1.1평짜리 방에서 매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은혜와, 아내와 동거하는 삶으로 인해 감사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었다. 기도를 끝낸 아내의 눈을 바라보면서 나는 이렇게 말을 건넸다.

 

“당신은 특공대야. 구조대야. 바람처럼 서울로 올라와 나를 구출해냈지···.”
그저 툭 내던진 말이었건만 아내의 눈가에는 작은 이슬이 맺혀 있었다. <35편으로 이어집니다>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

 

=1942년생. 오현고를 나와 육군사관학교 4년을 중퇴, 1967년 5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자로 입문했다. 제주도 기획관, 주이탈리아 한국대사관 농무관, FAO(국제식량농업기구) 한국교체수석대표, 농림수산부 축산국장, 농업구조조정정책국장,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YS정부 시절인 1993년 12월 제29대 제주도지사로 취임했다.

 

이어 첫 민선 지방선거인 95년 6·27선거에선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돼 31대 지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98년, 2002년 두 번의 제주지사 선거에선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후 축협중앙회장을 거쳐 친환경 농업회사법인인 (주)삼무와 전시판매장인 삼무힐랜드를 운영했지만 지사 재직시절 뇌물수수사건에 휘말려 2년여 수감된 뒤 풀려났다. 삼무힐랜드는 수감기간 중 문을 닫았다.

 

제주삼다수와 관광복권,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제주교역, 제주세계섬문화축제 등이 그의 지사 재직시절 작품이다. 현재 제주생태도시연구소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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