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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41)

몹시 불편하다. 하지만 진실이다. 대법원 판결까지 가는 기나긴 세월을 지나 모든 사실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진 사안이다. 그러나 그 시절 난 한마디로 당했다. 솔직히 입에 담기도 싫은 사안이다. 그러나 분명한 건 난 2002년 지방선거 당시 이 ‘적반하장의 결정판’으로 무릎을 꿇었다. 가장 중요한 선거 패인(敗因)이다. 논란의 본질과 진실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따로 있는데 내가 오히려 죄를 뒤집어 썼다. 누명이 나에게 씌워진 것이다. ‘성추행 논란을 확대하고 부추긴 인물’이 바로 나라는 것이다. 그 시절 기가 막힌 적반하장의 실체를 이제 정리한다.

 

2002년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 나와 경쟁했던 도지사 후보는 다양한 방법으로 덮어 씌우기 전략을 구사했다. ‘신구범이 감귤을 파묻었다’고 주장한 것도 모자라 2002년 5월16일 KBS의 정책토론회에선 “지난 2월5일 신 후보가 ‘이번 선거는 쉽게 끝내는 방법이 있다’고 몇몇이 참석한 자리에서 말했다. 이미 진술을 확보하고 있다”고 떠들어댔다. 선거법 위반 재판과정을 밝힌 이전의 회고에서 말했듯이 나를 옭아매기 위한 공작과 음모가 한창이었던 모양이다. 마치 성추행 논란을 내가 배후에서 조작한 것처럼, 없는 사실을 내가 만들어낸 것처럼 그는 신념에 찬 어조로 말했다. 이어 벌어진 5월24일 MBC 토론회에선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고 여인은 검찰에 나가 1차 조사를 받을 때 분명히 이렇게 말했다. 이 사건을 확대, 부추긴 편이 있는데 그건 신 측이라고 시인했다”고 주장했다. 또 5월9일 서귀포시 남원읍 그의 남제주군 선거연락사무소 현판식에선 “고 여인이 검찰에 나가 신후보가 이 사건을 확대하고 부추긴 사람이라고 진술했다. 연약한 여자, 불쌍한 사람을 이용해 허황된 일을 뻥튀기하는 신 후보를 찍으면 안된다”고 모인 청중들에게 연설했다. 기가 막히다.

 

 

2002년 1월28일로 기억한다. 아내와 함께 몇몇 지인들과 늦은 저녁식사를 하고 밤 10시경 귀가해보니 아파트 현관 우유투입구 안쪽으로 쪽지 한 장이 놓여 있었다. 내가 도지사로 재임하던 시절 제주도여성단체협의회장을 지낸 김순선(현 김순선 산후조리원장)씨가 남긴 메모였다. “상의할 일이 있는데 안 계셔서 메모만 남기고 간다. 내일 오전 9시쯤 다시 전화하고 찾아 뵙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오전 9시쯤 전화가 왔다. 그는 한 여성과 함께 집으로 찾아왔다. 제주도미용사회 제주시지부장이라고 소개받았다. 그러더니 그 둘은 “충격적인 일을 겪었다”고 내게 말했다. 1월25일 내 경쟁상대였던 현직 지사와 면담과정에서 벌어진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당시 제주도의 오모 보건복지여성국장과 이모 여성정책과장이 전화가 와서 “도지사를 꼭 만나달라”고 했고, 마침 지사도 또 직접 전화를 걸어와 “한번 찾아오라”고 해 하는 수 없이 지사 집무실로 갔다가 어이없는 일을 겪었다는 것이다. 그 이전 제주그랜드호텔에서 열린 한 행사장을 찾아갔다가 빠져나오는데 우연히 지사와 얼굴이 마주쳤는데 그가 “왜 안오느냐. 한번 내 방에 와라. 안아줄게”라고 말해 좀 당황했고 얼굴을 붉혔는데 너무도 기가 찬 일을 현실에서 당했다는 것이다.

 

너무 당혹스럽기도 하고 분노가 치밀어 어느 수녀를 찾아갔지만 그 수녀는 “살아있는 권력과 붙어봐야 달걀로 바위치기다. 침묵하는 게 낫겠다”고 조언하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딸아이는 지금이 조선시대도 아니고, 엄마가 무수리냐”며 흥분을 감추지 않았고, 결국 성폭력 상담전화(1366)로 전화했더니 “담당자가 없어 내일 오라”는 말을 들었고, “도무지 어디 하소연할 때도 없어 끙끙거리다 과거 여성단체협의회장인 김순선씨를 만나 상의하다 의논이라도 하고 싶어 찾아왔다”고 말했다. “혹이나 도움을 얻을 수 있으려나 싶어 찾아왔다. 제발 도와달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착잡했다.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믿기지도 않았고, 지사 선거를 앞두고 한창 준비를 하고 있던 터에 섣불리 내가 나설 일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로선 “우선 법률가 도움을 받는 게 좋겠다”고 조언했다. 그러자 그들은 “저희들도 그렇게 생각 안해본 게 아닌데 제주도내 변호사가 이 사건을 맡을 지 의문이 듭니다. 그들이 현직 지사를 상대하겠습니까? 그래서 부탁하러 온 겁니다”라며 탄식의 소리를 내뱉었다.

 

난감했다. 사실 개인적으론 억울하게 당한 일이라면 내가 당연히 도와야 하는 게 도리였다. 그러나 선거가 목전인데다 그 사람들 말을 100% 믿기도 어려웠다. 특히 상대방이 워낙 공작에 뛰어난 인물이기에 ‘어떤 음모가 있지 않나’란 의심을 거둘 수도 없었다. 다만 변호사 얘기가 나오길래 “그러면 내가 축협중앙회장 시절 민변 변호사가 우릴 위해 수고했는데 그 중 백승헌 변호사(후일 민변 회장 역임)를 추천, 소개해주도록 하겠다. 그가 도울 수 있도록 내가 통화할 테니 그분을 찾아가 보시라“고 말하고 헤어졌다. 그후 백 변호사와 그들의 연락이 닿은 것으로 안다. 백변호사와 민변에서 함께 일하는 한 변호사가 ”남녀간 성추행 문제는 입증이 어렵다. 그러니 녹음하는 게 좋겠다“고 조언한 것으로 안다. 물론 그 녹음 마저도 후일 수사결과 발표에선 내 재임시절 단체장이었던 김순선 원장의 사주인 것처럼 묘사돼 마치 나와의 연관성 의혹을 더 부추겼다. 고 여인은 이후 현직 지사에게 다시 면담을 요청, 사과를 받고자 2월5일 한차례 더 만났다. 그리고 그는 사실을 인정하는 내용을 녹음기에 담아내는 데 성공했다. 녹음 직후에 그는 이모 여성쟁책과장을 만나 사실을 토로하기도 했지만 ”둘 다 망신이다. 무덤까지 갖고 가라“는 말만 듣고 집안에서 온종일 울분을 삭였던 것으로 안다.

 

그리고 나중에 알았지만 이 여성들은 결국 제주여민회를 찾아갔다. 그리고 여민회는 자체적인 조사와 사실확인 과정을 거쳐 2월20일 ‘도지사의 성추행 사건’을 고발하는 공개기자회견을 열었다. 더불어 그들은 당일 여성부 남녀차별개선위원회에 성희롱 사실을 신고했다. 아마 피해자인 고 여인과 여민회는 수사기관 고발과 여성부 신고를 놓고 고민하다 수사기관이 못 미더워 여성부 신고를 택한 것으로 안다. 하지만 그때부터 한마디로 난리가 벌어졌다. 현 지사측의 반격이 시작된 것이다.

 

2월22일 김영택 정무부지사가 반격의 선두에 섰다. 그는 기자회견을 통해 ‘정무부지사의 입장’을 밝혔다. 그는 회견에서 “작금 특정인의 날조에 의해 도지사에 대한 음해성 내용이 발표됐다. 불순한 의도와 치밀한 각본을 가진 배후세력의 흉계”라고 밝혔다. 회견장에서 기자들이 "그럼 배후세력은 신구범 측을 말하는가“라고 되묻자 ”알아서 해석해라. 피해자 고씨는 나도 잘 아는데 통화도 안된다. 누가 데리고 사는지···“라며 알듯 모를 듯한 여운을 남겼다. 이어 2월25일엔 가해자로 몰린 현직 지사가 직접 ‘도지사 음해사건에 대한 기자회견’이란 이름을 걸고 언론을 상대했다. 그는 ”현직 도지사의 이미지를 실추시키고 정치적 타격을 가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왜곡·조작된 음해다. 선거 때만 되면 난무하는 악성루머이자 유언비어로 척박한 정치풍토에서 못된 음해성 시도는 이제 확실히 고쳐야 된다“고 주장했다. 자신은 결백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한술 더 떠 ”나는 정치인이기 이전에 60평생 동안 건전한 양식을 가지고 공직자로서 깨끗하게 살아왔다. 터무니 없는 정치적 음모! 이거 안 된다. 바로 이런 정치적 모함 때문에 남이장군도 목숨을 잃었고, 이순신 장군은 감옥에 갔고, 다산 정약용 선생은 평생 귀양살이를 했다. 이분들이 당하듯이 나도 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하루 아침에 남이 장군과 이순신 장군, 정약용 선생의 반열에 올라섰다. ‘코미디’ 같은 그의 표현은 그날 더 나왔다. ”이건 분명히 재선을 방해하는 정치적 음모가 깔린 헐리웃 액션이다. 잘못된 심판판정으로 미국의 오노 선수에게 금메달을 뺏긴 김동성 선수를 보며 국민이 얼마나 분노했는가?“라고도 말했다. 아예 당시 동계올림픽의 영웅이었던 김동성 선수의 자리까지 박차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는 ”진실은 반드시 승리한다“란 말로 회견을 마무리했다.

 

역시 현직 도지사의 위용은 셌다. 2월26일엔 상당히 많은 여성단체장이 이름을 올린 ‘제주도지사의 성희롱 공방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 나왔다. 요지는 이랬다. “2002년 5월 월드컵과 전국체전, 그리고 지방선거를 앞둔데다 국제자유도시 추진 원년인데 이 무슨 해괴한 일인가”라며 갖가지 질의를 쏟아냈다. 물론 내용은 성희롱 피해자와 여민회를 겨냥한 공격성 질의가 주류였다. “남녀인권 존중의 평등한 관점에서 정치적 오해를 불식하려는 중립적 입장에서 회견한다”고 그들은 밝혔지만 내용은 전혀 중립적이지 않았다. 그 입장엔 그때 고향을 생각하는 주부들의 모임, 농가주부모임 제주도연합회, 대한간호협회 제주도간호사회, 제주도 약사회, 대한미용사회 제주도지회, 원자력을 이해하는 여성모임 제주지회, 전국주부교실 제주도지회, 제주도새마을부녀회. 제주도생활개선회, 제주YWCA, 제주도재향군인회 여성회, 한국자유총연맹 제주여성협의회의 회장들이 이름을 함께 올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그들이 내건 입장의 문안을 그들이 직접 만든 것인지도 의문이 든다.

 

정체불명의 단체는 그때도 등장했다. 3월5일엔 ‘제주의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들’ 명의로 중앙지에 성명광고가 실렸다. 요지는 도지사의 성희롱사건을 폭로한 여성단체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제주의 음해세력과 함께 움직이는 건 잘못된 것”이라는 내용이다. 물론 당시 서울에서 문제를 제기한 한국여성단체협의회도 싸잡아 비판했다. 그러나 그 때쯤 임문철 신부 등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소속 신부 3인은 3월8일 도지사를 만났다. “고 여인에게 사과하고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하라”는 요구였다. 물론 그게 받아들여질 리는 만무였다.

 

 

여민회는 그 시절 정면돌파를 선택했다. 3월14일 여민회가 입수한 피해자와 현직지사 간 대화내용을 담은 녹음테잎과 녹취록을 공개한 것이다. 물론 내용은 그 시절 언론보도로 기사화됐고, 지금도 인터넷 곳곳을 검색해보면 당시 녹취한 내용이 떠돌아 다닌다. 물론 가해자였던 현직 지사 역시 정면으로 맞섰다. 아마 그로선 정면으로 반격해야 했을 것이다. 그 역시 같은 날 기자회견에 나섰고, 그는 “진실규명을 위한 법적 대응을 하겠다. 인격에 큰 타격을 주고 있는, 치밀하게 계획된 음해사건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며 피해자인 고여인과 제주여민회 대표를 ‘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제주지검에 고소했다. 물론 3월20일 여성부가 직권조사에 나서려 하자 현직 지사는 ‘여성부의 소관이 아니다’란 이유로 조사를 거부했다.

 

성희롱 논란이 급박하게 돌아갈 즈음인 3월1일 우리 캠프는 선거전략회의를 했다. 내 비망록은 그 때의 회의결론을 이렇게 적고 있다. “6·13선거 D-103일! 현직 지사의 성희롱 사건은 당분간 여론의 추이를 지켜본다. 음해논란에 우리가 대응하면 사건의 본질에서 벗어날 우려가 있다. 그게 대단히 걱정스럽다. 피해여성과 여민회 등 가족들의 어려움이 있는데 표나 계산해서 유·불리를 따지고 대응하면 그건 도리가 아니다. 지켜보자.” 그게 우리 캠프의 그 시절 그 사건에 대한 방침이었다.

 

3월27일 난 임문철 신부를 만나기 위해 서문성당 사제관으로 찾아갔다. 그때 임 신부와 문영희 제주YWCA 사무총장은 피해여성과 지사와의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맡고 있었다. 나는 임 신부에게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다 말해줬다. 다만 그에게 “도지사를 했고, 도지사를 다시 하려는 사람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여성을 돕지 못하는 것에 대해 죄책감이 든다. 그러나 오히려 내가 나서면 선거판이 변질되는 악영향이 있고, 진실이 감춰질 우려가 있다. 그래서 내가 오해 받더라도 나서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임 신부께서 적극적 생각을 갖는다면, 정의구현사제단이나 여민회 측에서 요청하면 언제든 내가 나서서 정식으로 대응하겠다”는 말을 전했다. 물론 그는 당시 ‘성희롱이 진실임을 확신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해할 수 없는 건 그 사건의 진실을 캐던 당시 검찰은 피해여인과 가해자인 지사를 연결한 일종의 창구역이었던 그와 문영희 총장을 상대로 얼마든지 조사가 가능했을 터인데 그러지 않았다. 검찰 스스로 진실확인의 의지가 없었던 대목이다.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녹음된 테잎의 조작·편집 가능성 여부까지 불거지던 상황에서 4월3일 대검찰청은 “녹음테잎은 진본”이란 판정을 내렸다. 상황이 이쯤 이르자 4월4일엔 서울에서 ‘제주지사 성추행 민간진상조사위원회’가 출범했다. 박원순 변호사(현 서울시장)과 안상운 변호사, 신철영 경실련 사무총장, 이시재 환경운동연합 정책위의장, 한유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신부 등이 조사위원으로 나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2주일 여의 조사활동을 마치고 4월20일 서울 종로구 안국동 느티나무 카페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성추행은 사실이다. 정치적 음모는 없다. 제주도지사는 피해자와 여민회에 사과하고 재출마를 자제하라”는 발표였다.

 

그 때를 전후로 검찰도 움직였다. 물론 그들의 수사방향은 현직 지사가 제기한 명예훼손 혐의에 대한 수사였다. 4월10일 검찰은 나와 내 아내에게 현직 지사의 명예훼손 사건에 대한 참고인 신분으로 제주지검에 출석해달라고 전화가 왔다. 나는 그 시절 담당 검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특정언론이 나를 표적으로 삼고 있다. 내가 검찰에 출두하는 모습이 공개적으로 사진에 찍혀 보도되는 걸 원치 않는다. 마치 내가 그 사건의 피의자인 것처럼 보여진다면 정치적으로 악용될 소지가 있다. 그러니 제3의 장소에서라면 참고인 조사에 응하겠다”고 말했다. 그때 나와 불편한 관계였던 강모 회장이 경영하던 H일보는 나에게 오명을 뒤집어씌우고자 혈안이었다. 그러나 검사는 내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러더니 그들은 나중에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전후 내용을 걷어 치우고 “출석을 요구했으나 신 후보 본인이 불응했다”고만 밝혔다. 난 피의자가 아니라 참고인인데 마치 죄인이 나오지 않았다는 투였다. 그 발표로 당시 곤궁에 직면했던 여민회 측에선 “왜 떳떳이 조사에 응하지 않았느냐”며 나를 힐난했다. 이제 밝히지만 이런 이유때문이다.

 

물론 그 시절 내가 검찰 출석을 주저한 이유는 또 있다. 내가 검찰에 출석해 진술을 하다 보면 피해여성과 김순선 원장이 이상하게 엮일 우려가 있었다. 그들이 검찰에 나가 한 진술에서 사실관계가 틀린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검찰 조사에서 나를 만난 장소를 우리 집이 아닌 다른 장소로 둘러댔다. 아마 괜한 일로 내가 오히려 피해를 입을까 우려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내가 사실대로 진술할 경우 당장 그들의 진술은 허위가 된다. 결국 그들 진술의 일관성을 의심받기 십상이었던 것이다.

 

현직 지사의 역량인지 그를 진심으로 존경한 이유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정제가 모호했던 단체의 움직임은 더 거세졌다. 4월25일과 27일 사이 이번엔 ‘제주의 미래를 생각하는 여성들’이란 이름으로 중앙지와 지방지에 광고가 도배됐다. 박원순 변호사가 참가한 민간진상조사위원회의 기자회견을 반박하는 내용이었다. “임의단체인 민간위원회가 또 다른 방법으로 현직 도지사를 음해하고 있다”는 주장을 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을 끌어온 ‘도지사 명예훼손 사건’에 대한 검찰의 수사결과가 5월7일 발표됐다. 제주사회를 뒤흔든 사건이었고, 명예훼손의 성립 여부는 곧 성희롱이 진실인지 여부와 직결된 사안이었으며, 당시 2002년 선거의 큰 물줄기를 바꿀 수도 있는 사안이었기에 세간의 관심은 컸다. 기자들이 제주지검에 몰려갔고, 김우경 차장검사의 수사결과 발표현장은 당시 지역TV가 생중계로 보도했다.

 

난 지금도 그리 희한한 수사결과를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고 여인의 명예훼손 혐의도 없지만 그렇다고 성추행도 아니다”란 게 수사결과다. 그녀의 가슴에 현직 지사의 손이 닿은 건 인정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성추행으로 보기도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김 차장검사는 수사결과 발표의 상당시간을 할애, 고 여인과 김순선 원장, 그리고 나와 내 아내가 서로 사건을 전후해 수십 차례 통화가 이뤄졌다는 사실을 자세히 설명했다. 내가 사건에 개입, 확대·왜곡한 것 같은 분위기를 돋궜다. 현장의 기자들이 “그렇다면 사건의 배후가 신구범이란 말인가”라고 물어도 그는 “누가 배후세력이라 했는가? 우린 팩트만 얘기한 거다”란 말로 빠져나갔다. 하지만 그 누가 보더라도 마치 내가 배후에서 음모를 키운 것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는 발표였다. 물론 검찰의 수사결과 발표 직후부터 우호적이던 여론은 점점 나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나로선 검찰 스스로 여당 후보를 기발한 방법으로 돕는 것이라고 불 수 밖에 없었다.

 

아내는 그 시절 마음 속으로 큰 고통을 겪었다. 별 소문이 다 나돌았다. 온갖 억측이 난무했다. 당시 성희롱 피해자였던 고씨는 사실 신제주에 미용실을 열어 꽤 실력으로 유명세를 치르던 이다. 내 상대방인 현직지사의 아내가 단골로 다니던 곳이다. 그러던 그가 우연히 그해 연초 제주시 일도2동 내 집 근처로 가게를 옮겼고, 아내와 그저 얼굴을 트고 지내던 처지였다. 내 아내는 사실 미용실을 잘 가지 않는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꼭 선머슴 같은 커트머리를 할 뿐 파마를 하지 않기에 미용실을 자주 찾을 일이 없다. 그저 한달에 한번 커트나 하러 미용실에 들리는 게 고작이다. 그저 김순선 원장이 돌연 찾아와 어려움을 호소하기에 도움을 줘야겠다는 막연한 생각만 한 그런 사람이다. 그런데 고 여인이건, 김원장이건 그 둘은 검찰에 불려가 답답한 마음이 생기거나 울분이 생기면 여지없이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죽 답답했으면 그랬겠는가? 물론 어떨 땐 나와도 통화했다. 급박한 검찰수사가 한창일 때인데 하루 한 두차례 통화만 이뤄져도 한달이면 30~40차례 통화가 이뤄지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그들은 ‘검찰이 이상하게 엮으려 한다’, ‘기도해달라’며 괴로운 심경을 말하고자 우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전화를 받고, 그들을 위로해준 게 성희롱 사건을 확대하고 부추긴 세력이 되는 것인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걸 수사결과 발표에서 마치 내가 배후인 것처럼 몰아간 것이다.

 

 

검찰 수사결과가 나오자 내 상대방인 현직지사 측은 쾌재를 불렀다. 마치 신이 난 듯 선거운동에 열을 올렸다. “도지사가 정상이라면 어떻게 젊고 예쁘지도 않은 늙수그레한 중년 여성의 몸에 손을 대겠나?”라며 선거판의 핫 이슈로 떠올렸고, 심지어 후보로 나서고도 피해자인 고여인의 얼굴사진을 들고 다니며 온갖 곳에 이런 말을 해대고 다녔다. 바로 이게 명예훼손이다. 그들은 성희롱 피해자에 대한 인격살인도 그렇게 서슴지 않았다.

 

당시 사건에 최대한 개입을 자제한다는 우리 캠프의 원칙엔 법리적 판단도 깔려 있었다. 당시 법령에 따르면 여성부가 성희롱에 대한 신고를 받으면 90일 이내 그 여부를 결정하게 돼 있었다. 지금은 법이 바뀌었지만 옛 ‘남녀차별 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률’ 22조6항에 의해 접수로부터 90일 이내 조사완료하고 발표를 하도록 못박고 있었던 것이다. 어차피 진실은 밝혀질 것이라고 본 우리는 섣불리 사건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는 것 보다 차분히 그 결과를 기다리는 편이 낫다고 본 것이다. 그 시한은 여민회의 신고일로 치면 5월21일이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우린 대응의 타이밍을 놓쳤다. 한명숙 장관 시절 여성부는 스스로 그 법률시한을 어겼다. 6·13 선거 전에 진실이 규명되리라 봤는데 오히려 우리가 누명을 뒤집어 쓰고 선거가 끝나 버린 것이다.

 

그러더니 선거가 어이없는 나의 낙선으로 귀결되고 나서, 사건의 처리결과를 발표해야 할 여성부는 법정시한을 다 넘기고 7월29일 남녀차별개선위원회 명의로 직권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현직 지사의 성희롱이 명백하다. 가해자는 금 1000만원을 피해자에게 손해배상액으로 지급하고, 도청 전 직원을 대상으로 재발방지대책을 수립하라”는 권고였다. 당시 남녀차별개선위 위원장은 여성부 장관인 한명숙이었고, 황인자, 김선택, 김영란(전 대법관, 강지원 청소년위원장 부인), 조승경, 김윤성, 김주덕, 황덕남 등 판·검사 출신이 상임위원으로 포진했다. 그 결정이 나오자 피해자였던 고 여인이 직접 나서 언론에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그녀의 괴로웠던 심정이 대변될 것 같아 여기 내용을 조금이나마 옮긴다.

 

“어제 아침 여성부의 판결을 듣고 한동안 멍하니 앉아있었습니다. 거짓말처럼 아무 생각이 나지 않고 순간 마비된 느낌이었습니다. ···(중략)··· 그동안 힘들었던 순간이 다 잊어지면서 그저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습니다. ···(중략)··· 딸들은 제가 힘들 때마다 용기를 주는 존재였습니다. 딸들은 제가 살아가는 희망이고 존재 이유입니다. 그리고 힘들 때마다 감사의 기도를 했습니다. 그렇게 순간 순간을 견뎌냈습니다. 또한 저를 믿어주고 든든히 지켜봐 준 사람, 저를 위해 기도해주는 사람들의 힘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중략)··· 그간 땅에 떨어진 저의 명예가 이번 여성부의 판정으로 조금이나마 회복되었습니다. 그간 저와 함께 해준 모든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드립니다.”

 

그러나 가해자로 지목된 현직 도지사는 여성부의 결정을 따르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이의신청을 했고, 그게 여성부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자 2002년 10월 서울행정법원에 여성부 결정에 대한 불복취소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결국 그는 2004년 5월 서울행정법원에 의해 패소판결을 받았고, 또 다시 이에 불복해 서울고법 항소를 거쳐 대법원으로 사건을 끌고 갔다. 그러나 2006년 12월 대법원은 그가 제기한 상고를 모두 기각하고, “여성부(국가인권위)의 성희롱 결정은 타당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대법원 인터넷사이트와 각종 검색을 동원하면 그 시절의 판결문 원문과 당시 사실관계, 또 그에 따른 법리적 판단 모두를 알아낼 수 있다.

 

가해자였던 그는 그렇게 나의 배후론을 들먹이며 선거에서 재미를 봤다. 피해자였던 한 여인에게 인격적 살인까지 서슴지 않으며 악랄하게 맞섰다. 하지만 그의 모든 노력은 2004년 선거법 위반 혐의로 지사직에 낙마한 데 이어 2006년 말 성희롱 사건에 대한 별도의 법률적 판단을 거쳐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2002년 선거판이 막바지로 치닫던 6월10일 JIBS 토론회를 마치고 나서면서 난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도 사람이냐? 너 양심 있는 인간이냐? 네 성추행 사례는 지금 불거진 이 것 말고도 내가 두 건을 더 알고 있는데도 선거에 써먹지 않았다. 그런데 네 범죄를 남에게 뒤집어 씌워?” 그렇게 꾸짖었다. 물론 그는 아무런 말도 못했다. 솔직히 나조차 그의 행동을 힐난하자니 함께 격하되는 느낌이다. 하지만 실제로 난 그 시절 그가 한 졸렬한 행동을 더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내 손마저도 흙이 묻는 듯 싶어 더 이상 거론하고 싶지 않다. 그저 당시 그 사건 외에도 그의 파렴치한 행위는 또 있었다란 말로 매듭짓고자 한다. 물론 그가 지금이라도 그런 사실을 밝혀보라고 요구하면 언제든지 공개할 자신이 있다. 그저 나로선 그가 지금이라도 인간의 본성을 되찾길 원할 뿐이다.

 

 

2002년 성추행 논란이 한창이던 때 제주일보 부영주 국장은 한 칼럼에서 이렇게 썼다. 스크랩을 해두고 지금도 문득 생각나면 읽어본다. 그는 “20세기를 넘어 21세기로 가는 지금 제주사회에 민망한 얘기가 연일 화제다. 문제의 진실은 간 곳이 없고 소문이 날개를 달아 엉뚱하게 이상한 결과로 발전하는 일이 우려된다. 참으로 안타깝다”고 적었다. 많은 공감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외침만큼 나로선 당시 우리 제주사회의 지식층에 대해 가슴 아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정말 이렇게 사건의 진실은 파묻히고 이렇게 일이 흘러가도록 방치해도 좋은지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디트리히 본헤퍼(Dietrich Bonhoeffer)라는 독일의 신학자가 있다.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 나치의 전범 히틀러를 제거하기 위한 암살 모의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기 수개월 전 처형된 인물이다. 그는 현실에 참여하는 신학자로서 많은 고민을 갖고 있었다. 그는 그가 남긴 『묵상52』란 책에서 지금도 내 가슴을 울리는 명정(銘旌) 같은 문구를 기록하고 있다.

 

“그 어떤 고발로도 성공한 사람의 지은 죄를 폭로할 수 없습니다. 고발의 목소리는 시간이 흐를 수록 잠잠해지며 성공은 남아서 역사를 결정합니다. 역사의 심판자들은 역사를 만든 자들 곁에서 슬픈 역할을 담당합니다.“

 

내가 겪은 역사, 그 숱한 일련의 역사에서 정말 누가 역사의 심판자인지 의문을 갖게 된다. 내가 나서서 얘기하면 음모론의 배후이자 ‘시기’라고 보았다. 더 무서운 건 그것이 통합을 저해한다고 보았다. 불의를 묵인하는 건 통합에 기여하는 것이고, 진실을 밝히려고 하는 건 통합에 대한 저해로 보았다. 역사는 이렇게 가는 것인가? 우리 도민들은 이렇게 슬픈 역할을 담당하고 있어야 하는가? 참으로 답답하다. <42편으로 이어집니다>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

 

=1942년생. 오현고를 나와 육군사관학교 4년을 중퇴, 1967년 5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자로 입문했다. 제주도 기획관, 주이탈리아 한국대사관 농무관, FAO(국제식량농업기구) 한국교체수석대표, 농림수산부 축산국장, 농업구조조정정책국장,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YS정부 시절인 1993년 12월 제29대 제주도지사로 취임했다.

 

이어 첫 민선 지방선거인 95년 6·27선거에선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돼 31대 지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98년, 2002년 두 번의 제주지사 선거에선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후 축협중앙회장을 거쳐 친환경 농업회사법인인 (주)삼무와 전시판매장인 삼무힐랜드를 운영했지만 지사 재직시절 뇌물수수사건에 휘말려 2년여 수감된 뒤 풀려났다. 삼무힐랜드는 수감기간 중 문을 닫았다.

 

제주삼다수와 관광복권,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제주교역, 제주세계섬문화축제 등이 그의 지사 재직시절 작품이다. 현재 제주생태도시연구소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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