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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35)

성탄절이다. 제주에선 보기 드물게 내리는 눈이 마음을 심란하게 하고 자칫 우리 도민들이 피해나 입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겨울에 찾아오는 한파가 내 인생에서도 모질게 이어지던 시절이 있다. 지금이야 훌훌 털고 그저 지난 과거의 일로 생각하고 있지만 곱씹어 보면 회한과 번민이 있다. 야인으로 돌아가 검찰의 수사로 치도곤을 겪을 무렵 도무지 스스로를 묵과할 수 없었다. 좌절의 늪에서 그냥 고꾸라질 순 없다고 생각했다. 마음의 상처와 재기 욕구는 이윽고 도민들의 부름에 다시 응하리란 의지로 굳어져 갔다. 2002년 6월 민선 3기 지방선거를 전후로 벌어진 비화를 공개한다.

 

 

2000년 9월26일 구치소에서 풀려났다. 단 6일만에 구속적부심에서 자유를 찾은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제주로 귀향했다.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도 않았지만 교래리 종중 땅 녹차밭을 일구는 것으로 하루 하루를 보냈다. 쓰라린 마음 한 구석에 울분과 분노가 켜켜이 쌓여가고 있었다. 그러던 때였다. 11월8일 제주대의 송성대·고성준 두 교수에게서 연락이 왔다. 일찍이 제주인의 정신적 원류를 ‘해민(海民)정신’으로 지목, 문명사를 더듬어가던 송 교수와 동북아 문명권에 대한 관심이 촉발된 나머지 내가 지사로 재직하던 때 세계섬문화축제의 기획과 집행을 책임졌던 고 교수는 틈나는 대로 내가 그들의 얘기를 경청하며 배우던 처지였다. “엄연히 제주문명사에 당신이 책임이 있다”는 그들의 말을 듣다보니 마음 한 구석에서 용기가 치솟기 시작했다. 더욱이 송 교수는 그때쯤 지방언론에 나를 빗대 ‘제주의 마지막 장두(狀頭)’란 칼럼을 기고했고, 그 글을 읽으면서 몹시 고마운 마음이었던 터였다.

 

“지사를 지냈던 이가 밭농사로 소일하는 건 가당치 않은 일”이며 “서둘러 제주의 발전과 지역개발 전략을 모색하는 길에 나서라”는 그들의 지적 끝에 조금씩이나마 바깥 바람을 쐬기 시작했다. 마침 일주일 여 뒤인 16일 제주대 강지용 교수로부터 연락이 왔다. “지사님의 도움으로 과거 재직시절 개설한 제주대의 농업최고경영자 과정에 와서 특강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사람들도 그리웠고, 그들의 얘기도 듣고 싶었던 지라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대학으로 갔다. 한림지역 분들이 주축이었던 것으로 안다. 낙협조합장 출신인 이의웅씨가 원우회장을 맡고 있던 때의 특강이다. 1차 산업 회생방안을 주제로 강의를 했는데 뒤이어 이어진 간담회 자리에 한림선주협회장이 느닷없이 “신 지사가 다음 선거에 출마하지 못하도록 정부에서 묶어버리고 있다”고 한탄을 하는 것이었다. 웃음으로 ‘선거 얘기는 그만하시라’는 말로 마무리 짓고 집으로 돌아오던 때 비보(悲報)를 들었다.

 

이틀 전인 14일 일본의 동경에서 제주출신 우리 교포 한 분이 급작스레 세상을 뜨셨다는 것이다. 당일 동경에서 재일 제주동포들이 컨벤션센터의 출자금 반환문제를 논의하던 중 구좌읍 김녕출신인 고하윤 일본 동경제주개발협회 고문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격론을 벌이다 돌연 사망했다는 것이다.

 

 

일찍이 지사 재직시절 번듯한 컨벤션센터를 건립하고자 재일동포의 출자를 이뤄낸 나로선 책임도 있었기에 가슴도 아팠다. 문상을 가는 게 도리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은혜재단 문제에 얽혀 송사에 묶인 처지인지라 내 소송대리인인 백승헌 변호사를 통해 검찰 쪽으로 일본 출장을 허락해달라고 요구했다. 출국금지가 된 처지였기 때문이다. 다행히 허가를 얻어 난 그해 11월20일 오전 9시15분 제주공항을 떠나 부산을 거쳐 일본 나리타에 내렸다. 동경개발협회 임원인 고한준 사장과 일행이 공항으로 마중을 나왔다. 나와 아내는 동경 힐튼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그리고 당일 저녁 6시에 고인의 빈소를 찾았다. 고인에 대한 깊은 위로의 뜻을 드렸지만 솔직히 장례현장을 방문하고 놀라움이 컸다. 모든 조문객이 검은 상복을 입어 예의를 갖춘 것은 물론 문상객 대부분이 아이들을 데리고 있던 것이다. “어려서부터 예(禮)를 아이들에게 가르치기 위한 것”이라고 들었다. 더욱이 빈소는 너무도 조용했다. 고인을 추모하는 동안 기껏 맥주나 한 잔 들이킬 뿐 우리처럼 술판과 윷놀이가 이어지는 왁자지껄 분위기는 상상할 수 없었다.

 

그 당시 동경지역회장은 이덕웅씨였다. 그 외 지역경제계에서 활동하던 고부인 사장도 있었다. 그 두 분이 나에게 장례식 조사(弔辭)를 요청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답답한 심경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사정을 들어보니 동경지역 출자자들이 서로 컨벤션센터 출자금의 반환문제를 논의하던 중 제주도와 내 후임 도지사에 대한 불만이 폭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내 후임지사는 “컨벤션센터는 공익사업이다. 출자금은 요청하면 반환하겠다”고 공언했다. 게다가 컨벤션센터의 규모도 축소하는 것은 물론 애초 계획했던 케이블카와 같은 수익사업도 모두 취소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 버린 것이다. 재일동포들은 이를 놓고 “우리가 좋은 뜻으로 출자했는데 제주도가 왜 이러느냐”며 분개하고 있던 것이다. 물론 그 당시 제주도의 한 지방언론은 “고인이 출자금을 반환하라고 소리치다 사망했다”고 보도했지만 그건 사실과 달랐다. 내가 현장에서 파악한 바로는 현지에도 이간질을 해 대는 ‘간첩’ 같은 이가 있었고, 그가 고의로 제주에 왜곡된 정보를 흘린 것이었다. 고인의 숭고한 뜻을 왜곡한 것은 물론 고인의 악착 같은 고향사랑을 한마디로 매도해버린 것이었다.

 

장례에 임하며 조사를 통해 현지에 계신 분들에게 사과했다. 컨벤션센터 건립사업에 출자한 동포의 뜻과 상관 없이 컨벤션센터 건립사업이 지지부진한 것에 대해 용서를 구했다. 그리고 약속했다. “귀국하면 지금의 현 지사와 협의, 당초 계획대로 건립사업이 잘 추진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고인의 영전은 물론 현지 교포들에게 다짐과 약속을 했다. 그리고 난 뒤 현지에서 몇 분과 더 의견을 나눌 기회가 생겼다. 동경의 이시향 고문과 한재원 고문, 김세방 사장, 고부인 사장, 고찬호 사장, 부승배 회장 등이다. 그들의 입장을 소소히 들어보기로 마음 먹었다. 그들의 의견을 정리해보니 세 가지였다. 당초 출자한 목적과 취지 대로 컨벤션센터를 잘 건립해달라는 것이 첫 번째였다. 수익성을 담보할 수 있도록 해주면서 고향사랑의 기꺼운 마음도 실현되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또 컨벤션센터의 건립도 당초 계획 대로 가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지금의 지사는 컨벤션센터 건립에 대한 입장이나 출자금 반환 문제에 대해 3번씩이나 약속을 어겼다. 그건 제주도식 사고방식이다. 안 되는 일”이라고 정색했다. 결국 그들이 마지막 말은 “출자금을 반환한다면 받겠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어려우면 적어도 그동안 지금의 도지사가 거짓말 한 것에 대해 그가 직접 사과하고 대책을 마련해달라. 그걸 전달해 달라”는 것이었다. “꼭 그러겠다”는 약속을 하고 일본에서 돌아왔다.

 

귀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검찰에서 나를 불구속기소한다는 발표가 나왔다. 언론에서도 대대적으로 이를 보도했다. 마음 속에서 분노가 치솟았다. 어떤 범죄혐의자라 할 지라도 확정판결을 받기 전까진 ‘무죄추정’이 원칙인데 우리나라의 경우는 검찰 선에서 이미 단죄(斷罪)가 이뤄지고 있었다. 이미 난 모든 이들에게 범죄인으로 매도되고 있었고, 지역언론과 사법당국은 이미 나를 그런 죄인의 굴레로 덧씌우고 있었다. 마음에 응어리로 남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내 스스로가 침잠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내 스스로가 당당하기에 남들의 시선에 아랑곳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재일 제주동포들과의 약속은 지켜야했다. 12월 7일 우근민 지사와 오찬을 함께 했다. 일본으로 조문을 다녀온 얘기와 컨벤션센터 건립 추진과정에서 일본 측에서 협력했던 일, 그리고 그동안의 진행사항을 설명해줬다. “전직 지사로서 내가 해야 할 역할이 있다면 하겠다. 도움 줄 일을 예의주시하겠다”고 말하고, 현장에서 보고 들은 교포들의 얘기도 그대로 전달했다. 그는 그렇게 대답했다. “종합적으로 연구해서 안을 정리한 다음 12월 중엔 교포들을 대상으로 설명하겠다”고 나에게 약속했다. 이젠 그가 지사이기에 나로선 더 이상 그를 압박하는 건 도리가 아니라고 봤다. 그 약속이 실천됐기를 바라는 마음이지만 그 후로도 일본에서 들려오는 얘기는 안타까움의 연속이었다. 마음이 쓰라렸다.

 

그와는 별개로 재판은 지속됐다. 그러다 재판에 임하며 나에게 뇌물을 준 것으로 지목된 뇌물공여자인 대유실업(주) 한상훈 사장의 진술서를 봤다. 어이가 없고 기가 찼다. 검찰은 한 사장에게 진술내용을 아예 받아 쓰도록 했다. 그들이 요구한 내용은 “신구범 지사가 양로원 운영경비 명목으로 두 차례에 걸쳐 30억 원을 요구했는데 제주에서 관광사업을 해야 할 입장에서 어쩔 수 없이 돈을 줬다”고 진술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거짓말은 검찰에서 시작되는구나···.” 한 사장의 진술조서를 보면서 그렇게 읊조렸다. 그 지점에까지 이르자 ‘달걀로 바위 치듯’ 재판에 임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불현듯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강자에게만 봉사하는 ‘권력의 시녀’ 검찰에 맞설 방법은 내 스스로 힘을 갖출 수 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당당히 선거에 임하자. 제주도민의 뜻과 힘을 모아 맞선다면 지금처럼 저들에게 질질 끌려 다닐 일은 없다. 당당히 선거에서 도민의 선택을 받고 정당한 재판을 받겠다”는 판단으로 귀결됐다. 이를 악물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마음 속에 떠올린 건 국민학교 운동회 같은 깨끗한 선거, 정책선거의 풍경이었다. “그동안의 지방선거문화를 바꾸는 전위대와 같은 역할을 하고 깨끗이 물러나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결심이 서자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첫 행보는 그해 12월25일 남제주군 대정지역에서 열린 대정오현동문회 모임이었다. 정당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고, DJ정부에서 갖은 수모를 겪었던 터라 대안이 없었다. 한나라당 입당을 노크할 수 밖에 없던 내 현실에서 고교동문이자 대정지역이 고향인 변정일 당시 국회의원(현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 이사장)과의 회동은 중요한 만남이었다. 그 자리에서 한나라당 입당 문제를 비공식적으로 논의했다. 물론 무조건 한나라당행을 결심한 건 아니다. 한나라당 입당을 생각한 건 소위 김대중 정부에 대한, 농·축협 통합에 대한 반감이 사실 크게 작동했다. 다음 정권에서 이회창 후보가 되면 축협을 원위치로 되돌려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내가 선택할 곳은 한나라당이었다. 그 정당을 등에 업을 수 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 차원에서 변 의원과 논의와 숙고를 시작했다.

 

변 의원은 말했다. “지금 대안이 없다. 차기 도지사 후보가 없다. 곧바로 대선도 오는데···입당하면 신 지사가 (2002년 지방선거 후 6개월 뒤인 12월 치러질) 대선에서 일정한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긍정적인 화답이었다. 그리고 그는 “1월중 양정규 한나라당 부총재(전 헌정회장, 2011년 작고)와 현경대 의원과 협의하겠다”고 말했다. 당시 한나라당 총재 비서실장이던 그는 친절하게도 “만약 두 의원과 협의 후 문제가 있으면 이회창 총재에게 직접 보고, 결론을 내겠다”고 말했다. 그는 나와 동갑인 처지지만 엄연히 내 고교동문으로서 1년 선배다. 내 북초등학교 동창인 현 의원과는 동기동창이다. 그런 그의 말에 나로선 고마움을 감출 수 없었다.

 

해가 바뀌고 2001년 1월4일이 됐다. 서울에서 나와 고인이 된 양정규 한나라당 부총재, 변정일 의원 세 사람이 만났다. 양 부총재는 내가 기소된 사건의 사법처리 전망을 물었다. “전혀 당에 부담되지 않게 하겠다”고 답했다. 다만 나로선 “1998년 6·4지방선거 출마과정에서 벌어진 현경대 의원과의 앙금이 걱정”이라고 말하자 양 의원은 “현 의원이 큰 정치인인데 대승적인 관점에서 당신의 입당을 생각할 것이다. 입당문제를 나에게 위임해주면 알아서 하겠다”고 말했다. 일이 잘 풀리는 듯 했다. 그러나 우려는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현임종 후보 지원문제로 현 의원과 벌어졌던 간극은 그해 2월8일 연합통신(현 연합뉴스)에서 지방선거 조기실시론이 불거지면서 더 벌어져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연합통신 보도는 “2002년 월드컵과 지방선거가 시기가 맞물려 조기실시가 불가피하다”는 것이었고, 그 보도는 그런 내용과 더불어 전국의 지방단체장 후보를 정당별로 물망에 올렸다. 그런데 거기에 내가 거명된 것이다. 아마 한나라당 중앙당에서 흘러나온 얘기인 것으로 추측된다. 후일 안 얘기지만 아무런 일언반구도 없이 이런 얘기를 듣게 된 현 의원은 심정적으로 몹시 불쾌한 감정을 가졌던 것으로 안다.

 

 

그런 사정과 별개로 막상 지사 선거를 앞두고 사전정지작업에 돌입한 나에겐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이어졌다. 주변 참모진용을 구축하고 선거판에 뛰어들어야 할 상황인 나로선 당연히 제주의 ‘경조사 정치문화’를 도외시할 수 없었다. 제주 전역을 돌며 이곳 저곳에 얼굴을 내밀어야 했다. 하루에 12~17곳을 돌아다닐 정도여서 솔직히 몸도 힘들었다. 하지만 그런 육체적 피로보단 마음 속에서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가”란 자괴감이 더 나를 괴롭혔다. 경조사 현장을 돌아 다디던 보름여만인 3월 초에 이르러 그런 답답함이 마음을 옥죄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지사에 당선돼 본들 내가 뭘 하겠다는 건가”란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더욱이 그렇지 않아도 마음이 심란하던 때였는데 하루는 제주에서 활동하던 한 중앙언론사 중견기자가 나에게 놀리듯 이렇게 말했다. “아니 도지사 재직시절엔 그렇지 않더니 지금 하시는 것 보니 측은한 생각이 듭니다.”

 

주위에선 그렇게 보고 있었다. 사실 과거 지사로 재임할 땐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경조사 일을 잘 찾지 않았다. 일이 너무 바쁜 탓도 있지만 “한시가 급한 일이 산더미인데다 정부 협의로 서울을 오가기도 바쁜 마당에 한가하게 경조사 현장을 찾을 수 없다”는 생각이 자리 잡았고, 또 어느 곳은 가면서 어느 곳은 가지 않아 오히려 불만을 사서도 곤란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구걸하듯 돌아다니는 내 처지를 보니 자괴감이 엄습해 온 것이다.

 

그건 축협 중앙회장을 사임한 후 제주로 돌아오는 카페리 안에서 마음 먹은 다짐이 진작부터 무너지고 있던 순간이었다. 그 시절 난 그 배 안에서 “이제 고향에 돌아가면 더러운 것, 악한 것조차 사랑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런 내가 막상 이곳 저곳 경조사 현장에 끌려 다니다 보니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이 시간이면 정책을 구상하고 미래를 더 튼실히 준비할 텐데 경조사 돌아보는 걸로 이렇게 시간를 허비해야 하는가”란 의문으로 번졌고, 어느 순간 그건 육체적 피곤의 문제가 아니라 가슴팍을 짓누르는 회의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 시절 난 ‘경조사 정치’에 매몰돼 가슴팍을 짓누르던 일과 또 다른 일로 서울로 올라갔다. 98년 지방선거에서 생긴 현경대 의원과의 앙금을 털고 싶었다. 3월20일 서울로 가서 오후 3시 서대문에 있는 현 의원의 변호사 사무실로 찾아갔다. 그는 나에게 말했다. “과거의 소행으로 봐서 신뢰를 아직 확신하지 못한다. 입당은 자유다. 그러나 한나라당 제주시지구당은 신 지사의 입당에 부정적이다.” 마음이 착잡했다. 과거 그가 어이 없는 방송사고로 낙선하고 헤매고 있을 무렵 로마에서 만났던 기억이 아스라이 떠밀려 왔다. 내가 주이탈리아 한국대사관에 농무관으로 있을 무렵 그가 쓴 입술을 다시며 찾아왔을 때 그의 마음을 풀어주고자 다녔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그 친구의 마음을 풀 길은 도대체 없을까?”

 

그와의 불편함을 덜어보고자 4월14일 부활절 전날엔 아내와 함께 현임종 선배의 집을 찾아갔다. 내가 먼저 사과하면 그래도 선배가 조금이라도 풀지 않겠나란 생각이었다. 한 마디로 문전박대를 당했다. 마음 한 구석으로 “나이가 들면 상스러운 말이나 모습을 보이는 건 참으로 부끄러울 수도 있구나”란 생각이 자리 잡았다. 그렇지만 손을 놓고 있을 순 없었다. 현 의원의 주변을 두루 찾다보면 그의 마음을 되돌릴 수 있지 않겠는가란 생각을 했다. 현 의원의 아성인 제주시 지구당 대의원들을 만나 설득을 거듭했다. 그 가운데 여성인 K대의원을 만났다. 그는 대뜸 “이번 지방선거는 신·우 싸움이다. 다음번 선거는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국회할복은 실수한 거다. 하지만 DJ정부가 하는 꼴을 보니 결국 신 지사가 성공한 거다. 여성 표를 걱정하는데 한 마디로 말한다. 단체장 폼 잡는 여성들은 표 없다. 못나고 소박하며 평범한 이들에게 표가 있다. 오히려 표가 더 많다. 돕겠다.” 그런 얘길 해 주는 것이었다. 격려가 보태져 의욕이 솟았다. 그 때부터 5월 초까지 수백명의 한나라당 제주도당 대의원 접촉과 방문을 마무리했다. 4개 시·군 구석구석을 모두 돌았다.

 

한나라당 입당을 위해 공을 들이던 터여서 현 의원은 그렇다 치더라도 사실상 내 입당을 ‘내락’한 변정일 의원과 양정규 부총재는 계속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시절 변 의원과 양 부총재는 이견을 보였다. 변 의원은 내가 당장 입당하는 게 낫다고 본 반면 양 부총재는 당직 개편시기에 맞춰 입당하는 걸 제안했다. 5월4일 서울로 가서 그 문제를 매듭지었다. 신라호텔에서 양 부총재와 변 의원을 만나 기본적인 합의를 봤다. 먼저 중앙당으로 입당한다는 것과 현 의원의 동의 문제는 입당 후 처리한다는 것. 또 축산인들의 지원을 얻기 위한 동반입당은 100명 이내로 한 뒤 대선을 도모하기로 했다. 입당시기도 마지막 조율을 마쳤다. 한나라당 당직개편 시기에 맞춰 5월 하순 또는 6월 초로 하기로 한 것이다. 물론 그들은 입당하면 자신들의 지역구 관리에도 내가 협력한다는 확약을 받는 걸 잊지 않았다. 그런 내용은 제주로 오자마자 당시 한나라당 소속인 신철주 군수를 만나 전달했다. 현 의원의 그림자 격이었던 강영철 제주시의회 의원에게도 그런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했다.

 

 

일이 착착 진행되는 듯 했건만 ‘경조사 정치’에 거부감을 갔던 나는 그만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 시절 누군가는 그런 너스레를 떨었다. “제주도는 죽은 사람과 시집·장가 가는 사람이 없으면 정치인은 실직할 것 같다”고. 경조사 정치를 비아냥 댄 것이다. 그런 비아냥에 내 마음도 싱숭생숭하고 있을 참인데 그만 5월8일 오후 4시경 제주시 애월읍 수산리에 문상을 갔다가 한 노인과 몸 싸움 일보직전까지 갈 뻔했던 것이다. 문상을 마치고 나오는 데 윷놀이를 하던 한 노인이 대뜸 “저거 무신거 허젠(무엇 하려고) 와신고(왔는고)?”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인격도야가 덜 된 게 나였다. 그만 울컥해버린 것이다. “당신!! 뭐하러 왔냐고? 문상하러 왔다.” 그리고선 삿대질과 으름장, 고성이 오가게 돼 버린 것이다. 그날도 자그마치 17곳이나 문상정치를 다녔다. 그땐 스스로 그런 일을 벌이지 않고자 ‘선거실습 텍스트’를 만들고 다니고 있었다. 내가 직접 작성한 일종의 마음가짐 지침서다. 드러내지 않고 친화력을 배가하기 위한 내 다짐이었는데 그 1호가 ‘화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금기 1호를 그날 깨버렸다. 속으로 쓰라렸다. "내가 여기까지 와 놓고 왜 이리 했는지···. 그냥 웃으면서 문상 와수다게(왔습니다) 할 걸···.“ 후회가 막급했다.

 

내가 그 시절 새긴 또 하나의 지침은 ‘전화 하기’였다. ‘전화를 자주 걸자’였는데 막상 마음은 먹으면서도 전화기만 만지작거리기 일쑤였다. 이름과 전화번호만 보고서 마치 아는 것처럼 전화를 걸자니 도무지 쑥스러웠다. “너무 뻔뻔스러운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 일화가 있다. 지사 재직시절 고향 후배인 김완근 도의원(농업경영인 중앙회 부회장 역임)이 나에게 귀띔하듯 ‘부탁 아닌 부탁’을 하는 것이다. 그가 이르기를 “지사님! 출근하면 하루에 업무 시작하기 전에 이장, 부녀회장 10명씩만 전화를 꼭 하십시오.” 이렇게 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덧붙이길 “어느 이장 잘 있소? 마을에 필요한 거 뭐 없습니까?” 그런 식의 전화만 매일 아침 하라는 것이었다. “막상 숙원사업을 해주고 안 해주고는 상관 없다”는 친절한 설명도 곁들였다. 격의 없던 후배인 지라 나는 그 말에 “이 새꺄! 얼굴도 모르는데 어떵(어떻게) 그걸 해지나(할 수 있냐)?”고 거절한 바 있다. 물론 실제로 그런 일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선거를 앞두고 그런 일을 하겠다고 결심했는데 아무래도 전화기를 잡기도, 입에서 말이 떨어지지도 않는 것이었다. 스스로 “아무래도 난 정치인감이 아닌 것 같다”는 자조가 나왔다.

 

다시 선거에 나오려고 마음 먹은 도지사 후보-. 하지만 민선 1기 도지사 시절에도 ‘독선과 오만’이란 혹평을 듣더니 98년엔 ‘어이 없는’ 경선 실패로 또 고배를 마셨지만 내 ‘아둔’과 ‘우직’은 여전히 나를 가두고 있었다. 그러나 난 지금도 ‘경조사 정치’만으로 세상 사람들의 환심을 사는 게 아직도 어색하기도 하거니와 옳은 길이 아니라고 판단한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수화기에 대고 입에 침을 발라대며 남을 속이고 싶은 마음은 지금도 없다.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순간의 이득을 챙기는 누군가가 있게 마련이지만 결국 그런 교활한 술수는 우리 공동체를 파괴하는 ‘사기’의 첫 걸음이다. 그러나 그래야만 제주의 정치판에서 먹혀 들어간다니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지금도 우리 도민들의 깊은 성찰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36편으로 이어집니다>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

 

=1942년생. 오현고를 나와 육군사관학교 4년을 중퇴, 1967년 5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자로 입문했다. 제주도 기획관, 주이탈리아 한국대사관 농무관, FAO(국제식량농업기구) 한국교체수석대표, 농림수산부 축산국장, 농업구조조정정책국장,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YS정부 시절인 1993년 12월 제29대 제주도지사로 취임했다.

 

이어 첫 민선 지방선거인 95년 6·27선거에선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돼 31대 지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98년, 2002년 두 번의 제주지사 선거에선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후 축협중앙회장을 거쳐 친환경 농업회사법인인 (주)삼무와 전시판매장인 삼무힐랜드를 운영했지만 지사 재직시절 뇌물수수사건에 휘말려 2년여 수감된 뒤 풀려났다. 삼무힐랜드는 수감기간 중 문을 닫았다.

 

제주삼다수와 관광복권,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제주교역, 제주세계섬문화축제 등이 그의 지사 재직시절 작품이다. 현재 제주생태도시연구소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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