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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40)

제주에선 감귤산업을 '생명산업이라고 부른다. 관광산업과 더불어 지금 이만큼이라도 먹고 살게 만들어준 기조산업의 핵심축이기도 하다. 한때는 감귤나무로 아이들 키우고 대학에 보낼 등록금까지 만들어 내 ‘대학나무’로 불리기도 했다. 뭍 지방 쌀농사 이상의 작목이자 제주경제의 버팀목이 된 우리 제주농민들의 땀과 꿈이다.

 

제주도와 농림부에서 잔뼈가 굵은 내가 그걸 모르는 바가 아니다. 제주에서건, 서울에서건 늘 내 머리를 떠나지 않은 건 “기필코 제주감귤을 세계시장의 반열에 올라놓아 우리 제주농민들이 떵떵거리며 살게 만들리라”는 다짐이다. 하지만 1998년과 2002년 두 번의 선거에서 이미 ‘정치작목’으로 변질된, 더 정확히는 감귤을 정책이 아니라 오로지 표를 얻기 위한 정치도구로만 악용해버린 상대방의 기가 막힌 속임수에 나도 도민들도 무참하게 표를 도둑맞았다. 내 상대방은 98년 “신구범이 감귤을 파묻었다”는 유언비어로 재미를 봤다. 그리고 2002년엔 감귤 매립현장을 굴착하는 ‘쇼’까지 보여주며 재탕의 단맛을 실컷 맛봤다. 감귤농가들의 정서를 자극하는 얕은 술수였지만 기가 막히게 그들의 작전은 주효했다.

 

감귤에 관해서 내가 재임시절 기본적으로 가진 생각은 한 관(3.75kg)당 우리 농민들이 1만원은 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게 정책기조였다. 결국 문제는 가격이라고 본 것이다. 관선지사로 부임하고 일본 현지로 가서 감귤 값 동향을 파악할 기회를 가진 적이 있다. 일본의 평균 감귤 도매값은 당시 kg당 일화 320엔이었다. 그 시절 환율은 100엔 당 한화가 780원이었다. 계산해보니 관당 1만원쯤 됐다. “우리 제주라고 그만큼 못 받을 이유가 있나”고 생각했다. 그래서 목표를 그렇게 잡았다. 더욱이 여러 가지 생산조정 정책을 쓰자 내가 재임하던 96년에 이르러선 역대 시장도매가격 중 최고인 관당 6천원선이 형성됐다. 충분히 1만원까진 가능하겠다고 생각했다.

 

그 시절 내 감귤정책의 핵심은 두 가지다. 그 하나는 생산조정이었고, 또 하나는 유통개선에 뒀다. 생산조정은 생산량을 줄여 감귤 값을 올리겠다는 것이다. 과잉생산 땐 가격이 폭락하고, 적정생산 땐 가격이 올라가는 게 상식이었기에 그렇다면 오히려 생산량을 줄이는 게 우리 농민들이 더 이익이었다. 감귤은 흉년이 들어야 농민이 산다. 풍년이 들면 일부러 정책을 통해 흉년을 만들어야 농민이 산다. 그래서 빼곡히 들어찬 감귤나무를 솎아 베는 간벌(間伐)과 나무에 매달린 채로 비상품 감귤을 걸러내는 열매솎기(摘果)에 매달렸다. 물론 감귤과수원으로 적합지 않은 곳엔 각종 정책자금을 지원해 폐원을 유도하는 부적지 폐원정책도 병행했다.

 

 

유통개선은 출하조절이다. 그 시절 수확철에 감귤이 도외로 반출되는 물량은 가장 많을 땐 하루 8천톤이나 됐다. 물론 그 정도의 물량이 뭍지방으로 나가면 단 하루 이틀 차이로 ‘잘 나가던’ 감귤 값이 곤두박질쳤다. 가격폭락사태가 오는 것이다. 그걸 하루 3천~4천톤 정도로 출하량을 조절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단기적으로 제주도감귤출하연합회를 만들었다. 농·감협 조합장과 생산자 단체가 참여하고, 도지사가 출하연합회장이 되는 구조다. 제주도가 직접 시장상황에 맞춰 출하량을 통제, 가격안정을 꾀할려는 의도였다.

 

이와 더불어 중장기적으론 감귤을 산지공판시스템으로 바꾸려고 했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제주에서만 생산되는 감귤이 왜 생산자가격을 못 받고 소비자가격에 맞춰 끌려다니는가란 문제의식이 출발점이었다. 서울의 송파구 가락동 농산물도매시장과 대구·광주 등 각지 대도시 공판장으로 우리가 직접 생산물량을 끌고 가거나 유통상인에게 비용을 들여 맡기고 감귤을 내보내는 현실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감귤을 사고 싶으면 제주에 와서 직접 사고 가라. 그것도 경매절차 거쳐 사고 가라”는 발상이 산지공판·산지경매시스템이다. 그런 방법으로 자연스레 생산지 가격을 만들어낼 요량이었다.

 

그런 고민의 부산물이 지금 제주시 일도지구의 하나로마트와 농산물공판장이다. 하지만 지금의 현실은 당시의 구상과 한참 동떨어진 결과다. 당시 구상은 이렇다. 산지공판장을 고민하다 제주시농협이 갖고 있던 두 가지 강점이 눈에 들어왔다. 우선 제주시농협은 전국에서 제일 큰 단위조합이다. 육지부 어느 곳도 제주시농협을 능가할 단위조합은 없었다. 또 결국 물동량도 제주항을 통해 이뤄지는 상황이기에 뭍 지방 유통상인들과 상대할 수 있는 경쟁력도 있었다. 그래서 당시 난 현경희 제주시농협 조합장을 통해 140억원을 지원했다. 융자금 등을 뺀 직접보조비만 80억원인 거액이다. 당시로선 단위농협에 줄 수 없는 돈이다. 한마디로 일을 저지른 것이다. 요지는 '산지공판시스템을 구축하라'는 것이었다. 그것만 완공되면 우리 제주에서 직접 농산물 경락가를 확정, 뭍지방 유통가격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것이기에 충분히 해야 할 투자라고 봤다.

 

그러나 이 산지공판장이 준공되기 전에 다가온 98년 6·4지방선거에서 난 낙선했다. 내가 낙선하고 오래지 않아 그 공판장은 준공됐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소비시장인 하나로마트와 소규모 농산물공판장만 떡하니 눈앞에 나타났다. 감귤 산지공판 기능은 사라져 버린 것이다. 게다가 현재 그 농산물공판장에서 취급하는 물량의 70%이상이 육지에서 생산, 반입된 농산물이다. 애초 우리가 구상한 제주감귤 산지공판장이 아닌 것이다. 또 하나의 소비지 공판장을 만든 것에 불과한 일이 벌어졌다. 우리 농민들은 아직 이해하지 못할 지 모르지만 나로선 우리가 더 큰 이익을 거둘 수 있는 공판시스템이 송두리째 하늘로 날아가 버린 것이기에 가슴이 아프다.

 

 

그런 면들에 대한 구상을 우리 농민들이 미처 이해하지 못할 때 난 두 번의 선거를 치르고, 철저히 상대방으로부터 유린당했다. 무엇보다 “신구범이 감귤을 파묻었다”는 말도 안 되는 난리통에 난 말려들었다. 내 상대방이 이런 발언으로 처음 재미를 본 건 98년 선거때다. 결국 97년 산 감귤의 처리문제와 얽힌 얘기다.

 

재임시절인 97년 감귤은 풍작이었다. 예상대로 감귤값 조짐은 심상치 않았다. 강력한 생산조정 정책으로 과잉생산된 감귤을 시장에서 격리할 필요가 있었다. 숱한 논란을 거치며 생산조정제를 시행했다. 솔직히 그 시절 다음 해에 열릴 선거를 염두에 두었다면 생산조정제를 시행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랬다면 우리 농민들 중에서 자금력이 약한 일부 영세농민들은 큰 빚더미에 앉았을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 안위문제로 도민을 이용할 생각은 없다. 과감히 선과장 규격상 1번과 이하와 9번과 이상 감귤을 비상품으로 격리, 아예 시장에 내놓지도 못하도록 했다. 물론 그 때 강대준 감협조합장을 비롯, 각종 단체가 지사 집무실로 찾아와 생떼를 쓰는 통에 집무실에서 일을 하기도 어려웠다. 어쩔 수 없이 0번과와 10번과만 비상품으로 재조정했다. 물론 그 직후부터 시장에서 감귤값은 곤두박질쳤다. 결국 우린 다시 감귤값 하락을 저지하고자 시장에 나가는 물량의 일부를 직접 수매, 다른 방안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일단 급한 불은 꺼야 했기 때문이다.

 

‘감귤을 파묻었다’ 논쟁의 연유를 또 거슬러 올라가면 1998년 선거 전인 그해 3월 내가 일선 조합장 등을 대상으로 한 공무원교육원 특강이 거론된다. 그 특강에서 내가 한 발언은 이렇다. “우리가 지난해 겪은 일이다. 감귤이 적정생산량을 넘어 과잉생산 돼 시장으로 나가면 제값을 받는다는 건 아예 기대할 수 없다. 감귤을 파묻어서라도 가격을 지켜야만 우리 농민들의 소득을 보장할 수 있다.” ‘감귤 매립 논쟁’으로 비화된 계기가 된 건 딱 이 발언 하나다. 문제가 됐지만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다. 과잉생산된 물량으로 가격폭락사태가 벌어져 우리 농민들이 애써 공들인 노력이 물거품이 될 위기라면 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 할 수만 있다면 일부 물량은 태평양 바닷 속에 내던져서라도 시장에서 격리해 감귤이 제값을 받도록 해야한다는 게 내 지론이다. 하지만 이 발언은 철저히 왜곡·변형되기 시작했다. 한 정보형사의 손에 공무원교육원 육성강의 녹음 테입이 쥐어졌고, 그는 98년 선거를 준비하던 내 상대방에게 그걸 전달했다. 그건 ‘감귤을 파묻어서라도’가 ‘감귤을 파묻었다’로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내 상대방은 98년 5월16일 제주KBS의 도지사후보 초청 정책토론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신 후보는 재임시절 2만8천톤의 감귤을 땅에 파묻었다.” 이어 5월22일 MBC토론회에서도, 이어 29일 서귀포시 남원읍 자신의 선거연락사무소 현판식에서도, 6월1일 제주시 제원아파트 입구 유세에서도. 투표일 직전인 6월2일 제주시 오일장 유세에서도 그는 그렇게 떠들었다. 각종 토론회와 유세 때마다 “신구범은 감귤을 파묻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감귤을 피땀 흘려 애지중지 키워낸 농민들의 정서를 자극하는 기가 막힌 전술이었다. 여기다 한술 더 떠 2002년 6·13선거를 앞둔 6월9일엔 제민일보 1면에 “신구범 후보가 감귤을 수매해서 방법이 없으니 전부 파묻었다”고 광고까지 했다. 물론 그 때도 각종 유세와 토론에서 “신구범은 감귤을 파묻은 장본인”이라고 주장을 펴더니 급기야 그해 5월26일엔 “신구범이 감귤을 파묻은 현장”이라며 일반에 공개, “이제 사실임이 증명됐다”고 열을 올렸다. 2002년 5월26일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한 목장부지로 도내 언론사 기자들을 불러 모아 직접 포클레인으로 땅을 파헤치고 파묻힌 감귤을 보여주며 나를 공박했다. 한마디로 깔끔하게(?) 당했다. 진실을 말할 틈도 없이 선거 막판 쏟아낸 한방의 거짓말로 누명을 뒤집어 썼다.

 

너무도 어이 없이 당했지만 그 후로 우리의 자체조사를 통해 사정을 알아보니 기가 찰 정도가 아니었다.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난 뒤 진실을 더 파악했다. 경위는 이렇다. 1997년 감귤농사는 대풍이었다. 앞서 말한 대로 농업단체 등의 성화에 못 이겨 감귤선과장 출하 규격을 완화하자 감귤 값은 대폭락했다. 그러자 도지사가 당연직인 제주도감귤출하연합회는 97년 11월23일 상품성이 떨어지는 1번과와 10번과를 유상수매하기로 결의했다. 가격하락을 막고 농가소득을 보장하자는 차원이었다. 수매물량은 4만톤으로 하기로 하고 주관기관은 농협, 수매물량 처리기관은 출하연합회로 했다. 결국 도지사가 책임지고 일을 처리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난 뒤 97년 12월7일부터 98년 1월 말까지 농협이 수매에 나섰다. 농민들로부터 돈을 주고 사들인 수매총량이 4만814톤으로 투입된 예산은 100억2700만원이나 됐다. 그 물량 가운데 1만3246톤은 사회복지시설이나 가공용으로 공급했다. 나머지 2만7568톤은 안덕면 동광리 소재 (주)고암기업(대표 이억봉)과 계약을 맺고 처리하도록 했다. 고암기업은 97년 5월1일 남제주군수로부터 폐기물관리법상 일반폐기물 퇴비화와 사료화 전문 중간처리업으로 허가를 받은 제주도내 유일 기업이었다.

 

 

고암기업은 그 감귤을 처리할 수 있는 철골 주처리시설 1동을 보유하고 있었다. 체적이 1575㎥로 보관용량이 2만2천톤이었다. 물론 처리시설 용량 부족으로 나머지 5천톤은 처리시설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그건 당시 주처리시설 바로 옆 부지에 비닐로 차수막시설을 한 대형저장조에 임시로 보관하고 있다가 나중엔 주처리시설로 다 집어 넣어 처리를 마무리했다. 누구나 쉽게 짐작할 테지만 먼저 처리시설로 집어 넣은 감귤이 발효되면서 부피가 줄어 물량을 더 담을 수 있는 공간이 생기게 된 결과다. 즉 단 1톤도 땅에 파묻은 바가 없다는 소리다. 전량 처리시설로 들어갔기에 파묻은 바가 없는데 파묻었다고 난리통을 핀 것이다.

 

더욱이 당시 나는 도지사로서 100억원에 이르는 기금을 들여 운수업자와 공무원, 농협직원 상당수를 투입해 대규모 ‘작전’(?)을 하듯 물량을 처리했다. 감귤 4만톤이면 10톤 트럭으로 2700대, 5톤짜리로 5512대나 된다. 수매한 물량을 일시에 처리하다 보니 그 물량을 실어 나르는 거대한 차량행렬이 마치 군사 퍼레이드처럼 작전하듯 장관이었다. 그런데 일부 물량이라도 파묻었다면 그걸 우리가 모를 수 있는가? 더욱이 폐기물 업체나 일부 운송업체가 그 물량을 우리와 계약한 대로 저장고에 넣어 처리하지 않고 파묻는다면 나로선 상상도 못할 바보이거나 아니면 어떤 ‘의도’를 갖고 돈을 들여서까지 누군가의 사주로 파묻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과연 그런 바보가 있을까? 2만~4만톤의 감귤을 파묻으려면 땅 속에서 걷어낸 흙만으로도 제주에 새로운 ‘오름’ 하나가 등장할 규모다. 나 역시 미친 사람은 아니기에 그럴 일은 없다.

 

'감귤 파묻었다‘ 주장이 말도 안 되는 이유는 하나 더 있다. 우리와 계약을 맺은 고암기업의 대표 이억봉씨는 당시 농산물 부산물을 이용한 퇴비화작업을 하는 동암영농조합법인도 운영하고 있었다. 감귤 부산물은 그가 퇴비로 만들어 돈도 벌 수 있는 자원인데 무엇하러 감귤을 땅에 파묻는 방식으로 버리겠는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물론 절차상으로도 그 물량을 처리할 때 선과장 별로 비상품 감귤을 수매했고, 선과장 마다 전부 농협직원이 배치돼 컨테이너 별로 철저한 검수작업을 거쳤다. 그리고 폐기물 업체로 실어 나르면 현장에서 다시 공무원이 검수작업을 거쳤다. 돈 나가는 게 만만찮았기에 그랬고, 운송작업비만 kg당 1원24전에 계약했기에 확인해야 정산, 돈을 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어쨌든 실어 날라야 그 돈을 준다. 돈이 눈 앞에 있는데 이걸 빼돌려 다른 곳에 가서 무엇하러 파묻는가?

 

그런데 내 상대방이 2002년 투표 직전 내가 감귤을 파묻은 곳이라고 어떤 땅을 지목했다. 찾아가 봤다. 안덕면 동광리 고암기업 부지가 있는 한 목장 안에 있었다. 우리가 계약을 맺은 고암기업과 400~500m 떨어진 곳이었다. 그런 매립현장이 있는지 들어본 적도 없고, 보아본 적도 없는 곳이었다. 그 곳에서 그는 포크레인을 동원, 자랑스럽게 땅을 파헤쳤고, 땅 속에선 악취가 진동하는 감귤부산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게 내가 감귤을 파묻은 현장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현장에 기자들을 동원, 그는 열변을 토했다.

 

 

이해를 돕기 위해 1993년 내가 관선지사로 부임하기 전 감귤처리 실태를 설명한다. 그 시절은 오렌지가 수입자유화 되기 전인 때다. 감귤가공 처리시설이 고작 두 곳에 불과한 때다. 롯데칠성음료와 해태음료다. 당시는 국내산 감귤을 수매하는 물량에 비례해 오렌지 원액 수입쿼터를 줬다. 그 때문에 제주산 감귤을 많이 수매할 수록 오렌지 수입을 더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두 업체는 경쟁적으로 제주감귤을 수매했다. 그런데 감귤박(감귤원액 착즙 후 남은 찌꺼끼) 처리가 문제였다. 처리할 방법이 마땅히 없자 그들은 고암기업의 대표인 이억봉씨에게 매달렸다. 그 때 이씨는 고암기업과 별개의 기업을 두고 있었고, 그 기업은 당시 도내에서 유일하게 감귤박 처리업 허가를 받은 기업이었다. 그런데 해태와 롯데가 경쟁적으로 감귤박을 맡기다 보니 이씨는 처리가 버거운 상황에 직면했고, 결국 그는 일부 물량을 그냥 땅속에 묻어버렸다. 내 상대방이었던 사람이 지사로 재직하던 1992년 말까지 그렇게 동광리 땅속에 감귤박을 묻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그 일로 폐기물관리법 위반 사범이 돼 재판을 받게 됐다. 그 때 내 상대방인 전임지사는 검찰에 “감귤 처리과정에서 저지른 불법이기에 선처해달라”고 탄원서도 냈다. 하지만 그는 결국 감옥까지 가는 신세가 됐고, 폐기물 처리사업을 계속해야 했던 그는 출소 후 철골 주처리시설 등 적법한 시설을 만들었던 것이다. 파묻었다간 재차 교소소로 갈 판이니 그로선 당연히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린 그렇게 적법한 시설이 설비된 기업과 계약하고 철저히 처리결과를 파악했다.

 

하지만 그런 그가 과거에 저지른 범법장소를 누가 알 것인가? 탄원서까지 써 주며 그 시절 그의 불법 매립 행위에 대해 선처를 해달라고 한 사람이 알 수 있는가? 아니면 영문도 모르는 매립지에서 포클레인으로 들쑤신 뒤 나온 감귤박을 지켜 보던 내가 그 사정을 알 수 있는가? 더 웃긴 건 2002년 선거 때 현장에서 “바로 이게 신구범이 땅에 파묻은 감귤이다”고 보여줄 때의 현장상황이다. 우린 1997년 산 비상품 감귤을 시장에서 격리, 처리할 때 컨테이너 단위로 검수작업을 거쳤다. 그래야 정확한 중량을 계산, 농민과 운송작업자에게 돈을 내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감귤을 파묻었다고 주장한 현장에선 감귤박이 마대자루에 뒤섞여 나왔다. 가공공장에서 나온 감귤박을 마대에 담아 와서 그냥 파묻어버린 것이다. 어느 지사의 재임시절 소행인지는 이제 지나가던 개도 알 수 있다. 고스란히 내가 당한 것이다. 누구의 소행진지 당장 확인할 길은 없고, “신구범이 감귤을 땅에 파묻었다”고 말한 뒤 알 수 없는 현장에 기자를 동원, 포클레인으로 땅을 파헤친 뒤 “바로 이거다”라고 하니 내가 파묻은 게 진실로 돌변했다. 이렇게 기가 찬 거짓말과 뒤집어 씌우기가 있는가?

 

2002년 선거가 끝난 뒤 갖가지 허위사실로 당한 나로선 당연히 분노하지 않을수 없었다. 선거가 끝나고 나서도 우린 진실을 알아내고자 발품을 팔아 당시 관련자와 현장을 미친 듯이 뒤지고 다녔다. 그리고 알아낸 진실이다. 허위사실 공표건으로 고소한 이유는 그만큼 진실을 가려내고 억울함을 풀기 위한 호소였다. 더욱이 우리 내부에서도 법률적으로 검토한 결과 여러 가지 사안 중에서도 내가 감귤을 파묻었다는 그 주장은 가장 악질적인 거짓말이자 내 상대방의 당선을 당장이라도 무효로 만들 수 있는 심각한 사안이라는 결론이었다.

 

그의 범죄혐의를 밝히고자 동분서주했다. 하지만 우린 사실 많은 난관에 봉착했다. 당시 모든 사정을 알고 있던 농협직원과 공무원은 물론 모든 근거 서류를 갖고 있던 제주도감귤출하연합회까지 모두 꿈쩍을 하지 않았다. 당선자가 된 현직 지사의 권력에 짓눌려 모두 우리를 피하고 숨죽였다. 현직 지사는 그 권력을 최대한 활용. 알고서도 침묵하도록 만들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해 뛰었던 김계홍 전 제주시 부시장 등 일행은 일일이 사람을 찾아다니며 증거·증언을 확보했다. 심지어 당시 시장에서 격리된 감귤을 싣고 가 동광리 처리시설로 운송, 처리시설로 집어 넣은 페이로더 운전수와 덤프트럭 운전수로부터 증언까지 다 받았다. 그들의 증언은 너무도 명확했다. “그냥 가져다 처리시설로 집어 넣으면 돈을 받는데 미쳤다고 땅을 파는가? 그럴 시간도 없었고, 파묻으려면 땅을 파야 하는데 그 돈이 얼마냐?”고 반문했다. 그게 그들의 증언이었다. 이런 증언까지 모두 받아 검·경찰에 줬는데 이게 무혐의가 됐다. ‘봐주기식’ 수사의 절정이었고, 그들은 ‘축협의 부실채권 매입’ 운운 발언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가 우리가 재판과정에서 더 철저하게 대응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내 상대방의 유죄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너무도 기가 찬 거짓말에 당한 지라 그 시절 제주도의 부채를 확대포장한 허위사실 공표는 그러다 보니 ‘새발의 피’다. 내 상대방은 ‘신구범이 감귤을 땅에 파묻었다’는 거짓말도 모자라 내 재임시절 제주도의 부채가 5343억원이나 됐다고 소리치고 다녔다. 98년 자신이 당선되고 나서 상공회의소 모임에 가서는 “당선돼 보니 도 금고가 텅텅 비어 있더라”고 주장한 것이다. 소도 웃을 일이다. 회계상 부채는 순계와 총계개념이 따로 있다. 말하자면 제주도 부채의 총계 속에는 시·군부채가 포함된다. 예컨대 도가 100원을 빌리고 이 가운데 50원을 군으로 보내면 군에서 50원이 부채로 잡힌다. 그러면 제주도의 총계부채는 150원이 된다. 이런 식으로 내 상대방은 2628억원의 부채를 부풀려 5343억원으로 만들어 “신구범이 제주도 재정을 망쳤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가 회계와 예산구조를 몰랐던지, 아니면 알고서도 의도적으로 부풀렸던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어느 것도 대단히 큰 문제다. 도지사가 그 정도 개념을 모른다면 그런 이에게 우리가 제주도 재정을 맡겼다는 것이고, 의도적이라면 추악한 범죄인 것이다.

 

 

나는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마치 저잣거리에서 멋대로 생때를 부리는 작부 같았던 그 때를 회상하며 성서의 한 구절을 떠올린다.

 

   " ··· 압살롬이 그 사람을 붙들고 입을 맞추니 ··· 무릇 이스라엘 무리 중에 왕에게 재판을 받으러 오는 자들에게 압살롬의 행함이 이 같아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도적질하니라.“ (성경 구약 사무엘하 15장 5,6절)

 

이스라엘을 통일한 영웅 다윗왕에게는 아버지를 시기하고 왕위를 불법으로 찬탈하려고 시도하는 압살롬이라는, 아버지를 따를 능력과 용기는 없으면서도 야욕이 불같은 아들이 있었다. 결국 그는 야욕을 이루기 위하여 거짓 친화력으로 아버지를 따르는 백성들을 속이기로 했었다는 이야기다.

 

아무리 능력과 추진력이 중요하다지만 정치인들이 해서는 안 될 일중 가장 중요한 건 거짓말과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다. 정직과 염치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내 상대방은 해서는 안 될 그 두 가지를 다했다. 서슴없이 그랬다. 우리 제주도민들을 그렇게 속였다. 우리 도민들의 마음을 그가 도적질 했기에 나는 지금도 도민들의 마음을 그 도적질로부터 지켜내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회한이 크다. <41편으로 이어집니다>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

 

=1942년생. 오현고를 나와 육군사관학교 4년을 중퇴, 1967년 5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자로 입문했다. 제주도 기획관, 주이탈리아 한국대사관 농무관, FAO(국제식량농업기구) 한국교체수석대표, 농림수산부 축산국장, 농업구조조정정책국장,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YS정부 시절인 1993년 12월 제29대 제주도지사로 취임했다.

 

이어 첫 민선 지방선거인 95년 6·27선거에선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돼 31대 지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98년, 2002년 두 번의 제주지사 선거에선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후 축협중앙회장을 거쳐 친환경 농업회사법인인 (주)삼무와 전시판매장인 삼무힐랜드를 운영했지만 지사 재직시절 뇌물수수사건에 휘말려 2년여 수감된 뒤 풀려났다. 삼무힐랜드는 수감기간 중 문을 닫았다.

 

제주삼다수와 관광복권,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제주교역, 제주세계섬문화축제 등이 그의 지사 재직시절 작품이다. 현재 제주생태도시연구소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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