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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33)

검찰과의 모진 인연이 다시 시작됐다. 민선 1기 정권에 맞섰던 나에게 검찰의 수사가 따라 붙더니 민선 2기 선거에서 낙선하자 여지없이 검찰수사진이 들이 닥쳤고, 축협중앙회장으로 재직하며 정권의 ‘어이 없는’ 개혁에 반기를 들자 또 검찰의 수사 광풍이 나에게 몰아쳤다.

 

2000년 6월1일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는 재판관 전원일치로 “축협중앙회와 농협중앙회 등을 해산해 2000년 7월1일 새로 발족되는 농협중앙회에 통합되도록 하는 내용의 새 협동조합법의 관련 조항들에 대해 통합은 본질적으로 입법정책의 문제이고 이로 인해 기존 축협중앙회 등 이 사건 청구인들의 기본권이 과도하게 제한되는 것은 아니다”란 이유로 축협중앙회 등이 제기한 농·축협 통합법(새 농협조합법)에 대한 위헌심판청구 헌법소송에 대해 청구를 기각, 합헌 결정을 내렸다. 축협중앙회가 1999년 9월22일 제기한 소송이 마무리됐다. 축협중앙회장 취임 후 10개월23일간 벌였던 원칙을 향한 우리의 투쟁이 막을 내린 것이다.

 

헌법재판소의 ‘합헌’ 결정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동안의 투쟁이 무위(無爲)라거나 ‘헌법과 협동조합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우리의 소신을 바꾸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제부터 그동안의 노력과 희생을 바탕으로 협동조합 민주화 운동을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당시 헌법재판소에서 연구관으로 근무했던 한 변호사는 “헌법재판소가 부끄러운 결정을 했다”고 한탄한 사실도 있다.

 

‘권력과 헌법재판’의 관계를 나는 모른다. 다만 헌재의 최종결정과 관련해 여러 가지 루머가 나돌았고, 민주·인권국가에서 정부 공권력에 의해 사법인인 농·축협중앙회를 강제 통합한 것이 옳다는 합헌결정이 언젠가는 부끄러운 기록으로 판명되기를 바라는 소망이 있음을 고백한다.

 

 

그해 6월7일 나는 축협중앙회장직을 사임하고 고향 제주도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플러스생활복지연구소 운영과 녹차농사에 매달렸다.

 

그러나 7월1일 서울지검에서 출석요구서가 날아왔다. 농림부가 전 축협중앙회장을 고발한 사건에 대해 조사한다는 내용이었다. 7월6일 오후 2시 내가 서울지검 청사 현관에 들어서자 사진기자들이 몰려들었다. 포토라인에 서서 포즈를 취해달라는 것이다. “우리 축협이 투쟁하고 있을 때 이렇게 관심 가져줄 일이지···.” 그 말을 남기고 난 그들의 요구를 거절, 곧바로 조사실로 직행했다.

 

서울지검 조사부로 출두해 밤 11시20분까지 조사를 받았다. 예의를 갖추고 객관적인 조사를 하려고 애쓰는 수사관이 인상적이었다. 나 역시 지루함을 참으면서 사실관계와 내 입장을 진솔하게 진술했다. 원칙에 입각해 농·축협 통합 반대를 위한 적법절차의 예산집행과 광고·홍보 및 노조활동 지원 등에 대한 농림부의 덮어 씌우기 식 고발은 기가 찼다. 고발내용은 업무방해, 명예훼손, 업무상 배임 등의 죄목이었다. 조사를 받으면서 나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는 정부 측과 검찰 사이에서도 갈등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조사를 받은 지 한 달 쯤 지났을까? 다시 서울지검에서 출두해달라는 전화연락이 왔다. 8월22일 오전 10시였다. 일자에 맞춰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그런데 가서 보니 이번엔 서울지검 조사부가 아닌 ‘없는 죄도 만들어낸다’고 무서워하는 이가 많았던 특수부였다. 수사관의 안내로 특수부에 들어서자 담당검사가 커피를 권했다. 그는 “신 지사님! 누군가는 한사람 책임져 주어야겠네요”라고 말을 건넸다. “책임질 일이 있으면 져야지요.” 난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심문내용은 지난번 조사부에서 조사받은 내용과 거의 같은 것이어서 별 부담도 없었다. 그런데 밤 11시가 지나자 질문내용이 바뀌기 시작했다. ‘은혜재단’ 문제를 꺼내기 시작한 것이다. “왜 고발사건 이외의 것을 심문하는가”라고 되물었다. 검찰은 “아무거나 조사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심문 도중 은혜재단 출연금 30억원이 우보악 관광지구 지정대가가 아니냐는 추궁이 이어졌다. 의도가 점점 의심됐다. 은혜재단이 시설한 양로원이 호화판이 아니냐는 말까지 검사 입에서 나오자 그와 나는 다툼의 수준으로 격론이 이어졌다.

 

 

그런데 검사가 “부인이 이미 시인했습니다”며 아내의 자술서 일부를 내게 보여줬다. 그때 비로소 아내도 서울지검 특수부에 불려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검사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축협 일로 그동안 겹고생을 했던 내 아내까지 부르고, 나 하나를 잡기 위해 무고한 아내에게까지 고통을 주다니···이런 게 정권인가?” 소리를 질렀다. 속으론 “이런 정권, 이런 정부를 우리가 그토록 기다렸단 말인가? 검찰을 권력의 하수인으로 생각하는 권력 때문에 아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견딜 수가 없었다.

 

제주의 시골에서 함께 자란 아내는 풋풋한 청소년기 때부터 내 마음을 앗아간 사람이다. 육사에 진학했다가 중퇴할 무렵에도 내 인생의 반려자가 되길 주저하지 않았고, 첫 아이를 낳은 기쁨과 그 아들의 심장판막증 판정이란 청천벽력 소리도 함께 눈물을 흘리며 들었다. 내가 고시에 합격했을 때 함께 기뻐해줬고, 농림부 축산국장 시절 마사회의 체육부 이관문제와 관련, 정부의 조치에 맞섰을 때도 아내는 “당신 소신대로 하는 게 좋겠다”며 사표를 내는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내가 도지사직을 수행하는 동안 인사 청탁을 받는다든지 공무에 관여하는 일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도지사 부인으로서 공익을 실현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도움이 되고자 애썼다. 아내는 또 목욕을 좋아하는 나를 따라 대중목욕탕을 즐겨 다녔다. 물을 낭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아내의 제안에 따라 난 전국 최초로 도내 전 대중목욕탕에 자동절수기를 달 수 있도록 정책지원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내는 대중목욕탕에서 옆에 앉은 손님이 물을 헤프게 쓰는 걸 보고 “좀 아껴 쓰면 안되겠냐”고 권유했다. 그런데 그 시절이 선거철이라 그 손님이 아내의 권유를 부풀려 주변에 얘기하는 바람에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그 뒤 아내는 대중목욕탕에 가는 걸 꺼리게 됐다. 98년 6·4지방선거에서 낙선했을 때도 아내는 “그동안 도민복지를 위해 애썼으니 이제는 아내복지를 위해 애쓰라고 하나님이 당신을 낙선시킨 것 같아요”라며 내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도지사직을 수행하는 동안 받은 봉급을 모두 탕진하고 무일푼이 된 나를 보고 하는 격려이자 위로였다. 국회에서 할복사건까지 저지르며 “안일한 불의의 길보다 험난한 정의의 길을 걷는다”는 육사생도의 신조에 의지해 학연·혈연·지연도 없는 대한민국 공직사회에서 싸우며 부딪치며 살아가는 남편을 전능자로 믿으며 가난과 긴장, 고통 속에서도 사랑으로 아름다운 삶을 지켜간 내 아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아내는 밤 11시가 넘도록 검사와 수사관이 번갈아 조사를 하는 도중에도 처음 앉았던 자세를 흩트리지 않고 꼿꼿이 그러면서 조용히 진실을 말했다고 한다. 검찰은 그런 아내를 속였다. 제주도에 있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오후 2시에 출두했던 남편의 조사가 끝났으므로 신병인도 보증인이 필요하다고 서울지검에 나오도록 한 뒤 참고인 조사를 한 것이다.

 

아내와 함께 살아온 날들을 되돌아보고 있었지만 내 현실은 검사와 수사관 앞이었다. 수사관이 피의자 심문조서 말미에 최후로 하고 싶은 말을 하라고 했다. 나는 “내 아내가 도지사 부인으로서 제주 땅에 은혜재단 같은 훌륭한 복지법인이 설립될 수 있도록 출연자 및 그 가족과 협력해 좋은 일을 한데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자정 무렵이 되자 수사관 두 사람이 날 13층에 있는 취조실로 데려갔다. “여기서 정대철이 조사받았지요. 그도 울더군요.” 그러면서 눈 좀 붙이라고 했다. 잠이 올 리가 없었다. 이튿날 낮 12시경 검사가 좀 보자고 했다. “아무래도 구속영장을 청구해야겠다”고 말하고는 영장실질심사를 청구하겠느냐고 물었다. 구속영장 청구서를 읽어보니 서울지검 특수부의 전화를 받고 자진출두한 내가 긴급체포된 것으로 쓰여 있었다. 그게 DJ정부가 내세운 인권국가의 현주소라고 생각하자 착잡했다. 검사에게 “영장실질심사 청구를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어차피 자기들 시나리오 대로 진행될 것 아닌가?

 

구속영장을 청구한다는 말을 듣고도 난 담담했다.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을 했다. 구속기소가 되면 재판과정에서 그동안 김성훈 농림부 장관을 비롯해 농림부 담당자들이 저지른 비열함을 공개할 수 있고, 또 재판과정을 통해 은혜재단 설립 출연금 30억원이 우보악 관광지구 지정에 따른 뇌물이란 검찰의 시비를 깨끗이 불식시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난 구속영장이 집행될 때를 기다리는 동안 조용히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하나님! 세상에는 억울하게 고통을 겪는 많은 심령이 있음을 알기에 원망은 없습니다. 그러나 구속영장이 기각되고 제주도에 돌아가 8월24일, 내일로 예정된 ‘감귤피막 저장제 실증시험 결과’에 대한 기자회견을 도청 기자실에서 하고, 우근민 지사도 만나 설명해줄 수 있다면 그게 더 하나남이 기뻐하실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 저로서도 얼마나 당당하고 좋은 일이겠습니까?”

 

오후 4시쯤 축협중앙회장 당시 헌법소원을 담당했던 한결법무법인의 백승헌 변호사가 찾아왔다. “서울지검에 출두할 때 연락이라도 좀 하시지요.” 그러면서 그는 오후 5시경 구속영장이 발부될 것 같다면서 내일 서울구치소로 나를 면회오겠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은혜재단의 설립 경위를 대충 설명해주고 우보악 관광지구에 관해선 제주도의 김승석 변호사(전 정무부지사)와 상의하는 게 좋겠다고 말해줬다.

 

5시경에 발부된다는 구속영장은 6시가 지나도 소식이 없었다.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한 수사관이 내게 다가오더니 “신 회장님! 축하합니다. 영장이 기각됐습니다”라고 귀띔해줬다. 여전히 담담했다. 그가 나간 후 나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감사합니다. 이곳도 사람이 있는 곳임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밤 9시가 넘어 구속영장 기각이라는 검사의 통보로 나는 기다리던 아내와 큰 아들 용인이와 함께 서울지검 청사를 나섰다. 기자들이 따라 붙었지만 뭐라고 대꾸하기도 싫어 한마디만 했다. “자유를 생각했었지.” 서울 마포가든 호텔에서 “내일 새벽에 제주도 가야지···” 하는 생각을 하며 아내와 잠을 청했다.

 

8월24일 제주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제주도청으로 향했다. ‘감귤피막 저장제 개발 및 실증실험 결과’에 대한 기자회견이 오전 10시로 예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기자회견 전에 난 지사실에 들러 우근민 도지사에게 약제개발팀인 상명여대 양용준 교수와 고려대 박현진 교수, 농가실증시험에 참여한 농가대표인 남원읍 김을인씨와 표선면 강부일씨를 소개했다. 그동안의 실증시험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을 해주고, 이 사업은 감귤농가를 위한 사업인 만큼 도사업으로 추진한다면 협력할 용의가 있다고 말해줬다. 기자회견을 마치고 나올 무렵 모 주간신문의 K기자에게서 구속영장 기각 에 대한 축하인사 전화가 왔다. 그는 “신구범 죽이기는 하명사항이기 때문에 검찰도 곤혹스러워 하고 있는 것 같다. 특히 민주당에서 신경 쓰고 있는데 아직 자료를 입수하지는 못했지만 앞으로 도지사 선거와 관련해 조사한 지역동향과 관계된 것 같다”고 전했다.

 

 

7월의 검찰조사를 까마득하게 잊고 연구소 일에 매달리던 어느 날. 잠깐 다시 나와 달라는 서울지검 수사관의 전화가 왔다. 서울지검 특수부로 또 갔다. 9월21일이다. 은혜재단에 대한 심문이 되풀이됐다. 미국에 체류 중인 대유실업(주) 한상훈 사장이 귀국했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확인하지 못한 나로서는 왜 같은 심문을 검찰이 되풀이하는 지 궁금했다. 그가 귀국했으면 나와 대질심문을 시키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검사는 구속영장을 재청구하겠노라고 했고 나는 영장실질심사를 청구하지 않겠다는 확인서를 써주고는 일어섰다. 특수부 사무실을 나가려는데 검사가 가로막았다.

 

“왜 못 나가게 하는 거요?”
“영장청구 심사가 끝날 때까지 여기 있는 게 좋겠습니다.”
“나를 긴급체포한 것입니까?”
“아니오.”
“그러면 나가겠습니다. 구속영장이 발부되면 연락하시오. 바로 들어올거요.”

 

그리고는 큰 아들 용인이와 함께 서울지검 청사를 나왔다. 그리고 기다리던 축협중앙회 동지들과 저녁을 함께 했다.

 

밤 11시가 넘어도 검찰로부터 연락이 없었다. 용인이는 이렇게 영장심사가 늦어지는 것을 보니 기각될 것 같다면서 나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새벽 2시20분 서울지검 특수부로부터 연락을 받고 새벽 2시40분 서울구치소로 향했다. 구속영장이 발부된 것이다. 나중에 확인한 것이지만 한상훈 사장이 귀국해서 검찰심문에 응했던 것이다. 그런데 검찰은 그가 귀국했는데도 왜 나와 대질시키지 않았을까?

 

후에 재판과정과 대한매일신문(현 서울신문)의 취재에서 밝혀진 내용이지만 너무나 기가 차서 분노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검찰은 과거 검찰 고위직이었던 한상훈 사장의 변호사를 통해 “그가 귀국해서 은혜마을 재단 출연금 30억원은 신구범이 달라고 해서 준 것이라고만 진술해주면 한상훈 사장의 100억원 규모의 탈세·횡령 등 기소중지 사건을 없었던 일로 하겠다”고 제의, 일종의 흥정이자 거래(plea bargain)을 한 것이다.<대한매일 2001년 4월19~21일자>

 

검찰은 그렇게 나를 옭아맸다. ‘정권의 시녀’란 모욕까지 감수하면서 권력의 주구(走狗) 노릇을 정확히 해낸 것이다. 오로지 목표는 죄의 유·무와 관계 없이 그저 나를 감옥에 가두는 것이었다. <34편으로 이어집니다>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

 

=1942년생. 오현고를 나와 육군사관학교 4년을 중퇴, 1967년 5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자로 입문했다. 제주도 기획관, 주이탈리아 한국대사관 농무관, FAO(국제식량농업기구) 한국교체수석대표, 농림수산부 축산국장, 농업구조조정정책국장,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YS정부 시절인 1993년 12월 제29대 제주도지사로 취임했다.

 

이어 첫 민선 지방선거인 95년 6·27선거에선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돼 31대 지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98년, 2002년 두 번의 제주지사 선거에선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후 축협중앙회장을 거쳐 친환경 농업회사법인인 (주)삼무와 전시판매장인 삼무힐랜드를 운영했지만 지사 재직시절 뇌물수수사건에 휘말려 2년여 수감된 뒤 풀려났다. 삼무힐랜드는 수감기간 중 문을 닫았다.

 

제주삼다수와 관광복권,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제주교역, 제주세계섬문화축제 등이 그의 지사 재직시절 작품이다. 현재 제주생태도시연구소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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