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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43)

 대형교회 몇 곳으로 삼무의 판로문제를 해결하고자 동분서주하던 2005년. 극동방송의 김장환 목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를 한번 만나보라는 것이다. 4월26일 서울의 순복음교회 본당으로 찾아갔다. 그는 나지막이 말했다. “3년 전 충남의 농민과 그런 일을 해봤는데 말만 친환경이지 진짜 상품을 보내지 않아 난감했습니다. 그래도 김 목사가 추천하면 우리 교인들도 회원가입하도록 제가 권유해 보겠습니다.” 일이 풀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며칠 뒤엔 서울 영등포구 오류동에 있는 평강제일교회와 선이 닿았다. 대한매일에서 기자로 재직했던 제주출신의 강승훈 선배가 다니는 교회다. 정원식 전 총리는 그 교회의 장로다. 주일예배 시간을 빌어 삼무에 대해 설명할 시간을 주겠다고 하길래 5월12일 그 교회로 가 열심히 삼무에 대해 말했다.

 

기독교TV에서도 반응이 좋았다. 극동방송 제주지사장으로 일했던 황영일씨가 부사장으로 재직 중이었고, 안면이 있던 터라 편하게 대해 주었다. 무언가 일일 착착 풀리는 분위기였다. 내친 김에 서울 강남의 사랑의 교회 옥한음 목사도 찾아갔다. 그들도 “돕겠다”고 약속했다. 되겠다고 생각했다. 평강교회 신도가 6만명이고 사랑의 교회는 5만명이다. 순복음교회는 60만명에 이른다. 제주도 전체를 아우른 인구보다 많다. 이 시장만 뚫으면 삼무는 성공한다고 봤고, 또 가능성을 느꼈다.

 

 

그런데 현실은 꼬여가고 있었다. 우린 처음 주주회원 5천명 확보를 목표로 했다. 100만원씩 5천명이면 50억 운영자금이 만들어진다는 계산이었다. 그런데 그리 열심히 뛰었는데 주주회원으로 들어온 이는 고작 123명 뿐이었다. 창립시절 확보한 20억 자본금 외에 고작 1억2300만원을 모은 것이다. 미칠 노릇이었다. 호쾌한 반응을 보이던 대형교회들도 막상 어느 시점에 이르자 그저 미룰 뿐 적극적인 움직임은 없었다. 그해 6월27일 강승훈 선배의 도움으로 평강제일교회의 박윤식 목사 등 일행이 제주를 찾아왔다. 장로와 권사 14명을 대동한 채였다. 정말 그들을 극진히 대접했다. 유기농 식사와 친환경 숙소, 풍력발전 구상지 등을 함께 둘러봤다. 회사의 사활이 그들에게 달렸다고 판단했다. 1박2일을 그들과 함께 하느라 분주히 움직이던 6월27일 밤 예부터 가까이 지내던 제주출신 중앙언론사의 한 기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무언가 북받치는 목소리였다. “지사님! 1996년 6·27 지방선거 후 꼭 10년만입니다. 대한민국 지방자치 출범 10년이란 말입니다. 지금 무얼 하고 계시는지···.” 그는 그렇게 알듯 모를 듯한 말만 던지고 전화를 끊었다. 갑자기 가슴을 때리던 그 울림을 아는 지 모르는 지 제주를 찾은 평강교회 사람들은 이틀간의 제주일정을 마치고 돌아가면서 그렇게 말했다. “신 지사님! 도지사 한번만 더 했으면 제주도가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6월29일 몇 개월을 공을 들이던 삼무의 물류센터가 준공됐다. 이제 사무실도 제주시 일도지구 농협 하나로마트 자리를 떠나 그곳으로 옮겼다. 센터 완공과 더불어 드디어 첫 주문도 들어왔다. 15kg 분량 돼지고기와 야채 300상자다. 그런데 첫날부터 일이 터졌다. 하루를 다 써도 직원들이 그 물량을 처리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답답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직원들에게 “전문가를 믿지 말고 너희들이 전문가가 되라”고 닦달했지만 마이동풍이었다. 어찌어찌 첫 주문은 시간에 맞춰 댔지만 그 후론 눈에 띄는 주문이 없었다. 목을 빼고 기다리는 대형교회로부터의 주문은 감감 무소식이었다. 죽을 맛이었다.

 

그때쯤 육사선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저 안부를 묻고 이야기하다 그 선배가 “박세직(전 국가안전기획부장, 전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 선배가 유통사업 고문으로 일하고 있는데 그 분한테 얘기하면 간단한 걸 무얼 그리 고민하냐”고 타박했다. “제이유(JU)만 뚫으면 끝인데 한심하다”고 혀를 찼다. 귀가 번쩍 뜨였다.

 

방향을 돌렸다. 교회신자를 주주회원으로 확보하겠다는 구상에서 생존을 위해 방향을 틀었다. 8월27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 박세직 선배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에게 사정을 이야기하자 “나도 그 생각”이라며 그가 맞장구를 쳤다. 그러더니 그는 한 주간지에서 언론인 생활을 했던 제이유 이상호 고문을 소개시켜줬다. “박세직 선배도 바보가 아니고, 그가 몸 담고 있는 곳이라면 신뢰해야 하는 것 아닌가?” 마음이 바람결 따라 흘러갔다. 8월30일 이 고문은 돌연 제주로 왔다. 이것 저것을 돌아보더니 그는 주수도 회장을 제이유 본사에서 만나도록 주선했다. 이제 일이 풀리기 시작하는가? 9월4일 서울 강남의 제이유 본사에서 주 회장을 만났다.

 

사실 제이유가 다단계 회사란 건 알고 있었다. ‘다단계 판매’에 대한 인식이 안좋아 걱정도 있었다. 그러나 삼무가 출범 후 8개월이 지났는데 가시적 성과가 없는 마당에 이것 저것 잴 여유가 없었다. 강남 본사에서 그를 만나자 그는 “세계적 네트워크 기업인 암웨이를 꼭 이기고 싶다”는 말로 서두를 꺼냈다. 학원국어교육의 돌풍을 몰고 온 서한샘 전 국회의원도 배석한 자리다. 지사 재임시절 얼굴을 터 나 역시 알고 있는 그였다. 주회장의 입에서 “삼무가 생산한 전량을 구매한다. 축산물 중심으로 감귤·녹차·쑥차·된장·김치 등을 가미한 6가지 세트를 개발해달라. 8%의 이윤을 보장하겠다”는 말이 나왔다.

 

제이유는 당시 단순한 다단계 사업만 하고 있지 않았다. 백화점과 마트를 보유하고 있었고, 상장회사인 한성에코넷(박건수 사장)을 두고 있었다. 브레인 역할을 하는 제이유지엔(JUGN)이라는 회사와 회장역인 한의상씨도 있었다. 제이유가 내놓은 아이디어는 제이유 전국 네트워크에 삼무의 생산물을 깔고, 직영 식당을 하나 만들자는 것이었다. 얘기를 듣다보니 이러다 물건이 없어서 못 팔 것 같은 분위기였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 싶어 “주 회장과 나와의 약속 만으론 안된다. 공적인 견지에서 약속을 해야 한다. 제주에서 기자회견을 하라. 그래야 신뢰한다”고 말했다.

 

제이유는 그 약속을 지켰다. 그해 10월5일 제이유 제주지점(현 미래컨벤션센터)에서 제이유와 삼무간 사업협약서에 주 회장과 내가 서명을 했다. 바로 그날 오전 10시30분 제주도청에서 기자회견을 했고, 김태환 당시 지사도 예방했다. 물론 그 시절 언론의 반응도 호의적이었다. 양자 간의 사업협력은 마치 물을 만난 듯 전광석화처럼 진행됐다. 10월12일엔 추가 합의가 있었다. 제이유의 지주회사인 한성에코넷이 삼무에 5억원을 출자하고, 주수도 회장은 1억을 출자하며 제이유네트워크가 +알파를 더 얹어 우리 삼무에 출자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프랜차이즈 전문가를 삼무가 영입하는 한편 제이유의 자체 방송네트워크 프로그램인 ‘유종숙과의 만남’에 내가 나가 인터뷰에 응한다는 것도 확약했다.

 

 

10월14일 제이유로부터 첫 주문이 들어왔다. 400세트나 됐다. 평균 단가는 10만원. 하루 매출 4천만원을 기록한 것이다. 그것도 현금으로 대금이 결제됐다. 연일 주문이 밀려오다 보니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주문과 배송으로 인원이 달려 허덕대다 보니 11월5일엔 직원도 12명이나 더 충원했다. 여기서부터 내가 넘어간 것이다. 그들에게 보기 좋게 당한 전주곡이었다.

 

한달 여가 지나 12월2일이 되자 일이 터지기 시작했다. 법원으로부터 기각결정이 나왔다. 공정거래위가 그 결정이 있기 한참 전 제이유의 영업활동에 대해 특판조합의 문제를 지적, 업무정지 결정을 내린 것에 대해 제이유가 불복, 법원에 제기한 가처분 신청에 대해 기각결정을 내린 것이다. 당장 제이유는 영업정지 상황에 빠졌다. 어렵사리 만들어낸 판로가 막힌 건 둘째 치고 제이유로 보낸 물량에 대해 대금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 우리 역시 직면한 것이다. 그래도 우리로선 어떻게든 상황이 풀릴 것으로 보고, 더 솔직히 말하면 어떻게든 팔아야 할 입장이기에 그 후로도 제이유의 주문을 맞췄다. 다음 해인 2006년 2월8일부터 4일간 그들이 감귤농축액 350톤을 주문하자 제주개발공사 감귤가공공장과 계약, 그 물량을 전부 보내줬다. 물론 그것 역시 돈을 받지 못했다. 쪼달리기 시작했다.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주 회장을 만나 “아무래도 제이유와 납품계약은 물 건너 간 것 같다. 차라리 제이유의 사업자 회원을 우리 회원으로 변경하는 제이유-삼무클럽을 만들자”고 합의, 그렇게 했다. 미칠 노릇이었다. 차라리 그때 안됐으면 더 좋을 걸 회원을 모집하니 1만20명의 회원이 신청서를 보내온 것이었다. 사업이 될 것 같으니 그들을 계속 붙잡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상황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4월29일 언론의 대대적인 보도가 나왔다. 검찰이 제이유를 상대로 대규모 수사인력을 투입했다. 혐의는 유사수신행위 상 수당이 35%범위 내 지급 여부와 석유시추 관련 주가조작 등이었다. 그 와중에도 서울 강남엔 제이유 본사 옆에 삼무의 직영식당 ‘삼무도’가 문을 열었다. 진정 미칠 노릇인 게 하필이면 장사가 잘 됐다. 제이유 사업자 회원들이 회사에 나왔을 때 그들을 상대로 점심장사를 했는데 벌이가 되는 아이러니가 이어졌다.

 

발을 뺄 수도, 더 담글 수도 없이 엉거주춤하던 시절.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쯤에서 멈춰야 한다”는 판단이 들었다. 잘못하단 우리 삼무까지 말려들어 우리 회사까지 풍비박산이 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엄습했다. 5월31일 주 회장의 연락으로 만남의 자리를 가졌다. 난 말했다. “도대체 당신들 입으로 매출이 몇 조라고 그러는데 사내유보금이 하나도 없다. 지금이라도 잘못을 인정하고 당신은 손을 떼라. 사실을 공개, 사과하고 3일 이내 당신은 떠나라.” 그가 책임질 일은 그렇게 마무리하면 끝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버텼다. 당시 제이유엔 마치 세뇌를 당한 듯 충성파 사업회원들이 있었고, 그들은 주수도 회장의 재기를 노리는 분위기였다. 그는 그걸 볼모로 버텼다. 무모한 행동이자 무책임이었다.

 

6월2일 주수도 회장은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떠난다. 하지만 며칠 전 둘과 나눴던 대화는 공개하지 말아달라. 공개하면 다 쑥대밭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었다. 그는 6월19일부터 검찰의 소환조사를 받더니 결국 구속됐다. 물론 그와 더불어 제이유와 손잡은 우리의 시도 역시 파탄이 났다. 그 쯤 되자 제이유의 사업자 회원들은 나에게 청을 했다. 나에게 제이유를 맡아달라고 청을 하는 것이었다. 내가 할 일이 아니었다. “그럴 수 없다”고 거절했다. 항간에 떠도는 얘기지만 그 시절 내가 우리 제주도민들에게 제이유 가입을 권유했다는 소리가 있다. 맹세코 말하지만 그런 일은 없다. 나로서도 미심 쩍었던 지라 그런 이가 있으면 오히려 만류했다. 그러나 삼무와 제이유가 손을 잡는 바람에 그들을 신뢰하다 피해를 본 이도 있을 것 같다. 이 자리를 빌어 그 분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그와는 별개로 그 시절 의문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암웨이는 되는데 왜 제이유는 안될까”란 의문이다. 사실 알고 보면 풀무원 식품도 다단계 판매로 사업을 키웠고, 제주에 중국관광객 열풍을 일으켜 신제주에 바오젠거리를 만든 중국의 바오젠 그룹도 다단계 네트워크 회사다. 왜 문제가 벌어졌는가를 곰곰이 따져보니 답은 두 가지였다. 다단계 회사를 만든 사람들이 제멋대로 하지 않도록 정부가 감독기능을 강화했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다단계 회사를 관리하는 직판조합 이사장은 공정거래위 1급 출신들이 앉는 자리다. 그저 골프나 치며 놀면서 적당히 시간이나 때우다 가는 자리다. 거기서 제대로 일을 하지 않으니 그런 일이 터지는 것이다. 일이 커지고 있는데도 눈감아주고 그러다 더 큰 화를 부른 격이 바로 제이유의 사례였다. 그저 사업회원으로 가입, 열심히 물건을 팔고자 애썼던 서민들만 억울한 것이다.

 

 

또 하나는 법의 문제였다. ‘방문통신판매사업법’ 자체가 갖고 있던 맹점이 있었다. 고쳐야 되는 게 맞았고 내가 생각한 건 두가지 방안이다. 하나는 3억이상 출자하면 누구나 다단계 회사를 만들 수 있는데 매출제한액이 없으니 엉터리 상황을 초래한 것이다. 자본금 대비 적정선에서 매출을 제한하면 자동으로 감독이 가능하게 된다. 두 번째는 공정위의 감독기능을 확실히 해야 한다. 그 둘만 보완해주면 제이유와 같은 사태는 안 벌어질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난 그런 생각을 갖고 그 시절 여당인 열린우리당의 김근태 의장을 만나고자 했다. 서귀포의 김재윤 의원을 통해 그를 만나고 싶다는 운을 뗐다. 내가 그렇게 까지 나선 이유는 또 있다. 그 당시 다단계 사업체는 전국에서 130여 곳이나 됐다. 사업자·회원 명목으로 가입한 이는 우리나라에서만 300만명이나 됐다. 모두 서민이었고, 근본적으로 법을 고쳐 다단계 사업도 건전한 방향으로 유도해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우리 서민들도 적정한 이익을 공유하며 법의 보호 안에 있도록 하고 싶은 것이었다.

 

7월1일 김근태 의장을 어렵사리 제주공항 귀빈실에서 만났다. 40분간 얘기를 나눴다. 그는 “충분히 알겠다”고 말했고, 나로선 “서민경제 사각지대다. 양성화해야만 문제가 풀린다. 여당에서 꼭 관심 가져 주시고, 의장이 꼭 나서줬으면 좋겠다. 필요하다면 실무적으로 법 개정안 등 모든 자료를 보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며칠 뒤 열린우리당의 박명관 의원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법 개정을 검토하고 있으니 자료를 보내달라”는 것이다. 법 개정안을 비롯해 관계자료를 모두 보내줬다. 그러나 김 의장과 박 의원은 당시 정국변화와 맞물려 그로부터 또 수일이 지나고 모두 사퇴했다. 개정법안은 국회 소관 상임위는 커녕 의원실에서조차 제대로 검토 못하고 사라졌다. 답답한 노릇이다.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벌이는 시원찮았고 숨이 턱 밑에 차오를 지경이었다. 그러나 2006년 8월11일 희망의 소식이 들려왔다. 삼무의 친환경 농산물 제품화와 별개로 추진하던 해상풍력발전 개발사업에 대해 제주도의 시행승인이 나온 것이다. 지금은 다들 익히 들어 아는 해상풍력발전이지만 그 시절 우리의 시도는 아시아에서도 최초로 시도하는 획기적 사업이었다. 해상풍력발전을 시도하게 된 저간의 사정은 차후 더 거론한다. 다만 이 해상풍력발전 사업을 도로부터 허가받으면서 우리는 숨통이 트였다. 그때까지 고생하던 어려움을 한꺼번에 극복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8월24일 부산에서 세무사 일을 하며 학원사업을 병행하던 변천수 원장을 만났다. 그는 각종 개발사업의 회계와 시장가능성, 사업타당성에 대해 해박한 사람이다. 내 의문은 삼무가 얻어낸 해상풍력발전 사업권의 가치가 어느 정도일까였다. 그 영업권에 대한 권리금으로 자금을 확보하려던 심산이었다. 변 원장은 팀을 꾸려 풍력발전사업의 영업권에 대한 분석에 들어갔고, 뒤이어 “120억원의 가치를 갖고 있다”는 회신을 보내왔다. “최소한 금융권으로부터 그 정도의 돈은 빌릴 수 있다”는 소리였다.

 

대형교회를 못잡아 허덕이고, 제이유로부터 호되게 뒤통수를 얻어 맞은 만큼 더 이상 ‘바깥’을 기대하지 말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 돈을 빌릴 수 있다면 우리가 직접 유통사업에 뛰어들 수 있다는 판단이 깔렸다. “제주에 친환경 전용마트를 만들자. 거기서 새롭게 시작하자. 생산보다 제주에 제대로 된 친환경 농산물 유통본부를 만들자.” 그게 그 시절의 결심이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제일 먼저 걸리는 게 나타났다. 우리에게 5억원을 출자한 제이유의 지주회사 한성에코넷의 주식문제였다. 풍력사업은 앞으로 충분히 더 커질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됐고, 그 시점에서 그들이 지분을 갖고 권리행사를 하면 곤란했다. 그들이 가진 주식지분을 서둘러 우리가 회수해야 했다. 풍력사업 영업권의 가치평가를 얻어내기 직전인 8월23일 한성에코넷 박건수 사장을 만났다. 풍력사업 허가를 받은 사실은 쏙 뺐다. “주식지분만 있었지 우리와 한 여러 약속을 이행하지 못하고 있다. 계약 불이행을 더 이상 감내할 수 없고, 모든 계약은 파기된 걸로 봐 투자금도 반환하겠다”고 말했다. 주금반환 명목으로 20%인 1억원을 일단 주고 잔금은 12월 준다고 확약하고 그들이 가진 보유지분을 모두 되찾아왔다. 솔직히 우리로선 제이유로부터 받지 못한 미수금이 10억원이나 됐지만 장래를 내다보면 서둘러 그들과 맞잡은 손을 털어야 했다.

 

풍력발전기 날개가 돌아가듯 나 역시도 마음의 생기가 돌았다. 풍력발전 사업승인이 나자 유통본부 격인 매장을 건립할 부지를 8월부터 뒤졌다. 우린 그중에서도 연북로 인근 부지를 주목했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몇 년 안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설 예정인데다, 인근엔 오라지구 택지개발이 한창이었다. 3년여만 지나면 완전한 시장을 형성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10월27일 부지물색을 끝내고 3130평 땅을 매입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11월10일부터는 디자인 전문가인 양기석 교수 등이 참여, 매장의 컨셉 디자인 작업에도 착수했다.

 

 

신바람을 내며 일을 하던 무렵인 12월22일 아내가 박사학위 논문심사를 통과했다. 1998년 내가 지사 선거에 낙선하고 “이제는 밀렸던 공부를 하겠다”며 서울을 오가며 논문에 매달리던 아내가 박사학위까지 올라선 것이다. 정말 학부모가 된 심정으로 양영철 제주대 교수 등 수고해준 몇몇 분을 모시고 제주시 칼호텔에서 식사를 대접했다. 일이 술술 풀려선지 그 시절 내 비망록은 “올해는 최고의 해다”라고 적고 있다. 아내는 이듬해 2월 학위수여식장에서 정식으로 행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너무도 고맙고 자랑스러운 마음이었다.

 

하지만 사업은 언제나 ‘돈걱정’이다. 김동규 전 도의원과 나로 인해 고생한 정용진 전무, 부산의 김성태 사장 등. 그들과 자금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등에 대한 의논이 잦았다. 친환경 농산물 유통매장을 건립하기로 했지만 필요한 소요자금이 100억원이나 됐기에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고민하고 있으면 일이 풀렸다. 2007년이 되자 제주은행이 협력을 약속했다. 1월12일 제주은행이 40억원을 대출해줬다. 일단 돈 걱정을 덜었다.

 

그리고 3월3일 제주시 연북로 부지에서 ‘치유의 땅’을 선언한 ‘삼무힐랜드’(Healand)의 첫삽을 떴다. 수많은 이들이 현장을 찾아와 축하해줬다. 우리가 가진 그 시절 컨셉은 마트, 테마파크를 통해 건강프로그램과 생명시나리오, 생활신트로피(synthropy) 3가지를 구현하는 것이었다. 상품과 교육·체험을 통해 생명을 건강하게 지켜내는 생명공간이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물론 제주은행이 아니어도 그 때 수많은 이들이 돈을 빌려주거나 여러 방면으로 자금을 도와줬다. 막판엔 제이유와 관계를 맺고 있던 일부 기업인도 나서 우리가 제이유로부터 못 받던 10억 미수금 중 일부를 해결해줬다. 골치 아픈 일들이 해결되니 나로선 고맙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양돈업을 하는 송용만 사장도 나서 일부 돈을 대주기도 했다. 많은 빚을 졌다. 한숨을 돌렸고, 한 시름을 놨다.

 

 

삼무 힐랜드는 8월20일 완공됐다. 개장 예정일은 9월10일이었다. 물론 건물만 떡하니 있어선 될 일이 아니다. 매장 안에 차곡차곡 상품을 쌓아놓고 진열해야 하기에 추가자금이 필요했다. 그러자 이번엔 “지사로 재직하던 때 큰 도움을 얻었다”며 고인이 된 김성인 전 제주은행장의 부인인 김정은 으뜸저축은행 이사장이 10억원을 또 빌려줬다. 정말 고마운 마음을 이루 다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하늘은 무심하게 우리를 버렸다. 아마 그 시절 그저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며 원망하던 이들이 우리 뿐이었을까? 9월16일 초대형 태풍 ‘나리’가 제주섬을 초토화시켰다. 강폭우를 동반한 그 태풍 한방으로 우린 망연자실했다. 우린 태풍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했고, 하물며 정전사태를 예상도 못했다. 개장에 맞춰 차곡차곡 쌓아둔 냉장육 등 모든 상품이 태풍 ‘나리’ 한방으로 모두 쓰레기가 되고 말았다. 물난리가 겹친 지라 매장 안을 정비하는데도 자그마치 일주일이란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어찌어찌 복구를 했다. 다시 매장의 몰골을 찾았다. 하지만 물건을 사러 오는 사람들을 구경하기가 그리 어려울 줄은 몰랐다. 100억원을 깔아 놓은 매장인데 가슴이 타들어갔다. 자동차 한대라도 주차장으로 들어오면 그리 반가울 수 없었다. 한 걸음에 달려 나가 그들에게 인사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어쩌다 가물에 콩 나듯이었다. 그렇게 외로운 싸움에 한창이던 때 동양제과 박은하 상무와 마케팅 컨설턴트인 신병철 박사가 나를 찾아왔다. 그들은 “이런 게 서울에 있으면 대박인데 제주여서 안타깝다. 한계다”고 말했다. “그래도 도울 일 있으면 돕겠다”고 그들은 말했다. 그러나 난 사실 서서히 깨우쳐 가고 있었다. 그들의 컨설팅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이 보고 있는 문제 보다 더 답답한 걸 스스로 알아채 가고 있었다.

 

W이론이란 말이 있다. 한국의 전통적 기질인 신바람, 흥을 산업현장과 우리 생활에서 불러 일으켜 현재 상황을 획기적으로 돌파해 나가야 한다는 논리다. 서울대 이면우 교수가 1993년에 주창했다. 난 사실 그걸 기대했다. 일류가 아닌 이류가 저지르는 대형사고를 기대한 것이다. 우리 제주의 청년들이 일을 저질러 주기를 학수고대했다. 힐랜드 매장의 문을 열며 27명을 채용했다. 그들이 그렇게 사고를 치길 기다리며 아무런 벌이가 없더라도 단 한달도 거른 적 없이 그들의 월급을 꼬박꼬박 입금했다. “정말 끼를 갖고 한번 해보자”는 바람이었다. 그런 바람이 어느 순간 나에게 절망과 비애로 변하고 있었다.

 

11월28일 삼무힐랜드의 팀장 회의를 소집했다. 그리곤 선언했다. “당신들을 더 이상 신뢰하지 못한다. 대표이사 혼자서 모든 걸 다할 수 없다. 그렇기에 여러분들이 힐랜드를 운영할 구상이 있으면 내놓고 직접 운영하라. 내가 위임한다. 그런 구상이 없으면 힐랜드는 문을 닫는다. 알아서 하라.” 결국 나는 100억원을 쏟아붓고 무참히 무너진 것이나 다름 없었다. 결국 판을 벌인 내 잘못이었다. 그 순간 그리 숱한 역경을 거치며 나와 함께 했던 공무원들이 떠올랐다. 삼다수 개발과 해외증권 발행 등 해보지 않은 일들을 기가 막히게 성사시키던 우리 제주의 공무원들이 떠오른 것이다. 그들은 해냈다. 저력이 있었다. 어떻게 자극을 주느냐에 따라 그들은 저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그 방법으로 젊은 친구들을 이끌고 2년여를 뛰었건만 그들은 그런 저력이 없었다. 내 안목이 없었고, 내 예상도 빗나갔다.

 

난 최후통첩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앞으로 6개월간 급여는 없다. 내일까지 회사에 잔류할 건지 떠날 건지 결정하고 알려주기 바란다”고 말하고 난 자리를 떴다. 그런데 다음 날인 29일 오전 출근해 보니 기괴한 일이 벌어졌다. 삼무힐랜드 수조에서 키우던 33마리의 철갑상어가 모두 숨을 거둔 채 물 위에 둥둥 떠다니고 있던 것이다. 삼무힐랜드의 대표요리로 선보이며 키우던 어종이었고, 그동안 단 한 마리도 폐사한 적은 없었기에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불길한 징조였건만 나로선 그 시절 그저 썩 내키지 않는 예감만 있었다.

 

다음날은 서울고법에 출두해야 하는 날이다. 1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지만 검찰의 항소에 따른 2심 선고였다. 국회 할복사건으로 비화된 일이 그렇게 나를 모질게 괴롭히며 은혜재단과 연관된 뇌물수수 혐의로 오히려 주죄목이 바뀐 판이었다.

 

철갑상어가 모두 폐사한 걸 확인하고 그날 오후에 쓴 비망록에 난 이렇게 적었다. “내일 서울고법에서 선고가 있기에 마지막 항공편으로 올라가야 된다. 사랑하는 아내가 오늘은 혼자 자야한다. 미안하구나···.” 그걸로 끝이었다. 공직생활을 시작하면서 꾸준히 써왔던 내 비망록 역시 그 후로 어떤 기록이 없다. 11월30일 오전 11시 서울고법 법정에서 난 다시 유죄가 됐고, 징역형이 언도됐다. 그리곤 곧바로 영어(囹圄)의 몸이 되고 말았다. 790일의 새로운 인생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44편으로 이어집니다>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

 

=1942년생. 오현고를 나와 육군사관학교 4년을 중퇴, 1967년 5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자로 입문했다. 제주도 기획관, 주이탈리아 한국대사관 농무관, FAO(국제식량농업기구) 한국교체수석대표, 농림수산부 축산국장, 농업구조조정정책국장,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YS정부 시절인 1993년 12월 제29대 제주도지사로 취임했다.

 

이어 첫 민선 지방선거인 95년 6·27선거에선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돼 31대 지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98년, 2002년 두 번의 제주지사 선거에선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후 축협중앙회장을 거쳐 친환경 농업회사법인인 (주)삼무와 전시판매장인 삼무힐랜드를 운영했지만 지사 재직시절 뇌물수수사건에 휘말려 2년여 수감된 뒤 풀려났다. 삼무힐랜드는 수감기간 중 문을 닫았다.

 

제주삼다수와 관광복권,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제주교역, 제주세계섬문화축제 등이 그의 지사 재직시절 작품이다. 현재 제주생태도시연구소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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