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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42)

적반하장으로 오명을 뒤집어 쓴 2002년 선거판-. 선거가 끝나고 나서도 어이 없는 선거법 위반 공판에 휘말린 신세-. 그저 정의를 도모하고자 애썼건만 황당한(?) 유탄에 맞서 반론을 펴야 했던 일들. 솔직히 지긋지긋했다. 그러나 도대체 누구를 위한 ‘법’인지 알 수 없는 그 ‘법’과의 악연은 내 인생사에서 아직 마침표와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

 

축협중앙회장으로 재직하며 농·축협 통합에 맞서 벌인 소위 ‘국회할복사건’은 2002년 선거 후에도 여전히 나를 옭아매고 있었다. 수년에 걸친 지리한 공판이 이어졌다. 국회할복사건과 관련, 난 2003년 5월14일 서울지법에서 마지막 공판에 임했다. 그 때 나를 기소한 검사의 논고는 “피고가 도저히 반성을 않고 있고, 국민경제에 해악을 입힌 데다 뇌물까지 수수했다”며 징역 10년에 30억원의 추징금을 구형했다. 국회할복사건으로 기소된 내 죄목은 업무방해·배임·국회모독·명예훼손·뇌물수수 등 무려 5건이나 됐다. 하지만 난 실감하지 못했다. “죄진 게 없는데 사람을 엮으려고 참 많이들 노력한다”며 마치 농담하듯, 남의 재판을 구경하던 심경이었다.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편했다.

 

 

결심공판을 하던 날 최후진술을 하라는 재판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피고인석에 앉아 있던 난 그저 덤덤히 일어나 말했다. “반성은 내가 아니라 검찰이 할 일입니다. 이 재판을 통해 정부가 잘못된 개혁을 추진한 걸 인식해야 합니다. 정부가 과오를 뉘우치고 바로잡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그해 6월11일 오후 서울지법 형사 21부 재판정. 재판장인 황찬영 부장판사가 판결문을 읽고 방망이를 두드렸다. “사회복지재단 은혜마을 관련 30억 뇌물수수 무죄, 축협 상호금융 경영손실 관련 배임 무죄. 업무상 방해 무죄···.” 그의 입에서 잇따라 ‘무죄’란 언도가 쏟아졌다. 그는 “다만 국회에서의 행위에 대해선 혐의가 입증되는 바 국회모독 및 명예훼손은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다”고 밝히고 촘촘히 재판정을 떠났다. “정의는 아닐지라도 이 땅에 상식은 존재한다”고 마음에 새겼다. 판결의 대강을 읽어보니 사실상 내게 씌워졌던 대부분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것이었다. 국회 할복사건이야 내 스스로 저지른 일이고, 실체가 있는 것이지만 나머지 혐의는 한 마디로 검찰이 갖은 수로 옭아매기 위해 덮어씌운 것이었기에 나로선 이제 누명을 벗은 것이었다. 판결문을 찬찬히 훑어보니 검찰이 그렇게도 집요하게 매달린 ‘은혜마을’ 건에 대해 재판부는 “전체적 돈의 흐름과 처리과정을 보면 돈이 사용된 복지재단의 설립 경위 등을 종합할 때 뇌물로 볼 수 없다. 무죄다”라고 판시했다. 서서히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사실 국회할복사건으로 비화된 나에 대한 검찰의 수사는 2000년 7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성훈 농림장관이 서울지검 특수부에 나를 고발하면서 수사가 비롯된 것이다. 검찰이 온갖 죄목을 다 뒤집어 씌우며 기소한 지 3년 만에 내려진 1심 판결이 바로 서울지법의 판결이다. 선거법 위반 사건까지 겹쳐 장기간 법정에 불려다니다 보니 그만큼 고통은 컸다. 판결이 떨어지자 나를 도와 변호에 나선 오윤덕·김승석 두 변호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증인으로 나선 고희식 장로를 비롯한 많은 제주 분들, 지금은 고인이 됐지만 온누리교회 하영조 목사 등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다. 정말 감사하다는 생각 뿐이었다. 특히 내 사건으로 기업이 도산하는 어려움을 겪은 삼오종합건설 정용진 전무를 생각하니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그 판결이 그나마 그에게 위로가 돼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판결이 나오자 오 변호사가 덕담 끝에 “그래도 걱정”이라며 슬며시 말을 꺼냈다. 그는 2라운드를 생각하는 중이었다. 구속적부심에서 풀려나고, 이후 사건을 맡아 일을 처리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나는 그가 원칙주의자이자 인격을 갖춘 변호사란 사실에 사실 탄복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대뜸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친구이기도 했던 그는 “신 지사! 이젠 변호사 사라. 항소심은 재판부와 가까운 변호사를 사야 된다. 그게 현실이다.” 그리곤 묵묵히 내 얼굴을 쳐다봤다. “사실 힘이 부치다”는 말이 가느다랗게 들렸다.

 

 

난 1998년 6·4지방선거에서 낙선하며 지사직에서 밀려났다. 6년이 다 되도록 별 수입이 없는 실업자 신세였다. 그렇다고 지사직에 재임하던 때 별도의 주머니를 꿰찬 적도 없었기에 도무지 경제력이 없는 ‘백수’였다. 돈이 있을 리 만무였다. 1심 선고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냈기에 나로선 그에게 별도의 성의표시를 해야 하지만 그건 고사하고, 재판에 들었던 실비나 대면 다행이었다. 물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백승헌 변호사와 제주의 김승석 변호사는 나를 그냥 무료변론했다. 큰 덕을 본 것이다.

 

난 그렇게 대답했다. “변호사를 사라구? 난 그럴 필요 없는 것 같다. 당신이면 충분하다. 설사 잘못돼서 감옥 간다고 해도 난 만족한다.” 어찌 됐건 난 그와 함께 탄 배에서 내리기 싫었다. 훗날 밝힐 테지만 이 말이 씨가 됐는가? 문득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해본다.

 

어쨌든 난 누명을 벗었다. 달리 보면 그건 수년을 이어져온 고통의 뿌리가 결국 정치권과 서울지검 특수부의 ‘농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소리가 된다. 나로 인해 오명을 뒤집어 쓰고 고통을 겪은 이들을 위해 그냥 덮어둬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언론도 나에게 우호적이었다. 판결이 나오자 동아일보가 검찰의 플리바겐(plea bargain·수사거래) 수사의 문제를 혹독히 지적했고, 제주일보 역시 ‘사실상 모든 혐의에서 무죄를 받았다’고 보도했다. 6월13일 제주도청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은혜마을 재단설립 출연금 관련 뇌물수수 혐의 무죄선고에 즈음하여‘란 이름으로 전 지사의 입장을 밝히고 “이 땅에서 다시는 제2·제3의 정용진과 같은 기업인, 재단출연자의 아픔이 없도록 나를 수사·기소한 특수부 유성원 검사를 직권남용죄로 고발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제주사회의 잘못된 정치풍토를 근본적으로 치유하기 위한, 진실과 반성에 바탕을 둔 활동에 나서겠다”고 공언했다.

 

그날 저녁 제주시내 신우성회관. 나의 안위를 걱정했던 내 지지자 200여명이 모여 들었다. 식사를 하며 그동안의 고충을 토로하고 격려에 감사했다. 그리고 7월1일 난 당시 전북 남원지청장으로 자리를 옮긴 유 검사를 대상으로 서울지검에 고소장을 냈다. 물론 그 고발로 검찰이 움직이거나 제대로 수사하리라고 보진 않았다. 하지만 검찰은 이미 자정능력이 없다고 보았기에 한 사람 한 사람의 고소·고발 등 노력은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보았다. 나에게 고발을 당한 유 검사는 내가 5일 여간 철창 안에 갇혀있던 무렵 “우리 아버지가 무슨 죄가 있느냐”며 따지러 간 사법연수원생 신분인 내 아들에게 그렇게 말했다. “이 사건은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버님이 농·축협 통합만 반대하지 않았더라도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 그의 고뇌이기도 하지만 그게 권력의 입맛에 맞추는 대한민국 검찰의 현주소였던 것이다.

 

 

해를 넘겨 2004년 1월8일 서울지검은 ‘증거불충분’으로 유 검사에 대한 나의 고발에 대해 ‘혐의 없음’ 결정을 내렸다. 예상했던 일이자 그들로선 당연한 것이다. 아마 그들은 알고 있을까? 어떤 여론조사를 해봐도 국민들의 ‘검찰’에 대한 신뢰도가 최하위권인 이유, 그리고 자기혁신을 하지 못하는 그들을 향한 국민의 ‘칼날’이 점점 그들을 백척간두로 몰아 세우고 있다는 사실을-.

 

그해 1월21일 난 박광준 장로를 만났다. 후일 제주기독신문 사장을 지낸 분이다. 그는 나를 돕고 싶어했다. 그 당시 고령이면서도 ‘민들레영토’란 곳을 운영하던 분이다. 각종 사법의 굴레에서 이제 자유로운 신분이 된 것으로 본 난 이제 “일본의 마츠시다 정경숙 처럼 젊은 지도자들을 키우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선선히 “협력하겠다. 필요하다면 제주 소재 민들레 영토 공간도 내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말이 그쯤 이르자 품었던 생각들을 서로 주거니 받거니 했다. 평소 생각하던 말을 그에게 조심스레 꺼냈다. “친환경 농산물 유통시스템을 만들면 참 좋겠는데···.” 그는 박수로 맞장구를 쳤다. 아예 “투자하겠다”고 그는 거들었다. “무슨 일을 하고자 할 땐 언제나 사람이 있구나.” 감사하는 마음은 슬슬 나에게 시동을 걸고 있었다.

 

한 두달 여를 곰곰이 생각하다 혼자서만 끙끙 댈 일이 아니라고 봤다. 기본구상을 다듬고자 3월2일 제주대 강경선 교수와 고계추 전 제주도 농수축산국장, 한림의 어민후계자인 김영철씨를 함께 만났다. 그들에게 운을 떼봤다. “기본적으로 환경시대가 왔다. 제주도는 물과 바람, 생태농업을 갖고 환경산업화를 해야 한다. 지사직에 재임하며 물과 바람은 삼다수와 구좌읍 행원리의 첫 상업풍력발전을 통해 의미 있는 시도를 했다. 이제 농업 차례다. 자치단체나 생산자 단체가 못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소규모라도 민간차원에서 나서야 한다.” 그들도 공감했고, 의기투합했다.

 

그 자리에서 함께 기본구상을 다듬은 우리가 공감한 생각이 있었다. 제주의 청정이미지와 결합된 환경농업으로 가야된다는 것이 도정을 운영하면서도 느낀 철학이다. 생산·유통·판매에 이르기까지 모든 걸 아우른, 우리가 생각한 건 계열화 사업이다. 국내 닭고기 시장을 주름잡는 ‘하림’이 대표적인 사례다. 내가 농림부 축산국장을 하던 시절 하림의 김흥국 대표가 찾아와 도움을 요청할 때 주목했던 곳이다. 여러 가지 정책자금을 지원해 주며 그들을 눈 여겨 봤던 것이다. 물론 그들은 성공했다. 궁극적으로 계열화 사업으로 갈 수 있도록 친환경 농·수·축산물 생산유통시스템을 구축하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나 취지는 공감했지만 현실의 세계는 아직 속단하기 이른 처지였다.

 

4월까지 기본구상을 다듬고 보완, 구체화하는 작업에 매달렸다. 그 시절 숱한 사람들을 만나보면 농업에 대한 위기의식도 있고, 전환해야 한다는 인식도 있는데 모험은 않겠다는 것으로 요약됐다. 말하자면 “어떵 될테주(어떻게 되겠지)···.” 그런 의식이 팽배했다. 그게 친환경농업으로 가지 못하는 이유였다. 일단 농업회사법인을 설립하기로 마음 먹었다. 유통은 회원제로 하면 될 거로 봤다. 일반 시장유통에선 경쟁력을 갖추기가 어렵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협력할 수 있는 곳을 물색했다. 일단 계약농가를 확보하는게 급선무였다. 농지 25만평과 감귤밭 9만평을 확보하고, 무항생제 양돈사업을 할 수 있는 농가 3곳을 찾아냈다.

 

시간이 흘러갔다. 그런 일로 반 년여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철저한 준비는 필수적이었다. 그해 10월14일 드디어 우리가 그렇게 원하던 농업회사법인의 발기인 총회를 열었다. 수권자본금은 100억, 납입자본금은 20억으로 출발했다. 20억 가운데 10억은 발기인들이 전원 출자하는 걸로 하고 나머지 10억은 모집하는 걸로 했다. 법인명은 ‘자연’과 ‘삼무’를 놓고 고민했다. 하지만 무농약, 무항생제, 무화학비료를 고집한다는 말을 귀담아 들은 아내가 “그렇다면 새로운 3무네요”라고 말하자 귀가 번쩍 뜨인 나머지 회사명은 ‘삼무’(三無)로 귀착됐다.

 

이제야 새삼 밝히지만 그 때 난 믿는 구석이 있었다.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살아온 나로선 국내 기독교 교단의 실태와 성도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어느 정도 꿰뚫어보고 있었다. 일반 소비자 시장에서 기존 업체와 싸우며 힘겨운 승부를 하는 것보다 대형 교회만 몇 개 장악하면 끝이란 판단을 한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대형교회는 신도만 해도 한 곳 당 5만~6만명에 이른다. 한마디로 기독교 세력을 우리의 소비자로 확보하면 ‘게임은 끝’이란 점을 염두에 두고 솔직히 그들을 노렸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발기인 총회에 맞춰 부르지도 않았는데 기독교계 방송인 극동방송의 사장 김장환 목사가 우리의 회사 발기인 총회 날에 맞춰 제주로 내려왔다. 그는 기독교계 저명인사다. 그의 협력을 얻어내면 일이 쉽게 풀릴 것이란 예감을 가졌다. 그는 그날 극동방송의 제주본부 안테나 교체문제로 제주에 온 처지였다. 무작정 만나자고 연락한 뒤 서로 반기다 우선 그에게 슬쩍 운만 띄웠다.

 

일은 착착 진행돼 갔다. 농산물 법인을 설립만 하고 말 게 아니라 유통까지 고려했던 우리로선 유통센터 건립도 시급한 문제였다. 10월22일 조천읍 와흘리 임야 1400평에 터를 잡았다. 선영이 물려준 거창 신(愼)씨 문중이 소유주로 우린 그 신씨 문중과 임대차 계약서를 썼다. 그리고 11월13일 (주)삼무는 세상에 얼굴을 드러냈다. 우리 농업의 발전과제를 담론으로 다룬 세미나형식으로 창립기념식을 갖는 자리에 정말 많은 이들이 찾아와 대성황을 이뤘다. 오제길·이영문씨등 이름만 대면 아는 친환경농업의 선구자들이 그날 현장농업을 중심으로 강연했다. 그 때 우리가 내건 사훈(社訓)은 세 가지다. “우리는 생명을 존중한다. 우리는 진실을 존중한다. 우리는 가치를 창출한다.” 부산지법 판사이던 큰 아들 용인이는 창립기념식 당일 현장을 지켜보고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이제 정치판 훌훌 털어불어수다예. 축하햄수다.” 나에게 해맑은 미소를 보내던 그 얼굴이 떠오른다.

 

 

회사는 출범했지만 정작 몰골을 보면 초라했다. 회사를 차렸지만 2002년 선거를 치르기 전 매달렸던 플러스생활복지연구소가 사무실이었다. 몇몇 자원봉사격 직원들이 나와 일을 거드는 정도였다. 11월19일 회의가 한창이던 때 현경희 제주시농협 전 조합장이 허겁지겁 우리를 찾아왔다. “일을 하려면 제대로 하시죠.” 그러더니 그는 적당한 사무실을 마련하기 전까진 제주시 일도지구 하나로마트 농산물공판장 2층의 사무실을 쓰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천군만마이자 그리 고마울 수 없었다. 그쯤 이르자 이제 제대로 일할 직원도 뽑아야 했다. 32명이 고마운 원서를 내줬고, 강경선 교수와 진덕진 농업경영인(현 제주도친환경농업인연합회 회장), 현 조합장이 면접위원으로 나서 청춘을 불태울 적임자 9명을 찾아냈다.

 

무엇보다 우리와 정신적 교감을 하는 게 필요했다. 정신적 가치를 공유해야 에너지도 발휘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선발된 인원 모두가 그해 12월7일부터 나흘간 연수에 나섰다. 제주도청으로 찾아가 도정의 농정실태를 곁눈질하도록 했고, 농협 제주지역본부와 농수산물유통공사 제주본부 등 곳곳을 살피도록 했다. 이어진 교육과정은 제주 밖이었다. 12월13일부터 다시 사흘간 나를 포함해 전 임직원은 경기도 하남시에 있는 가나안농군학교로 몰려갔다. 가나안농군학교는 내가 농림수산부에서 총무과장을 하던 시절 인연이 있는 곳이다. 중·고생 등 청소년기 문제가 있던 학생들이 방학기간에 강원도에 있는 제2농군학교에서 부모와 함께 훈련하던 걸 지켜보며 범상치 않게 생각했던 곳이다. 경기도 하남시가 제1농군학교로, 창립자인 일가 김용기 장로는 박정희 대통령이 퍽 좋아한 사람이다. 1964년 창립, 소위 복민(福民)운동을 주창하며 모든 이들을 복되게 하겠다는 창립정신을 구현하던 곳이다. 그 시절 찾아가보니 가나안농군학교의 이사장은 창립자의 큰 아들인 김종일 목사가 맡고 있었고, 막내인 김평일 장로가 교장 일을 하고 있었다. 이사장인 김 목사는 우리에게 강연하며 이런 말을 했다. “우리 민족은 우수하다. 그러나 일류·일등 국가는 되기 어렵다. 이유는 5가지다. 뇌물과 거짓말, 성매매, 무질서, 무원칙. 이것 때문에 안 된다. 우리 가나안 농군학교의 슬로건은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는 것이다.” 많은 생각을 했다. “제주청년들과 우리의 창업 이념인 ‘삼무’근성을 어떻게 공유해야 하나?”

 

 

또 다시 해를 넘겨 2005년 1월24일. 현장답사를 명목으로 삼무는 무던히도 전국을 휘젓고 다니기 시작했다. 충남 천안의 한살림 쌍용동매장, 유기농하우스 서울 분당매장, 올가 분당매장(풀무원 소매매장), 서울 양재동 한살림사무소, 서울 강남 초록마을, 현대백화점, 허클베리팜(뉴질랜드 유기농 체인), 유기농 두레마을, (주)자연과 식품의 해가온매장, 막판엔 남녘땅 전남 장성까지 찾아가 유기농마을인 한마을공동체까지 들여다봤다. 20여일이 넘는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그때쯤 삼무는 서서히 결론을 얻어갔다. 유기농 매장은 황당하게도 거의 가공품이 주류였다. 진짜가 아니었다. 유기농은 없고 고작 무농약 정도인데다 과실류는 100% 저농약이었다. 이미 1~2년 전부터 유기농 붐이 일었는데 그랬다. 더욱이 앞으로 수요는 증가하지만 소비계층은 완벽히 양극화할 것이란 판단이 왔다. 고소득층은 유기농을 식탁에 올리겠지만 저소득층은 저가 중국산에 매달릴 상황이 뻔했다. 먹는 것 마저 양극화가 된다는 역설의 시대가 바로 눈앞이었다. 게다가 더 놀라운 건 유기 농산물을 사먹는 사람도 ‘불신’을 버리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그 시절 용역조사를 맡겨보면서 얻어낸 결론이다. 우리의 확신은 더 커졌다. 그렇다면 믿을 수 있는 생산과 주주회원 직거래, 확실한 유통설계만 이뤄진다면 성공을 담보하고 있다는 소리 아닌가?

 

마침내 2월16일 삼무의 물류센터를 짓는 첫 삽을 떴다. 그 때쯤 우리의 사업구상은 거의 해답을 얻어가고 있었다. “주주회원 5천명 확보가 목표! 그들이 100만원씩 출자하면 50억! 게다가 한달 1회 물건을 구매하는 회원이 1만명이 되고, 두 번 구매하는 회원이 5천명만 된다면···.”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수지타산은 걱정이 없었다. 그림은 다 그려진 것이나 다름 없었기 때문이다. 계획대로 대형 교회 몇 곳만 판로를 개척하면 이미 성공은 예정된 수순이란 건 쉽게 그려볼 수 있는 미래였다.

 

 

4월7일 서울로 올라갔다. 제일 먼저 극동방송의 김장환 목사를 찾아갔다. 성경책이 내 손에 쥐어졌다. 기독교인이라면 익히 알 '역대하 7장 14절'에 나온 구절을 그에게 읽어줬다. “생명을 지키려는 노력입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멀뚱멀뚱 내 얼굴을 쳐다보던 그에게 난 “대대적인 광고를 계약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손사래를 쳤다. “무슨 광고 말입니까? 우선 신 지사 당신의 인터뷰를 내보내고, 이어 우리 극동방송의 시·도 각 지사에 아예 뿌릴 테니 삼무를 소개하는 팸플릿 1천부를 보내주시죠. 반응 보며 더 도와드리겠습니다.” 같은 날 기독교TV를 찾아갔고, 거기선 영상광고(CF)로 돕겠다는 것이다. 게다가 제주출신인 현명관 삼성물산 회장을 찾아가자 그 역시 “소개자료 500부를 일단 보내달라”는 말로 화답했다. 물론 회사설립 때 추가로 모으기로 했던 10억 자본금은 이미 그해 5월에 이르자 성원이 돼 20억 자본금이 주주회원명부를 채웠다.

 

너무나 일이 술술 풀리는듯 했다. 어딘지 모를 곳에 복병이 도사리고 있으리라 짐작 안한 게 아니다. 위기가 오면 기회가 있고, 기회가 오는 순간엔 위기가 매복하고 있다고 하는가? 제이유(JU)-. '희대의 사기꾼‘으로 불리고 현재 옥살이를 하고 있는 주수도 회장은 저만치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행운의 그림자에 드리워진 불운이 나를 또 기다리고 있었다. <43편으로 이어집니다>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

 

=1942년생. 오현고를 나와 육군사관학교 4년을 중퇴, 1967년 5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자로 입문했다. 제주도 기획관, 주이탈리아 한국대사관 농무관, FAO(국제식량농업기구) 한국교체수석대표, 농림수산부 축산국장, 농업구조조정정책국장,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YS정부 시절인 1993년 12월 제29대 제주도지사로 취임했다.

 

이어 첫 민선 지방선거인 95년 6·27선거에선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돼 31대 지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98년, 2002년 두 번의 제주지사 선거에선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후 축협중앙회장을 거쳐 친환경 농업회사법인인 (주)삼무와 전시판매장인 삼무힐랜드를 운영했지만 지사 재직시절 뇌물수수사건에 휘말려 2년여 수감된 뒤 풀려났다. 삼무힐랜드는 수감기간 중 문을 닫았다.

 

제주삼다수와 관광복권,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제주교역, 제주세계섬문화축제 등이 그의 지사 재직시절 작품이다. 현재 제주생태도시연구소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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