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리 해녀불턱
해녀불턱은 해녀들이 물질 전후 모닥불을 피우고 언몸을 녹이던 장소이다. 지금의 마을 해녀탈의장과 같은 역할을 했다.
안쪽에 해신제단을 놓고 물질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기도 했다.
■신흥리 방사탑
방사탑은 '거욱', '거욱대' 등으로도 불리는데 사악한 기운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려는 마음에 세워진 조형물로서 제주 도내 마을 곳곳에 산재해 있다. 신흥리 2호 방사탑은 탑 머리에 새머리형상의 돌을 놓아 돌출된 형태라서 '양탑'이라 한다.
신흥리 1호 방사탑은 밀물때는 하부가 잠긴다. 상부에는 50cm정도 움푹 파여있어 '음탑'이라고 한다.
■헤엄치는 해녀상
물속에서의 갑갑했던 물질을 벗어나 하늘을 날아보시라는 의미로 사진각도를 잡아봤다.
하늘이든 바다든 파란건 매한가지이니까.
■제주항일운동 기념관
제주 항일운동은 조천을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되는데 그 이유는 기존의 지식층과, 육지부 또는 일본으로 건너가 새로운 사상과 지식을 배운 청년들이 많은 지역이기 때문이다.
조천에서 시작된 3.1운동은 당시 휘문고 재학생이던 김장환이 서울에서의 3.1운동 후 독립선언서 사본을 들고 피신차 제주에 와서 숙부인 김시범, 김시은과 협의하여 11인의 동지를 규합하고 김시우의 소상날인 3월21일에 미밋동산(지금의 만세동산)에서 만세운동을 시작하였다. 3월24일까지 4차에 걸쳐 운동이 이루어졌고 주동자 14명이 전원 검거되며 일단락된다. 이 운동으로 29명이 기소되어 이 중 23명이 실형을 선고 받는다.
(위 사진에서 뒷줄 왼쪽으로 두번째 분이 김시범 선생)
조천에서 시작된 제주 3.1운동은 이후 민족해방의 일선에서 활약하던 제주출신의 인물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제주지역에서 민족교육운동이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조천극장(동방극장)
동방극장으로 개명하여 1971년까지 운영되었던 조천극장 건물이다. 이 건물터는 4.3때 조천지서 앞에 위치하고 있어서 소위 도피자 가족들이 억울하게 희생되었던 가슴 아픈 장소이다. 제주읍내의 현대극장과 더불어 근대 건축유산으로 보호가 시급해 보인다.
■조천중학원 터
조천중학원은 1946년 3월에 지역주민들의 자발적인 힘으로 설립이 된다. 당시 5개 학급에 2개 학년 200여명이 공부했다고 하니 꽤 큰 규모의 교육시설이었다.
4.3당시 김달삼의 뒤를 이은 유격대 사령관 이덕구가 당시 사회와 체육을 담당하던 교사였다. 대부분 일본에서 공부한 교사들은 친일파 척결을 위한 민족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어서 직간접적으로 좌익활동에 가담되어지며 4.3발생 이후 대부분 희생된다.
1947년 3.1기념집회 이후 미군정의 감시와 체포, 구금으로 정상적인 수업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상황에서 교사와 학생들이 입산하는 경우가 많이 생기며, 48년 2월 조천지서에 구금되었던 조천중학원생 김용철이 고문치사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처음엔 미군정 경찰은 사건을 은폐하려 했으나 양심적인 의사 장시영에 의해 고문치사로 밝혀진다.
1948년 5월 9일자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결국 김용철을 고문치사케 한 사건에 대한 군정재판에서 관련 경찰관 5명 전원은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1948년 5.10선거 이후 조천중학원은 미군정에 의해 폐원조치 되었다.
■조천지서(현 조천지구대)
1948년 4.3당일 무장대에 의해 습격당했던 경찰지서중의 한 곳이다. 4.3 당시 이곳을 통해 벌어졌던 수많은 아픔을 다 헤아릴 수 있을까.
4.3의 아픔에 대하여 숙연해지는 역사의 한 공간이다.
조천-신흥 구간은 생각할 것도 볼것도 많은 길이다. 걸으면서 제주의 역사와 풍광, 삶을 오롯이 느낄 수 있어 한번쯤 가보길 권한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승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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