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에 만들어진 ‘철의 심장을 가진 남자(The Man with the Iron Heart)’는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당시, 독일군 고위 장교 하이드리히 암살사건을 다룬다.
전쟁 중의 내용을 다루면서 영화는 감염병 역사의 중요 순간을 다루면서 지나간다. 영화에서 의학의 내용을 꼭 집어서 소개하는 필자로서는 그 장면을 놓치지 않고 소개해보려고 한다.
1942년 5월 어느 날, 프라하 교외에 있는 대저택의 넓은 정원이 보이고, 맑은 햇살 속에 분수가 뿜어지고 있다. 아이들이 평화롭게 뛰어노는 가운데 한 남자가 저택 안으로 들어간다.
하켄 크로이츠(나치 최고의 영예인 철십자 훈장)를 왼쪽 가슴에 단 그는 잠시 후 컨버터블(convertible)을 탄 채 프라하의 복잡한 시내를 지난다. 커브를 돌다가 속도가 줄어지는 순간, 갑자기 나타난 정체 모를 남성이 나타나 차를 막고 기관총을 들이댄다.
그리고 영화는 과거로 돌아간다. 때는 1929년의 독일 어느 해군기지. 해군사관학교를 거쳐 해군 장교가 된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제이슨 클락)는 문란한 사생활을 했다는 이유로 군사법정에서 심문을 받고는 불명예제대를 하게 되었다.
이후 파티장에서 우연히 독일 명문가 집안 출신 리나(로자먼드 파이크)를 만나게 되는데, 리나는 하이드리히에게 ‘나의 투쟁’이라는 히틀러의 책을 보여주면서 나치당에 관심을 가져보라고 권한다.
리나의 도움으로 당시 나치 권력 서열 2위라고 볼 수 있는 SS 수장 힘러까지 만나게 되면서 SS의 정보부대 임무를 맡는다. 하이드리히는 자비란 원래 가지고 있지 않았던 사람처럼 잔인하면서도 일을 신속하고 확실히 처리하면서 정보부대의 역할을 높여 힘러의 신임을 얻게 된다.
독일이 체코를 점령하자 히틀러의 신임 속에 그는 지금의 체코 영역인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지역 총독 자리에 오른다. 하이드리히는 프라하를 독일제국에서 유태인 없는 최초의 도시를 만들겠다며 유태인 ‘청소’를 하기 시작하면서 악명이 높았고, 사람들은 그를 ‘금발의 짐승’, ‘프라하의 백정’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히틀러는 그의 충성심을 칭찬하며 ‘철의 심장을 가진 남자’라고 치켜세운다. 그러나 그는 영화 첫 장면처럼 영국에서 훈련받은 체코 레지스탕스에 의해 암살 대상이 되었다.
하이드리히 암살사건이 중요한 이유는 당시 나치 고급 장성 중 최초로 암살당한 인물이면서 히틀러를 크게 분노케 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 하이드리히는 폭탄에 부상을 입고 프라하의 종합병원에 입원해서 독일에서 급파된 최고의 의사들에 의해 수술을 받는다.
히틀러는 자신의 주치의까지 보내면서 치료하게 했지만, 잠시 회복하는 듯 하다가 심한 고열과 통증이 지속되면서 결국 패혈증으로 사망하고 만다. 물론 수술은 잘 되었을 것이고, 당시 개발된 항생제인 ‘프론토질’이라는 설파제도 거듭 투여하였다.
그 당시 서양은 수술 기법이 상당히 발달한 시대였기 때문에 웬만한 외상으로는 죽는 일이 거의 없었다. 아직 항생제 개발과 투여가 보편화되지도 않아서 세균 감염으로 대부분 죽던 시대였다.
이전의 1차 세계대전 당시만 해도 전장에서 다친 독일군인들 중 10~20만 명이 상처감염으로 사망했다는 보고가 있을 만큼 폭탄과 총알보다도 ‘박테리아’라는 놈이 더 무서운 적군이었다.
항생제의 역사에서 기억해야 할 인물들
이처럼 인류는 오래도록 감염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수많은 과학자들이 노력을 하는 중에 항생제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업적을 남긴 세 인물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연구자들에 의해서 ‘606호’라고 이름이 붙여진 ‘살바르산’이라는 항균물질을 만들어 매독 치료의 새로운 장을 연 독일의 파울 에를리히(Paul Ehrlich, 1854~1915)는 항생제 역사에서 첫 테이프를 끊었다고 할 수 있다.
옷감을 물들이던 염색 방법으로 세균(박테리아)도 색깔을 입혀 현미경으로 볼 수 있게 된 과학자들은 세균 속에 침투하는 염료를 이용해서 세균을 죽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연구하던 때였다. 화합물을 변조하고 쥐 실험을 하기를 수백 번 반복하다가 살바르산은 606번째 만들어졌기 때문에 개발 초기에는 ‘606호’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독일의 게르하르트 도마크(Gerhard Domagk, 1895~1964)는 1934년에 ‘프론토질’이라는 황화합물로 여러 세균에 효과를 보이는 광범위항생제를 만들어냈으며,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해서 전 세계에 사용되었다. 아직까지도 흔히 ‘설파제’라고 부르는 항생제의 효시로서 인류 최초로 대량생산이 가능하도록 개발된 항생제라고 보면 될 것이다.
세 번째 인물은 1944년에 최초로 결핵 치료 물질인 스트렙토마이신을 개발한 미국의 왁스먼(S. A. Waksman, 1888~1973)이다.
항생제의 역사에서 우리는 영국의 알렉산더 플레밍(Alexander Fleming, 1881~1955)을 떠올리기 쉽다. 우리가 항생제의 시초라고 알고 있었던 알렉산더 플레밍은 1928년에 실험실에서 우연히 푸른곰팡이를 통해 페니실리움이라는 항균 물질을 발견한 것일 뿐, 정제된 항생제로 대량생산이 가능했던 것은 1935년 경 플로리와 체인이라는 과학자들에 의해서였다.
‘철의 심장을 가진 남자’에서 하이드리히가 자동차 밑에서 터진 수류탄에 의해 외상을 입었지만 끝내 소생할 수 없었던 이유는 뭘까? 당시 도마크에 의해서 개발된 프론토질은 웬만한 감염병에 효능을 보여서 ‘마법의 탄환’이라는 명칭까지 붙었고, 하이드리히에게도 투여됐다.
영화에서는 보여주지 않았어도 훗날 의학자들은 세균 감염에 항생제가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고, 혈액으로까지 감염이 번져 패혈증이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프론토질이 시판된 1930년, 1940년대 전 세계는 그 약에 열광하면서 무분별하게 사용하였다. 머리나 배가 아파도, 감기만 걸려도 세균 감염이 아닌 거의 모든 병에 프론토질을 투여했다. 용량도 정해지지 않아서 ‘약을 탈탈 털어 먹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로 남용을 하였다고 한다. 하이드리히는 이미 내성이 생겨버린 설파제의 희생자였을까?
감독은 하이드리히가 군 최고의 요직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소상히 담으면서 한편으로는 체코 출신이면서 영국에서 군사 훈련을 받은 레지스탕스 얀과 요제프, 쿠르다 3인이 프라하로 침투해서 체코 레지스탕스들과 암살사건을 주도하는 것까지 연출하면서 서로의 상황들을 보여주려고 했다.
워낙 중요한 사건이어서 관련된 영화들이 과거에도 몇 차례 나왔다. 대부분의 영화들은 ‘국뽕’ 영화처럼 게릴라들이 작전을 수행하는 내용에 초점을 두었지만, 이번 영화는 감독이 하이드리히가 권력의 핵심에 오르기까지의 과정과 그의 일상을 보여주는데도 각별히 신경을 썼다.
“우리는 함께 하는 거야, 친구.”
“그래, 저 세상에서 다시 만나자.”
몸을 피하고 최후까지 저항하던 얀(잭 오코넬)과 요제프(잭 레이너)의 마지막 대사이다.
이 사건과 관련된 영화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새벽의 7인(Operation Daybreak, 1975)’이다. 잘생긴 티모시 바텀즈가 주연하였고, 당시 암살 작전에 투입된 요원들의 비장한 연기가 차가운 프라하의 분위기와 어울려 지금까지도 명화로 꼽힌다.
영화의 배경인 체코 프라하에는 아직도 지하실 좁은 창문 외벽에 총탄 자국이 있는 성당이 하나 있다. 바로 얀과 요제프가 최후까지 저항하다 자신들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죽음을 택한 지하실이 있는 ‘성 키릴과 메소디우스 성당(St. Cyril and Methodius Cathedral)’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숭고한 죽음을 기리고자 그곳을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고병수는?
= 제주제일고를 나와 서울로 상경, 돈벌이를 하다 다시 대학진학의 꿈을 키우고 연세대 의대에 입학했다. 의대를 나와 세브란스병원에서 가정의학 전공의 과정을 마쳤다. 세브란스병원 연구강사를 거쳐 서울 구로동에서 개원, 7년여 진료실을 꾸리며 홀로 사는 노인들을 찾아 다니며 도왔다. 2008년 고향 제주에 안착, 지금껏 탑동365의원 진료실을 지키고 있다. 열린의사회 일원으로 캄보디아와 필리핀, 스리랑카 등 오지를 찾아 의료봉사도 한다. '온국민 주치의제도'와 '주치의제도 바로 알기' 책을 펴냈다. 한국일차보건의료학회(KAPHC) 회장, 한국장애인보건의료협회(KAHCPD) 부회장,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이사장 등을 맡아 보건의료 선진화 방안과 우리나라의 1차 의료 발전방안을 모색하는 보건정책 전문가다. 2020년 4.15 총선에 정의당 후보로 나와 제주갑 선거구에서 분루를 삼켰지만 총선 직후 곧바로 코로나19 감염이 창궐하던 대구행 의료자원봉사에 나서 숱한 이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선사했다. 정의당 제주도당위원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