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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고병수의 '영화와 만난 의학'(30) 다른 인격의 각자를 말한다

해리성 장애란 정신 질환은 전혀 다른 인격을 갖는 경우를 말한다. 과거에는 그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단순히 조현병의 하나로만 여겼다. 크게 해리성 기억상실, 해리성 정체성 장애, 이인증 등으로 구분한다. 이 중에서 앞 두 가지를 다룬 영화를 살펴보자.

 

1957년 제작한 ‘이브의 세 얼굴(The Three Faces of Eve)’은 관련 영화로 아직까지 여기에 견줄 작품이 없을 정도로 내용을 잘 살렸고, 1인 다역을 해낸 주인공의 연기 또한 훌륭했다. 영화는 미국 남동부 조지아주에 사는 한 가정주부 이야기를 각색했다고 한다.

 

1951년 어느 날, 정신의학과 외래 진료실에 한 부부가 찾아온다. 남편 말에 의하면 부인이 요즘 부쩍 사치가 늘고, 비싼 구두나 의상을 사지만 정작 본인은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뗀다는 것이다. 이브 화이트(조앤 우드워드)라는 이름의 부인은 차분하고 순종적인 전업주부이다. 의사가 몇 가지 질문을 할 때 화이트 부인은 평소에는 괜찮다가 두통이 심하면서 갑자기 발작(기억상실을 발작이라고 말함)을 경험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기억이 돌아왔을 때는 변한 상황을 전혀 기억할 수가 없다고 한다.

 

진료를 담당한 커티스 루터 박사(리 J. 콥)는 처음에는 거짓말을 한다고 짐작했지만, 몇 번 상담하면서 그의 상태가 정말 변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박사 앞에서 원래 얌전했던 부인이 갑자기 새로운 인격으로 바뀌며 쾌활하고 은근히 유혹하려 하는 여인이 되어 버렸다. 이름을 물으니 이브 블랙이라고 한다. 그 이름은 화이트 부인의 결혼 전 이름이다. 이브 블랙은 원래의 이브 화이트가 너무 순종적이어서 경멸하였고, 바보 같은 남편과 빨리 헤어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루터 박사는 당황스러워 하며 옆 진료실 동료 의사를 불러서 함께 지켜보지만 방법이 따로 없었다. 그 당시나 요즘에도 아주 드문 사례여서 루터 박사는 책으로만 보았고, 직접 진료해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떨 때는 어린아이로 바뀌어 네 살난 자신의 딸과 어울리면서 놀기도 한다. 한 사람에게 세 명의 인격이 공존하고 있는 셈이다. 루터 박사는 정신의학과 학회에 사례 보고도 하며 부인을 성심껏 상담을 진행하였고, 약간의 약물 치료로 좋아지는 듯 해서 퇴원을 시킨다.

 

다중인격장애

 

이브 화이트 부인이 겪는 상황은 해리성 장애 중에서 ‘해리성 정체성 장애(Dissociative identity disorder)’에 해당하며, ‘다중인격장애(Multiple personality disorder)’라고도 한다. 한 사람 안에 동시에 둘 이상의 정체성을 가진 존재가 있고, 그 사람들은 성 정체성이나 이름, 경험들이 각기 다르고, 서로 경쟁하면서 갈등 관계에 있을 때도 있다. 이브 화이트란 원래의 인격체에 이브 블랙이라는 인격과 아이와 같은 인격이 공존하는 것처럼. 다른 인격체로의 변화는 급격히 이루어지고, 그들은 다른 인격체일 때를 기억하기도 한다. 영화에서 루터 박사는 원래의 이브 화이트 부인에서 이브 블랙으로 번갈아 불러내면서 그들의 생각을 묻기도 한다.

 

화이트 부인은 집으로 돌아가서 잘 지내는가 싶었지만, 이듬해쯤 다시 증상이 심해졌다. 딸의 목을 졸라서 죽이려고 한다든지, 야한 옷을 입고 근처 클럽에서 술 마시며 밤새 즐기다가 집으로 돌아온다든지 하는 일이 빈번해지자 남편의 폭력도 늘어난다. 결국 남편은 의사도 못 믿어서 치료를 중단하고 부인과 이혼하고는 딸을 데리고 다른 데로 가버린다. 망연자실해서 화이트 부인은 다시 루터 박사를 찾아가지만, 이번에는 우아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제인이라는 여인이 들어서 있다. 네 번째 인격인 셈이다. 루터 박사는 최면요법으로 부인을 재워 어린 시절로 돌아가게 해서 하나하나 더듬기 시작한다. 어떤 안 좋은 사건이 있었을까?

 

‘이브의 세 얼굴’은 그 부인이 실제 조지아 의과대학에 입원하고 치료했던 기록을 바탕으로 만들어서인지 병에 대한 상황 묘사가 잘되어 있다. 이브 블랙은 화이트 부인이 어려서부터 살고 싶었던 억압된 기억일 수도 있고, 현재 삶이 힘들고 남편의 폭력으로부터 방어기제로 나타난 모습일 수도 있다. 아니면 어렸을 적 죽은 할머니에게 키스했던 무서운 기억으로 인해 억압이라는 기제로 나타난 인격일 수도 있다.

 

영화에서처럼 해리성 정체성 장애 환자의 특징을 알면 치료자는 한 사람을 두고 그 안에 있는 여러 인격들과 집단 치료를 시행하기도 한다. 그 안에 있는 다양한 인격들을 하나하나 나오게 하여 그들 사이의 갈등과 힘의 기울기를 파악하면서 문제 해결을 시도해본다. 또 영화에서는 오늘날에도 중요하게 사용하는 최면요법이나 자유연상, 지지요법 등이 등장한다. 결국 이브 블랙이 지배 인격으로 다른 인격들을 조종하려고 하지만 루터 박사는 그를 살살 달래면서 빠져나가게 하면서 좋은 인격이 지속하도록 만든다.

 

18세기 정신의학 최강자 최면치료

 

영화에서 중요하게 사용한 최면치료(Hypnotherapy)는 어떤 암시를 주면서 지시하는 것에 집중하게 되는 특수한 의식 상태를 만들어서 의식 속에 잠겨있는 기억을 떠올리게 하며 치료하는 정신의학 기법이다. 새로운 내용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뇌 신경세포들의 생리 반응을 통해 묻힌 기억을 꺼내오는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실제로는 잠을 자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수면 상태라기 보다는 몰입 상태라고 보는 것이 맞다.

 

최면을 일컫는 단어인 ‘Hypnosis’는 그리스어 ‘hypnos(잠)’에서 왔고, 오래 전부터 이용되어 왔지만 현대 최면치료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의사 제임스 브레이드(1795~1860)에 의해 정립이 된다. 최면술로 자기통제가 약화된 환자의 자아는 퇴행하게 쉬워서 무의식의 내용이 겉으로 표현되기 쉬워지고, 억압되었던 갈등이나 잊었던 기억이 회복된다. 이때 치료자가 특정 신호를 보내면 깨어나게 되는데, 그 후에도 최면 상태에서 주입된 지시를 따른다. 혹은 최면분석을 통해 여러 상황을 돌아보게 하던 중 환자는 안 좋은 사건을 재경험하게 되고, 그것을 통해서도 증상이 좋아질 수 있다.

 

다중 인격 관련 영화

 

‘지킬박사와 하이드(Dr. Jekyll and Mr. Hyde)’도 비슷한 해리성 정체성 장애를 다룬다. 원작이 워낙 유명해서 오래전부터 여러 번 영화로 만들어졌지만, 2002년 작품이 나은 편이라 소개한다. 인간의 내면에서 분출되지 못하고 억눌리고 있는 욕구나 공격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지킬박사(존 한나)는 약물을 주입해서 선한 인간과 악한 인간으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이드라는 이름을 미리 지어놓고 스스로 약물을 자기에게 주입한다. 한 인간이 낮에는 덕망 있는 의사이지만, 밤에는 잔혹한 인간으로 변한다. 약물의 작용에서 깨어나면 밤에 하이드가 저지른 끔찍한 사건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밤마다 흉악한 일들이 지킬박사의 얼굴로 행해지고.....

 

이 영화의 원작은 보물섬의 작가로 알려진 스티븐슨이고, ‘지킬박사와 하이드’는 그가 1886년에 출간한 작품이다. 아직 해리성 장애에 대한 개념이 만들어지기는커녕, 다들 그런 경우는 악마에 사로잡히게 된 ‘빙의(憑依)’로 취급해서 정신병원에 가두는 게 일상이었던 시대에 상상력만으로 이런 작품을 만들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다만 1800년데 중반에 프랑스의 장 마르탱 샤르코가 이것이 정신질환임을 인식했고, 프로이트는 정신역동학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했을 뿐이다.

 

최근에 만들어진 ‘23 아이덴티티(Split, 2016)’는 스릴러 영화이면서 반전을 기가 막히게 만들어내는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이 만들었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으로는 ‘식스 센스(The Sixth Sense, 1999)에서부터 최근의 ‘올드(Old, 2021)’까지 예상할 수 없는 작품들을 연이어 내놓았다. 이 영화는 ‘이브의 세 얼굴’처럼 전혀 다른 인격이 한 사람 속에 공존하며 전개되는 영화이다. 문제는 한, 두 명이 아니라 무려 스물 세 명이라는 거다.

 

정신의학과 캐런 플래처(베티 버클리) 박사와 상담하는 한 남자(제임스 맥어보이)가 있다. 박사는 한 명 한 명 상담이 끝날 때마다 탁자에 놓인 차트를 옆으로 놓는다. 각 인격마다 한 권의 차트로 정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박사와 상담하는 사람은 케빈이라는 청년 한 명이다. 의상 디자이너인 케빈은 물건이 똑바로 있지 않으면 못 참는다. 빵부스러기가 있거나 더러운 옷도 못 견딘다. 같이 사는 인격체로는 잠시 들락거린다는 배리, 아홉 살짜리 소년 헤드윅, 여성인 페트리샤, 그 외 데니스, 오웰, 제이드, 하인리히 등..... 어떤 때는 스물 세 명의 인격이 각각 박사에게 상담 전자 메일을 보내기도 한다. 자아마다 성격도, 아이큐도, 체력도 다르면서 서로 잘 알고 지내서인지 우리라고 표현한다. 그래서 ‘우리 중 누군가가 의사를 만나고 있다’고 말하면서 고자질하는 놈이 누구라고 서로 짐작하기도 한다.

 

해리성 정체성 장애는 대게 우월한 위치에 있으면서 조종하려는 누군가 있기 마련이다. 소개하는 영화들도 우월한 위치에 있으려는 자가 있고, 다른 인격체들은 모두 이를 두려워한다. ‘23 아이덴티티’는 실제로 있었던 미국의 흉악범을 소재로 만들었다는데, 정신감정과 뇌파검사 등으로 24개의 존재를 모두 확인하고 결국 무죄로 풀려났다고 한다. 영화에서는 스물 세 개의 인격체만 플래처 박사와 상담을 하는데, 드러나지 않은 24번째 있다고 한다. 그가 깨어나면 무시무시한 일들이 벌어질 것인가?

 

해리성 기억상실

 

해리성 장애 중 해리성 기억상실에 관한 영화를 짧게 소개한다. 오래된 영화로 ‘마음의 행로(Random Harvest, 1942)’가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인 1917년, 연대장으로 부대를 지휘하다가 치열한 전투를 치렀던 프랑스의 아라스(Arras, 프랑스 북부에 있는 이 지역은 영국으로 통하는 길목이어서 전략상 중요한 곳으로 제1차, 2차 세계대전 모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던 곳임) 지역에서 독일군에 의해 발견되었다는 존 스미스(로날드 콜맨). 영국으로 돌아왔어도 이전 기억을 상실하고, 말도 어눌해진 상태로 정신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이듬해 1918년 종전 선언으로 혼란해진 틈을 타서 그는 병원 밖으로 몰래 나가게 된다. 거리에서 방황하는 자신을 돌봐준 무용수 폴라 리지웨이(그리어 가슨)를 좋아하게 되고, 조용히 결혼식을 올린 후 시골에 신혼집을 마련하였다. 집으로 들어갈 때 존은 항상 벚꽃 가지가 폴라의 머리에 닿을까봐 살짝 들어주고, 열쇠로 문을 열면서 부인을 들어가도록 했다.

 

아기를 낳고 둘이 행복하게 지내던 어느 날, 리버풀에 있는 신문사에 취직 통보를 받고 면접을 보러 가서 다음 날 돌아오기로 한 스미스는 자동차 사고를 당하고 만다. 가벼운 찰과상이었지만 사고의 충격으로 원래의 기억이 돌아온다. 이번에는 1920년이라는 현재의 시간 개념도 모르고, 오직 전투 중이었던 참호 속만 기억이 날 뿐이다. 기억이 되살아나서 알고 있는 그의 이름은 찰스 레이니어. 5년 만에 찾아온 집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유산 문제로 뒤숭숭하다. 그의 주머니에는 어느 집 것인지 모르는 열쇠 하나가 들어 있고..... 같이 행복하게 살던 시절로 돌이키고 싶은 폴라와 그 기억을 상실한 찰스.

 

2시간이 넘는 흑백영화로, 당시 전 세계에 공전의 흥행 성적을 올리면서 사람들의 눈물주머니를 짜냈다고 한다. 다들 불쌍한 폴라가 어떻게 될지 마음 졸이면서 봤을 것이다. 지금 봐도 명작인 이 영화에서 찰스가 앓았던 정신질환은 해리성 장애 중에서 ‘해리성 기억상실(Dissociative amnesia)’에 해당한다. 그는 전쟁 중 무참히 죽어가는 동료 군인들을 보았고, 포탄이 날아드는 참호 속에서 공포감에 휩싸였을 것이다. 그의 내면에 있는 무의식은 맞서기 어려운 트라우마로부터 도피하는 수단으로 기억상실(해리)을 택했던 것이다. 언어 능력이나 지적 능력은 남아 있다. 다시 기억이 돌아오기도 하는데, 돌아오게 되면 이번에는 찰스처럼 그 이전의 기억이 사라진다. 영화의 대사에서처럼 “그의 머리에서 한쪽 문이 닫히고, 대신 다른 쪽 문이 열리는” 것이다.

 

그 외 해리성 장애에는 자신이 변했다고 자주 느끼거나 외부 세계가 달라졌다는 비현실감을 자주 느끼게 되는 ‘이인증/비현실감 장애(Depersonalization/Drealization disorder)’란 것도 있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겪는 현상으로, 어느 날 갑자기 뭔가 변했다는 느낌이 그런 것이다. 극적이지 않아서 이에 관한 영화는 없는 편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고병수는?
= 제주제일고를 나와 서울로 상경, 돈벌이를 하다 다시 대학진학의 꿈을 키우고 연세대 의대에 입학했다. 의대를 나와 세브란스병원에서 가정의학 전공의 과정을 마쳤다. 세브란스병원 연구강사를 거쳐 서울 구로동에서 개원, 7년여 진료실을 꾸리며 홀로 사는 노인들을 찾아 다니며 도왔다. 2008년 고향 제주에 안착, 지금껏 탑동365의원 진료실을 지키고 있다. 열린의사회 일원으로 캄보디아와 필리핀, 스리랑카 등 오지를 찾아 의료봉사도 한다. '온국민 주치의제도'와 '주치의제도 바로 알기' 책을 펴냈다. 한국일차보건의료학회(KAPHC) 회장, 한국장애인보건의료협회(KAHCPD) 부회장,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이사장 등을 맡아 보건의료 선진화 방안과 우리나라의 1차 의료 발전방안을 모색하는 보건정책 전문가다. 2020년 4.15 총선에 정의당 후보로 나와 제주갑 선거구에서 분루를 삼켰지만 총선 직후 곧바로 코로나19 감염이 창궐하던 대구행 의료자원봉사에 나서 숱한 이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선사했다. 정의당 제주도당위원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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