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연재를 시작합니다. 고병수의 '영화와 만난 의학'입니다. ‘영화관에서 만나는 의학의 세계’는 영화 속에서 드러난 의학 이야기를 다룹니다. 감염병의 역사와 감염 질환 이야기, 정신의학뿐만 아니라 여러 질병들을 영화 속에서 찾아내 소개합니다. 오랫동안 지역 의료현장에서 진료를 하며 보건의료 정책 및 교육 활동을 하는 고병수 의사가 필진으로 나섭니다. 많은 애독바랍니다. /편집자 주
수천 년 동안 인류를 괴롭히던 감염병이라고 하면 두창(천연두), 중세 때 유럽을 휩쓸었던 페스트, 콜레라 같은 것들을 들 수 있다. 오래도록 눈으로 볼 수 없어서 그 실체를 모르기 때문에 뭉뚱그려서 역병(疫病)이라고 불렀다.
최근에는 1918년 스페인 독감 정도가 전 세계를 떨게 만든 것이었을 뿐, 세균학이 발달하고 항생제가 넘쳐나는 근래에 “그깟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무슨 문제냐”고 우리 인류는 자신했다. 게다가 사스(SARS), 메르스(MERS), 신종플루가 기승을 부렸어도 잠시 그때뿐이었던 기억을 해보면 과거처럼 대규모 감염병은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공상과학 영화나 상당히 과장된 드라마가 아니면 생각할 수 없던 문제로 받아들였다.
1995년에 만들어져서 상영될 때만 해도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과장했구나'하고 생각했던 ‘아웃브레이크(Outbreak)’라는 영화가 있다. 코로나19 감염병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근래에 다시 본 사람들은 영화에서 나오는 상황이 바로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25년 전에 만들어져서 미래를 예견한 이야기에 감탄하게 된다.
영화는 그 당시 세계보건기구(WHO)에 보고되던 에볼라바이러스의 위험이 아프리카에서 심각한 상황이라는 현실을 보고 상상력을 가미해서 만들어졌다. 에볼라바이러스 질환은 ‘에볼라 출혈성 열성질환(EHF, Ebola hemorrhagic fever)’이라고 부를 정도로 고열과 연이은 출혈 경향으로 다발성장기부전에 빠져서 사망하게 된다. 감염되면 치사율이 평균 50%에 이를 정도로 치명적인 바이러스 감염병이다.
1976년에 아프리카 남수단과 콩고에서 발생하여 처음 보고된 이후 현재까지도 간헐적으로 국지성 유행을 일으키고 있는데, 워낙 사망률이 높기도 하고 심한 출혈이 나타나니까 극적인 상황을 연출하면서 영화로 만들기에 좋은 소재였을 것이다. 영화를 보다 보면 감염을 일으킨 괴바이러스의 모양이 기다란 털실이 꼬여있는 것으로 화면에 비치는데, 에볼라 바이러스의 모양과 닮았다.
영화는 1967년 어느 날, 아프리카 자이르(Zaire, 콩고공화국의 옛 이름)의 모타바 강 계곡에 있는 미군 캠프에서 알 수 없는 전염병이 나도는 상황에서 시작한다. 무엇엔가 감염되어 갑자기 죽어가는 군인들이 많아지고, 부대에서는 본국에 긴급 의료지원 요청을 하지만 파견된 요원들은 혈액 샘플만 채취한 뒤 비밀리에 부대에 폭탄을 투하하여 몰살시켜 버린다.
극비리에 진행된 이 작전은 세월이 지나면서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는다. 30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자이르의 같은 지역에서 비슷한 전염병이 돈다는 보고를 받고 육군 대령 샘 다니엘즈(더스틴 호프만)가 급히 파견되어 조사를 벌인다.
혹시나 모를 미국으로의 바이러스 유입이 걱정되어 본국의 의사들에게 경고를 해야 한다고 보고하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그러던 중 모타바 강 근처에서 잡힌 원숭이가 미국 캘리포니아의 시더 크릭이라는 작은 마을로 반입되어 전염원이 되고, 그 원숭이를 데리고 있던 청년도 감염되어 바이러스를 전파시킨다. 이 과정에서 원숭이를 데리고 있던 한국 화물선인 태극호가 등장하면서 한국말이 나오니 영화를 보는 우리에게 흥미를 더해준다.
감염자와 접촉했던 사람들이 고열을 앓다가 갑자기 죽어간다. 잠복기는 24시간이 안 되고, 치사율은 100%. 백악관에서는 30년 전과 비슷한 방식으로 미국 내 최초 감염 지역을 봉쇄하고 몰살시키려는 계획을 긴급히 세운다.
감염 환자들을 돌보던 미국 질병관리본부(CDC) 연구원이자 샘의 전 부인 로비(르네 루소)는 문제의 괴전염병을 연구하다가 감염자 주사기에 찔려 감염된다. 샘은 상황을 숨기려는 정부와 상관들의 비협조 속에 몰래 감염원인 원숭이를 찾아 나선다. 사람들은 죽어 나가지만 그 원숭이는 오래도록 살아있기 때문에 항체를 만드는데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샘은 원숭이를 찾아서 로비를 살리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릴 수 있을까?
영화의 제목인 ‘아웃브레이크(Outbreak)’라는 말은 쉽게 표현해서 유행성 감염병이라는 뜻이다.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토착화해서 발생하면 풍토병이라고 하지만, 아웃브레이크는 전염성이 강해서 주변으로 퍼질 수 있고 다소 통제가 가능한 상황을 말한다.
최근의 코로나19처럼 통제하기 힘들고 전 세계에 유행해버리는 것은 팬데믹(Pandemic), 즉 대유행이라고 할 수 있겠다.
상상할 수도 없었던 상황이 현실로 목도하고 있는 2020년 이후의 세계..... 영화는 선견지명이 있었던 걸까, 아니면 가능하지 않았던 상황을 짐작하며 상상의 날개를 펼친 것일까?
요즘의 우리도 영화에서처럼 완전히 밀폐된 방역복을 입은 모습을 쉽게 보고 있고, 확진자라는 사람들을 격리하고 있다. 지금껏 볼 수 없었던 상황이다. 만일 우리도 아웃브레이크와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국가는 어떤 자세를 보여줄까?
이제는 현실이 되어버린 영화 속 이야기들을 느껴보며 이 영화를 다시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다소 젊은 시절의 더스틴 호프만을 보는 것도 덤으로 얻게 되고, 지금은 쟁쟁한 배우들인 르네 루소, 모건 프리먼, 케빈 스페이시 등이 함께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이와 비슷한 영화로는 2011년 개봉한 ‘컨테이젼(Contagion)’이 있다. 맷 데이먼과 미국 내 최초 감염자면서 초기에 죽는 것으로 나오는 기네스 펠트로, 감염병 전문가인 로렌스 피쉬번과 마리옹 꼬띠아르, 개나리꽃이 치료제라고 사기치는 인물 주드 로 등 쟁쟁한 배우들이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눈이 황홀해진다. 컨테이젼은 ‘전염’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인데, 최근의 한글맞춤법으로는 ‘컨테이전’이라고 써야 맞다.
영화는 무엇보다도 이전의 아웃브레이크나 한국 영화 감기와 달리 극적인 상황 연출을 자제하면서 유행하는 감염병에 대해 대처하는 여러 인물들을 보여주려고 한다. 가족을 살리려는 이기적인 모습, 자신이 살아야 하는 상황에서도 다른 감염자들을 배려하려는 사람들,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려는 회사, 개나리꽃이 치료약이라며 사기를 치는 인물 등..... 영화가 보여주려는 설정이나 인물들을 따라가다 보면 다소 지루하게 느껴지겠지만 생각할 점들이 그만큼 많아진다는 매력이 있다.
영화의 또 다른 특징은 섬세한 내용들을 집어넣었다는 점이다. 감염 경로와 접촉자들을 면밀히 파고드는 역학조사 모습은 영화가 전문적인 자문을 잘 받았다는 것을 알게 하고, 백신이 개발되지만 누가 먼저 수혜를 받을 것인지 논란이 되는 것, 생일 날짜를 기준으로 백신을 제공하게 되는 점, 백신을 맞았다는 증명 표시 등은 코로나19 시대에 사는 우리가 접한 현실과 너무 똑같다.
영화는 후반부에 지본의 탐욕으로 숲이 망가지고, 서식하던 박쥐들이 인간 사회와 접촉점이 많아지면서 바이러스가 돼지, 그리고 사람에게 옮기는 내용을 보여주는데, 너무나 사실을 반영한 내용이라서 감탄이 나올 정도이다.
한국 영화인 '감기(The Flu, 2013)'는 극적인 상황을 만들어내면서 국가와 시민의 관계를 중요 갈등으로 가지고 가며 대규모 감염병을 다룬다. 한국 포스터에서 제목은 감기라고 했지만, 영어 제목으로는 플루(Flu)라고 했다. 플루는 인플루엔자(Influenza)의 약자로 ‘독감’을 말하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다른 의미인데, 가볍게 생기면서 종국에는 심각한 폐해를 입히는 것으로 보이기 위해 독감이 아닌 감기라는 제목을 사용한 걸까?
인류 역사에서 수없는 감염병들이 있었지만 일부 지역에서 유행했다. 유럽을 중심으로 대규모로 유행했던 것은 3차례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첫 번째 대유행은 541~750년 동안에 유럽을 휩쓸었던 ‘유스티니안 역병(Plague of Justinian)’이다. 기독교 성인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는데, 당시 유럽 인구의 절반이 사망(2500만~5000만 명)했을 정도로 초토화됐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염병의 원인을 몰라서 장티푸스, 두창(천연두), 홍역, 에볼라 등으로 추정했으나, 2011년 네이처(Nature)지에 대역병의 원인균이 페스트균임을 밝혀내서 인정이 되는 중이다.
두 번째, 세 번째 대유행은 중세와 근대에 돌았던 페스트이다. 그 외 콜레라나 많은 감염병들이 있었지만, 크게 인류를 위험에 빠뜨린 감염병 역사는 세 차례였다. 지금의 코로나19는 지금 우리가 난리를 치지만, 한때 유행했던 작은 유행병 정도로 역사는 기록할 것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고병수는?
= 제주제일고를 나와 서울로 상경, 돈벌이를 하다 다시 대학진학의 꿈을 키우고 연세대 의대에 입학했다. 의대를 나와 세브란스병원에서 가정의학 전공의 과정을 마쳤다. 세브란스병원 연구강사를 거쳐 서울 구로동에서 개원, 7년여 진료실을 꾸리며 홀로 사는 노인들을 찾아 다니며 도왔다. 2008년 고향 제주에 안착, 지금껏 탑동365의원 진료실을 지키고 있다. 열린의사회 일원으로 캄보디아와 필리핀, 스리랑카 등 오지를 찾아 의료봉사도 한다. '온국민 주치의제도'와 '주치의제도 바로 알기' 책을 펴냈다. 한국일차보건의료학회(KAPHC) 회장, 한국장애인보건의료협회(KAHCPD) 부회장,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이사장 등을 맡아 보건의료 선진화 방안과 우리나라의 1차 의료 발전방안을 모색하는 보건정책 전문가다. 2020년 4.15 총선에 정의당 후보로 나와 제주갑 선거구에서 분루를 삼켰지만 총선 직후 곧바로 코로나19 감염이 창궐하던 대구행 의료자원봉사에 나서 숱한 이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선사했다. 정의당 제주도당위원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