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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고병수의 '영화와 만난 의학'(31) 최면으로 행복해지는 사람들 ... '첫눈이 사라졌다'

무의식의 세계를 깨운 프로이트가 나타나기 전까지 최면요법이 정신의학의 세계에서 최강자였다. 많은 정신질환들을 치료하려고 사용했다.

 

하지만 너무 강력해서 대상자에게 잘못된 기억을 심어줄 수도 있는 등 부작용이 있어서 요즘은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다. 얼마나 강력했는지 보여주는 영화를 소개한다.

 

홀연히 마을에 나타난 사나이

 

한 남자가 무거운 가방을 들고 숲 속에서 내려오고 있다. 시내로 들어서서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더니 육교와 지하 터널을 지나간다.  멀쩡했던 전등들은 갑자기 깜빡거리는데, 뭔가 이상한 사람인 듯한 느낌을 준다.

 

장면이 바뀌면서 폴란드 바르샤바의 어느 사무실, 입국 심사를 하는 공무원이 그의 출생지가 우크라이나의 프리피야티라는 것을 확인하면서 체르노빌을 언급한다.

 

체르노빌은 1986년 4월 26일 원자로 폭발사고가 났던 곳이고, 프리피야티는 그 근처로서 원자로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가족과 함께 집단 거주하던 곳이었다. 폭발이 일어나기 7년 전, 같은 날짜에 이 남자가 태어났다. 둘의 잠시 눈이 마주치더니 이 남자는 그 공무원의 뒤로 가서 머리를 감싸 쥐더니 나직이 읊조린다.

 

“검은 시냇물이 발밑에서 흐르다가 내 손을 타고 들어옵니다.”

 

사무실을 나와서 그 남자는 도심을 벗어나 경비원이 지키는 고급주택단지로 들어간다. 어느 집 문을 두드리자, 한 여인이 반갑게 그를 맞이한다. 마치 그 전부터 알았다는 듯이.....

 

‘첫눈이 사라졌다(Never gonna snow again, 2020)’는 이렇게 신비한 느낌을 주면서 시작한다. 이 남자의 이름은 제니아(알렉 엇가프). 산에서 내려올 때 들고 있던 큰 가방은 이동식 침대로, 찾아가는 집에 들어가서 펼치고는 마사지를 해준다.

 

그의 정체는 출장 마사지사? 정성껏 여기저기를 만져주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만족했지만, 그는 대부분 사람들에게 최면을 건다. “제가 치유해드리죠. 서서히 잠이 듭니다. 불행과 고통, 병을 몰아내는 중입니다. 검은 시냇물이 발밑에서 흐르다가 몸과 마음을 통해 내 손에 전달됩니다.”

 

“숨을 내쉬세요. 그때마다 몸이 가벼워집니다. 먼지처럼.....”

 

그를 부르는 사람들은 어딘가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다. 최면에 들게 한 후 제니아는 사람들을 어두운 숲 속 어딘가로 데려가서 자아를 들여다보게 한다.

 

최면으로 행복해지는 사람들

 

영화의 배경이 되는 이 마을은 고급스런 집들이 즐비하고, 거기에 부유하게 사는 사람들이지만 모두 고통 받고 불행하다. 제니아는 손의 접촉으로 지친 몸을 풀어주고 최면을 걸어서는 마음의 병을 돌아보게 하면서 치유의 길로 이끈다.

 

도대체 그는 어떤 인물일까? 감독은 종교 영화가 아니라고 했지만, 그런 느낌을 가지도록 했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주인공 제니아는 예수의 궤적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영화 전체에서 그런 상징은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예수는 나자렛 출신으로 핍박받는 유태인인 것처럼 제니아는 체르노빌 인근의 프리피야티 출신이다. 그곳은 주민들 대부분이 원자로 폭발 사고로 피폭을 당한 지역이며 척박하고 저주받은 곳이다. 피폭으로 사망한 어머니가 그에게 보낸 초대 카드의 의미, 항상 걸고 다니는 십자가 목걸이의 상징이라든지, 어루만지고 치유하는 능력은 제니아가 피폭으로 얻은 초능력 때문이라고 설정이 되었지만, 예수가 사람들에게 행한 기적과 연결된다. 그가 찾아간 집의 막내딸은 어떤 사람이 제니아를 칼로 내리치는 장면을 그린다. 이것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듯이 제니아의 죽음을 뜻하는 것일까?

 

크리스마스 즈음에 학예회 행사에서 제니아는 상자 속에서 나타나는 마술 쇼를 보여주다가 홀연히 사라져 버린다. 상자 안에 있어야 할 그가 없는 장면은 예수가 죽은 후 동굴 무덤에 넣어졌다가 사라진 것을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다. 고급주택단지 관리실 직원과 술을 마신 후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외친다.

 

“내가 너희를 구해주겠다.”

 

술김에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태복음11장28절에 예수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말한 것과 비슷하다.

 

화장실에서 만난 꼬마 숙녀는 볼 일을 보면서 '다시는 눈이 내리지 않을 거래요'라고 뜬금없이 말하는 것과 길에서 만난 아이도 '이제 눈이 안 내린다고 하더라고요'라며 지나간다. 묻지도 않았는데..... 세상의 모든 죄와 고통을 안고 가는 예수의 죽음처럼 제니아가 찾아간 마을의 사람들은 이제 희망이나 행복은 없을 거라고 비관하는 상황에서 치유의 기적을 보여주고 사라졌다. 그리고 온 마을을 덮는 눈이 내린다. 모두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지고.....

 

영화를 연출한 폴란드의 마우고시카 슈모프스카 감독은 이 작품을 위해 특별히 또 다른 감독과 공동 촬영을 했다. 그만큼 작품성을 높이려고 애썼고, 상징이 잘 나타나도록 빛이라든지 배경 색깔 등에 신경을 쓴 흔적이 엿보인다. 뛰어난 촬영기법과 빛을 이용한 장면 구성은 손쉽게 나타난다. 이야기 구성도 연결이 잘 안 되고, 상징이 너무 많기 때문에 영화를 볼 때 감독의 의도와 작품의 상징성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보지 않으면 난해한 영화로 끝날 수 있다. 하지만 지나치게 각 장면들에 대해서 지나친 해석으로 연결하려는 것은 오히려 영화에 대한 재미를 감소시키기 때문에 상징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살짝 느끼는 정도로 지나가는 게 좋을 듯 하다.

 

제니아의 꿈이나 환영으로 어머니를 만날 때마다 두꺼운 먼지들이 내려앉는다. 체르노빌의 낙진의 이미지이다. 체르노빌의 원자로 폭발사고 문제를 지속해서 이끌고 간 것은 반핵을 강조하려는 단순한 의도일까?

 

주인공 제니아 역의 알렉 엇고프는 작은 조연 역할만 맡던 신인이다. ‘미션 임파서블: 로그네이션(Mission: Impossible-Rogue Nation, 2015)’에서 앞 부분에 신경작용 독가스를 항공기로 나르려던 체첸 분리주의자 일당 중 한 명으로 잠깐 출연하기도 한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고병수는?
= 제주제일고를 나와 서울로 상경, 돈벌이를 하다 다시 대학진학의 꿈을 키우고 연세대 의대에 입학했다. 의대를 나와 세브란스병원에서 가정의학 전공의 과정을 마쳤다. 세브란스병원 연구강사를 거쳐 서울 구로동에서 개원, 7년여 진료실을 꾸리며 홀로 사는 노인들을 찾아 다니며 도왔다. 2008년 고향 제주에 안착, 지금껏 탑동365의원 진료실을 지키고 있다. 열린의사회 일원으로 캄보디아와 필리핀, 스리랑카 등 오지를 찾아 의료봉사도 한다. '온국민 주치의제도'와 '주치의제도 바로 알기' 책을 펴냈다. 한국일차보건의료학회(KAPHC) 회장, 한국장애인보건의료협회(KAHCPD) 부회장,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이사장 등을 맡아 보건의료 선진화 방안과 우리나라의 1차 의료 발전방안을 모색하는 보건정책 전문가다. 2020년 4.15 총선에 정의당 후보로 나와 제주갑 선거구에서 분루를 삼켰지만 총선 직후 곧바로 코로나19 감염이 창궐하던 대구행 의료자원봉사에 나서 숱한 이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선사했다. 정의당 제주도당위원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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