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몽괘(蒙卦)
몽(蒙)은 덮다, 덮어 가리다 뜻이다. 처음에는 세상사람 모두에게 영성1)이 있었다. 천부적 자질도 차이가 없이 인생의 길을 걸었다. 그런데 나중에는 어째서 부질없이 바쁘게 보내며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이 생기는 것일까? 반면에 어떤 사람은 대업을 이룰 수 있는 것인가? 도대체 무엇이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사람의 앞길을 막아선 것인가? 무엇이 그 사람의 지혜의 불꽃을 덮어 가린 것인가?
건성건성하고 산만하고 해이하면 어떻게 하여야 할까?
강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면 바다는 강물의 진행 방향을 좌우한다. 강의 아름다운 흐름을 덮어버린다. 이로써 강물 자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강물의 이름도 바다로 대체된다.
나무를 불 속으로 던져 넣으면 불은 ‘동량’이 되려던 나무의 꿈을 삼켜버린다. 거대한 ‘옥체’를 태워 버린다. 목재는 끝내 공기 중에 흩날리는 부드러운 재가 되어 버린다. 바람이 불면 그나마 남아있던 재도 어디로 갔는지 사라져 버린다.
그래도 그건 아무 것도 아니다. 적어도 그들은 정당한 귀착점이나마 있지 않던가. 반면에 사람이 해이하고 태만해지면 사상을 갉아 먹히고 정신을 빼앗겨 버린다. 이때부터 사람은 자유가 없게 된다. 용부(庸夫)가 되어 버린다. 세상의 기생충이 되어 버린다.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게으름은 인간이 발전해 나가는 과정을 막아서는 가장 큰 적이다. 가장 무서운 독약이다. 사람이 일단 게으름에 포로가 되어 버리면 앞길도 빛도 희망도 공중누각이 되어 버린다. 부질없게 되어 버린다.
나태함은 사람을 경박하게 만든다. 방만하게 만든다. 어려움을 만나면 두려움에 떨게 하고 현실을 도피하게 만든다. 끝내는 삶의 목표를 잃게 만든다. 의기소침, 낙담하게 만든다. 활기를 찾아볼 수 없게 만들고 깊은 수렁에 빠뜨려 버린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자아를 다시 찾아올 것인가? 어떻게 나태함을 떨쳐버릴 것인가?
『주역』은 말한다.
“몽은 형통하니 내가 동몽을 구하는 것이 아니요 동몽이 나를 구하는 것이니, 처음 점을 치면 알려주고 두 번 세 번 점을 치면 모독하는 것이다. 모독하면 알려주지 않으니 올바름을 지켜야 이롭다.”2)
태어날 때부터 사람은 몽매(蒙昧)하다. 몽매하다면 그것을 벗어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지혜로운 사람을 찾아야 한다. 우리를 ‘계몽(啓蒙)’해 줄 스승을 찾아서 지도받아야 한다. ‘계몽’하는 스승이 우리의 결점과 오류를 지적하면 적극적으로 주동적으로 받아들여 고쳐야 한다. ‘계몽’하는 스승이 깨우쳐 주는데도 여전이 완고하게 고집피우고 개선하지 않으면 몽매의 단계에서 멈춰 서게 된다.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영원히 지혜롭지 못하게 된다. 건성건성, 산만, 해이가 우리를 덮게 된다. 꼭두각시가 되어 버린다.
그렇기에 성장하려면 스승을 구해야 하고 공부하여야 한다. 고쳐나가야 한다. 힘들게 고생하여야 한다. 알려고 노력하고 연구하여야 한다. 배움에 적극적이어야 하고 주동적이어야 한다. 앞으로 나아가려 분투하여야 한다.
가우스(Carl Friedrich Gauss)는 어릴 적부터 부지런했다. 독서에 너무 열중해 정신을 팔다보니 공작의 화원으로 잘못 들어갔다. 공작부인이 가우스에게 꼬치꼬치 따져 물었다. 그런데 어린아이가 묻는 대로 다 답하는 것이 아닌가. 부인은 공작에게 알렸다. 공작도 마을 천재의 행적을 들은 바 있었다. 직접 가우스를 관찰해 보기로 했다. 관찰 결과, 실로 뛰어난 아이라 판단되자, 대학에 진학해 학문을 더 닦도록 장학금을 주기로 결정하였다. 마침내 가우스는 유명한 수학자가 됐다.
에디슨은 평생 동안 1328건이나 되는 발명품을 등록해 발명왕이라 불린다. 그의 발명은 총명과 재지에 의한 것이 아니다. 간난신고의 과학적 실천에 따른 것이다. 그가 말하지 않았는가?
“발명은 1퍼센트의 영감과 99퍼센트의 땀이다.”
게으름을 이기려면 먼저 명확한 목표가 있어야 한다. 목표는 일의 동력이다. 목표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길을 밝혀주는 등불이다. 목표는 지혜의 불꽃을 일깨우는 열쇄다. 어려움에 봉착하였을 때 꿋꿋하게 싸워나가야 한다.
세상은 모순으로 가득 차있다. 어려움은 시시때때로 어디에서나 다가온다. 우리는 용감하게 그 어려움을 이겨내어야 한다.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즐거움 또한 끝이 없다.
『주역』은 말한다.
“산 아래 샘〔천(泉)〕이 나오니, 몽이다. 과단성 있게 행동함으로써 덕을 기른다.(군자는 이것으로 과단성 있게 행동하고 덕을 기른다)”
산 아래 샘은 졸졸 흐른다. 영원히 그치는 법이 없다. 도도하게 강이 되고 바다로 간다. 천리만리를 내달리며 창생을 윤택하게 한다. 사람도 이와 같다. 과감하게 앞으로 나아가면서 신심을 닦고 덕을 쌓아야만 만민을 은혜롭게 할 수 있고 생령을 감화시킬 수 있다.
온갖 시내를 받아들이는 바다처럼 마음이 넓고 어떤 의견도 다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3) 넓은 흉금으로 모든 것을 포용하는 사상을 이해하여야 한다. 커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사상이 넓어진다. 넓어져야 멀리 내다볼 수 있다. 지혜로울 수 있다. 지혜로워야 어떤 일에도 새로운 방법을 모색할 수 있고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다.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어야 이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충만할 수 있다. 호기심이 생기고 재미를 느끼게 되면 분발해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 그러면 언제까지나 해이해지지 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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蒙卦 ䷃ : 山水蒙(산수몽), 간(艮 : ☶)상 감(坎 : ☵)
몽(蒙)은 형통하니, 내가 철부지 어린이를 찾음이 아니라, 철부지 어린이가 나를 찾음이다. 처음 점치거든 알려주고 두 번 세 번 점치면 욕되게 하는 것이니, 욕되게 하면 알려주지 않는다. 바르게 함이 이롭다./몽은 형통하니 내가 동몽를 구하는 것이 아니요 동몽이 나를 구하는 것이니, 처음 점을 치면 알려주고 두 번 세 번 점을 치면 모독하는 것이다. 모독하면 알려주지 않으니 올바름을 지켜야 이롭다. (蒙亨,匪我求童蒙,童蒙求我.初筮告,再三瀆,瀆則不告.利貞.)
「단전」에서 말하였다: 몽(蒙)은 산 아래 험함이 있고, 험해서 그치는 것이 몽이다.(彖曰,蒙,山下有險,險而止,蒙.)
「상전(象傳)」에서 말하였다: 산 아래에 샘이 솟아남이 몽이니, 군자가 그것을 본받아 과감하게 행하며 덕을 기른다.(象曰,山下出泉,蒙,君子以,果行育德.)
[傳]
몽괘는 「서괘전」에서 “준(屯)은 가득 참이니, 준은 물건이 처음 생겨난 것이다. 물건이 생겨남에 반드시 어리므로 몽괘로 이어 받았는데, 몽(蒙)은 몽매함이니 물건의 어린 것이다”라고 했다. 준은 물건이 처음 생겨난 것으로, 물건이 처음 생겨남에 어리고 작아서 몽매하고 아직 계발이 되지 못하니, 몽괘가 준괘 다음에 놓인 까닭이다. 괘의 모양이 간(艮☶)은 위에 있고, 감(坎☵)은 아래에 있으니, 간은 산이 되고 그침이 되며, 감은 물이 되고 험함이 된다. 산 아래에 험한 것이 있으니, 험한 것을 만나 멈추어 어디로 가야할지 알지 못함이 몽의 상이다. 물은 흘러가는 것이니, 물건이 처음 생겨남에 아직 갈 곳이 없기 때문에 몽매하지만, 나아가게 되면 형통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1) 영성(靈性), 신령(神靈)스럽게 총명(聰明)한 품성(品性), 또는 성질(性質). 천부의 총명(聰明)이다.
2) 蒙,亨.匪我求童蒙,童蒙求我.初筮告,再三瀆,瀆則不告.利貞.
3) 海納百川,有容乃大.壁立千仞,無欲卽剛.(「林則徐總督府衙題書堂聯」) : 바다는 온갖 시내를 받아들이니 그 너그러움이 있어 거대하고, 벽이 천길 높이 서 있어도 욕심이 없으니 굳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