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신(魯迅)은 『고향』에서 이렇게 썼다 :
낡고 허름한 집이 내게서 더 멀어졌다. 고향의 산수도 점점 내게서 멀어져 갔다. 그런데 나는 떠나기 서운한 어떤 미련도 느끼지 못했다. 나는 내 사방에 보이지 않는 높은 담벼락이 있는 것을 느낄 뿐이었다. 나를 혼자 격리시키고 있어서, 나를 무척 답답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 수박 밭의 은 목걸이의 작은 영웅의 형상을 나는 원래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갑자기 모호해 졌다. 그게 나를 무척 슬프게 했다.
노신이 묘사한 이런 짙게 깔린 참담, 냉담, 비애의 광경은 정말 사람을 질식시킨다. 도대체 왜 그럴까? 세태염량, 유수 같은 세월, 풍물은 여전한데 이미 변해버린 인간사, 소통의 정지 때문이다. 물론 진부하게 변질된 봉건왕조도 그렇다.
인간에게 소통이 없다면 얼마나 무섭게 변할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침묵은 금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침묵을 유지하면 벙어리나 겁쟁이가 되어 버린다. 사람의 마음은 뱃가죽을 사이에 두고 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외곬로만 방비한다면 우리 마음의 벽은 더욱 높아질 뿐이다.
세상은 각박하다, 사람 마음은 헤아리기 어렵기에 결국 속임을 당할까 두렵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목이 멘다고 먹기를 그만두거나, 작은 장애 때문에 긴요한 일을 그만두거나, 모든 외부 세상과의 왕래를 단절할 수는 없지 않는가.
소통이 부족하면 서로 이해할 수 없다. 피차의 정신, 마음 사이에 한 층의 ‘두꺼운 장벽’이 존재하게 된다. 나아가 서로 의심하게 되고 서로 믿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낭패다.
소통을 잘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것은 성취욕, 일에 대한 열정, 책임감에 대한 구체적인 검증이다. 소통은 졸렬하고 속된 ‘관계학’이 아니다.
첫째, 소통은 원칙이라는 기초 위에서 사람 사이의 단결 문제를 처리하는 것이다. 무원칙 위에서 그저 좋게 지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 개인의 이익을 위하여 서로 결탁해서도 안 된다. 이익이 되는 일을 다투어서도 안 된다. 얻을 이익이 없을 때 교분을 나누어 소원하게 되는 ‘붕당’ 행위도 해서는 안 된다. 성취를 위하여 분투하는 공동의, 이상이라는 기초 위에서 소통해야만 진정으로 단결할 수 있다.
둘째, 소통은 사상(생각, 견해)이 중요하다. 매일 만나 얼굴을 맞대면서도 의견을 나누는 데에 소홀하면 안 된다. 사상이 소통되지 않으면 감정은 어우러지기 어렵다. 사상을 소통하면서 감정의 기반을 굳혀, 업무에서 서로 도와야 한다. 방법과 정책을 결정할 때 서로 보완하여야 한다. 삶에 서로 관심을 가져야 한다. 소통은 일상적으로 하여야 한다. 일이 바쁘면 바쁠수록 단체가 단결이 잘 되면 잘될수록 수시로 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해야 한다. 견해를 나누어야 끊임없이 응집력을 증대시킬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 소통은 진실이 중요하다. 표면적인 호의를 베풀어서는 안 된다. 그저 영합하거나 허풍 떨거나 과정해서는 안 된다.
구성원의 결점이나 문제점이 보이면 진심을 가지고 형제와 같은 정으로 제때에 지적하고 성심성의껏 동료가 알지 못하는 부분을 도와주어야 한다. 경험을 종합해 서로 도와주고 배우는 목표를 이루어야 한다. 그래야만 진짜로 한 번의 소통으로 더 좋은 감정을 쌓았고 더 많이 깨우침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소통하려면 반드시 성심으로 사람을 대해야 한다. 자기 마음으로 남의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여야 한다.
소통하는 데에 진심이 부족하면 모든 것은 허위가 된다.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모든 교류는 내포된 뜻이 깊이가 없으면 타인을 믿게 만들지 못한다.
‘형통태평(亨通泰平)’이란 막힘없이 통해야만 태평할 수 있고 무궁한 복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거침없이 통하려 한다면 서로 융합하여야 한다. 상하가 단결하여야 한다. 피차 이해하여야 한다.
우리가 진보하고 앞서 나아가려면 소통이 가장 중요하다. 교류하여야 한다. 교류 중에 발전이 있다. 소통하는 중에 타인을 이해하고 자신을 이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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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天地泰(천지태) 곤(坤: ☷)상 건(乾: ☰)하
태(泰)는 본래 ‘미끄럽다(滑)’ ‘미끄럽게 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글자이다. 여기에서 ‘통하다’는 뜻이 파생되었다.
태괘(泰卦)는 작은 것이 가고 큰 것이 오니, 길하고 형통하다.(泰,小往大來,吉亨.)
태는 작은 것이 가고 큰 것이 오니 길하여 형통할 것이다. 천지가 교합해 만물이 소통되며, 상하가 교합해 그 뜻이 같다.(泰,小往大來,吉亨.則是天地交,而萬物通也,上下交,而其志同也.)
천지가 교류하는 것이 태이니, 임금이 그것을 본받아 천지의 도를 마름질하고 천지의 마땅함(바른 운행)을 도와서 백성을 돕는다.(天地交,泰,后以財(裁)成天地之道,輔相天地之宜,以左右民.)
안은 순양으로 가득 차 군자가 건실하고 밖은 순음으로 채워져 소인이 잘 따르니 군자의 도는 잘 자라고 소인의 도는 쇠퇴해 가니 태평하다.(內陽而外陰,內健而外順,內君子而外小人,君子道長,小人道消也.)
[傳]
태괘는 「서괘전」에 “실천하여 태평하게 된 뒤에 편안해지기 때문에 태괘로 받았다”라고 했다. 실천한 것이 제자리를 얻으면 여유로워 태평해지며 태평하면 편안하니, 리괘(履卦) 다음에 태괘가 오게 됐다. 태괘는 유순한 곤의 몸체가 위에 있고 굳센 건의 몸체가 아래에 있으니, 천지음양의 기운이 서로 사귀어 조화되면 만물이 생성되므로 통하여 태평한 것이 된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