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과괘(大過卦)
대과(大過)는 상규를 넘어선다는 뜻을 나타낸다. ‘진리는 왕왕 소수의 손에 장악’되기 때문에 군자는 ‘홀로 서서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결정적인 순간에 실수하지 말라’고 자주 말한다. 바로 자신이 발전할 결정적인 순간에 주눅 들지 말아야 한다. 위축돼서는 안 된다. 소심해져서도 안 된다. 용감하게 돌진하고 용감하게 맞서야한다. 실패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래야 자기에게 속한 천지를 개척할 수 있다.
너무 소심해서 이것도 겁나고 저것도 두려우면 어떻게 하여야 할까?
사람의 일생은 비상시기가 결정적인 순간이 되기도 한다.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우리가 안전하게 그 문턱을 넘어설 수 있느냐를 보면 된다.
교묘하게도 비상시기에 호방한 본성이 드러날 수 있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하지 않던가. 비상시국이 군웅의 재능이 나타나는 시기이기도 하다. 결정적인 순간에 넘어야 하는 문제를 잡아내고 잘 처리할 수 있으면 성공도 순리적으로 펼쳐지게 되리라.
기회를 붙잡는 것은 그리 쉬운 게 아니다. 제대로 파악해야만 한다. 용감하게 맞서야 한다. 실패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주역』은 말한다.
“못이 나무를 없애는 것이 대과(大過)이니, 군자가 그것을 본받아 홀로 서서 두려워하지 않으며, 세상을 피하여 은둔하여도 근심하지 않는다.”
무슨 말인가? 커다란 과도기가 도래할 때, 용감하게 돌진하고 용감하게 맞서 나아가야 한다. 추호의 두려움도 가지지 말고 강철같이 굳세어야 한다는 뜻이다.
중국의 몇 천 년의 봉건사회는 엄격한 계급관념을 만들어 냈다.
“군주가 신하에게 죽으라면 신하는 어쩔 수 없이 죽어야만 했다.”
명령에 따라야 했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절대 복종하여야 했다. 그것이 신하된 자의 유일한 선택이었다. 이런 윤리문화는 광범위하게 전해졌다. 더욱이 오늘날까지도 엄연하게 끊이지 않고 전해져 왔다. 정확성과 실제성은 접어두고 오직 상부(상급)에서 말하는 것만을 표준으로 삼는 것, 오직 책의 내용만을 전적으로 믿는 것, 이것도 그런 윤리문화의 다른 표현이다. 개성을 버리고 복종을 중시하는 현상도 그런 윤리문화의 다른 표현이다. 연공서열을 따지는 것, 권세를 맹신하는 현상도 그런 윤리문화의 다른 표현이라고 아니할 수 있겠는가?
창조성을 목숨처럼 여겼던. 이미 고인이 된 중국 과학자 왕선(王選), 그는 생전에 권세에 도전해 창조하여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현대 중국의 뛰어난 노동자 대표인 기중기 기사 허진초(許振超), 그렇게 많은 ‘특기’를 몸에 익힐 수 있었고 그렇게 많이 창조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그런 윤리문화에 젖어있던 결과는 아닐 터이다.
여러 가지 사실이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계급이 분명하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절대 복종하는 윤리문화는 창조의식을 ‘틀’ 안에 가두어 소멸시킨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개성을 버리고 권세에 굴복하면 창조성 인재는 ‘테두리’ 속에서 멈춰서 버리지 않던가. 문화를 창조하고 창조성을 배양할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계급문화가 만들어낸 복종하는 윤리도덕과는 영원히 고별해야만 한다.
이외에도 대세에 순응하는 사유습관이 아직도 존재한다. 같다는 뜻인 ‘동(同)’은 중국 전통문화 속에 많은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 적극적인 의미가 적지 않다. 오늘날에도 더더욱 중시할 가치가 있다. 그런데 부정적인 면이 많다는 것도 부정해서는 안 된다. ‘同’에는 너무나 많은 부정적인 면이 내포돼있다. 예를 들어, 앞서지도 말고 뒤지지도 말고 그저 여러 사람이 하는 대로 따라야 한다. 대세에 순응하여야 한다. 모험하지도 말고 나서지도 말고 남이 하는 대로 따라가라. 이것이 오히려 가장 안전하고 틀림없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다.
“머리를 내미는 새가 총을 맞는다.”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
“불거져 나온 서까래가 먼저 썩는다.”
“숲속의 나무가 홀로 유별나게 크면, 바람이 반드시 그것을 부러뜨린다.”
걸출한 인재는 늘 사람들의 주요 견제 대상이 된다는 말일지니. 이런 말들이 지극히 이치에 맞는 명언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어디 이뿐이랴.
“공을 세우기를 바라지는 않고 다만 잘못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또 있다.
“공로는 없지만 그래도 고생은 좀 했다.”
무슨 말인가? 비록 잘하지는 못했더라도 열심히는 했다는 뜻이다. 이것을 성공한 사람의 행동 규범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문화심리로 얼마나 많은 창조의 불꽃을 소멸시켰던가. 탐색해 나가는 발걸음을 얼마나 많이 멈추게 만들었던가. 용감하게 ‘첫 번째로 게를 먹은’ 사람은 ‘분수도 모른다’고 말하지 않던가. (‘첫 번째로 게를 먹은 사람’은 아무도 말하지 않을 때 용감하게 나서서 발언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나서는 사람을 분수도 모른다고 하는 세태는 지금도 존재한다. 감히 이목을 끄는 사람은 ‘세상을 모르고 분별없이 우쭐댄다’고 보고, 용감하게 돌진하고 부딪치는 사람은 ‘경솔하다’거나 ‘경망스럽다’고 멸시하지 않던가. 개성이 강한 사람은 ‘덜 되먹었다’고 ‘미숙’하다고 간주하지 않던가.
대체로 창신(創新)이란, 창조란, 원래 있거나 현존하는 사물을 초월한다. 아직 오지 않거나 없는 것을 포착한다. 미지의 세계를 탐색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개성의 해방이 필요하다. 독창성이 있는 분위기가 있어야 한다. 처음으로 만드는 개척정신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문화조건이 마련되어야 새로운 사고를 할 수 있도록 격려할 수 있고 신천지를 개척할 수 있으며 새로운 사물을 창조할 수 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개혁 창조하는 인물을 대할 때 사람들은 자주 완전무결이란 척도로 평가하려고 한다. 모든 일을 원만한 것을 문제 삼고 완벽한 것을 가혹하게 요구한다. 일하는 사람 뒤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눈 뜨고 지켜보는 사람들이 줄서있다. 일하지 않는 사람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일하는 사람이 뒤떨어지게 되면 모든 것이 잘못했다고 이야기한다. 용감하게 돌진하는 사람 뒤에는 손가락질 하는 사람 몇몇이 있기도 한다. 손가락질하는 사람이 오히려 ‘멋있는 사람’이 되어서는 용감하게 맞선 사람이 실수할 때면 유감이라고 말한다. 창조하려는 사람 뒤에는 끊임없이 흠을 들추어내는 사람이 서있다. 흠을 들추어내는 사람은 오히려 ‘식견이 앞섰다’고 하면서 창조하는 사람이 실패하면 무참하게 질책한다. 이런 사례, 부지기수가 아니던가.
창조는, 변화하는 ‘변(變)’을 주장한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변한다는 것이다.”
일정 정도의 의미에 있어 창조는 고유한 사물을 균형 있게 깨뜨렸고 고유한 관계를 조화롭게 돌파하였다. 더욱이 판박이 업무 추진 방식을 무너뜨렸다. 바로 그랬기 때문에 사람들은 용감하게 변혁할 수 있었고 경쟁할 수 있었다. 즐거이 모험할 수 있었고 창조에 최선을 다할 수 있었다. 창조에 대한 열정을 앞 다퉈 내뿜을 수 있었고 활력 넘치는 창조의 기세를 앞 다퉈 내달릴 수 있었다.
커다란 과도기는 비상시기다. 곤란과 좌절 앞에서 일말의 두려움도 가져서는 안 된다. 세파에 휘둘리지 않고 신념대로 행동하여야 한다. 새로운 길을 향하여 매진하여야 한다. 새로운 사상을 발전시키고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여야 한다.
비상시기에는 비상한 인물이 탄생하게 된다. 비상한 찬스를 만나게 된다.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고 하지 않던가. 그런 인물이 그런 찬스를 만나 뛰어난 영웅으로 태어나게 된다. 그런 영웅은 유별난 감화력을 갖추고 있다. 고상한 도덕을 겸비하고 있고 대담하게 앞서나가는 용기를 갖추고 있다.
사실, 비상시기에 기회는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주어진다. 그 기회를 포착하는 사람이 적을 따름이다. 기회를 포착하는 사람은 성공한 사람이 되고 기회를 놓친 사람은 일반인이 된다.
더 아쉬운 것은 분명히 기회가 도래했음을 알고 있으면서 너무 소심하여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하는 사람이 생긴다는 점이다. 앞뒤를 너무 재어 우유부단해져 버린다. 사고가 생길까 겁을 집어먹는다.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고 할 수도 없다. 그들은 그래서 기회를 순순히 넘겨줘 버린다. 뻔하지 않은가. 과도기에 용감하게 뛰어들려는 열정이 없이 머뭇거린다면 쉬이 성공할 수 없지 않겠는가.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