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괘(損卦)
손(損)은 감소(減少)다. 적게 하다, 적어지다, 감소하다, 덜다, 줄(이)다, 절약검소, 자아 약속 등으로 인신할 수 있다. 어떤 때는 잠시 감소한 것은 나중에는 오히려 증가하게 된다. 적당한 손해는 미래의 복을 불러올 수도 있다. 물건 하나를 잃으면 다른 물건을 얻게 된다. 이 세상은 이처럼 기묘하다.
손해를 보면 어떻게 하여야 할까?
『주역』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 손해란 결코 온전히 나쁜 것만은 아니다.
평상시에 손해를 봤다면? 자신이 잃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실제로는 타인에게 신임과 존중을 받게 되기도 한다. 결국 우리에게 보답으로 돌아오는 게 더 많을 수도 있다.
손해는 복이다. 사람은 모두 이익을 보려는 본성이 있다. 내가 손해 보면 타인은 이익을 보게 된다. 최대한도로 타인의 적극성을 발양할 수 있게 만들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어떤 결과를 낳게 될까? 우리 사업도 흥성하고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
그렇더라도 현실 생활에서 주동적으로 손해 보려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 어찌 인성의 약점이라고만 말할 것인가. 본래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데 그것을 거절하기 어디 쉽겠는가? 어찌 대다수가 멀리 앞을 내다보는 전략적 안목이 부족하다고만 말할 수 있겠는가. 눈앞의 작은 이익을 버리고 멀리에 있는 큰 이익을 얻기란 그리 쉽지 않음일지니.
강자는 항상 강하다. 강자는 본전을 잃을 때가 많다. 그렇다면 약자는? 손해를 보려하여도 손해 볼 것이 없을 때가 많다. 그렇기에 약자는 실제로 생존하기가 무척 어렵다.
『주역』은 말한다.
“세 사람이 가면 한 사람을 덜어내고, 한 사람이 가면 그 벗을 얻는다.”
세 사람이 길을 간다고 치자. 우리가 조금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한 명과는 더 친하게 되고 한 명과는 소홀하게 된다. 그렇게 우리는 둘 중 한 명의 감정을 상하게 만들게 된다. 손해를 보는 것이다. 우리가 의심을 품게 되면 누가 친하고 누가 소홀한지 알 수 없게 된다. 그중 한 사람은 뜻을 같이하는 사람을 찾지 못하여 떠나게 된다.
그래서 우리 혼자 길을 간다면 어떻게 될까? 분명히 고독하다는 감정이 생기게 된다. 그러면 갈망하게 된다. 겸허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분명 동반자를 얻게 된다.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가지고 있는 것을 제외한 다른 물건은 모두 잃은 것이다. 잃어버린 것 이외에는 모두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 사람에게는 득실이 있다. 잃은 것이 있으면 얻는 것이 있다. 득실 사이에서 사람은 살아간다.
어떤 득실은 우연에 속하기도 한다. 지갑을 주웠다고 하자. 우연하게 얻은 것이다. 반대로 지갑을 잃어버렸다고 하자. 그 또한 우연하게 잃어버린 것이다. 지갑을 주웠는데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고 하자. 그러면 미덕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얻는 것이 있으면 잃어버리는 것이 있다. 지갑을 잃어버렸는데도 ‘한 번 좌절을 당하면 그만큼 현명해진다’라는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다면 잃는 것 중에서 얻는 것이 있는 것이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다.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게 있게 된다. 얻고 잃는 것, 얻으면 잃게 되고 잃으면 다시 얻게 된다. 이것이 생명의 과정이다.
어떤 득실은 필연적인 것이 있다. 생을 얻으면 반드시 생을 잃게 된다.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다는 말이다. 이런 법칙을 아는 사람 중에서 얻는 게 있는 것은 똑 같지만 그를 대하는 태도는 서로 다르다. 소극적인 태도가 있다.
“오늘 아침 술 있으면 오늘 아침 취하고”1), “인생에서 뜻대로 되었을 때 모름지기 즐겨야 하나니.”2)
반면에 적극적인 관점이 있다.
“사람의 일생은 짧고도 짧다. 절대 헛되이 생명을 낭비하지 마라.”(계선림季羨林)
전자의 관점은 그 법칙을 이해하는 데에 그치고 있다. 후자는 확실하게 깨달은 것이다. 물론 앞에서 말한 법칙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인생 전반에 대한 이해라 할 수 있다.
일득일실(一得一失)에 끙끙 앓고 이해득실에 전전긍긍하는 사람도 있다. 인간은 ‘1’에 불과하다고 누가 그랬지 않은가. 어떤 때에는 끝끝내 마음속에 떨쳐버리지 못하고 목숨 걸고 ‘1’ 뒤에 ‘0’을 붙이려고 건강을 상해가면서 끊임없이 애쓰지 않던가. 결국에는 ‘1’ 뒤에 ‘0’을 얼마 붙이든지 간에 연기나 구름같이 사라져 없어져 버리나니. ‘1’ 때문에 마침내 쓰러진 것이나 진배없다.
우리는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그리 아파할 필요가 없다. 후회 막급할 필요가 뭬 있는가. ‘1’은 또 있을 터인데. 기왕에 잃어버렸는데도 그걸 또 후회하면 낭비가 아니던가.
비를 흠뻑 맞아 물에 빠진 병아리처럼 됐다고 가정해보자. 비를 홀딱 맞은 때의 느낌을 계속해 되새기면 결과는 갈수록 비참해지고 결국에 자기가 원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오지 않겠는가. 이왕 그렇게 된 바에야 다시 후회하지 말고 새로이 시작하는 게 옳지 않은가. 이미 땅바닥에 쏟은 물이거늘, 울면 뭐할 것인가.
잃어버린 것을 슬퍼할 필요가 없다. 얻었다손 그리 기뻐할 필요도 없다. 얻을 수 있는 것은 얻게 된다. 얻을 수 없는 것을 목숨 걸고 얻으려고 하지 말자. 서지마(徐志摩)가 말했잖은가.
“얻으면 행운이요, 얻지 못하면 운명이다. 그것뿐이다.”
손실에 직면하였을 때 생각해 보자. 손기이인(損己利人)이라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남을 이롭게 한다면? 자신은 손해를 보면서라도 욕망을 제어한다면? 자신의 행위나 총명함, 포부가 억제된다면? 마땅히 좋은 일이라 생각하여야 한다. 그래야 우리 스스로에게 이로움이 있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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損卦 ䷨ : 산택손(山澤損) 간(艮: ☶)상 태(兌: ☱)하
손괘는 믿음이 있으면 크게 착하고 길하며 허물이 없어서, 바르고 곧게 할 수 있기에 가는 것이 이로우니, 어디에 쓰겠는가? 그릇 둘로도 제사지낼 수 있다. / 손괘는 믿음이 있으면 크게 착하고 길하며 허물이 없고, 곧게 할 수 있으며, 가는 것이 이로우니, 어디에 쓰겠는가? 그릇 둘로도 제사지낼 수 있다.(損,有孚,元吉,无咎,可貞,利有攸往,曷之用.二簋,可用享.)
세 사람이 가면 한 사람을 덜어내고, 한 사람이 가면 그 벗을 얻는다.(三人行,則損一人,一人行,則得其友.)
[傳]
손괘는 「서괘전」에 “해(解)는 느슨해짐이니, 느슨해지면 반드시 잃는 것이 있으므로 손괘(損卦䷨)로 받았다”라고 했다. 늘어지고 느슨해지면 반드시 잃는 것이 있게 되고, 잃으면 손실되니 손괘가 해괘를 이은 것이다. 괘의 모양은 간괘(☶)가 위에 있고 태괘(☱)가 아래에 있는데 산의 몸체는 높고 연못의 몸체는 깊다. 아래가 깊으면 위가 더욱 높으니 아래를 덜어서 위를 보태는 뜻이 된다. 또 연못이 산 아래 있어서 그 기운이 위로 통하여 윤택함이 초목과 만물에 미치니, 이것이 아래를 덜어서 위에 보태는 것이다. 또 하괘는 태괘라는 기쁨이 되어 세 효가 모두 위로 호응하니 이는 기쁨으로 위를 받드는 것으로 역시 아래를 덜어 위를 보태는 뜻이다. 또 아래의 태괘가 태괘로 된 것은 육삼으로 변했기 때문이고, 위의 간괘가 간괘로 된 것은 상구로 변했기 때문이다. 삼효는 본래 굳센 양이었는데 부드러운 음이 되고, 상효는 본래 부드러운 음이었는데 굳센 양이 됐으니 또한 아래에서 덜어 위에 보태는 뜻이다. 위에서 덜어 아래에 보태면 익괘가 되고, 아래에서 취하여 위에 보태면 손괘가 되니, 남의 윗자리에 있는 자가 은택을 베풀어 아래에 미치면 보탬이고, 그 아래에서 취하여 자신에게 두텁게 하면 덜어냄이다. 성루의 흙에 비유하면 위에서 덜어 그 터전을 북돋우면 위아래가 편안하고 튼튼할 것이니, 어찌 유익이 아니겠는가? 아래에서 취하여 위를 높게 올리면 위태롭고 추락할 것이니, 어찌 손실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손괘(損卦)는 아래에서 덜어 위에 보태는 뜻이고, 익괘(益卦)는 이와 반대이다.
1) 「스스로 근심을 풀다(自遣)」(唐·나은羅隱)
得則高歌失則休(득즉고가실즉휴), 잘 풀리면 노래하고 안 풀리면 할 수 없고,
多愁多恨亦悠悠(다수다한역유유). 근심 많고 한 많아도 느긋할 뿐이라오.
今朝有酒今朝醉(금조유주금조취), 오늘 아침 술 있으면 오늘 아침 취하고,
明日愁來明日愁(명일수래명일수). 내일 할 근심일랑은 내일 근심하세나.
2) 「술을 권하며(將進酒)」(唐·이백李白)
人生得意須盡歡(인생득의수진환), 인생에서 뜻대로 되었을 때 모름지기 즐겨야하나니,
莫使金樽空對月(막사금준공대월). 달을 마주하고서 금으로 만든 술통 헛되이 두지 마시게.
天生我材必有用(천생아재필유용), 하늘이 나를 낳았으니 반드시 쓰임이 있을 터이니,
千金散盡還復來(천금산진환복래). 천금을 다 써버리면 또 다시 생기는 것이거늘.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