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은 말한다 :
비상시기에 비상한 수단을 가지고 비상한 일을 하라. 한 가지 방법에만 구애되지 말라. 용감히 창조하라.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
거리낌 없이 얘기해 보자. 무슨 일을 하던 간에 사람은 모두 자신이 성공하기를 바라지 않더냐. 그런데 성공은 사람에게 쉽사리 웃는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사업에 대한 추구가 광명을 향한 행진이라고 한다면 실패라는 거꾸로 선 그림자는 그림자처럼 어디를 가든 따라오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보자. 투자자는 파산의 위험을 감수하여야 한다. 경기 참가자는 도태할 수 있다는 걱정이 생길 수 있다. 시험을 보는 사람은 낙방할 우려가 있고 과학 연구자는 ‘심기만하고 수확하지 못하는’ 지경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이 있다. 그렇게 실패는 그림자처럼 우리를 따라온다. 그런데 실패란 두렵기는 하지만 실제로 우리를 훼멸시키는 것은 실패 그 자체가 아닐 경우가 많다. 실패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태도가 문제일 경우가 많다.
어떤 일을 하던 우리는 실패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아니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실패가 도래한 후에 우리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린다면 다음번에 문을 두드리는 것은 어쩌면 성공일 가능성이 많다. 유감인 것은, 성공이 문을 두드리기 전에 대다수 사람이 떠나버린다는 점이다.
실패는 분명 우리 사업의 장애물이다. 우리를 멍이 들도록 넘어뜨릴 수도 있다. 그런데 실패는 사업의 디딤돌이 되기도 한다. 우리를 더 높이 올려다볼 수 있도록 만들기도 한다. 진정으로 교훈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면 된다. 실패를 발판으로 삼으면 실제로 우리를 완벽한 길에 올려놓고 매진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기도 한다.
여러 상황 속에서 실패는 성공 교향악의 전주일 따름이다. 성공을 분만하기 전 극통이다. 실패 속에는 이미 성공의 동기가 포함돼 있다. 사업상 성공한 사람은 대부분 일찍이 실패를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실패를 충분히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이다.
실패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추구하는 목표가 높으면 높을수록 실패를 경험할 확률이 많다. 실패로 쓰러질 위험성이 더 많다. 영국 물리학자이면서 수학자인 켈빈(Kelvin)은 일찍이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나는 55년 동안 끊임없이 분투하였다. 과학 발전에 최선을 다했다. 나를 가장 힘들게 만든 특별한 점을 한 단어로 말한다면, 그것은 실패라는 말이다.”
얼마나 많은 실패를 경험했을까? 많은 실패를 경험했기에 저명한 물리학자 겸 수학자가 될 수 있었다. 다른 쪽으로 보면 우리는 많은 실패를 피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것을 해보지 않으면 된다는 전제가 있으면 된다. 미국 캔자스시티에 유진 브라이스(Eugene Brice)라는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실패를 피하는 아주 쉬운 방법이 있습니다. 나는 한 번도 테니스 선수권대회에서 져본 적이 없습니다. 공직 선거에서 한 번도 낙선한 적이 없습니다. 독창 콘서트에서 한 번도 가사를 잊어버려 웃음거리가 되 본 적이 없습니다. 그것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을 해보려고 하는 사람만이 실패의 위험을 안게 됩니다.”
이 이치는 분명 맞다. 어떤 행동이 결과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목사일 따름이다. 그는 테니스 선수도 아니요 음악가도 아니며 미국 대통령은 더더욱 아니다. 앞으로 나가려는 길에 힘듦과 장애가 놓여있는 것을 보고, 실패할 위험이 두려워 주저주저 나아가지 않으면 그 결과는? 어떤 실패도 피할 수 있다. 그런데 성공은 영원히 숨어버린다.
창조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사가 필요하다. 과학은 실패를 겁내지 않는 용사가 필요하다. 현대화 사업도 마찬가지로 실패를 무서워하지 않는 용사가 필요하다. 우리의 생활, 사업과 세계의 일부분은 실패로 구성돼 있다. 성공은 바로 그것과 비교 속에 존재한다. 실패가 있기에 성공이 찬란한 광채를 뿜어내는 것이다. 이러한 부분이 없다면 인류가 그것을 정복하지 않을 것이고 사물도 발전의 동력을 잃게 될 것이다. 세계는 있어야만 하는 균형과 조화를 잃게 될 것이다.
사업의 실패자는 마찬가지로 사업의 헌신자이다. 단지 그런 헌신은 자기 희생정신이 필요할 뿐이다. 창조를 위한 실패는 모방하여서 얻은 성공보다도 가치가 있다. 여태껏 실패를 맛보지 않은 사람은 영원히 위대해질 수 없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용감하게 실패를 마주할 용기를 갖추어야 한다.
사업 발전의 중요한 시기에 어려움이 겹겹이 쌓이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도처가 가시밭길이다. 일을 시작하기 전, 인내심이 필요하다. 서슴지 않고 뛰어들 용기가 필요하다. 실패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만약 우리가 이 점을 해낼 수 있다면 기적은 우리 곁에 다가온다는 점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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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過卦 ䷛ : 택풍태과(澤風大過), 태(兌 : ☱)상 손(巽 : ☴)하
대과(大過)는 들보가 휘어지니, 가는 것이 이로워 형통하다.(大過,棟橈,利有攸往,亨.)
「상전」에서 말하였다 : 못이 나무를 없애는 것이 대과(大過)이니, 군자가 그것을 본받아 홀로 서서 두려워하지 않으며, 세상을 피하여 은둔하여도 근심하지 않는다.(象曰,澤滅木,大過,君子以,獨立不懼,遯世无悶.)
[傳]
대과괘(大過卦)는 「서괘전(序卦傳)」에 “이(頤)는 기름이니, 기르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대과괘(大過卦)로 받았다”라고 했다. 무릇 만물은 길러진 뒤에 이루어질 수 있고 이루어지면 움직일 수 있다. 움직이면 지나치게[과(過)] 되니, 대과괘(大過卦)가 이 때문에 이괘(頤卦)의 다음이 됐다. 대과괘는 위는 태괘(兌卦☱)이고 아래는 손괘(巽卦☴)이니, 못[택(澤)]이 나무[목(木)] 위에 있음은 나무를 없애는 것이다. 못은 나무를 윤택하게 하고 길러주는 것인데 마침내 나무를 없애는 데에 이르니, 이것이 대과(大過)의 뜻이다. ‘대과’란 양이 지나친 것이다. 그러므로 큰 것이 지나침과 지나침이 큼과 대사(大事)의 지나침이 된다. 보통사람보다 크게 뛰어난 성현의 도덕과 공업 및 보통의 일보다 크게 뛰어난 모든 일이 다 여기에 해당한다. 성인이 인도(人道)를 다하는 것이 이치에 지나친 것이 아니다. 천하의 바른 이치로써 일을 다루나, 잘못을 바로잡는 작용[용(用)]이 조금 중(中)보다 지나치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행함에 공손을 지나치게 함과 초상(初喪)에 슬픔을 지나치게 함과 씀에 검소함을 지나치게 함과 같은 것이 이것이다. 바로잡기를 조금 지나치게 한 뒤에야 중(中)에 미칠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중(中)을 구하는 작용이다. 이른바 ‘대과’라는 것은 보통의 일 가운데에서 큰 것일 뿐이지, 이치에 지나침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크기 때문에 항상 볼 수가 없고, 항상 보는 바에 비하여 크기 때문에 ‘대과’라고 이른 것이다. 요임금과 순임금이 선양(禪讓)하고 탕왕과 무왕이 방벌(放伐)한 것과 같은 것은 모두 도(道)를 말미암은 것이니, 도는 중(中) 아님이 없고 항상 되지 않음이 없으나, 세상 사람들이 항상 보지 못하기 때문에 ‘보통보다 크게 지나치다[대과(大過)]’고 이르는 것이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