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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그 진실을 찾아서(52)… 제주공항에서 기적같은 4·3유해 발굴

2007년부터 시작된 제주국제공항 4·3희생자 유해발굴사업은 충격 그 자체였다. 활주로 바로 옆에서 뒤엉켜져 압착된 유해들이 수없이 발굴됐다. 4·3 유해들은 당시 무차별적인 학살을 입증하듯 60년 만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공항 내 유해 발굴은 1, 2차로 진행됐다. 2007년에 유해 127구, 2008년부터 2009년까지 261구를 찾아냈다. 결국 공항 안에서 유해 383구를 발굴한 것이다.

 

시신없는 희생자 5천명 추산
4·3희생자 유해 발굴사업은 반세기 넘게 풀지 못한 숙제였다. 4·3 당시 희생자 중에는 ‘시신 없는 희생자들’이 많다. 그 숫자가 무려 4천~5천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불법적인 군법회의에 의해 징역형을 선고받고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 끌려갔다가 6‧25전쟁 발발 직후 군‧경에 의해 집단 처형돼 묻힌 장소조차 모르는가하면, 제주도내 곳곳에 암매장된 사례도 있다.

 

그 중 일부는 유족들의 노력에 의해 유해를 수습하고 안장된 일이 있다. 1956년 6년 만에 132구의 시신을 거두었지만 뒤엉켜진 유골을 일일이 구분할 수 없어서 ‘백 할아버지의 한 자손’이란 뜻의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란 이름의 묘역(대정읍 상모리 소재)이 만들어진 것이 대표적 사례다.

 

남원읍 중산간마을 주민들이 매장된 ‘현의합장묘(顯義合葬墓)’도 마찬가지 경우이다. 4·3 당시 시신이 구별되지 않은 채 커다란 3개의 봉분에 나뉘어 매장됐던 현의합장묘의 유해는 2003년 의귀리에서 수망리로 이장됐는데, 이장 당시 39구의 유해가 확인됐다.

 

그러나 안타까운 사례도 있다. 1992년 발굴된 ‘다랑쉬굴 유해’ 11구는 “양지바른 곳에 안장해야 한다.”는 여론에도 불구하고, 발굴 45일 만에 ‘보이지 않는 손’의 작동에 의해 한 줌의 재로 변해 바다에 뿌려졌다.

 

다랑쉬굴 유해처리 타산지석 삼아
나는 그런 경험을 하면서 4·3유해 발굴사업은 국가사업으로 추진하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2003년 4·3진상조사보고서의 조사결과를 토대로 대정부 7대 건의사항 초안을 쓸 때, ‘집단매장지 및 유적지 발굴사업 지원’을 6번째 항목에 삽입하면서, 다른 건의사항보다 길게 썼던 기억이 난다.

 

즉, “정부는 집단매장지 및 유적지 발굴사업을 지원해야 하며, 유해 발굴 절차는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의 존엄성과 독특한 문화적 가치관을 충분히 존중해 시행해야 한다.”고 표현한 것인데, 그대로 채택됐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제주도는 2005년 제주4·3연구소에 의뢰해 ‘제주4·3유적 종합정비 및 유해 발굴 기본계획’을 수립했다.

 

2006년 정부 예산에 4·3희생자 유해 발굴 예산 10억 원이 처음으로 반영됐다. 그해 4·3희생자 위령제에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 참석한 노무현 대통령도 “유해와 유적지를 발굴하는 일을 지속적으로 지원해 나갈 것”이라고 밝혀 힘을 보탰다.

 

이렇게 4·3희생자 유해 발굴계획이 하나하나 추진되던 2006년 5월,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제주시 화북동 하천 정비 공사장에서 4·3사건 당시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해 3구가 발견됐다. 이는 유해 발굴의 필요성을 더욱 부각시키는 계기가 됐다.

 

화북지역 유해 발굴조사를 통해 모두 11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특히 별도봉 일본군 진지동굴 안에서 8구의 유해와 유류품 188점을 찾아냈다.

 

이런 과정을 거쳐 2007년부터 제주국제공항 활주로 옆에서 본격적인 유해 발굴작업이 시작되자 이목이 쏠렸다. 4·3 진상규명작업이 시작되면서부터 예전 ‘정뜨르 비행장’으로 불렀던 제주국제공항에 많은 시신들이 암매장됐다는 이야기가 계속 들려왔다.

 

실제로 그 현장을 목격했다는 증언자들도 있었다. 주로 불법적인 군법회의에 의한 학살과 6‧25전쟁 발발 직후 예비검속에 의한 집단 학살 피해자들이었다. 당시 비행장 안에는 커다란 구덩이들이 있어서 수백 명씩 암매장하는데 용이했다는 것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하늘이 도왔다”
그러나 공항이 어떤 시설인가. A급 국가보안시설로, 공항 주변에서 사진 한 장이라도 잘못 찍었다간 혼쭐나던 시절도 있었다. 과거 군사정권 시절이라면 언감생심 어찌 그런 곳에 들어가서 유해를 발굴하겠다고 생각이라도 했겠는가.

 

그런데 세상은 변해 있었다. 그리고 하늘이 도왔다. 저가 소형항공기의 출현으로 그동안 쓰지 않던 남북활주로를 활용하게 되면서 주변 부지에 대한 정비가 필요했다.

 

4·3희생자 유해들은 바로 그 남북 활주로 주변에 묻힌 것으로 추정됐다. 그 틈새를 비비고 들어가 발굴허가를 받은 것이다.

 

 

2007년 8월부터 본격 추진된 제주국제공항 내 4·3희생자 유해 발굴사업은 제주도로부터 위탁받은 제주대학교와 제주4·3연구소 발굴 팀이 공동으로 추진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국가 최상위 보안시설인 국제공항 안에서 과거 국가권력에 의해 희생된 유해들을 발굴할 수 있었던 것은 세상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첫째는 권위주의정권이 민주정권으로 바뀐 것을 우선 꼽을 수 있다. 둘째는 국가원수가 2006년 4·3희생자 위령제에 참석해서 유해 발굴을 지속적으로 지원하겠다고 공표한 점이다.

 

셋째는 2006년 12월 국회가 ‘4·3 수형자’를 희생자 범위에 포함하는 법 개정을 한 점이다. 넷째는 2007년 3월 국무총리가 주재한 정부위원회에서 제주공항 안에 암매장된 군법회의 사형수들까지 4·3희생자로 결정한 점이다.

이런 변화가 있었기에 평소 까다롭다는 공항당국도 유해 발굴 허가에 유연하게 접근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공항 내 유해 발굴은 1, 2차로 실시됐다.

 

1차는 남북 활주로 북서쪽 지점에서 2007년 8월부터 그해 말까지 진행돼 유해 123구를 찾아냈다. 2차는 남북 활주로 북동쪽 지점에서 2008년 9월부터 2009년 6월까지 모두 261구의 유해를 발굴한 것이다.

 

 

1차 발굴지점은 6‧25전쟁 직후인 1950년 8월 예비검속된 사람들이 암매장된 곳으로 추정되던 곳이다. 연구소 조사팀은 문헌과 목격자들의 증언을 종합해서 암매장지 위치를 추적했다. 공항 경내가 넓었기 때문에 장소를 특정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옛날 지적도가 길잡이 역할을 했다. 이 구 지적도는 공항 확정 이전의 것으로, 발굴 팀이 4·3중앙위원회 김종민 전문위원으로부터 입수한 것이다.

 

김 위원은 미국에서 한국 과거사 진상규명에 혼신의 열정을 쏟다가 몇 년 전 타계한 이도영 박사로부터 이 구 지적도를 건네받았다. 이 지적도 위에는 이 박사가 조사한 유해 매몰 예상 지점을 형광펜으로 표시까지 됐었는데, 초기 위치를 찾는데 단초를 제공했다.

 

그러나 유해 발굴까지 많은 시련이 있었다. 첫째는 공항 확장공사를 하면서 과거의 구덩이를 매립했기 때문에 원래의 땅을 찾아내는 작업이 쉽지 않았다.

 

원래 지형보다 3~5m 가량 높게 매립되어 있어서 넓은 면적의 매립토를 걷어내느라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얼마 후 파편처럼 흩어진 뼈 조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공항 확장공사에 휘말려 부서진 유해들이었다.

 

 

형의 이름이 새겨진 도장도 나타나
드디어 거대한 암매장 구덩이를 찾아냈다. 그때부터 정밀 발굴한 결과 그 구덩이는 폭 1.5m, 길이 32m에 이르렀다. 그 구덩이를 중심으로 유해 123구와 유류품 659점을 수습했다.

 

유류품은 카빈 소총 및 M1 소총 탄피, 안경, 금보철, 의안, 단추, 머리빗, 신발, 사진첩 등이었다. 특히 실명이 새겨진 나무도장 2점이 발굴됐다.

 

그 도장에는 ‘梁奉錫’(양봉석), ‘熙銓’(희전)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희생자 명부를 중심으로 추적한 결과, 그 도장의 주인은 의귀초등학교 교사였던 양봉석, 대정초등학교 교사였던 김희전으로 그 신원이 밝혀졌다.

 

 

두 사람 모두 학살 당시 19세의 꽃다운 나이였다. 6‧25가 일어나자 서귀포경찰서(당시 이름은 제2구경찰서)에 의해 예비검속된 사람들이었다.

 

양봉석은 현의합장묘 4·3유족회 양봉천 회장의 형이었다. 양봉천 회장은 “수장된 것으로 알았던 형님을 차디찬 흙 속에서 암장된 모습으로 만나니 눈물이 가린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이렇게 희생자의 신원을 밝혔던 발굴 팀에게 두 번째 시련은 바로 폭우였다. 그해 가을엔 유독 비가 많이 왔다. 9월 중순 제주를 온통 삼킨 A급 태풍 ‘나리’ 때는 하마터면 연구원들이 큰 변을 당할 뻔 했다.

 

그날은 일요일이어서 쉬는 날이었는데, 폭우가 쏟아지자 발굴현장의 훼손을 염려한 조미영‧고성만‧박근태 등 3명의 연구원이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시간당 100㎜가 쏟아지는 폭우로 고립되고 말았다. 해안도로 범람으로 차도 움직일 수 없었다. 아슬아슬한 순간을 겨우 넘겨 생환할 수 있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2차 발굴은 남북 활주로 북동쪽 지역에서 2008년 9월부터 시행됐다. 1949년 10월 군법회의 사형수 249명이 처형된 것으로 추정되던 곳이었다.

 

4·3중앙위원회는 이미 이들이 불법적인 군법회의에 의해 억울하게 처형됐다고 규정하고, 4·3희생자로 결정한 바 있다. 이곳에서 뒤엉켜 처형된 유해 261구와 유류품 1,311점을 찾아낸 것이다.

 

2차 발굴 때 현장 발굴을 지휘하던 고고학자(박근태 연구원)가 그 무렵 250구의 유해를 안고 나오는 꿈을 꾸었는데, 실제로 발굴된 유해수와 거의 일치해서 4·3영령들이 작용하고 있는가하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그리 넓지 않은 구덩이에 200여 구의 시신이 압착된 상태로 여러 층에 겹쳐 있어서 발굴자들의 눈시울을 붉게 만들었다.

 

남북 활주로와의 거리는 72m. 활주로 옆 70m 이내의 발굴은 금지되어 있어서 하마터면 세상 빛을 보지 못할 뻔했던 유해들이었다. 문명사회에서 이런 유해들이 60년 동안 방치된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DNA검사로 89구 신원 확인
2009년까지 발굴된 총 393구의 유해는 제주대학교 의과대학으로 옮겨져 신원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이 유해와 관련성이 있는 유족들을 대상으로 채혈 작업도 진행됐다.

 

이렇게 모아진 혈액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으로 이송돼 유전자 감식을 거쳤다. 이와 함께 보철이나 골절 유무 등을 확인하는 체질인류학적 분석도 진행됐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희생자 신원이 하나 둘 밝혀지기 시작했다.

 

제주국제공항 유해 발굴사업이 마무리되는 시점에 이르자 여러 형태의 위령행사도 열렸다. 2009년 4월 5일 유해 발굴 현장에서 제주민예총 주최로 ‘해원상생굿’이 벌어졌다. “짓눌린 육신 환생꽃으로 살아나소서”란 주제의 이날 행사는 사물놀이, 추모노래, 추모춤, 상생굿으로 이어졌다.

 

최종 유해 운구에 앞서 6월 8일과 9일 이틀간 유족과 일반도민들이 참여하는 발굴 유해 조문행사도 열렸다. 4·3희생자유족회 제주위원회(위원장 송승문)가 주관한 이 행사는 60년 동안 묻혔던 공항을 떠나는 영령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추모하기 위한 제례였다.

 

 

 

 

 

제주시내를 관통해서 제주대학교에 이르는 운구행사도 엄숙하게 진행됐다. 결국 DNA검사를 통해 89구의 유해 신원이 확인됐다. 60여 년 만에 희생자와 가족들이 재회하는 특별한 만남이 이뤄진 것이다.

 

이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 희생자 유해 발굴을 통해 신원이 확인된 전국 최초의 사례로 기록됐다.

 

‘북부 예비검속’ 500명의 종적은?
그런데 막상 발굴된 유해의 신원이 확인되면서 일부 유족들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제주공항에 묻혔을 것으로 예상됐던 ‘북부 예비검속 희생자’ 500여 명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북부 예비검속 희생자란 6‧25전쟁 직후 제1구경찰서(제주경찰서)에 수감됐다가 종적이 없어진 사람들을 말한다.

 

이와는 달리 수장됐을 것으로 추정되던 제2구경찰서의 예비검속자 일부는 앞의 도장 임자처럼 공항 발굴 현장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땅속에 묻혔던 유해가 세상 밖으로 나오면서 학살 암매장의 역사적 실체도 새롭게 드러난 것이다.

 

그렇다면, 500명에 이르는 북부 예비검속 희생자들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두 가지 경우의 수를 유추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이번 발굴 작업에서 파보지 못한 공항 활주로 밑이나 활주로 근처에 묻혔을 가능성이다. 다른 하나는 제주 앞바다에 수장되었을 개연성이다. 그 어느 경우든 실체적 진실을 찾는 일이 쉽지 않다. 그럼에도 진실 찾기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될 일이다,

 

발굴 유해에 대한 사후 봉안 문제도 대두됐다. 우리에게는 1992년 발굴됐던 ‘다랑쉬굴’ 유해들이 안장되지 못하고 화장 후 바다에 뿌려졌던 아픈 체험이 있다. 그래서인지 공항 유해 등이 발굴되면서 이번만은 예의를 다해서 유해를 엄숙히 봉안해야 한다는 여론이 드높았다.

 

2009년 3월 내가 제주4·3평화재단 상임이사로 부임했을 때, 4·3평화공원 안에 유해 봉안관을 짓는 것으로 결론이 나서 그 준비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나는 발굴 유해를 안치할 뿐만 아니라 유해 발굴 상황을 제대로 알리는 전시시설 마련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래서 이 분야 전문가, 관계 공무원과 함께 중국 난징대학살기념관을 벤치마킹하기 위해 직접 방문한 적이 있다.

 

중국 측 주장에 의하면, 1937년 일본군이 자행한 전쟁 범죄에 의해 40일 사이에 중국인 30만 명이 살해됐다고 한다. 이 기념관 속에는 유골 발굴 현장뿐만 아니라 유골 자체를 그대로 전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제주특별자치도 환경부지사로 자리를 옮기면서 그 업무에 더 관여하지 못했다.

 

2011년 3월 26일, 제주4·3평화공원 경내에서 4·3유족회 주최로 ‘제주4·3 행방불명인 발굴유해 영령 봉안식’이 거행됐다.

 

 

나는 그때는 부지사 직을 그만둔 때라 민간인 신분으로 참석했는데, 그때 본 전시시설은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쨌든 신원이 확인된 유해 중 일부를 그 유족이 찾아간 사례도 있지만, 대부분 이 봉안관에 안치됐다.

 

양문흠 교수(동국대학교 철학과)도 DNA검사를 통해 60여 년 만에 아버지의 유해를 찾았다. 서울에서 가족들과 함께 내려온 그는 유해 봉안에 앞서 별도의 위령행사를 가졌다.

 

그때 아버지에 대한 회고와 험난한 삶을 살아온 여정을 진솔하게 밝혀 주위를 숙연케 만들었다. 철학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삶 자체가 한편의 드라마 같았다.

유해 봉안관 갖춘 것은 그나마 다행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유해는 유전자 감식 확인번호를 붙여 안치했다. 그나마 이런 봉안시설을 갖출 수 있었던 것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제주4·3의 경우 진상조사와 희생자 심사 및 결정, 유골발굴 및 안치문제가 순차적으로 해결되었지만, 그렇지 못한 과거사 사건이 대부분이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지난 2007년부터 2009년까지 전국 13개소에 대한 발굴사업을 벌여 한국전쟁 전후 희생된 유해 1,617구와 유품 5,600점을 발굴했다.

 

그 유해들은 현재 충북대학교에 보관되어 있다. 진화위는 유해 안치시설이나 위령탑, 추모관, 추모공원 하나 마련하지 못한 채 2010년 문을 닫고 말았다. 그에 비하면 제주4·3은 발굴유해 봉안관까지 갖추었으니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 아닌가.

 

☞양조훈은? = 4·3 광풍이 휩쓸던 1948년 12월 제주읍에서 태어났다. 1972년부터 27년 동안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88년 제주신문 4·3취재반장을 맡아 「4·3의 증언」을 연재하며 운명적으로 4·3과 조우했다. 이후 제민일보 4·3취재반장과 편집국장 등을 거치며 4·3의 진실을 밝히는「4·3은 말한다」(456회)를 10년 넘게 연재했다. 1999년 신문사에서 해직당한 이후에는 4·3특별법쟁취연대회의 공동대표를 맡아 4·3특별법 제정 운동에 앞장섰다. 2000년 이후 4·3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 수석전문위원으로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작성의 실무책임을 맡아 공권력의 잘못을 밝혀냈고, 이 진상조사보고서를 근거하여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사과를 이끌어내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뉴욕타임스』(2001)는 저자를 “4·3 학살을 조사 연구해온 저널리스트”로 소개하고, “그의 소망은 나라 전체가 이 역사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4·3평화재단 초대 상임이사, 제주특별자치도 환경부지사도 지냈다. 현재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4·3평화교육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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