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4.3을 맞는다. 무섭고 시렸고 한스러웠던 통한의 역사다. 목소리는 커녕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던 4·3은 지금으로부터 27년여 전 제주의 한 언론사 취재진들의 용기로 세상 밖으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잔인무도였고 통곡이었다. 그 시절부터 20여년에 걸쳐 이뤄진 4·3 진상규명의 역사에 중심부에 있었던 양조훈 전 제주도 부지사의 육필 비사를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역사적인 4‧3연구소 출범
1989년 5월 10일 제주4‧3연구소가 출범했다. 연구소 개소식은 제주시 용담동 쌀가게 2층 사무실에서 조촐하게 진행됐다. 4‧3연구소는 1987년 서울에서 결성된 제주사회문제협의회(제사협) 팀과 1988년부터 제주도에서 은밀하게 4‧3 체험자들을 대상으로 증언 채록을 벌이던 현지 팀과의 결합으로 태동됐다.
제사협은 출범 직후인 1988년 4월 3일 서울에서 4‧3 학술대회를 가진 이래, 이런 일을 지속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연구소 설립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연구소 설립에 필요한 자금도, 연구에 필요한 기본적인 자료도, 연구소를 맡아 일할 사람도 없는 상태에서 연구소 설립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제주에 내려가 연구소의 실무를 맡을 사람이 없는 지금으로서는 시기상조이니 조금 더 준비를 하고난 뒤 설립하자는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을 때 홍만기 회원이 자기가 제주로 가겠다고 자청하고 나서는 바람에 주위를 놀라게 했다고 한다.
때마침 제주도 현지에서도 증언조사를 하는 팀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연구소 설립이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제주 현지팀은 굿 연구를 하는 문무병을 중심으로 김창후‧양성자‧이석문‧강은숙‧김기삼‧강태권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그들은 애월‧조천읍 일대를 돌아다니며 4‧3 증언조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증언조사를 하면서도 4‧3을 전면에 내세울 수 없어서 마을지 조사를 한다면서 서서히 4‧3 이야기를 끌어내고 있었다.
이렇게 접목된 두 팀이 축이 되어 4‧3연구소가 문을 열었다. 초대 이사장에 정윤형(홍익대 교수, 제사협 회장), 소장에 현기영(소설가, 제사협 부회장), 사무국장에 문무병, 간사에 홍만기 체제로 닻을 올렸다. 개소식과 함께 그동안 제주 현지 팀이 작업한 증언 자료집 <이제사 말햄수다> 제1권 출판기념 독후감 발표행사도 가졌다. <이제사 말햄수다> 제2권은 그해 8월에 발간되었다.
개소식에서 문무병 사무국장은 연구소 설립 취지를 “많은 사람들이 무고하게 죽어간 4‧3 이후 우리는 패배감과 허무주의에 사로잡혀 현실을 외면해 왔다. 진상규명으로 억울한 죽음들의 누명을 벗기고 우리 시대의 명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고자 연구소를 설립하게 됐다.”고 밝혔다.
나는 이날 4‧3연구소 개소식에 제주신문 4‧3취재반장의 자격으로 참석하여 취재반의 활동 계획을 설명하고, 4‧3연구소의 출범은 자료 축적과 학술적 논의의 토대를 마련한다는 점에 뜻이 있다면서 그 출발을 축하했다.
연구소는 그 후 4‧3피해 증언조사, 자료수집, 연구 및 출판활동, 유적지 발굴 및 순례, 학술세미나 주최, 추모행사 참여 등 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꾸준한 활동을 벌였다. 증언채록집 이외에도 <4‧3장정>, 무크지 <제주항쟁> 등을 발간하여 사실 증언의 축적과 학술적 논의의 바탕을 마련했다.
1989년 제주신문의 4‧3 연재와 4‧3연구소의 공식 출범은 금기와 왜곡, 굴곡진 역사의 벽을 뚫고 4‧3에 대한 공론의 장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는 개인적 기억 속에 밀봉되었거나 억압되었던 4‧3의 말문을 트게 하는 든든한 토대가 되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섬뜩함 느껴지는 사설 제목
그런데, 이 글을 쓰는 동안 제1회 제주4‧3평화상 수상자 재일작가 김석범 선생의 선정에 대한 행정자치부의 감사 의뢰가 있었고, 이에 따라 제주도감사위원회가 감사에 나섰다는 황당한 이야기를 들었다. 역사의 시계바늘을 되돌리려는 시도가 재연된 것이다.
김석범 선생의 수상소감 발언에 대해 새누리당 하태경 의원이 문제를 제기했고, 이어서 일부 보수단체들이 격렬한 어조로 ‘4‧3평화상 박탈’을 요구했음은 이미 알려진 이야기다. 그런데 4‧3 진실규명 과정 회고의 글을 쓰고 있던 필자가 순간 펜을 멈춘 것은 한 보수언론의 사설 제목 때문이다.
<조선일보> 4월 13일자 사설 제목은 “제주4‧3평화상 첫 수상자가 北 대변자라니”였다. 대한민국 일반 국민들은 이런 선정적인 제목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4‧3 연구를 해온 나도 놀랐다. 어째서 이런 제목이 나왔는가를 살펴봤더니, 이 신문은 두 가지 논거를 들고 있다.
하나는 김 선생의 수상 소감 발언이요, 다른 하나는 그가 조총련 기관지인 조선신보 기자 출신이란 점을 지적했다. 그리고 사설은 “4‧3평화상이 북의 주장을 옮기는 사람에게 주는 상이라면 단 1원의 국민 세금도 들어갈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묻고 싶다. 수상 소감에서 언급됐던 대한민국 건국과정에서의 친일파 문제 등은 진보학계에서 널리 회자되는 사실을 모르는가, 김석범 선생이 1960년대 조총련에서 탈퇴해서 그쪽으로부터 ‘배신자’란 소리를 듣고 있는 사실은 알고 있는지 묻고 싶은 것이다.
‘단 1원의 국민 세금’ 운운 부분도 그렇다. 정부가 마치 선심 쓰듯이 4‧3 예산 지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조선일보 사설에서도 언급했듯이, 4‧3 때 무고한 양민이 국가공권력에 의해서 수없이 목숨을 잃었다. 정부 조사 결과 밝혀진 사실이다. 그러면 응당 정부에서 희생자와 그 유족에게 개별적으로 배‧보상을 해야 한다. 그러나 정부 예산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현재 ‘낮은 단계의 공동체적 보상’ 차원에서 약간의 예산을 지원하고 있을 뿐이다.
4‧3흔들기, 특별법 제정 때부터
필자가 더욱 관심을 갖는 것은 이런 ‘섬뜩한 표현’으로 4‧3 흔들기를 해온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2000년 4‧3특별법 제정 때부터 시작되었다.
조선일보사에서 발행하는 시사 월간지 『월간조선』 2000년 2월호는 기고문의 표지 제목을 “국군을 배신한 국회-공산게릴라들에겐 면죄부를 주고 국군을 학살범으로 정죄(定罪)한 4‧3특별법”이라고 매우 선정적으로 달았다. 『월간조선』은 이진우 변호사의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특별법의 국회 통과를 개탄한다’와 이현희 교수의 ‘제주4‧3사건의 본질을 다시 말한다’는 기고문 두 편을 동시에 실은 것이다.
이진우 변호사의 글은 섬뜩함이 느껴질 정도로 과격했다. 즉 “4‧3특별법은 공산폭도들에게 면죄부와 함께 사랑의 꽃다발을 안겨주었고, 반면 이들의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피와 땀 그리고 생명을 바친 대한민국 국군, 경찰관들에게는 ‛무차별 양민 대량학살’이라는 유죄판결을 내렸다”는 게 그의 논지였다.
이현희 교수의 글은 왜곡 그 자체였다. “4‧3은 소련 지령 하에 대한민국 건국을 저지하기 위한 유혈폭동”이라고 당당히 규정하는가 하면 “4‧3사건은 우리 민족의 현대사에서 동족이 벌인 공산당의 광란의 살육으로는 가장 처참한 사건으로서 많은 희생자를 냈다”는 주장까지 폈다.
그들의 글만을 읽은 독자들은 ‘도대체 대한민국 국회가 어쩌다가 이런 큰 실책을 했단 말인가?’라는 우려와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소련의 지령을 받은 공산당이 광란의 살육극을 벌여 수많은 희생자를 발생시켰다고 억지 주장하는 판국이니 더 말해서 무엇하랴.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그 후에 진행된 상황을 보면, 4‧3특별법 그 어디에도 ‘대한민국 국회가 공산 게릴라들에게 면죄부를 주고 국군과 경찰을 양민 대량 학살범으로 정죄한’ 내용은 없었고, 다만 진상을 규명하고 억울한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시킨다는 대의명분이 있었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현희 교수가 주장한 ‘소련 사주설’의 실체적 진실이 밝혀진 사실이 있는가. 역사를 전공했다는 사람들이 ‘아니면 말고’ 식의 무책임한 발언은 그 도가 너무 넘쳐서 차라리 허탈할 지경이다.
“대한민국 정통성이 무너진다?”
2003년, 정부의 4‧3진상조사보고서가 확정되고 대통령이 사과했을 때도 일부 보수단체의 반발은 극에 달했다. 보수단체의 광고 제목은 “내란을 은폐한 4‧3진상조사보고서 우리는 절대 인정할 수 없다”였다.
보수단체들은 2004년 4‧3진상조사보고서와 대통령의 사과를 절대 인정할 수 없다면서 헌법소원을 청구했다. 그런데 그 청구내용 중에는 “4‧3 당시 공산무장 유격대의 병력이 평균 1만9900명에 이르며, 2만명에 육박하는 빨치산들에게 7년이라고 하는 긴 기간 동안 양식을 공급해주어서 무력투쟁을 할 수 있게 해준 사람들은 제주도민 이외에는 아무도 없다.”고 주장해 제주도민 전체를 빨치산 협력자로 매도, 도민사회의 공분을 사기도 했다.
2008년, 이명박 정부가 출범했을 때 보수진영은 자기들 세상을 만난 양 의기양양하게 과거사 해결의 성과물들을 한꺼번에 뒤엎으려고 했다. 4‧3위원회 폐지, 진상조사보고서 폐기, 4‧3희생자 결정의 무효화, 4‧3평화기념관의 개관 저지 등이 그것이다.
2008년 3월 말 평화기념관의 개관을 앞두고, 보수단체들은 결사적으로 이를 막으려 했다. 그들은 “4‧3평화기념관은 군경에 의한 진압과정에서 발생한 불행했던 사태들을 침소봉대하고 남로당 폭도들의 만행은 축소 은폐함으로써 군경은 악으로, 폭도들은 봉기자로 미화하는 등 대한민국 정통성을 부정하는 내용들을 전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총리와 장관까지 나서서 기념관 개관을 막으려 했다.
이런 비상 상황을 맞게 되자, 제주사회가 들고 일어났다. 2008년 ‘한나라당 제주4‧3특별법 개정안 반대 범도민대책위원회’가 결성됐는데, 4‧3운동 사상 가장 많은 49개 단체가 참여하게 된다. 유족회는 강력한 항의 표현으로 초상집을 연상시키는 상여를 메고 가두시위를 하면서 맞섰다.
이명박 정부는 이런 제주도의 저항과 4‧3의 진실규명과 명예회복 조치들이 특별법이란 법률적 절차에 이뤄진 사실을 확인하고 반년 만에 꼬리를 내렸다. 이에 실망한 일부 보수단체들이 2009년에 헌법소원 등 모두 6건의 소송을 제기했지만 모두 패소한 것이 역사적 진실이다.
2013년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서 추진된 4‧3 국가기념일 지정 때도 극우 보수단체들은 반대했다. 국가기념일 지정은 먼저 국회에서 특별법 개정 때 거론됐는데, 한 보수단체는 “매년 4‧3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한다면 대한민국 국회가 아니라 조선민주주의공화국 국회”라는 살벌한 주장을 펴기도 했다.
극우 보수세력의 주장을 일별해서 보면, 4‧3의 명예회복은 대한민국 정통성이 무너지는 것으로 직결시켜 해석하고 있는 것 같다. ‘반공은 국시’라는 낡은 프레임에 갇혀 있다면 과거 이념적 누명을 쓰고 있던 4‧3이 당당히 대명천지 밝은 빛으로 나오는 모습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는 그들 나름의 몸부림으로 보인다.
4‧3특별법 제정이나 정부 진상조사보고서 확정, 대통령 사과, 희생자 결정, 평화기념관 개관, 국가기념일 지정 등이 그들에게는 ‘용서할 수 없는 일’일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번 ‘평화상 수상’ 문제 제기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 같다.
“제주도민의 시각에서 재조명돼야”
중앙일간지라도 이들과는 다른 견해를 가진 신문이 있다. <경향신문> 4월 17일자 사설 제목은 “정부가 ‘4‧3 흔들기’에 앞장서겠다는 건가”였다. 일부 보수세력의 4‧3 흔들기에 휘둘리는 행정자치부의 태도를 나무랐다. 이 사설 내용 중 눈길이 가는 대목이 있다.
“(4‧3)추념식에 참석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4‧3사건은 육지의 시각이 아닌 제주도민의 시각에서 재조명돼야 한다’고 밝혔다. 지당한 말이다.”
바로 중앙의 보수세력들은 이 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 같다. 이명박 정부 시절 4‧3위원회 폐지 등에 반대해서 결집한 49개 제주도 단체 가운데는 보수 성향의 단체도 다수 참여했다. 왜 그랬을까. 4‧3에 관한한 과거로의 회귀를 원치 않는 분위기가 어느덧 제주사회에 뿌리 내렸음을 뜻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분위기를 극명하게 드러낸 사건이 2013년 4‧3유족회와 전직 경찰단체인 제주경우회의 역사적인 화해이다. 이 화해는 여기에 머물지 않고 두 단체장과 여야 제주도당 위원장 등 4명이 나란히 손을 잡고 충혼묘지와 4‧3평화공원을 참배함으로써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이제 제주사회는 4‧3의 이념 갈등을 극복해서 진보나 보수, 여야가 한데 어울려 ‘화해와 상생’이란 공동의 배에 승선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 분위기를 확증시켜준 것이 2014년 10월 28일 제95회 전국체육대회 개회식 성화봉송 주자로 유족회장과 경우회장이 나란히 입장한 사건이다. 박근혜 대통령과 수많은 관중의 박수를 받으면서 말이다.
이미 미국 대학교에서 4‧3의 진실규명과 명예회복 과정은 전 세계적으로 성공적인 모범사례란 박사 학위 논문이 나왔다. 나는 4‧3 진실찾기를 하면서 역사를 긴 호흡으로 봐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 시각으로 볼 때 요즘 호들갑을 떠는 ‘평화상 수상 파동’이 후세에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6편으로 이어집니다>
☞양조훈은? = 4‧3 광풍이 휩쓸던 1948년 12월 제주읍에서 태어났다. 1972년부터 27년 동안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88년 제주신문 4‧3취재반장을 맡아 「4‧3의 증언」을 연재하며 운명적으로 4‧3과 조우했다. 이후 제민일보 4‧3취재반장과 편집국장 등을 거치며 4‧3의 진실을 밝히는「4‧3은 말한다」(456회)를 10년 넘게 연재했다. 1999년 신문사에서 해직당한 이후에는 4‧3특별법쟁취연대회의 공동대표를 맡아 4‧3특별법 제정 운동에 앞장섰다. 2000년 이후 4‧3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 수석전문위원으로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작성의 실무책임을 맡아 공권력의 잘못을 밝혀냈고, 이 진상조사보고서를 근거하여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사과를 이끌어내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뉴욕타임스』(2001)는 저자를 “4‧3 학살을 조사 연구해온 저널리스트”로 소개하고, “그의 소망은 나라 전체가 이 역사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4‧3평화재단 초대 상임이사, 제주특별자치도 환경부지사도 지냈다. 현재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4‧3평화교육위원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