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차원의 진상조사 결과에 따라 국가원수의 사과까지 받게 되자, 제주 도민사회나 4·3진영은 4·3문제를 풀기 위한 새로운 해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보복이나 새로운 갈등이 아닌, 화해와 상생의 정신으로 이 비극의 역사를 평화와 인권의 역사로 승화하자는 운동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4·3문제 해법에 대한 구조적인 분석이 필요했다.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 이전까지 4·3 피해에 대해 제주도민끼리 갈등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도민들이 가해자 쪽에 서기도 했고, 피해자도 되었기 때문이다.
이전엔 직접 학살에 나섰던 군경 원망
그런데 정부의 4·3진상보고서가 발표되면서 인식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대량 학살의 지휘 체계가 더 높은 곳에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4·3 때 초토화를 당한 안덕면 동광리 주민을 만나서 그 당시의 상황을 들어보면 이런 이야기를 한다.
“늦가을 추수하느라 바빴던 어느 날, 스리쿼터를 탄 군인들이 갑자기 마을을 들어오면서 총을 팡팡 쏘고 집집마다 불을 질렀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총에 맞아 죽는 모습을 보고 우린 놀래서 마을 밖으로 달아났다.
멀리 대나무 숲에 숨어서 마을 쪽을 바라보니 닥치는 대로 학살행위를 하던 군인들이 소대장인가 하는 지휘자가 호각을 불자 스리쿼터를 타고 사라졌다. 조금 있으니 옆 마을에서도 불길이 올랐다. 그쪽에 가서도 방화와 학살행위를 한 것이다.”
체험자들은 그 때까지도 자기 마을을 방화하고 주민들을 죽인 소대장이나 군인을 원망대상으로 삼아왔다. 그런데 정부의 조사 결과 초토화작전도 소대장 수준에서 이뤄진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 연대장 수준에서 이뤄진 것도 아니었다. 더 높은 상부의 지시에 의해 제주도 전역에서 감행되었던 것이다.
1948년 11월부터 초토화작전을 직접 감행한 제9연대 송요찬 연대장조차 “정부의 최고 지령을 봉지하여” 해안선부터 5km 이외의 중산간지대를 배회하면 이유 여하를 불구하고 폭도배로 인정해서 총살하겠다고 밝히지 않았던가.
이승만 대통령은 국무회의를 통해 미국의 원조를 원활히 하기 위해서도 제주도사태 등을 조속히 진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 모두 피해자”란 인식 확산
4·3 당시 기록한 미군 정보보고서는 제주도의 유혈사태를 몰고온 초토화작전을 ‘성공적인 작전’으로 분석하는가하면, 주한미군고문단장 로버츠 장군은 송요찬 연대장의 초토화작전을 칭찬하며 이를 대통령 성명 등을 통해 널리 알리라고 요구하였다.
이런 사실들이 속속 밝혀지면서 초토화작전에 참여해서 민간인들을 학살한 소대장이나 군인들도 상부의 지시에 의해 동원된 하나의 ‘하수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토벌대 대열에 섰거나 또는 입산해서 무장대 대열에 섰던 제주도민도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린 ‘희생자’일 수 있다는 인식을 점차 하게 됐다.
비로소 동서 냉전 상황을 보는 눈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고, 자신들은 ‘고래싸움에 등터진 새우’같은 존재였음을 자각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가해 유형에 대한 높은 단계의 역사적 규명과 책임은 묻되 제주도민 대부분은 “동서 냉전의 피해자요, 정부 수립 과정의 역사적인 소용돌이 속의 희생자”란 인식이 번지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화해와 상생’이란 슬로건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이런 인식아래 4·3희생자도 폭넓게 인정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퍼져갔다.
1988년부터 4·3취재반장을 맡았던 나는 4·3 현장을 취재하면서 당혹스럽고 난감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바로 제주도민 사이의 이념 갈등 때문이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한 해안마을을 취재하는데 중산간마을을 지칭하면서 "폭도마을이었다"고 힐난했다. 그 중산간마을에 들어갔더니 되레 해안마을을 가리켜 "사람들을 함부로 죽인 토벌대 앞잡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충격이었다.
또 어느 마을에서는 누구 누구집이 ‘폭도네 집’이라고 손가락질을 한다. 그런데 그 집에서는 되레 빨갱이 누명을 쓰고 같은 마을 사람으로부터 말로 할 수 없는 핍박과 수모를 당했다고 하소연한다.
4·3의 근본적 해결은 ‘화해와 상생’
이런 상황을 자주 접하다보니 4·3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 깊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역사적인 화해와 상생'을 생각했고 그 일을 위해 매진해왔다.
2003년 정부의 4·3진상조사보고서를 확정할 때, 초토화에 의한 집단희생의 책임문제를 따졌다. 즉 그 책임은 당시 군 수뇌부, 이승만 대통령, 미군군사고문단 등 3개축에 있음을 밝혔다.
그러나 그들에게 '역사적인 책임'을 물었을 뿐, 서훈을 박탈하거나 국립묘지에서의 이장, 혹은 보상을 요구하지 않았다.
더불어 무장대 측에 대해서도 우두머리 등 실질적 책임이 있는 자를 희생자에서 제외시켰다. 그러나 설령 입산자라 할지라도 우두머리가 아니면 폭넓게 '역사 소용돌이 속의 희생자'임을 인정했다. 바로 화해와 상생의 정신이 작동된 것이다.
4·3유족 입장에서도 한결같은 소망은 이념적 누명을 벗는 일이었다. 어릴 때 ‘빨갱이’란 소리에 주눅 들었던 유족들은 가족의 희생이란 슬픔 이외에도 사회적 편견과 연좌제의 억압 속에 반세기란 기나긴 세월을 고통 속에 보냈다.
‘빨갱이’는 인간파괴와 같은 말
1999년에 발간된 『제주4·3연구』에 실린 서울대 의과대학 황상익 교수의 「의학사(醫學史)적 측면에서 본 4·3」이란 논문을 의미있게 본 적이 있다. 그는 ‘빨갱이’에 대해서 이렇게 분석했다.
“문둥이는 ‘나병’이라는 실체를 가지고 있다. 물론 그 실체가 인간소외와 파괴를 정당화시켜준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런데 ‘빨갱이’는 실체조차 없는 말이다. ‘좌익사상을 지닌 자’라는 뜻이 있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우리 사회에서 그동안 쓰여온 ‘빨갱이’의 어의는 그것과 크게 다르다.
한마디로 인간파괴와 동의어인 것이다. 그리고 ‘빨갱이’는 애당초 실체가 없는 것이기에 문둥이보다도 훨씬 파괴적이다. “빨갱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라”는 협박 앞에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나도 취재 과정에서 수없이 듣던 ‘빨갱이’란 말 때문에 한때 주눅이 들 때도 있었지만, 그것이 얼마나 파괴적이고 허망한 것인가를 뒤늦게 깨달았다.
물론 ‘화해와 상생’이란 표현이나 논리가 완벽한 것은 아니다. 4·3진영이나 유족 가운데 일부는 “가해자들이 고백하고 용서를 빌지 않은데 무슨 화해냐”고 역정을 내는 사람도 있다.
이념을 절대적 가치로 여기는 일부 보수진영 측에서는 오히려 ‘빨갱이들과 무슨 화해냐“고 화를 내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폭도는 희생자 일 수 있다”, “불량위패는 철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4·3진상에 대한 정부의 조사결과가 발표된 이후, 대부분의 유족들은 보상보다도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에 비중을 두었다. 그들 역시 역사의 책임은 규명하되, 가해자 처벌을 요구하지 않았다.
국가권력으로부터 피해를 입은 희생자나 유족들이 개별적 배·보상이 아닌 ‘낮은 단계의 공동체 보상’에도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이런 배경 아래서 ‘세계평화의 섬’ 지정 방안이 추진된 것이다.
소련대통령 방문으로 ‘평화의 섬’ 논의 시작
1991년 4월 제주국제공항 주변 도로에는 색다른 깃발이 휘날렸다. 붉은 바탕에 낫과 망치가 그려진 깃발, ‘철의 장막’의 상징인 소련 국기였다. 그 ‘적국’의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역사상 처음 열린 한-소 정상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제주를 방문했다.
해방 직후 국제적인 냉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혹독한 희생을 치렀던 제주도민들은 이 역사의 변화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세계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 대통령이 냉전의 대표적 희생지인 제주도를 방문했기 때문이다.
그 어느 지역보다 레드 콤플렉스에 시달렸던 제주도민들에게 ‘평화의 섬’이란 낯선 어휘가 다가서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때부터였다.
그러면 제주를 ‘평화의 섬’으로 지정하자고 처음 거론한 것은 언제인가. 고르바초프가 제주를 방문하기 전날인 1991년 4월 18일자 『제민일보』에 실린 미 캔터키대학교 문정인 교수의 특별 기고에서였다.
제주출신으로 국제정치 분야에 정통한 그는 이 역사적 회담을 계기로 제주는 어떻게 국제적 위상을 정립해 가야할 것인가에 물음을 던지고, 그 해답으로 ‘평화의 섬’ 선포를 제시했던 것이다.
그 이후 중국 장쩌민, 미국 빌 클린턴, 일본 하시모토 류타로·고이즈미 준이치로 등 한반도 주변 열강 정상들의 제주 방문이 이어지고, 북한 동포에게 감귤보내기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면서 ‘평화의 섬’ 논의는 가속도가 붙게 됐다.
2001년부터 창설된 제주 평화포럼도 일조를 했다. 이 포럼이 금년에 11회를 맞는다. 오는 25일부터 시작되는 제11회 제주포럼에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 등이 참석한다고 해서 벌써부터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 제주도민들을 옥죄었던 4·3문제가 특별법 제정에 이어 2003년 정부 차원의 진상보고서 확정, 그리고 국가원수의 사과로 이어져 해결 기미가 보이면서 ‘평화의 섬’ 논의는 더욱 구체화됐다.
제주도는 2004년에 각계 인사 22명으로 ‘제주평화의 섬 추진위원회’를 구성해서 평화의 섬 지정 운동을 본격적으로 밀고 갔다. 필자도 ‘4·3전문가’의 몫으로 추진위원회에 참여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제주도는 2005년 1월 27일 정부로부터 ‘세계평화의 섬’으로 공식 지정받게 됐다.
이날 발표된 평화의 섬 선언문의 전문(前文)은 “삼무(三無)정신의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하고, 제주4·3의 비극을 화해와 상생으로 승화시키며, 평화정착을 위한 정상외교의 정신을 이어받아 세계평화에 기여할 수 있도록 제주도를 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한다.”고 되어 있다.
결국 평화의 섬 지정 배경과 목표는 ① 삼무정신의 계승 ② 4·3비극의 화해·상생 승화 ③ 정상외교를 통한 세계평화 기여로 압축될 수 있다.
‘4·3항쟁’이라고 발언한 노무현 대통령
이날 청와대에서 열린 세계평화의 섬 지정 서명식에는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측 인사와 김태환 도지사 등 제주도민 대표 12명이 참석했다. 그런데 이날 노 대통령이 축하 인사말을 하면서 ‘특별한 발언’을 하고 말았다.
노 대통령은 제주도가 평화의 섬으로 지정된 것은 “제주도민들이 간절하게 염원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질적으로 그만한 조건을 갖췄기 때문”이라고 전제했다.
그리고 “‘삼무의 섬’이라고 해서 평화를 가꿔온 역사를 가지고 있고, ‘4·3항쟁’이라고 하는 역사적인 큰 아픔을 딛고 과거사 정리의 보편적 기준이라 할 수 있는 진실과 화해의 과정을 거쳐 극복해나가는 모범을 실현하기 때문”이라고 밝힌 것이다.
현직 대통령이 뜻밖에도 ‘4·3항쟁’이란 표현을 쓴 것이다. 이 표현은 4·3의 성격을 둘러싸고 진보와 보수 쪽에서 예민하게 대립하던 용어이기도 했다. 나는 그 직후 청와대 비서진에게 원고에 있는 용어냐고 물어봤다.
그 관계자는 원고에는 ‘4·3’으로 정리되어 있었다면서, 다만 대통령의 뇌리에는 ‘4·3항쟁’으로 각인되어 있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예전 같으면 극우단체에서 문제 삼을 만했던 일인데, 예상 밖으로 조용히 지나갔다.
“4·3은 ‘평화의 섬’ 추진할 권리”
제주도는 세계평화의 섬 선포로 축제 분위기였다. 거리마다 축하 현수막이 나부끼고, 이를 기념해서 공짜 술을 제공하는 음식점도 있었다.
정부는 제주도를 국제자유도시로 육성하고 국제평화센터, 동북아평화연구소 설립 등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17개 분야별 평화 실천사업 로드맵도 마련됐다. 4·3 관련분야로는 4·3평화공원 조성, 4·3유적지 보존관리, 진상조사보고서 국정교과서 반영, 4·3추모일 지정 등이 포함됐다.
나는 『한겨레신문』 2005년 1월 31일자에 ‘제주4·3과 평화의 섬’이란 제목의 특별 기고를 통해 이런 분위기를 전달했다. 또한 “4·3의 진실규명 운동이 내세운 슬로건도 진실을 규명하되 보복이나 새로운 갈등이 아닌, 용서와 화해였고 비극의 역사를 딛고 평화와 인권을 지향했던 것”이라고 밝혔다.
따라서 “제주도는 이제 ‘평화’란 브랜드를 안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새로운 출발점에 서있다”고 들뜬 분위기를 전했다.
제주도민들은 4·3이라는 혹독한 시련을 겪었기에 더욱 평화를 갈망하게 되었고, 끝내는 ‘평화의 섬’이란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노 대통령의 발언에서도 언급됐듯이, 실제로 4·3 문제 해결은 제주도를 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하는 원동력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그 무렵 제주에 취재 왔던 미국 CNN 기자의 인터뷰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CNN 한국특파원 손지애 기자는 자신은 처음엔 왜 제주도가 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곧 4·3의 역사를 알게 되고, 제주도민들이 그 시련을 극복한 과정을 알게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4·3이라는 역사적 배경 때문이라도 제주도는 충분히 ‘평화의 섬’을 추진할 권리가 있다”고 표현한다는 것이다. ‘권리’에 방점을 찍은 것이다.
그녀는 당시 서울 주재 외신기자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후에 청와대 해외홍보비서관과 아리랑국제방송 사장 등을 지낸다.
어쨌든 무모하리만치 돌짝밭같은 환경에 뿌려진 ‘화해와 상생’의 씨는 고난을 이겨내고 발아해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물과 기름 같았던 유족회와 경우회의 화해, 여야 도당 위원장까지 합세한 합동 참배, 전국체전에서의 성화 봉송 등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다. 심지어 제주4·3이 이제 한국사회 이념갈등 극복의 모범사례로 부각되고 있지 않은가.
☞양조훈은? = 4·3 광풍이 휩쓸던 1948년 12월 제주읍에서 태어났다. 1972년부터 27년 동안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88년 제주신문 4·3취재반장을 맡아 「4·3의 증언」을 연재하며 운명적으로 4·3과 조우했다. 이후 제민일보 4·3취재반장과 편집국장 등을 거치며 4·3의 진실을 밝히는「4·3은 말한다」(456회)를 10년 넘게 연재했다. 1999년 신문사에서 해직당한 이후에는 4·3특별법쟁취연대회의 공동대표를 맡아 4·3특별법 제정 운동에 앞장섰다. 2000년 이후 4·3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 수석전문위원으로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작성의 실무책임을 맡아 공권력의 잘못을 밝혀냈고, 이 진상조사보고서를 근거하여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사과를 이끌어내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뉴욕타임스』(2001)는 저자를 “4·3 학살을 조사 연구해온 저널리스트”로 소개하고, “그의 소망은 나라 전체가 이 역사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4·3평화재단 초대 상임이사, 제주특별자치도 환경부지사도 지냈다. 현재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4·3평화교육위원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