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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그 진실을 찾아서(1) ... 운명처럼 다가온 4.3

  다시 4.3을 맞는다. 무섭고 시렸고 한스러웠던 통한의 역사다. 목소리는 커녕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던 4·3은 지금으로부터 27년여전 제주의 한 언론사의 용기와 취재진들에 의해 세상 밖으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잔인무도였고 통곡이었다. 그 시절부터 20여년에 걸쳐 이뤄진 4·3 진상규명의 역사에 중심부에 있었던 양조훈 전 제주도 부지사의 육필 비사를 연재한다. / 편집자 주

 한국 언론사에 남긴 진기록

 

요즘은 4‧3에 대해 누구나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잊기 쉽다. 4‧3이, 신상의 위험을 각오하지 않고는 입 밖에 내거나 글자로 적을 수 없는 금기의 숫자였던 시절을.

 

제주신문 4‧3취재반이 결성된 1988년 3월은 봄이었지만 4‧3은 여전히 딱딱하고 차가운 얼음처럼 동결된 상태였다. 6월 항쟁으로 달궈진 민주화 열기도 1987년 12월 대통령 선거를 치르면서 한풀 꺾였다. 야권 3김의 분열로 36.5%의 낮은 득표를 하고도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노태우 정권은 직선 대통령으로 뽑혔지만 군사정권의 연장처럼 느껴졌다.

 

그런 암울하던 시절에 출범한 4‧3취재반이지만 한국언론사에 몇 가지 진기록을 남겼다. 맨 처음 4‧3특별취재반이 16명으로 구성됐는데, 하나의 특정사건을 집중 취재하는 특별취재반 숫자로는 전무후무할 것이다. 또한 나중에 탄생한 제민일보의 연재까지 포함하면 신문 연재기간이 무려 11년이란 장기간의 대하기획물이 된 셈인데, 이렇게 끈질기고 집요하게 한 사건의 진실을 추적한 사례도 드물다. 결국 4‧3 연재 기획물은 ‘탐사보도’라는 단어조차 생소하던 1996년, 한국언론연구원에 의해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폭로기사’와 더불어 한국언론의 대표적인 탐사보도 모델로 선정되기도 했다.

 

1988년 3월 5일 제주신문 4‧3취재반이 결성됐다. 제주신문은 당시 제주도내의 유일한 일간지였다. 5공 정권이 만들어낸 각 도에 신문사 1개씩이란 ‘1도 1사’ 언론 정책의 결과였다. 그런데 그 신문사 편집국에서 1988년 벽두부터 4‧3 문제가 불거져 나왔다. 젊은 기자들을 중심으로 4‧3사건 40주년을 맞는 기획 특집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개진됐다. 신문이 4‧3문제를 다루기에는 시기상조라는 우려도 있었지만 그 목소리는 작았다.

 

어느 사이엔가 “단발성 기획물로 할 것이 아니다. 특별취재반을 구성해서 본격적인 진상규명에 나서자.”는 목소리가 힘을 얻었다. 민주화 열기와 4‧3 발발 40주년이란 시기적 의미가 겹치면서 상승작용을 일으킨 것이다.

 

당시 사회 분위기는 매우 격동적이었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촉발된 민주화 바람은 한국사회를 뒤덮었다. 우리 생애에 처음이라 할 만큼 엄청난 격변의 시기였다. 30년 군사정권이 세운 허상들이 하나씩 무너지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4‧3 금기의 벽이었다.

 

철옹성처럼 단단하게 보이던 군사정권은 1987년 1월 14일 일어난 서울대 학생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때부터 금이 가기 시작했다. ‘호헌 철폐’와 ‘독재 타도’의 물결은 6월 항쟁으로 이어지면서 전국이 뜨거웠다. 노태우의 6‧29 개헌선언이 있었지만, 그 절정은 그해 7월 100만 인파가 서울시청 앞 광장 일대를 온통 뒤덮은 연세대 학생 이한열 장례행렬이었다. 이한열은 전두환 독재정권 반대 시위에 참여했다가 전경이 쏜 최루탄을 맞고 사망했다.

 

이런 전국적 열기가 제주까지 이어졌다. 그해 6월 제주거리에도 최루가스가 쏟아졌고, 민주화를 열망하는 시위는 점점 수위가 높아갔다. 이 시위는 제주대학교 학생들이 주도했다. 시민들도 가세했다. 제주시내 남문로터리, 중앙로터리에서 연일 시위가 벌어졌다. 대학생들이 똘똘 뭉쳐 시위를 벌이는 이면에는 4‧3이 한몫했다.

 


그해 4월 3일 제주대 구내에 4‧3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대자보가 나붙었다. 그런데 경찰이 이를 문제 삼아 4월 15일 대학생 2명을 연행했다. 그 일이 변곡점이 될 줄은 경찰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대학 사회가 분노했다. 그동안 학내 집회는 이른바 운동권 학생들이 주로 참석하는 수준이었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일반 학생들의 참여가 크게 늘었다.

 

학생들은 중간시험을 거부하며 연행 학생을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연행 학생은 사흘 만에 석방됐다. 그 다음 날인 4월 18일 비상학생총회가 열렸다. 경찰에서 풀려나온 여학생회 회장 송영란은 4‧3 대자보를 붙였던 이유를 설명한 뒤, 눈물을 흘리며 ‘타는 목마름으로’를 불렀다. 그 자리에 함께 했던 3000명의 학생들이 그 노래를 따라 불렀다. 4‧3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엉겁결에 맡은 4‧3취재반장

 

이런 사회 분위기가 제주신문 편집국에도 영향을 미쳐 온 것이다.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된 뒤 며칠 지나지 않아 4‧3취재반이 ‘전격적으로’ 결성됐다. 그리고 4‧3취재반장이란 직책을 떡하니 사회부장인 나에게 맡기는 것이 아닌가. 아마도 두 가지 이유가 작용한 것 같다. 우선 ‘사회부장’이란 직책이 그렇고, 다른 하나는 평소에 내가 체육사다, 개발사다 하며 기획 연재를 많이 해온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마음에 준비도 없이 덜컥 그런 중책을 맡게 된 것이다. 마음 속으로는 ‘피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피할 도리가 없었다. 그해 8월 정경부장으로 옮겼으나 취재반장직은 계속됐다. 그것이 내가 4‧3과 질기게 맺게 된 인연의 시작이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운명 같은 것이었다.

 

엉겁결에 취재반장을 맡은 내가 처음 한 일은 취재반 구성이다. 4‧3취재반은 16명의 기자들로 구성됐다. 외근 기자 20여 명 중 경제계나 문화계 등 일부 출입처의 기자를 제외하곤 대부분 포함시켰다. 백지 상태에서 4‧3의 진실을 규명하자니 많은 인력도 필요했지만, 외부의 압력에 대응할 수 있도록 방벽을 쌓자는 의도도 있었다. 그만큼 겁이 났기 때문이다.

 

기자라 해서 예외일 수 없는 공안정국 하에서 4‧3취재반장을 맡았으니 머릿속이 복잡했다. 나는 취재반 기자들에게 4‧3과 관련 있는 자료들을 닥치는 대로 모을 것을 주문했다. 나도 취재반 결성 그날부터 4‧3자료와 씨름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가장 큰 고민은 바로 연재 시점이었다. 취재반을 결성할 무렵 얘기된 기획 시점은 한 달 후인 4월 3일이었다. 그러나 4‧3이란 무게감 있는 대하기획 연재를 한 달 만에 시작한다고 생각하니 초조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나이 마흔인 나는 사라봉 앞쪽 작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내 개인사를 소개하자면, 나는 4‧3 광풍이 휩쓸던 1948년 12월 제주읍내 오현단 앞에서 태어났다. 4‧3을 통틀어 가장 험악하던 시기에 태어났지만 나의 가족이나 주변에 4‧3 희생자는 없었다. 그래선지 나는 그때까지도 4‧3의 실상을 잘 몰랐다.

 

닥치는 대로 모아지는 4‧3자료들을 집에 들고 가 끙끙거렸다. 며칠 지나지 않아 집안 공기가 싸늘해졌다.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구는 바람에 온 식구가 내 눈치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래선 안 되겠다는 생각에 아이들과 방을 바꾸기로 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남매에게 아내와 함께 안방을 쓰게 하고, 나는 아이 공부방을 혼자 쓰기로 했다.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 퇴근 후 일찍 잠자리에 들고, 대신 새벽에 일어나 자료들과 씨름했다.

 

“‘빨간 줄’ 한 줄이면 인생 망친다.”는 주변의 만류도 있었다.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는 불안감 속에서 자료들을 뒤적였지만 심적 갈등은 계속됐다. 어느 날 밤이었다. 잠을 자는데, 누군가 내 목을 누르기 시작했다. 심리적으로 불안해서 그런가보다 하면서도 결심이 서지 않았다. 가위눌리는 밤이 계속됐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은 침대까지 흔들어댔다. 안 떨어지려고 발버둥 쳤지만 결국 침대에서 떨어졌다. 꿈이었다. 난생 처음 침대에서 떨어진 것은 실제 상황이었다.

 

침대에서 떨어지는 순간 “하겠다!”고 소리친 것 같다. 시계를 보니 새벽 2시를 넘기고 있었다. 그 길로 내가 다니던 교회(중앙감리교회)에 가서 바닥에 엎드렸다. 나는 하나님을 향해 옆도 안 보고, 뒤도 안 보고 앞만 보고 달려갈 테니 도와 달라는 절실한 기도를 했다. 내가 결심을 하자 가위눌림은 사라졌다. 4‧3영령과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된 것 같다. 이후 4‧3영령과의 만남은 여러 차례 있었다. 그 일화는 앞으로 차차 밝히겠다.

 

마음을 다잡은 나는 4‧3취재반 회의를 소집했다. 1988년 3월 20일 전후로 기억된다. 이 회의에서 두 가지 점을 강조했다.

 

첫째는 연재 시점이다. “우리가 4‧3을 다루면서 100m 단거리 선수처럼 질주할 수는 없다. 그러다간 금방 지쳐 쓰러질 것이다. 그보다 더 큰 일은 섣부른 판단으로 진실을 그르치는 것이다. 이 연재를 제대로 하려면 우리에겐 42.195km를 달리는 마라토너 같은 인내와 끈기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면서 당장 4월 3일 연재를 시작하는 것은 무리이고, 연재 시점을 내년(1989년) 4월 3일로 해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했다.

 

둘째는 4‧3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정부 입장을 대변하는 관변자료는 대체로 ‘반란’ 또는 ‘공산폭동’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학가나 재야의 시각은 ‘민중항쟁’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흑과 백처럼 첨예한 대립 구도였다. 취재반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선입견을 갖지 말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으며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그 진실을 찾아 나서자. 그러다보면 4‧3의 본 모습은 저절로 드러날 것이 아닌가?”

 

나의 이런 주장에 약간의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대체로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가장 큰 고민이던 연재 시점이 해결되니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4‧3 전문기자' 탄생

 

현대사 관련 서적을 부지런히 수집하기 시작했다. ‘4‧3’이란 글자가 들어간 자료라면 눈을 밝혀 모았다. 4‧3이 방대하고 복잡 미묘한 사건인데도, 이를 정면으로 다룬 자료는 그리 흔치 않았다. 관변자료는 4‧3에 관한 몇 쪽 되지 않은 짧은 내용을 기술하면서도 붉은 색의 이념문제로만 도배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도 눈길을 끈 자료는 1963년 일본에서 펴낸 김봉현‧김민주의 <제주도 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와 1975년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 석사학위 논문으로 발표된 존 메릴의 「제주도 반란(The Cheju-do Rebellion)」이었다. 이런 글들이 포함된 4‧3자료집 <제주민중항쟁>, <잠들지 않는 남도>가 발간됐으나, 정부에 의해 ‘금서(禁書)’가 됐다. 그러나 대학가에서는 아름아름 날개 달린 듯 더 잘 팔렸다.

 

<4‧3무장투쟁사>는 4‧3의 전체 흐름을 다룬 첫 역사 저술이라는데 의미가 있었지만, 좌익적 시각에 편향되어 있었고, 과장된 면도 많았다. 이에 반해 존 메릴 논문은 최초의 4‧3 논문일 뿐 아니라, 미군 자료를 많이 인용함으로써 자극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 역시 미국적 관점에서 접근했다는 한계가 있었다. 그 후에 이들 저자들을 모두 만나 저술의 허실에 대한 심층 취재를 한 바 있다.

 

1988년에는 양한권의 「제주도 4‧3폭동의 배경에 관한 연구」(서울대)와 박명림의 「제주도 4‧3민중항쟁에 관한 연구」(고려대) 등 두 편의 석사 학위 논문이 동시에 발표돼 미로 같던 4‧3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때 취재반에게 활기를 불어준 자료가 또 있었다. 미군 자료다. 1980년대 후반에 미군정 연구가 본격화되면서 비밀 해제된 미군정 정보보고서가 쏟아져 나왔다. 취재반은 이를 입수해서 4‧3 관련 자료 발췌와 한글 번역작업을 동시에 진행했다. 해방 공간에서 발행되던 전국의 신문들도 모두 검색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얻어진 문헌자료와 체험자들의 증언자료가 쌓여가다 보니 카드 관리로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4‧3취재반 전용 컴퓨터를 도입했다. 4‧3취재반 출범 당시 편집국장은 양병윤 국장이었다. 양 국장은 이런 지원에도 앞장섰고, 외풍도 잘 막아주었다.

 

당시만 해도 경찰 정보과 형사들이 편집국에 드나들던 시절이었다. 4‧3을 연재한다하니 주로 공안문제를 다루는 대공분실 형사들도 얼굴을 비추기 시작했다. 양 국장은 곧잘 이들과 말다툼을 벌이면서 든든한 방파제 역할을 했다. 지금은 흔한 컴퓨터이지만, 그때 구입한 4‧3취재반 전용 컴퓨터가 편집국 제1호다. 이를 이용해 다양한 내용을 검색할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 프로그램도 만들었다.

 

이런 일에 두각을 나타낸 기자가 고려대 사학과 출신인 김종민이다. 그는 신문사에 들어온 지 2년 밖에 안 된 신참 기자였지만 치열하고 분석력이 뛰어났다. 거기다 역사를 보는 눈이 예사롭지 않고, 열정적이었다. ‘4‧3 전문기자’는 그렇게 탄생하고 있었다.

 

‘광주 청문회’ 닫힌 입 열어

4‧3처럼 오랫동안 은폐된 사건의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문헌자료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체험자들의 구술 증언이다. 4‧3취재반은 이 점을 매우 중시했다. 문헌자료가 줄 수 없는 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당시 제주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낮에는 본연의 취재활동(각자 출입처가 있었음)을 하고, 밤에는 마을을 누비며 체험자들의 증언을 채록했다. 주요 사건이 발생한 마을이 시골인데다, 제주에선 웬만하면 80대 노인도 밭일을 나가기 때문에 밤 시간을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취재반은 조천읍 선흘리를 시작으로 마을 취재에 나섰다. 그러나 취재반에게 곧이어 두 가지 어려움이 봉착했다. 그 하나는 증언자들이 피해의식 때문에 증언 자체를 회피하는 경우였다. 할아버지가 겨우 맘을 잡고 입을 떼려고 하면 “이 하르방, 또 잡혀가려고!”하며 할머니가 가로 막았다.

 

 

다른 하나는 어렵게 채록한 증언 내용을 검토하다보면, 같은 사건을 놓고도 구술자마다 다르게 증언하는 사례가 많았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기억이 희미하거나 사건을 잘못 파악해서 빚어진 일도 있었지만, 일부러 자기를 합리화하면서 왜곡시키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즉 앞의 사례는 잘못된 정보를 ‘입력’시킨 컴퓨터가 수십 년 동안 수정과정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잘못된 내용을 ‘출력’하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는 달랐다. 오랫동안 반복 학습된 반공교육 탓인지 스스로 선악을 구분하고 자기 쪽에 유리한 내용으로 채색한 후 증언을 한다는 점이다.

 

요즘은 ‘증언사’ 또는 ‘구술사’라는 학문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다. 이런 현상을 ‘집합기억’이라 한다. 즉 “개인의 회상들이 존재하지만, 개인들은 사회적 집단의 한 성원으로 기억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구술사는 과거가 현재에 어떻게 작동하고, 현재가 과거의 재현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 그 역학적 관계까지 분석 규명해야 유용한 자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취재반은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다단계 취재방식을 택했다. 마을 취재는 팀워크를 바탕으로 ①사전 준비 ②취재반 토론 ③1차 취재 ④취재내용 분석 및 상이점 검토 ⑤2차 취재 ⑥종합분석 ⑦연재 인용 시 재확인이란 7단계를 거치며 검증에 검증을 계속했다.

 

처음 취재 과정은 구술자가 입을 열도록 설득하는 것이었다. 참 많은 인내가 필요했다. “나이가 몇 살인가. 자네들은 당시를 몰라.”로 시작된 구술은 일제시대를 돌고 돌아 해방공간에 이른다. 결국 몇 시간을 들어도 4‧3에 관해서는 알맹이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어느 정도 노하우가 쌓이자 1차 취재 때는 주로 듣고, 2차 취재 때는 준비한 의문사항을 질문하고 답변을 듣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이런 고전 속에 뜻밖에 체험자들의 의식을 변화시키는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1988년 11월부터 시작된 국회의 ‘광주 청문회’였다. 1980년 신군부에 의해 자행된 광주 학살사건의 진상조사가 국회 차원에서 진행된 것이다. 전국에 생중계된 청문회는 1989년 12월 31일 전두환 전 대통령을 증언대에 서게 하면서 절정에 이른다.

 

광주 청문회 이후 4‧3 체험자들의 태도가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심지어 “청문회에서 총에 대검을 꽂았느냐 안 꽂았느냐가 쟁점이 되던데, 제주사태 땐 그건 문제도 아니었다.”고 분을 삼키며 4‧3의 참혹상을 이야기했다. 덩달아 그동안 만류하던 할머니들도 커피 잔을 들고 와 취재반 옆에 조용히 앉더니 곧 입을 열기 시작했다. 피해를 입은 마을 주민들의 제사 날짜를 일일이 구술하는 등 할머니들의 기억력은 뛰어났다.

 

그때 ‘4‧3같은 과거사는 혼자 따로 가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느낌이 왔다. ‘연동(連動)’의 중요성을 체험한 것이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

 

 

 

 

 

양조훈은? = 4‧3 광풍이 휩쓸던 1948년 12월 제주읍에서 태어났다. 1972년부터 27년 동안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88년 제주신문 4‧3취재반장을 맡아 「4‧3의 증언」을 연재하며 운명적으로 4‧3과 조우했다. 이후 제민일보 4‧3취재반장과 편집국장 등을 거치며 4‧3의 진실을 밝히는「4‧3은 말한다」(456회)를 10년 넘게 연재했다. 1999년 신문사에서 해직당한 이후에는 4‧3특별법쟁취연대회의 공동대표를 맡아 4‧3특별법 제정 운동에 앞장섰다. 2000년 이후 4‧3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 수석전문위원으로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작성의 실무책임을 맡아 공권력의 잘못을 밝혀냈고, 이 진상조사보고서를 근거하여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사과를 이끌어내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뉴욕타임스』(2001)는 저자를 “4‧3 학살을 조사 연구해온 저널리스트”로 소개하고, “그의 소망은 나라 전체가 이 역사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4‧3평화재단 초대 상임이사, 제주특별자치도 환경부지사도 지냈다. 현재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4‧3평화교육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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