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4.3을 맞는다. 무섭고 시렸고 한스러웠던 통한의 역사다. 목소리는 커녕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던 4·3은 지금으로부터 27년여 전 제주의 한 언론사 취재진들의 용기로 세상 밖으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잔인무도였고 통곡이었다. 그 시절부터 20여년에 걸쳐 이뤄진 4·3 진상규명의 역사에 중심부에 있었던 양조훈 전 제주도 부지사의 육필 비사를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해를 넘기고 1989년에 접어들었다. 신문 연재를 시작해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41주년이 되는 4월 3일엔 어떤 형태든 기획기사를 실어야 했기 때문이다. 연재를 4‧3의 어느 시기부터 시작할 것인가? 연재의 제목은? 논란을 빚는 용어들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입수된 자료들의 진위는? 체험자들의 증언을 어디까지 믿고 인용할 것인가?
이런 질문들이 계속 머리에 맴돌았다. 많은 사람들이 제주신문 4‧3취재반을 주시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공안당국은 “사회 안정을 해치는 일”이라며 여러 경로를 통해 연재를 막으려고 압박해 왔다. 취재반에게는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될 수가 없었다. 그것은 개인적인 불이익 수준이 아니라, 자칫하면 신문사의 운명과도 직결될 수 있는 폭발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연재 시점에 송상일 편집국장이 취임했다. 송 국장은 회사 측의 요구에 의해 ‘만일 문제가 발생하면 모든 책임을 진다’는 각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그 각서 제출사실은 최근에야 알았다. 송 국장은 취재반의 활동에 부담이나 제약이 될까봐 이 사실을 비밀에 부쳤던 것이다. 그만큼 신중했고, 음으로 양으로 4‧3취재반을 지원했다.
기획 연재의 제목은 「4‧3의 증언」으로 정했다. ‘폭동’이나 ‘항쟁’ 등 사건의 성격을 말해주는 꼬리표 없이 ‘4‧3’ 그 자체로 이야기하자는 뜻에서였다. 다음은 용어 정리가 문제였다. 가령 도민들이 주로 부르는 ‘산사람’에 대해서 관변 자료에서는 ‘폭도’ 혹은 ‘공비’로, 직접 활동했던 사람들은 ‘인민유격대’라고 호칭했다. 그래서 ‘무장대’란 중립적 용어를 사용하기로 했다.
해방 공간의 신문들을 검색하면서 깜짝 놀란 게 있다. 당시는 ‘인민’이란 용어가 너무나 자연스럽고 흔하게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심지어 1945년 9월 9일 발표된 극동군 미군 총사령관 맥아더의 포고 제1호는 “조선 인민에게 고(告)함”으로 시작됐다. 이후 6‧25전쟁을 거치면서 공고해진 반공 이데올로기는 용어마저 변색시켰다. ‘인민’은 친북적 용어가 되어 버린 것이다.
모아놓은 자료들을 검토하면서는 황당할 때가 많았다. 군인이 저지른 북촌 주민 학살사건이 ‘공비의 소행’으로 둔갑돼 있는가 하면, 잘못 쓰여진 기록이 재탕된 경우도 비일비재하였다. 남로당 제주도당 간부 조몽구(趙夢九)의 몽(夢)자가 노(魯)로 잘못 인쇄되자 다른 책자에도 계속 조몽구가 조노구(趙魯九)로 기록되는 식이었다. 한번 잘못 기록된 내용을 출처도 밝히지 않은 채 여기저기서 베껴 쓰다 보니 날짜, 장소 등 기초적인 사실조차 어긋나는 것이 부지기수였다.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상황도 제대로 기록된 게 없었다.
이런 오류는 증언자들의 구술 내용에서도 나타났다. 심지어 ‘4월 3일’이 양력이 아니라 음력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었다. 기억의 한계성도 있었지만 일부는 자의적으로 취사선택해 ‘편집된 기억’을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특히 사건 발생 시점에 대한 구술 가운데는 오락가락한 경우가 많아 혼선을 빚기도 했다. 왜곡‧부실투성이 자료 때문에 난감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4‧3 진상규명의 필요를 절감하고 의지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4‧3취재반에겐 수집자료 가운데 알곡과 쭉정이를 가려내는 작업이 급선무였다. 그래서 자료와 자료, 문헌자료와 증언 사이를 교차하면서 비교 검증하고 미진한 것은 다시 보충 취재하는 일을 반복했다.
나는 ‘4‧3’이라는 숫자의 상징성을 담고 있는 1948년 4월 3일 상황이라도 철저히 추적하자고 취재반을 독려했다. 그날의 상황부터 연재를 시작해야겠다는 판단이 섰다. 그래서 취재반은 4월 3일 그날 무장대로부터 습격을 받은 화북‧신엄‧한림‧남원‧성산 지역 등을 누비며 집중적으로 조사했다. 그 결과 기존 관변자료 기록들의 허구가 낱낱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막상 원고를 쓰려고 하니 수렁에 빠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4월 3일의 상황은 그 전에 있었던 복합적이고 누적된 전사(前史)의 한 기폭점일 뿐인데 이를 연재의 기점으로 삼으려한 결정적인 실수를 범한 것이다. 그날 상황이 왜 일어났는지 그 배경과 원인에 대한 설명 없이 집필해야 하는 부담이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또다시 깊은 고민에 빠졌다.
한국 언론사상 첫 4‧3 연재
1989년 4월 3일 첫 연재 기사를 집필하다 보니 사건의 배경과 원인을 다루기엔 준비된 자료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걸 느꼈다. 1948년 4월 3일 상황을 집중 취재하여 그 자료는 상당히 축적되었지만 4‧3 전사에 대한 자료는 미흡했던 것이다. 첫 연재를 4월 3일 일어난 일만 장황하게 보도했을 때 ‘원인 없는 4‧3’으로 해석될 수 있어서 이래저래 고민에 빠진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취재반은 두 가지 일을 추진했다.
하나는 4‧3의 전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4‧3 이전 2기, 4‧3 이후 8기 등 모두 10기의 ‘4‧3의 시기 구분’을 도표로 만든 것이다. 4‧3의 시기 구분은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4‧3 이전> 제1기 인민위원회 주도기(1945. 8. 15.~1947. 2. 28.)
제2기 미군정 공세기(1947. 3. 1.~1948. 4. 2.)
<4‧3 이후> 제1기 무장대 공세기(1948. 4. 3.~5. 11.)
제2기 경비대 주도 토벌기(1948. 5. 12.~10. 19.)
제3기 사태의 유혈기(1948. 10. 20.~12. 31.)
제4기 육해공 합동토벌기(1949. 1. 1.~3. 1.)
제5기 선무 활동기(1949. 3. 2.~5. 15.)
제6기 소강 상태기(1949. 5. 16.~1950. 6. 24.)
제7기 대대적 예비검속기(1950. 6. 25.~10. 9.)
제8기 마지막 토벌기(1950. 10. 10.~1954. 9. 21.)
다른 하나는 4‧3의 비극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줄 개인의 체험담을 싣기로 하였다. 그것이 바로 ‘열세살 김순애 소녀가 겪은 4‧3’이란 특별 기획이었다.
이런 준비 과정을 거쳐 1989년 4월 3일자 『제주신문』 1면 톱기사는 ‘40년 침묵의 비극사가 입을 연다’는 제목 아래 4‧3취재반의 본격 활동상을 알렸다. 한국 언론사상 처음 시도한 4‧3연재 대장정의 첫 발을 내디딘 것이다. 당시 4‧3 연재물 제목 등은 송상일 편집국장이 직접 달 정도로 열정을 보였다. 그는 4‧3취재반의 정신적 버팀목이었다.
3면에 실린 「4‧3의 증언」 제1회 기사는 ‘김순애 소녀가 겪은 4‧3’과 ‘4‧3의 시기 구분’으로 전면을 채웠다. 취재반이 만난 김순애는 쉰네 살의 여인으로, 13세 때 4‧3을 만나 갖은 고초를 겪었다. 중산간 마을인 안덕면 동광리가 고향인 그녀는 외할아버지를 포함한 마을 유지들과 외숙 내외, 자기보다 한 살 아래인 사촌동생이 군인의 총에 죽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
자신도 살기 위해 산으로 피신했다가 ‘폭도 아닌 폭도’ 생활을 했다. 나중에 하산한 어머니는 예비검속으로 행방불명이 됐다. 이런 비극사를 담담하게 이야기하던 그녀가 끝내 “어느 세상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라며 울먹이자 취재하던 기자도 눈물을 쏟고 말았다.
공안당국이 즉각 민감한 반응을 나타냈다. 보도내용을 믿을 수 없다면서 취재 경위와 취재원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며칠 만에 신문에 난 희생자 중 한 사람이 “토벌대가 아니라 폭도가 학살한 죽음인데 오보했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돌다리도 두들겨보는 심정으로 신중에 신중을 기한 보도인데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길 수 있다는 말인가?” 즉각 취재반을 투입하여 진위 조사에 나섰다.
반복된 ‘검증’에 목숨 걸었다
4‧3취재반이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바로 검증이었다. 오류와 왜곡투성이의 자료들을 그대로 인용할 수는 없었다. 마찬가지로 체험자의 증언을 곧이곧대로 믿다가는 헤어나기 힘든 수렁에 빠질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어떤 자료, 어떤 증언이라도 일단 의심의 눈으로 봤다.
내가 취재반원들에게 입버릇처럼 외쳤던 것이 ‘철저한 검증’이었다. 1948년 4월 3일 새벽의 분위기를 전하는 날씨도 추측이나 증언에만 의존하지 않고 기상대에 확인하여 기술했다. 새로운 자료와 증언을 입수할 때마다 속단하지 않고 ‘돌다리도 두들겨보는 심정’으로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 검증 과정을 반복했다. 나는 집필과정에서 신문에 인용되는 증언에 대해서는 반드시 당사자와 통화해서 재확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9년 4월 3일자에 보도된 「4‧3의 증언」 첫 연재부터 오보라니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가 토벌대에게 희생되었다고 보도한 사망자 중 한 명이 ‘폭도’에게 당했다는 것이 반론의 취지였다. 그 근거로 해당 희생자는 ‘국가유공자’로 등록되어 있고, 그 유족들은 정부로부터 일정액의 지원도 받고 있다는 것이다.
4‧3 당시 토벌대는 민간인들을 향보단, 민보단, 청년방위대 등에 가입시켜 마을 방위나 토벌 작전에 동원시켰다. 이런 과정에서 민간인들이 무장대의 습격을 받고 희생되기도 했다. 정부는 이런 희생자 수백 명에 대해 소정의 절차를 거쳐 국가유공자로 선정하여 예우했다. 4‧3 당시 같은 죽음이라도 무장대에게 피해를 입으면 ‘국가유공자’로, 토벌대에 의한 희생은 ‘폭도’ 또는 ‘좌익분자’, ‘빨갱이’로 취급되던 세상이었다.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동광리에 가서 재조사를 했다. 그런데 마을 주민들은 한결같이 그 해당 희생자가 토벌대에게 피해를 입은 것이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 어떻게 ‘국가유공자’로 지정됐다는 말인가? 그 경위를 추적해 봤더니, 인척 중에 경찰관이 있어서 피해 상황을 거꾸로 뒤집어 놓았다는 것이다.
‘오보 소동’의 첫 위기를 벗어난 4‧3취재반은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에 「4‧3의 증언」을 정기적으로 연재하며 가속도를 붙여 나갔다. 1948년 4월 3일에 일어난 지역별 상황을 자세히 기술하는 한편, 이날 상황을 기록한 기존 자료의 왜곡사례도 신랄하게 지적했다.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4월 3일 상황에 관한 자료 비교표’를 만들어 습격 상황, 피해 상황의 다름을 한 눈에 볼 수 있게 했다. 있지도 않았던 ‘감찰청과 경찰서의 점령’ 등을 기록한 관변자료 뿐만 아니라, 피해 상황을 심하게 부풀린 자료의 맹점도 들춰냈다.
연재를 하면서는 충분한 사료가 없어 논리적으로 확증할 수 없을 때는 아무리 심정적 확신이 드는 경우에도 논리 전개를 삼갔다. 대신 쉽사리 단정할 수 없는 내용은 그동안 수합한 자료와 증언을 드러냄으로써 독자들의 판단에 맡겼다.
그 대표적인 예가 ‘남로당 중앙 지령설’ 논쟁이었다. 이전의 관변자료는 남로당 제주도당이 북한, 또는 중앙당의 지령을 받고 ‘4‧3폭동’을 일으킨 것으로 못 박아 놓고 있었다. 하지만 연구자들은 남로당 제주도당의 독자적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이 문제는 너무도 예민한 사안이어서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제목도 ‘지령설’과 ‘독자적 감행설’이 팽팽하게 엇갈린다는 수준의 중립적 내용으로 뽑았다. 그러나 나중에 중앙당 지령설의 원조 격인 박갑동(남로당 지하총책), 지령설을 기술한 교과서 집필진 등을 취재하면서 그들의 주장이 허구임이 드러났다. 결국 4‧3취재반은 얼마 뒤에 ‘남로당 제주도당의 독자적 행동’이었다고 수정‧보도하게 된다.
신문 연재가 있던 날, 첫 추모제와 방송도
「4‧3의 증언」 연재물이 첫 보도된 1989년 4월 3일 그 무렵, 제주도에서 두 가지 의미 있는 일이 더 있었다. 그 하나는 제주시민회관에서 재야단체 주최로 4‧3 추모제가 처음 열린 것이요, 다른 하나는 제주MBC가 4‧3 특집기획물을 처음 방영한 것이다.
4‧3 추모제는 11개 시민사회단체로 결성된 ‘4‧3추모제 공동준비위원회’(사월제공준위)가 주최한 것이다. 참여 단체는 제주여민회, 제주문화운동협의회, 제주사회문제협의회, 그림패 보롬코지, 제주YWCA 대학부 및 청년부, 제주교사협의회, 제주사회연구소준비위, 제주4‧3연구소설립준비위, 제주지역총학생회협의회, 제주지역동아리연합회협의회 등이다.
행사는 4월 1일부터 3일간 추모굿, 슬라이드 상영, 시화전, 강연회, 진상규명 촉구대회, 토론회 등 다양하게 진행됐다. 놀이패 한라산은 마당굿 <한라산>을 공연했다. 그런데 공안당국의 훼방은 변함없이 진행됐다. 당초 강연은 현기영 소설가와 김명식 시인이 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현기영 소설가가 여러 날 마포경찰서에 유치되는 바람에 김명식 혼자 하게 되었는데, 그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4‧3은 민중항쟁이다!”고 열정적으로 외쳤다.
더 심각한 상황은 추모굿 주관자가 행방불명된 사건이었다. 처음 시도된 추모굿은 제주칠머리당굿 기능보유자로 유명한 안사인 심방이 진행하기로 돼 있었다. 그런데 행사를 앞두고 소식이 두절된 것이다. 뒤늦게 알려진 이야기는 당국에 의해 부산 모 호텔에 ‘연금 아닌 연금’ 신세가 됐다는 것이다.
불가피하게 마당굿에서 ‘심방’역을 맡아온 정공철 제주문화운동협의회 대표가 대역을 맡았다. 그는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굿을 진행했다. 4‧3 유족만이 아니라 참석자들의 눈시울까지 붉히게 했다. 그날 그는 뜻하지 않게 ‘심방’으로 전격 데뷔한 것이다.
당시만 해도 암울한 시절이어서 놀이패 한라산 단원들은 공연에 앞서 ‘구속도 감수한다’는 결의문을 채택할 정도로 비장한 각오로 나섰다. 아니나 다를까, 마당극 공연 직후 몇몇 단원들이 경찰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다. 다행히 구속자는 없었다.
제주MBC는 4월 2일 ‘현대사의 큰 상처’란 테마로 4‧3 특집 기획물을 방영했다. 김건일 기자가 취재구성, 오석훈 기자가 영상취재를 맡은 이 기획물은 4‧3을 처음으로 TV 화면에 올린 작품이다. 그 배경에는 대학생 때 4‧3 진실규명에 나섰다가 옥고를 치른 이문교 보도국장의 역할이 컸다.
김건일 기자(현 한라일보 사장)는 그 후로 해마다 4‧3 다큐멘터리를 연출해냈는데, 그에게는 대학 시절 뼈아픈 기억이 있다. 판금된 4‧3소설 「순이삼촌」 카피본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1984년 <제대신문> 편집장을 맡게 되자 작가인 현기영 선생과의 인터뷰를 시도했다. 서울에 올라가 취재까지 마친 후 대학신문에 기사화했는데, 막판 대학당국의 검열에 걸려 삭제되는 아픔을 겪은 것이다.
김건일 기자는 ‘현대사의 큰 상처’를 처음 연출하면서 “우선 4‧3의 존재를 알리고, 사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시각과 4‧3의 문제점을 보여주려는 의도에서 심혈을 기울었지만, 처음에 만드는 작품이어서 아쉬움도 컸다”고 회고했다. <5편으로 이어집니다>
☞양조훈은? = 4‧3 광풍이 휩쓸던 1948년 12월 제주읍에서 태어났다. 1972년부터 27년 동안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88년 제주신문 4‧3취재반장을 맡아 「4‧3의 증언」을 연재하며 운명적으로 4‧3과 조우했다. 이후 제민일보 4‧3취재반장과 편집국장 등을 거치며 4‧3의 진실을 밝히는「4‧3은 말한다」(456회)를 10년 넘게 연재했다. 1999년 신문사에서 해직당한 이후에는 4‧3특별법쟁취연대회의 공동대표를 맡아 4‧3특별법 제정 운동에 앞장섰다. 2000년 이후 4‧3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 수석전문위원으로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작성의 실무책임을 맡아 공권력의 잘못을 밝혀냈고, 이 진상조사보고서를 근거하여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사과를 이끌어내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뉴욕타임스』(2001)는 저자를 “4‧3 학살을 조사 연구해온 저널리스트”로 소개하고, “그의 소망은 나라 전체가 이 역사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4‧3평화재단 초대 상임이사, 제주특별자치도 환경부지사도 지냈다. 현재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4‧3평화교육위원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