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지난 5월 2일자 본란을 통해 “표출된 총선 민의…정부의 과거사 태도 달라질까?”란 제목으로 글을 쓴 바 있다. 부제로는 “4‧3과 5·18에 대한 박근혜 정부의 향방”이라고 달았다.
글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지난 4·13 총선은 집권여당의 참패라기보다 ‘성난 민심이 박근혜 정부를 심판했다’는 분석이 압도적이고, 불통과 일방통행, 오만의 통치를 버리고 소통과 협치, 겸손의 정치를 지향하라는 준엄한 국민의 심판이었다는 것이다.
총선 결과로 봤을 때, 박근혜 정부도 앞으로 대화와 협치의 정치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4·3의 당면 문제, 즉 4·3특별법 정신에 어긋난 4·3희생자 재조사나 내년 4·3추념식에 대통령 참석문제 등에 대한 변화가 있지 않을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보름 후쯤 거행되는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찾자는 것이었다. 광주에도 5·18 상징노래인 ‘임을 위한 행진곡’의 제창과 대통령의 참석 여부가 관심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정부는 지난 18일 광주에서 여실히 보여줬다. 하나도 변한 것 없이 ‘일방통행의 나의 길을 간다’는 사실을 말이다.
혼자서 입 다문 황 총리 모습에 답답
5·18기념재단 이사이기도 한 필자는 18일 국립5·18민주묘지에서 거행된 제36주기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했다가 답답함과 부자연스러움을 동시에 느꼈다.
그 부자연스러움은 한 장의 사진이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합창단들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자 정의화 국회의장, 정진석 새누리당 원대대표,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대표, 안철수 국민의당 공동대표 등 국회 대표와 여야 대표가 따라 제창했다.
다만 황교안 국무총리만 입을 굳게 다물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면 ‘임을 위한 행진곡’은 정부에 의해 제창은 안되고 합창만 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구태여 총리가 좌석에서 일어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참석자가 일어나 제창하자 혼자만 앉아있기엔 너무 거북했다. 그래서 총리도 엉겁결에 일어났지만 정부의 방침에 따라 침묵의 자세로 제창을 거부한 것이다. 그런 모습이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을까?
‘처삼촌 묘 벌초하듯’ 20분만에 끝나
부자연스러움은 기념식 식순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애국가를 4절까지 제창하고, 총리의 헌화, 경과보고, 총리의 기념사, 합창이 전부였다. 그러니 기념식은 달랑 20분 만에 끝났다.
주관부처인 국가보훈처가 짜놓은 기념식 식순에는 4·3추념식에서 보였던, 경과보고의 영상도 없었고, 지방자치단체장의 추념사, 유족 대표의 인사, 추모시 낭송도 없었다.
황 총리의 기념사도 구설수에 올랐다. 황 총리는 5·18 기념사에서 경제 활성화, 일자리 창출, 민생안정 등 정부가 추진 중인 정책들을 나열했기 때문이다.
이에 격분한 한 야당 국회의원은 “이게 무슨 짓이냐!”고 소리를 지르며 항의했다. 한 야당 대표는 “처삼촌 묘 벌초하듯이 기념식을 20분 만에 해치워버렸다”면서 5·18기념식에 무성의했던 정부를 질타했다.
이런 부자연스러움은 행사 주관자인 박승천 국가보훈처장이 5·18 유족들의 거센 항의로 자리에 앉아보지도 못하고 쫓겨나는 파행을 빚기도 했다. 소복을 입고 휠체어를 탄 유족들이 그의 입장을 가로 막은 것이다.
이런 현장의 모습을 4·3 유족들도 지켜봤다. 제주4·3희생자유족회(회장 양윤경)는 지난 17일부터 2박3일 일정으로 ‘4·3유족회원 역량강화를 위한 연수’를 시행했다.
다른 지역의 과거사 현장도 돌아보던 차에 광주 5·18기념식에도 참석한 것이다. 4·3 유족들은 이날 기념식 행사를 보면서 착잡한 심경을 감추지 못했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광주광역시교육청 장휘국 교육감으로부터 뜻밖의 환대를 받은 것이다. 지난 3월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이석문 교육감과 4·3과 5·18 역사 유적을 잇는 ‘테마형 수학여행 추진에 관한 업무협약’을 맺은 장 교육감은 이런 인연으로 4·3 유족들을 오찬행사에 초대한 것이다.
‘협치’ 기대도 물거품되나
필자는 5·18 행사를 보면서 지난 총선에서 여소야대의 결과가 나오고, 박근혜 정부도 협치를 중시하겠다고 발표를 할 때만 해도 이런 결과가 나올 줄은 몰랐다.
지난 13일 박근혜 대통령과 여야 3당 원대대표 회동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문제가 집중 거론되었고, 박 대통령도 국가보훈처에 좋은 방안으로 검토하도록 지시하겠다고 발표가 되었을 때에는 대부분 긍정적인 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상했었다.
그날 찍힌 청와대 회동 사진도 그런 기대를 갖게 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이례적으로 여야 원내지도자와 손을 맞잡고 밝게 웃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다. 국가보훈처는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이 국론 분열을 일으킨다면서 거부하고 기존의 입장을 고수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올해도 5·18 기념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취임 첫해인 2013년 기념식에 참석했을 뿐 내리 3년 동안 불참하고 있다. 이는 곧 박근혜 정부의 과거사에 대한 방향전환이 없다는 것임을 재천명한 것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그것은 비단 5·18 문제만이 아니다. 4·3을 포함한 대부분의 과거사 문제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과거사 문제는 연동(連動)되고 있기 때문이다.
광주청문회가 4·3체험자들의 입 열게 해
필자가 ‘과거사문제 해결의 연동’을 체득한 것은 1988년 4·3취재반장을 맡고 증언조사에 나섰을 때였다. 4·3을 체험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깊은 피해의식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고전 속에 뜻밖에 체험자들의 의식을 변화시키는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1988년 11월부터 시작된 국회의 ‘광주 청문회’였다. 1980년 신군부에 의해 자행된 광주 학살사건의 진상조사가 국회 차원에서 진행된 것이다. 전국에 생중계된 청문회는 1989년 12월 31일 전두환 전 대통령을 증언대에 서게 하면서 절정에 이른다.
TV를 통해 광주 청문회를 시청한 4·3 체험자들의 태도가 그후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심지어 “청문회에서 총에 대검을 꽂았느냐 안 꽂았느냐가 쟁점이 되던데, 제주사태 땐 그건 문제도 아니었다.”고 분을 삼키며 4·3의 참혹상을 이야기했다.
덩달아 그동안 만류하던 할머니들도 커피 잔을 들고 와 취재반 옆에 조용히 앉더니 곧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때 ‘4·3같은 과거사는 혼자 따로 가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느낌이 왔다. ‘연동’의 중요성을 체험한 것이다.
그 후 4·3특별법 제정운동 등을 전개하면서 광주 5·18은 하나의 나침반 역할을 했다. 과거사 문제를 어떤 방법으로 풀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시행착오가 있었는지 비교 분석하면서 우리가 나아갈 길을 찾았다.
그러다보니 어느덧 4·3은 과거사 해결의 새로운 모델이 되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노근리 사건 해결에 혁혁한 공을 세운 노근리국제평화재단 정구도 이사장은 “노근리 사건을 풀어 가는데 4·3의 진실규명과 명예회복 과정은 매우 유익한 도움이 되었다”고 피력한 적이 있다.
2013년 5월 10일 여수시청 대회의실에서 ‘여순사건 특별법 제정을 위한 심포지엄’이 열렸는데, 필자가 ‘제주4·3특별법 제정과정과 4·3위원회 활동성과’란 제목으로 주제 발표한 적이 있다.
여순사건 유족과 연구자들은 제주4·3의 해결과정과 성과를 경이롭게 보고 부러워했다. 그들은 “여순사건도 이제 제주4·3처럼 특별법도 만들고,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도 하고, 대통령 사과도 받고, 평화공원도 만들고, 유해 발굴도 하고, 평화재단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과거사 해결의 새로운 모델이 된 제주4·3
그러면 왜 제주4·3은 과거사 해결의 새로운 모델이 되고 있는가? 그 해답을 4·3과 과거사 문제를 연구해서 미국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한 연구자의 글에서 찾고자 한다.
“1987년 민주화 이후 4·3위원회 설립까지의 13년간의 진실규명 운동사와 2000년 8월 위원회 설립 이후 현재까지의 10여 년간의 4·3위원회의 활동사를 보면 국내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도 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성공적인 진실규명 및 명예회복의 사례이다.
제주의 사례가 성공적이었다는 세 가지 근거는 첫째, 포괄적이고 역사적인 진실의 규명, 둘째, 4·3위원회의 지속적이고 영향력있는 활동, 셋째, 4·3평화재단 설립을 통한 영구적인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의 모델 확보이다.”
이 글은 김헌준 박사가 2011년 12월 8일 제주4·3평화재단이 주최한 국제평화 심포지엄에서 「해외에서의 4·3 연구동향과 4·3의 세계화 방향」이란 주제 발표를 통해 밝힌 내용이다.
그는 2008년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에서 4·3 진실규명사와 4·3위원회의 활동성과를 집중 연구한 논문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0년 이후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 과거사 위원회 전체의 흐름과 제주4·3위원회의 활동을 비교 연구한 논문(「과거사 관련 위원회의 국제적 확산 경향에 관한 비교 연구」)이었다.
이 논문은 2009년 미국정치학회 인권 분야에서 최고 논문상을 받을 정도로 미국 학계에서도 평가를 받았다.
김 박사의 논문은 4·3위원회의 활동상을 세계 다른 과거사 위원회의 활동과 학문적으로 본격 비교 분석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있다. 그가 4·3위원회의 활동성과를 성공적이라고 본 이유는 다음 네 가지이다.
1) 4·3위원회는 초기 2년 반 동안 진실규명이란 중요한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2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어떠한 진실이 어떻게 규명되어야 하는지 초기 방향을 적절히 설정하여 효과적으로 추진하였다. 여기에는 제주도 연구자들의 축적된 연구 결과가 반영됐다. 4·3사건과 민간인 학살에 대한 ‘포괄적이고 역사적인 진실’을 밝혀냈는데, 이는 진실화해위가 ‘사건별 개인별 개별적이고 파편화된 진실’을 밝힌 것과 큰 차이가 있다. 4·3보고서는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고 이 후 명예회복과 특별법 개정, 재단의 설립, 추가적인 기념사업 등을 가능케 한 큰 힘이 되었다.
2) 4·3위원회는 전 세계적으로 비교해 보아도 가장 수명이 긴 과거사 관련 위원회다. 전 세계적으로 보통 6개월에서 2년 정도의 임기를 지닌 과거사 관련 위원회와 비교해 볼 때 4·3위원회는 10여년의 오랜 기간 존속하면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무엇보다도 4·3위원회는 정권 교체란 어려움을 맞으면서도 위원회 백서 발간, 전원위원회 개최, 추가 희생자 확정이란 성과를 이룬 것은 특기할 만하다.
3) 더불어 이야기되어야 할 것은 4·3 진상규명 운동의 놀라운 지속성과 집중력이다. 대부분의 국제적 인권 침해 사례가 사건 발발 직후 논의되고 오래된 사건들은 으레 묻히기 마련인데 4·3은 민주화 이후 13년, 그리고 사건 발발 이후 50여 년이 지난 후에 진실위원회가 설립되었다. 다른 국가에서도 공권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에 대한 유사한 관심이 일어나고 있으며 이런 점에서 제주4·3이 주요한 모델이 될 수 있다.
4) 4·3위원회는 지속 가능한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의 모델을 보여 주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2003년 확정된 진상보고서는 7대 정책 건의사항을 포함하고 있는데, 놀라운 사실은 그 건의사항이 대부분 채택되거나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전 세계적으로 보아도 이 정도의 이행율을 보인 것은 매우 보기 드물다. 이행된 권고사항 중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진상규명 및 기념사업 지속 지원’이고, 그 중심에 4·3평화재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7대 건의안 이행률 높이 평가
이 발표를 보면서 느끼는 점이 있었다. 우리가 ‘당연한 일’로 여겼던 정부의 사과, 국가추념일 지정, 평화공원 조성, 유해 발굴 등 대정부 7대 건의안의 이행 성과가 세계 다른 과거사위원회와 비교할 때 매우 높은 수준이라는 점이다.
이러고 보면 제주4·3은 국내의 다른 과거사위원회의 활동과 비교할 때도 그 성과가 높다고 볼 수 있다.
가령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등은 기념관 또는 추모시설 건립, 유해 발굴 안치의 규정이 있음에도 진전시키지 못했다.
특히 진실화해위원회는 ‘과거사연구재단 설립’(과거사법 제40조)이란 법적 근거가 있음에도 재단 설립을 하지 못했다. 또한 발굴된 유해(1617구)의 안장시설조차 마련 못하고 그 유해들을 대학 연구실에 맡긴 채 2010년 12월 문을 닫고 말았다.
그렇다고 4·3문제가 완결된 것은 결코 아니다. 아직도 해결해야할 문제가 많다. 최근에 4·3평화재단이나 4·3희생자유족회 등이 2018년 4·3 70주년을 앞두고 4·3해결의 과제를 연구하고 새로운 방안을 모색하고 있는 것도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정권 바뀐 대만 “2·28사건 재조사한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제주4·3과 흡사하다는 대만 2·28사건의 해결과정을 다시 주시할 필요가 있다. 이미 밝혔지만 대만 2·28사건은 발발배경이나 정부군에 의한 대량 학살, 이를 반세기동안 금기시한 것 등이 제주4·3과 너무 비슷하다.
그리고 진실규명 과정이나 정부의 사과, 명예회복, 기념사업 등도 흡사하다. 대만은 정부 보고서에 희생자 숫자가 1만8000~2만8000명으로 추정하고도 실제 보상금을 지급한 희생자는 2700여명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희생자 보상까지 시행했다.
그러면 2·28문제가 대체로 해결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대만 정권이 바뀌면서 2·28문제의 해결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대만 새 총통 차이잉원(蔡英文) 취임식이 엊그제(20일) 있었다. 그녀는 대만 역사에서 최초의 여자 총통인 동시에 야당인 민진당이 두 번째로 정권을 잡게 한 주인공이다. 8년만에 보수정당인 국민당에서 진보정당인 민진당이 정권을 쟁취한 것이다.
한국의 「연합뉴스」는 20일 타이베이 발 기사에서 “대만 정권의 교체는 차이잉원 총통 취임식에서 울려 퍼진 저항가요 ‘메이리다오’(美麗島)가 알렸다.”고 보도했다.
‘아름다운 섬’이란 의미를 가진 메이리다오는 대만의 독립과 민주화 투쟁을 상징하는 노래로 불러졌으나 1970~1980년대 국민당 정부의 계엄령 시기엔 금지곡으로 지정됐었다. 한때 금지곡이었던 이 노래가 총통 취임식에서 불릴 것이라고는 상상키 어려웠던 일이다.
그런데 취임 연설을 마친 차이 총통은 마지막 순서로 초등학교 합창단과 국립합창단이 이 노래를 부르자 자신도 무대 복판에 서서 지휘하듯 손을 휘두르며 따라 불렀다.
이 예상치 못한 모습에 취임식장을 가득 메운 2만여명의 참석자도 이 노래를 따라 부르며 취임식 행사는 절정에 올랐다는 것이다. 언론은 이 노래가 “대만판 ‘임을 위한 행진곡’”이라고 보도했다.
다시 5·18기념식장을 생각하게 한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를 때, 굳게 다문 국무총리의 입모습에서 대한민국 현 정부의 옹졸함을 연상시켰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대만 차이잉원 총통은 취임사에서 과거사 정리를 위해서 총통부 직속의 ‘진상과 화해위원회’를 구성하겠다고 밝혔다. 즉 “2·28사건을 재조사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혹자는 2·28사건의 경우 정부의 조사와 정부수반의 사과, 심지어 희생자 보상까지 마무리한 마당에 무얼 재규명하겠다는 것이냐고 의아해 할지 모른다. 그러나 같은 사안일지라도 어떤 성향의 정부가 진실 규명했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크게 달라질 수 있다.
과거사 해결의 연동은 비단 국내 문제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외국의 사례에서도 얼마든지 참고하고 비교하고 인용할 수 있다. 그런 차원에서 앞으로 전개될 대만 2·28의 치유는 또다시 ‘4·3의 거울’로 다가오고 있다.
☞양조훈은? = 4·3 광풍이 휩쓸던 1948년 12월 제주읍에서 태어났다. 1972년부터 27년 동안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88년 제주신문 4·3취재반장을 맡아 「4·3의 증언」을 연재하며 운명적으로 4·3과 조우했다. 이후 제민일보 4·3취재반장과 편집국장 등을 거치며 4·3의 진실을 밝히는「4·3은 말한다」(456회)를 10년 넘게 연재했다. 1999년 신문사에서 해직당한 이후에는 4·3특별법쟁취연대회의 공동대표를 맡아 4·3특별법 제정 운동에 앞장섰다. 2000년 이후 4·3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 수석전문위원으로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작성의 실무책임을 맡아 공권력의 잘못을 밝혀냈고, 이 진상조사보고서를 근거하여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사과를 이끌어내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뉴욕타임스』(2001)는 저자를 “4·3 학살을 조사 연구해온 저널리스트”로 소개하고, “그의 소망은 나라 전체가 이 역사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4·3평화재단 초대 상임이사, 제주특별자치도 환경부지사도 지냈다. 현재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4·3평화교육위원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