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에는 기운이 잘 모이는 땅과 기운이 잘 모이지 않는 땅이 있다. 명당은 용맥(龍脈), 즉 산줄기를 타고 흐르는 지맥이 이어져 생명력이 가득한 산천의 기운이 모인 곳으로 이러한 자리는 건강과 복을 얻을 수 있다. 명당의 입지와 환경은 지세가 포근하고 물이 잘 감싸 흐르는 양지가 바르고 사람이 살기에 아늑한 장소를 말하는 것이다. 풍수에서 용(龍)이라고 하는 것은 산의 능선이 상하로 높고 낮게 기복을 이루고 좌우로 구불구불하게 흘러 내려온 모습이 마치 꿈틀거리는 용의 모습과 같음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 변화무쌍한 형세로 이어진 산맥이 마치 풍운 조화를 일으키는 용의 모습에 비교한 것이다. 지맥(地脈), 즉 용맥이란 풍수지리에서 땅속에 있는 산천의 정기가 순환하는 토맥(土脈)을 말하며 지리적으로 말해 땅속 지층이 이어진 기맥(氣脈)을 가리키며 인체의 기혈(氣血)에 비교된다. 맥(脈)이란 본래 시각적으로 보이는 일반적인 산줄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용맥을 타고 땅속으로 흘러 통하는 기(氣)의 통로를 말한다. 산세를 타고 온 지맥을 기운이 흐르지 않거나 약한 사맥(死脈)과 기운이 잘 흐르고 생동하는 생맥(生脈)으로 구분하는데, 생기를 타는 용맥 중에서 기운이 가장 집중되어 모이는 곳을 풍수지리에서는 혈(穴)이라고 하는 것이다. 풍수에서 보통 지세에 따라 음양의 생기가 유동하는 것이 마치 인체의 맥락에서 기혈이 흐르는 것과 같으므로 생기의 운행이란 측면에서 ‘맥’이라고 한 것이다. 사람의 인상을 관찰하는 것이 관상이라면 풍수지리는 땅을 살피고 음양의 허실을 관찰하는 지리 분야이므로 땅의 관상, 즉 상지술(相地術)이라고도 부른다. 혈(穴)이 맑으면 귀한 인품이 나고 혈이 흐리면 천한 인품이 난다고 여겼으며 지맥을 받아 기운이 모이고 산세가 맑고 아늑한 곳을 일명 명당(明堂)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청룡, 백호, 주작, 현무가 잘 이루어지고 물길이 잘 감싸고 도는 포근하고 아늑한 지세의 적당한 곳을 말하는 것이다. 명당을 이루는 지맥의 흐름도는 다음과 같다. 집의 뒤쪽을 받치고 있는 주산(主山)이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하고 수려하며 단정한 곳이며 주위 사방에서 호위하는 산들이 있고 산맥이 평지 쪽으로 유유히 뻗어 내리흐르는 물가에서 그쳐 평평한 들판에 집터가 이루어진 곳을 말한다. 가장 좋은 곳은 일조량이 적당하고 통풍이 잘되며 적당한 거리를 두고 전후좌우로 동산이나 산이 감싸주는 포근하고 아늑한 곳이 이상적인 명당이라 말할 수 있다. ☞ 명당은 심신을 건강하게 하는 치유의 장소이다! 예로부터 배산임수(背山臨水), 즉 뒤로 산을 의지하고 앞으로 물을 맞이하면 건강장수(健康長壽)하고, 전저후고(前低後高), 즉 앞이 낮은 듯하고 뒤가 높으면 세출영웅(世出英雄)하고, 전착후관(前窄後寬), 즉 앞이 좁은 듯하고 뒤가 넓으면 부귀여산(富貴如山)이라고 했다. 밝은 기운이 모이는 명당은 혈(穴)과 사(砂)가 합한 곳으로써, 양택이든 음택이든 산천의 기운이 흩어지지 않고 한 곳으로 조화롭게 모인 취합국세(聚合局勢)를 이룬 것을 말한다. 산천의 기운이 잘 모이는 장소들을 활용하여 관광과 연계한 명당의 기운 받기라는 치유코스를 개발하여 지역의 발전을 도모함과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활기찬 마을로 만들어갈 수도 있다. 전통적인 풍수 이론에서는 바람을 음기(陰氣), 물은 양기(陽氣)로 여겼으며, 이 두 가지는 모두 기(氣)가 돌아다니는 물질이다. 기(氣)의 양(陽)이라는 것은 바람으로 유행하는 것이고, 기(氣)의 음(陰)이라는 것은 물로부터 움직이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기(氣)’는 특유의 겸성(兼性)을 가지고 있는데 즉 바람을 타면 흩어지고 물의 경계를 만나면 그친다.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바로 이 기(氣)가 모이면 살고 기(氣)가 흩어지면 죽는다. 이 때문에 “바람을 감추고 물을 얻는다. (藏風得水)”는 곧 풍수학설(風水學說)에서 말하는 ‘취기(聚氣)’의 근본이다. 이 가운데서 알 수 있는 것은 《역경》과 풍수학은 실제로 원(源)과 류(流)의 관계이다. 즉 근원과 파생의 관계이다. 한의학의 근본은 역시 음양오행의 이론을 바탕으로 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음양오행의 전체적인 기틀과 이론 위에서 건립된 것이다. 변별로써 인체의 음양가 허실(虛實), 표리(表裏), 한열(寒熱) 등을 주요 임무이며 따라서 인체 내부와 사람과 환경의 협조 관계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 신영대는? = 대한풍수연구학회 편집위원장, 한국역술인협회 공인 역학연구원이다. 중문학 박사와 풍수학자로서 ‘제주의 오름과 풍수’, ‘명리학원리대전’, ‘풍수지리학 원리’, ‘전원시인 도연명 시선', ‘흰 구름 벗을 삼아 읽어보는 당시선’ 등 다수의 저서를 냈다. '한라산 총서'의 구비전승·지명·풍수 분야와 ‘세계자연유산지구 마을일지 보고서’ 중 풍수 분야 공동 집필자로도 참여한 바 있다. 또 제주도 각 마을 '향토지' 풍수 부문에 공동 집필자로 참여하고 있다. 현재 제주관광대 관광중국어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른바 ‘매예형(賣藝型)’ 거지는 본인의 특기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기예를 자본으로 삼아, 관중을 불러 모으고 환심을 사면서 동냥하는 거지를 가리킨다. 옛날에 길거리에서 잡기, 무술, 곡예 따위의 기예를 팔아 생활하는 거지를 말한다. 강호에 나아가 기예를 파는 자의 개인 출신 성분, 사회배경, 처지 모두 대단히 복잡했다. 그중 거지는 항방(行幇)인 개방(丐幇)의 일원이 됐거나 흑사회(黑社會)에서 활약하기도 하여, 좋은 사람과 악한 사람이 섞여 있었다. ‘원시형’ 방식으로 구걸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훔칠 수 있으면 훔치고 사기 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사기를 쳐서, ‘순수견양(順手牽羊)’1) 식에 버릇이 들었거나 다른 법도에 벗어난 수단을 쓰는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매예형’ 거지는 사람을 모으는 방식과 동냥하는 방식이 천태만상이었다. 별의 별 것이 다 있었다. 그것들을 한꺼번에 모으면 ‘강호 예술단’이라고 부를 만했다. 퉁소를 불며 걸식하는 방법이 있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춘추시대에 ‘오자서(伍子胥)가 퉁소를 불며 구걸해 시정에서 밥을 빌어먹었다.’ 그래서 많은 거지들이 자기 직업의 조사(祖師)로 오자서를 모시어 공양했다. 현대에도 퉁소를 불며 구걸하는 거지들이 있다. 맹인이 대부분이다. 길거리나 시장 바닥에서 애절하면서도 원망하는 듯, 완곡하면서도 구성진 악곡을 불면서 구걸한다. 당나라 때에 서양에서 하모니카가 전래되어 하모니카를 불면서 구걸하는 거지도 생겨났다. 역시 맹인이 다수를 차지한다. 중국 내지와 홍콩에서 모두 볼 수 있다. 오자서가 퉁소를 불면서 구걸한 때부터 당대에 하모니카를 불면서 구걸하는 방식까지, 구걸 방식의 변화와 교체를 반영하고 있다. 하모니카가 유행하자 사람들이 즐거이 받아들였다. 오래되고 예스러운 퉁소는 거지 손에서도 시대에 맞춰 자리를 양보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오랜 역사 속에서 ‘길거리에서 퉁소를 불다’는 말은 구걸한다는 대명사가 되었다. 노래를 부르며 구걸하는 방식 강호에서는 ‘매춘(賣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역사가 유구하고 예나 지금이나 자주 보이는 구걸 방식이다. 가장 이른 시기는 전국시대에서 진(秦)나라 때까지 올라간다고 전한다. 노래를 아주 잘 부르는 한아(韓娥)라는 여인이 있었다. 노래를 팔며 구걸해 오늘날까지 ‘요량삼일(繞梁三日)’2)이라는 성어를 남겼다. 이야기는 『열자(列子)·탕문(湯問)』에 자세히 보인다. 한아가 먹을 쌀이 다 떨어지자 옹문(雍門)에서 노래하며 걸식하였다. 그녀가 지나간 지역에는 3일 후에도 여음이 남아 사람들이 그녀가 아직 주변에 머물고 있다고 여길 정도였다. 어느 날, 객점에 갔는데 객점에 있던 사람이 모욕을 주자 그녀는 소리 높여 구슬프게 울었다. 부근의 남녀노소가 그 울음소리를 따라 애처롭게 울면서 3일 동안 밥조차 먹지 못했다. 그런 지경이 되자 한아를 쫓아가 다시 노래를 불러달라고 간청하니, 노래를 불렀다. 사람들이 기쁨을 억누르지 못하여 함께 노래하면서 슬픔을 잊었다. 현지인들이 한아에게 후하게 보답하였다. 이후에 옹문 지역 사람 대부분이 노래를 잘하고 곡도 잘 지었는데 모두 한아의 여음이라 전한다. 이 이야기를 통해 노래를 팔며 구걸하는 거지는 오래전부터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길거리에서 노래하며 구걸하였을 뿐 아니라 객점에 들어가 여행객에게 노래를 들려주며 구걸했음도 알 수 있다. 후세에 창기로 생계를 유지하는 가녀(歌女)나, 소녀와 함께 다니며 주점이나 찻집에서 연주하며 구걸하는 맹인 예인이나, 객점에서 여행객에서 노래하며 입에 풀칠하는 사람들 모두 한아를 조사로 섬겼다. 노래와 함께 자태나 몸까지 파는 사람은 한아의 운명보다도 더 비참해졌으니. 구걸하며 다니는 거지 부류에서 노래를 팔며 구걸하는 거지는 일찍부터 존재했던 유형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 학사, 대만 정치대학교 중문학과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자로 『선총원(沈從文) 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 『재미있는 한자풀이』, 『수달피 모자를 쓴 친구(선총원 단편선집)』, 『음식에 담겨있는 한중교류사』, 『십삼 왕조의 고도 낙양 고성 순례』, 『발자취-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여정』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남관을 지나는데 포리가 의심쩍어 수레에 실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장소삼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대답하였다. “산돼지입죠. 싣고 가서 먹으려고 합니다요.” 포리가 더 의심이 들어 농담 던지듯이 물었다. “고기를 나눠 줄 수 있소?” 장소삼이 거절하자 포리가 거적자리를 들췄다. 사람 시신이 아닌가. 곧바로 장소삼을 관서로 끌고 가 심문하였다. 결국 감옥에서 병들어 죽었다.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은 참극이다. 장소삼은 인성을 잃어버리고 음식에 대한 변태심리를 가진 식인광이 되어버렸다. 비단 거지를 사서 잡아먹었을 뿐 아니라 자기 생부조차도 잡아먹으려 했으니. 팔려가 잡혀 먹힌 거지, 운명이 어떤 지경까지 비천하게 전락했는지 똑똑히 알 수 있지 않은가. 변태심리와 유사한 것이 또 있다. 기와 조각을 먹거나 돌을 먹는 사람도 있었다. 청나라 때에 사람이 건네준 기와 조각을 받아들고 입에 넣어 얼음조각을 씹어 먹듯이 잘근잘근 씹어 삼키는 것을 본 사람이 있었다. 명나라 때에 광주(廣州)에서 20여 살 정도 되는, 배가 조롱박처럼 볼록한 거지가 기와 조각과 자기 조각을 사 모았다. 호사가가 돈을 주면서, 기와 조각을 주워 건네며 먹어보라고 하면 주저하지 않고 손에 받아들었다. 입 속에 넣고 연뿌리를 씹듯 감저를 씹듯 맛있게 먹었다. 사기 조각을 먹게 하려면 많은 돈을 줘야 먹었다. 먹은 후에는 눈을 크게 뜨고 목을 길게 내밀면서 삼키기 힘들어 죽겠다는 모양을 하기도 했다. 어떤 특별한 병태심리가 아니라면 어찌 사기 조각을 삼킬 수 있겠는가. 원시형 거지의 비참한 운명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원시형의 거지는 어리석을 정도로 온순했기에 법도에서 벗어난 호가사들에게 비인간적인 모욕을 당했다. 거지들은 그저 자기 운명이 나쁘다는 것을 달게 받아들였다. 모든 것을 운명으로 넘겨버렸다. 그런데 어찌 할 것인가? 목숨은 붙어있기에 자기 몸을 손상시키면서까지 한 세상을 살아가려고 몸부림쳤다. 청나라 때에 이 씨 성을 가진, 언 듯 보기에 50여 세로 보이는 거지 이야기가 전해온다. 장강과 한수를 30년 동안 넘나들었다. 그는 아무 것도 없이 오로지 밥 빌어먹는 바가지 하나만 들고 다니면서 소고기와 돼지고기 등을 구걸하여 먹었다. 쥐를 잡아 생채로 먹기도 했다. 남으면 낡은 저고리 속에 넣어두었는데 무더운 여름에도 변질되지 않았다. 사람들이 말을 걸어도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종이와 붓을 주면 무엇인가를 써 갈겼는데 부적처럼 보였지만 뜻은 알 수 없었다. 어떤 관리가 사람을 보내어 데리고 가서 억지로 한직에 앉혔지만 며칠 지나지도 않아서 작별을 고했다. 떠날 때에 관리가 가벼운 갈화 신발을 선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발이 다 닳자 풍설 속에서도 태연히 맨발로 구걸하며 다녔다. 현실 생활 중 일반적인 원시형 거지가 관리에게 예우를 받는 경우는 새벽의 별같이 대단히 드물었다. 대부분은 운명이 주어진 대로 받아들이며 살았다. 서글프고 초라하게 배고픔과 추위를 묵묵히 견뎌내다가 어느 순간이 오면 먼지처럼 사라졌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 학사, 대만 정치대학교 중문학과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자로 『선총원(沈從文) 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 『재미있는 한자풀이』, 『수달피 모자를 쓴 친구(선총원 단편선집)』, 『음식에 담겨있는 한중교류사』, 『십삼 왕조의 고도 낙양 고성 순례』, 『발자취-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여정』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1938년 가을 아도르노는 친구인 발터 벤야민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의 내용 가운데 영화를 정의하는 다음과 같은 말이 언급돼 있었다. “자네의 연구서는 마법과 실증주의의 교차로에 섰군. 그 장소는 사람을 홀리는 곳이지. 그 주문(呪文)은 이론만이 깨뜨릴 수 있을 걸세.” 아도르노의 편짓말인 ‘마법과 실증주의의 교차로’는 이후 영화를 정의하는데 가장 적합한 표현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렇다면 아도르노는 왜 영화를 ‘마법과 실증주의의 교차로’라고 했을까? 영화의 역사적인 등장은 과학기술의 필연적 결과였다. 1826년 프랑스의 화학자 니셉호레 니엡스(Nicephore Niepce, 1765~1851)가 사진을 발명하면서 새로운 예술의 전조를 내비쳤다. 특히 그의 제자였던 화가 출신 다게르(Louis J. M.Daguerre,1789~1851)가 1837년에 실용적인 사진을 발명하고, 1939년에 최초의 인물사진을 찍음으로써 세계는 더욱 고무되었다. 거듭되는 사진실험으로 연속사진을 넘어서 급기야 1895년 최초로 영화가 제작되었다. 영화탄생 11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극장 수는 줄었지만 비디오, 텔레비전, 상영관을 통해 영화를 접하는 영화의 관객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다. 이제 영화는 대표적인 문화산업이 되었다. 영화는 시작부터 기술을 바탕에 둔 자본집약적 매체로서 테일러-포드적인 전형인 실증주의의 적용에 강렬하게 끌리는 하나의 산업으로 빠르게 발전했다. 즉 대량생산(복제), 표준화된 설계(35mm, 70mm필름), 전체 생산과정을 단일 장소에 집중시키기(세트, 녹음, 편집), 철저한 분업체계(조명, 감독, 배우, 의상, 스턴트맨), 고용된 인원들을 관리하기(배우 사생활 등), 출연자들의 인지도와 능력에 따라 성과급을 차별하여 지급하기 등 대규모 공장 제조업 시스템인 테일러-포드식 노동 관리 체계가 도입되면서 확장되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로 영화의 실증주의가 영화 산업의 형식이 되었다면, 영화의 ‘마법성’은 관객을 사로잡는 내용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자본 집약적인 기술력과 만나는 다양한 주제들은 나열하기가 벅찰 정도로 많은데 무협, 판타지, 섹스, 애정극, 공포, 코미디, SF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흥미를 유발하고 있다. 흔히 영화를 ‘드림박스나 마법상자’로 비유되는 것은 관객을 자신도 모르게 빨려들게 하는 강렬한 주술성이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 주술성은 도취, 오인, 가짜 신념 체계를 만들어 내는 장치로 작동한다. 단지 현실과 무관한 흥밋거리, 아니면 오락의 한 부분으로서 놀이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관객들은 결국 영화가 생산하는 이데올로기를 흡인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됨으로써 영화의 이데올로기에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결국 아날로그(굿 의례) 대 디지털(영화)이라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데올로기를 생산하고 전파하는 문화적 본질 면에서는 서로 유사하다는 것, 두 유형 모두 꼭 퍼포먼스를 통해서 신념 체계를 전파한다는 점이 의례와 영화를 보는 중요한 문제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유정은? = 최남단 제주 모슬포 출생이다. 제주대 미술교육과를 나와 부산대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술평론가(한국미술평론가협회), 제주문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제주의 무신도(2000)』, 『아름다운 제주 석상 동자석(2003)』, 『제주의 무덤(2007)』, 『제주 풍토와 무덤』, 『제주의 돌문화(2012)』, 『제주의 산담(2015)』, 『제주 돌담(2015)』. 『제주도 해양문화읽기(2017)』, 『제주도 동자석 연구(2020)』, 『제주도 산담연구(2021)』, 『제주도 풍토와 문화(2022)』, 『제주 돌담의 구조와 형태·미학(2022)』 등이 있다.
거친바람을 막아주고 좋은 기운이 모이는 명당의 요건을 이루려면 전후좌우에서 호위하고 감싸주는 산이나 언덕 또는 기타 자연적으로 형성된 지형지물 즉, 절대방위가 아닌 본인을 중심으로 왼쪽에서 감싸주거나 받쳐주는 산이나 언덕을 좌청룡(左靑龍), 오른쪽에서 감싸주거나 받쳐주는 산이나 언덕인 우백호(右白虎), 앞 즉, 맞은편에서 바라보이고 응대하는 앞산이나 언덕인 남주작(南朱雀), 뒤쪽에서 받쳐주는 산이나 언덕인 북현무(北玄武)의 요소가 갖추어져야 한다. 이 말은 뒤로는 산을 의지하고 앞으로는 멀리서 읍(揖)을 하는 형상, 즉 신하가 임금에게 공경의 뜻을 나타내는 형국의 작은 산을 바라보고, 좌우에서 호위하는 사산(砂山)인 청룡과 백호 등이 환포(環抱), 즉 조화롭게 감싸주어야 한다. 명당의 국세에 대해 배산임수(背山臨水), 즉 뒤로 산을 의지하고 앞으로 물을 맞이하면 건강장수(健康長壽)하고, 전저후고(前低後高), 즉 앞이 낮은 듯하고 뒤가 높으면 뛰어난 영웅이 나온다는 의미에서 세출영웅(世出英雄)하고, 전착후관(前窄後寬), 즉 앞이 좁은 듯하고 뒤가 넓으면 부귀가 산처럼 쌓인다는 의미에서 부귀여산(富貴如山)이라고 했다. 명당(明堂) 은 탁 트여야 하고 물이 굽이굽이 감아 돌아야 한다 이것은 풍수의 가장 이상적인 환경모식(環境模式)으로서 실제로 응용할 때는 후면의 지세나 건축물이 전방보다 높아야 하고 왼쪽의 지세나 건축물은 오른쪽보다 높아야한다 명당은 탁 트인 곳이어야 하고 아늑하고 포근한 지세에 답답한 느낌이 없는 상태에서 위에서 말한 장풍승기의 조건을 갖춘 곳이어야 한다 이 말은 바로 풍수의 중요한 네 가지 요소인 산이나 산줄기를 의미하는 용(龍), 산천의 기운이 잘 응집되어 형성된 요긴한 곳을 의미하는 혈(穴), 주변을 감싸주는 산이나 지형지물을 가리키는 사(砂), 지형의 낮은 곳이나 물줄기를 의미하는 수(水)를 의미한다. 용(龍)이라고 하는 것은 다시 말해서, 지맥을 일으켜준 시발점이 된 산을 의미하는 조산(祖山)으로부터 뻗어온 지맥을 이어주는 모든 산맥의 형상이나 지세를 뜻한다 다시 말해 지맥의 형상은 근본적인 산의 생김새를 의미하고 지세는 곧고(直), 휘고(曲), 일어나고(起), 엎드린(伏) 산세를 말한다 이것은 귀하고 천함을 의미하는 귀천(貴賤)을 주관하는 척도가 되며 사람의 사회적 지위나 성취 성품 등과 매우 깊은 관계가 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 신영대는? = 대한풍수연구학회 편집위원장, 한국역술인협회 공인 역학연구원이다. 중문학 박사와 풍수학자로서 ‘제주의 오름과 풍수’, ‘명리학원리대전’, ‘풍수지리학 원리’, ‘전원시인 도연명 시선', ‘흰 구름 벗을 삼아 읽어보는 당시선’ 등 다수의 저서를 냈다. '한라산 총서'의 구비전승·지명·풍수 분야와 ‘세계자연유산지구 마을일지 보고서’ 중 풍수 분야 공동 집필자로도 참여한 바 있다. 또 제주도 각 마을 '향토지' 풍수 부문에 공동 집필자로 참여하고 있다. 현재 제주관광대 관광중국어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른바 ‘원시형’은 가장 본능적이며 가장 거지 본분에 맞는, 애걸복걸하는 방식으로 구걸하는 거지를 가리킨다. 이것은 고금을 통틀어 가장 흔히 보이는 거지 구걸의 기본 유형이다. 이런 유형의 거지는 예나 지금이나 다 존재하지만, 거지 항방(行幇, 동업조직)인 개방(丐幇)이 타락하고 변질되어 흑사회의 일원이 된 후에는 하위문화 단체 중에서 주류의 지위를 점하지 못했지만 이전에는 거지가 구걸하는 주체였다. 이런 부류의 거지는 일시에 곤궁해져서 사회 저층으로 전락한 가난한 사람들이거나, 한번 몰락한 후 다시 일어서지 못하여 입에 풀칠하려고 오랫동안 구걸하며 생계를 도모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거지는 대부분 소박하고 유약하다. 자립능력도 다소 떨어진다. 그 처지가 세상 사람들의 동정을 받아 동냥을 얻는다. 그래서 『관자(管子)·경중을편(輕重乙篇)』에서는 이야기한다. “백성이 태어났으나 부모가 없는 자를 고아라 한다. 처와 자식이 없으면 홀아비라 한다. 남편이 없고 아들이 없으면 과부라 한다. 이 3자는 모두 관에서 먹여 살리니 길에는 구걸하는 자가 없다. 길에 구걸하는 자가 있으면 상의 죄이다.” 고아나 노인의 의식주를 돌봐줄 사람이 없는 것이 거지가 생겨나게 되는 근원이니 거지가 출현하면 관리의 죄라고 여겼다. 이런 거지는 일반적으로 기예를 팔아 생활할 수 없고 노동도 할 수 없었으니, 불량배나 무뢰한이 되지 않는다면 애걸하며 동냥하며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당대 이상은(李商隱)은 『의산잡찬(義山雜纂)·불인문(不忍聞)』 중에 읊었다. “밤은 고요한데 거지 소리가 들린다.” 이런 원시형 거지는 후세에 말하는 불량배를 가리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원시형 거지는 처지가 가장 고생스럽고 사회지위도 낮아, 열등의식이 있었다. 송나라 때 왕군옥(王君玉)은 『잡찬속(雜纂續)·부득인련(不得人憐)』에서 말했다. “거지같은 성품은 자제의 재목이 되지 못한다.” 타인의 동냥으로 살면서도 노름하고 제멋대로 하면 ‘동정을 얻지 못하여’ 먹을 것이 없어 살아가지 못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굽실거리고 외부의 압력을 참고 견디어 내면서 굴욕적으로 살아갔다. 그렇지 않으면 송나라 때 소식(蘇軾)이 말한 ‘거지가 좋은 사람을 화나게 만드는’ 것은 ‘뒷생각이 없는’ 것이다. 실로 그렇지 않은가. 처마 밑에 있는 사람이 어찌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떤 때에는 핍박을 받아 음식에 대한 이상심리가 생겨나기도 한다. 송나라 때 서현(徐鉉)의 『계신록(稽神錄)』에 기록되어 있다 : 광릉(廣陵)의 시중에서 구걸하며 살아가는 거지가 있었다. 땅에 떨어져 있는 말똥을 보기만 하면 집어먹었다. 그의 얘기는 이렇다. 이전에 다른 사람의 말을 대신 길렀는데 한밤중에 일어나서 사료를 주지 못했다. 주인이 밤마다 감독하면서 구유에 꼴이 없으면 질책하였다. 그래서 거지는 말에게 오매(烏梅) 구이를 먹였다. 말은 신맛 때문에 씹지 못하여 먹지 못하다가 굶어 죽었다. 나중에 거지도 병이 들자 말똥만 보면 걸신들린 듯 군침이 돌았다. 먹으면 오매와 같은 맛만 느낄 뿐 더러운 냄새는 맡지 못했다. 이 이야기 속에서 거지의 처지를 비추어 볼 수 있다. 이런 원시형 거지는 지위가 비천했기에 안전 또한 보장받을 수 없었다. 자신이 먹을 음식을 구걸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먹을 것이 되어 타인에게 먹히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청나라 때 수녕(睢寧) 지방에 장소삼(張小三)이란 양곡 세금징수원이 있었다. 성정이 흉포하고 인륜과 거리가 먼 인물로 사람 고기를 즐겨 먹었다. 야외로 사람을 보내어 버려진 아이를 데려다가 쪄서는 술을 곁들어 먹었다. 아예 거지를 돈 주고 사서는 먹어치우기도 하였다. 마지막에는 자기 생부까지 먹으려 하였다. 그의 부친은 수레를 몰며 살고 있었다. 노예처럼 장소삼에게 시중들었는데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욕하면서 때렸다. 어느 날, 장소삼이 자기 부친이 끄는 수레를 타고 향촌으로 세금을 징수하러 나섰다. 돌아오는 도중에 그의 부친이 배가 고파서 수레를 제대로 끌지 못했다. 장소삼은 빨리 끌라며 재촉했는데 대답할 기력도 없이 부친은 길옆에 쓰러졌다. 대노한 장소삼이 몽둥이를 들고 앞가슴을 내리치자 그 자리에서 부친이 죽어버렸다. 그러자 자기 부친의 시신을 수레에 싣고 거적자리를 덮고서 수레를 끌고 갔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 학사, 대만 정치대학교 중문학과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자로 『선총원(沈從文) 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 『재미있는 한자풀이』, 『수달피 모자를 쓴 친구(선총원 단편선집)』, 『음식에 담겨있는 한중교류사』, 『십삼 왕조의 고도 낙양 고성 순례』, 『발자취-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여정』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역사 속 인류사회는 방대하면서도 끝이 없는 풍속화이다. 다른 역사의 단면, 다른 자리나 모퉁이, 다각적인 생활공간은 모두 다양한 인류의 활동무대다. 변화하고 발전하는 멈추지 않는 무대에서 단장하거나 발가벗은 채로 다른 사회 층면, 다른 직업, 다른 연령, 다른 성별의 사람들의 양태를 표현하고 있다. 역사의 풍속화에 들어간 후, 정지된 스틸 속에 여러 양태가 매 시간 매 장소마다 언어, 행위, 사상, 심리상태를 묘사하지 않은 경우가 없다. 예부터 지금까지 거지가 구걸하는 수단과 방식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하층 사회 단체의, 하위문화의 여러 군상의 양태를 분명하게 드러내 보인다. 진짜도 있고 가짜도 있으며 눈물도 있고 웃음도 있다. 각양각색인 다양성도 있기는 하지만 결국에는 비극으로 끝을 맺는다. 여러 가지 가식적인 면사를 벗겨내면 대부분 희극적 형식의 추태를 연출해 내면서 울 수도 웃을 수도 없게 만든다. 아주 오래 전에 거지는, 참고삼아 이용할 만한 여러 가지 구걸 방식을 채용하면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수단(예나 지금이나 거의 비슷한 구걸 예술)을 이루었다. 독특한 하위문화 전승 형태로, 구걸 습속과 관례를 형성하였다. 당대에 기괴하고도 다양한 구걸 수단과 방식은 대부분 예전의 선례나 역사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은 감탄할 만한 기적이며 실재다. 보도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시인 뉴욕에 전문적으로 거지를 훈련시키는 ‘거지 학교’가 있다고 한다. 학교는 뉴욕의 외진 지역에 위치해 있다. 입학신청하려면 학비 100달러를 내야하고 졸업하면 증서까지 발급한다. 그 학교는 6일 과정이며 야간에 공부한다. 교실에서 이론을 강의한다. 마지막 이틀 저녁에는 거리에 나가 실습한다. 강사가 나누어 강의한 내용을 길가는 사람에게 구걸하는 기술을 실연해 보인다. 그때 교장은 곁에서 실습하는 상황을 지켜보고 그중의 오류를 찾아내어 다시 구체적으로 지도하여서 졸업생 모두를 구걸하는 데에 합격할 수 있도록 완벽하게 학습시킨다. 그중 가장 성공적인 기술은 병원이나 약국을 가기 위하여 급히 돈이 필요하다고 가장하여 구걸하는 것이었다. 목석간장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아픈 사람에게는 동정심을 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사람들의 그런 선량한 본능을 십분 이용했다. 성공한 거지가 될 수 있는 비결은 이렇다 : 말솜씨가 유창하고 기민하게 반응하며 인내심이 있고 얼굴이 두꺼워야 한다. 그리고 너무 가난하고 초라하게 분장해서는 안 된다. 중산층 인물로 분장해 갑자기 곤경에 빠져서 급히 타인의 도움을 필요한 것처럼 가장하는 것이 쉽게 구걸할 수 있는 비결이었다. 거지 학교를 세운 사람은 40세인 오마(Omar)로 제약공장에서 여러 해 동안 근무하였다. 학교를 설립한 주지를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공공사업이다. 나는 어려운 처지에 놓여 살아갈 방도를 찾지 못하는 사람을 구하려고 세웠다. 우리 학생은 절대로 부도덕한 일은 하지 않는다. 도둑질도 강도짓도 하지 않는다. 단지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선량한 마음을 내게 한 후 보잘것없는 돈 몇 푼을 받을 따름이다.” 그런데 도둑질이나 강도질을 가르치지 않는다하여도 세상 사람들의 아름다운 착한 마음에 사기를 치는 것을 가르친다면 ‘도덕적인 일’이라고는 할 수는 없지 않는가! 하물며 그 ‘학생’들이 거지가 된 후, "도둑질도 안 하고 강도질도 안 한다"라고 장담할 수 있는가. “절대 부도덕한 일을 하지 않는다”라고 장담할 수 있는가. 사기란, 일정한 조건 아래 법률이 정하지 않은 ‘도덕’ 범주에 속한다하더라도 직접 사기를 치는 수법으로 타인에게 재물을 얻는다면 다른 차원의 범죄행위가 된다. 중국에는 아직까지 거지 기법을 가르치는 전문 훈련 기관은 없다. 그러나 구걸 기술은 역사상 하위문화 내부에서, 민간에서 전승되어 온 궤적이 분명하게 남아있다. 종적을 찾아 근원을 찾아내면, 많고도 어지러운 세상사 속의 하층사회 단체의 여러 군상을 명확히 알 수 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 학사, 대만 정치대학교 중문학과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자로 『선총원(沈從文) 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 『재미있는 한자풀이』, 『수달피 모자를 쓴 친구(선총원 단편선집)』, 『음식에 담겨있는 한중교류사』, 『십삼 왕조의 고도 낙양 고성 순례』, 『발자취-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여정』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민간 비밀 사회단체는 각자 일련의 규정과 직업 은어를 가지고 있었다. 하위문화에서 전승된 기본적인 상징이며 내용 중의 한 가지다. 거지 단체도 그렇다. 당대 미국학자 래리 A. 사모바, 리처드 E. 포터의 공저 『문화 간 커뮤니케이션』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 사람들이 주로 이상 행위에서 구성된 하위문하로 생각하는 것 중에서, 해당 문화의 언어 유형이 은어(argot)로 발전한다. 유랑자와 거지는 여러 가지 표준에 따르면 범죄자는 아니지만, 그들은 주류문화와 도무지 맞지 않는다. 모종 은어가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은어는 특정 하위문화와 그 단체 내부에 한해서 사용하는 언어이고, 구성원은 주류문화 밖에 있다. 하위문화와 문화 단체를 이해하려면 은어를 이해하여야 한다. “은어 언어의 특정 형식일 뿐만 아니라 특정 생활방식을 반영하고……심리상태, 사람과 사회에 대한 평가, 사유방식, 사회조직과 기술능력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관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은어는 언어와 행위가 서로 결함된 방식이다. 하위문화는 특수한 언어 코드를 사용하여 요구를 만족시키기에 은어는 중요하다. 그러한 기능은 첫째, 은어로 표현하면서 반주류문화를 돕기에 자위의 수단이 된다. 둘째, 공동으로 습득한 언어 코드를 통하여 하위문화 단체 내에서 일치성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셋째, 진정으로 생존에 적합한 사회적 실체의 단체를 만드는 데에 도움이 된다. 일정한 하위문화 혹은 하위단체는 구체적인 환경 속에서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 대한 태도도 그들의 직업 언어 중에 반영된다. 여러 거지 단체의 은어(속어)는 강호 흑사회의 하위 언어문화 형태를 이룬다. 그렇기에 강호 여러 부류와 깊은 본질적 관계를 직관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예를 들어 명나라, 청나라 이래로 보이는 은어는 다음과 같다. 구걸을 괘한(掛熯, 걸어 말리다), 쇄산(碎山, 산을 부수다) ; 앉은뱅이 거지를 피가(披街, 거리를 나누다) ; 곤경에 빠졌다고 가장해 구걸하는 것을 탑상(搽相, 얼굴을 바르다), 목후(沐猴, 원숭이를 씻기다) ; 편지로 사정을 써서 구걸하는 것을 마가당(磨街黨, 길을 가는 무리) ; 여성을 데리고 다니면서 구걸하는 것을 관음당(觀音黨), 소개장을 가지고 돈을 구걸하는 것을 칭고상(稱古相, 예스럽고 수수한 상을 칭하다), 부모를 데리고 다니면서 구걸하는 것을 상문당(喪門黨), 읍하면서 구걸하는 것을 주권당(丢圈黨, 원을 던지는 무리), 울며불며 하소연하면서 구걸하는 것을 소원당(訴寃黨), 신의 이름을 빙자해 구걸하는 것을 동자당(童子黨), 뱀을 가지고 공연하면서 구걸하는 것을 차류(扯溜, 손으로 들다, 임분(臨汾)지역 방언) ; 원숭이를 부리며 공연하면서 구걸하는 것을 사노자(耍老子, 노자를 가지고 놀다) 등으로 불렀다. 이런 언어 코드는 비단 거지에게만 유행한 것이 아니라 강호 비밀 사회에서는 대부분 통용되었다. 단지 거지의 직업 특성에 국한된 언어일 뿐이다. 이 사이에 본업에 대한 은어들이 섞여있다. 예를 들어 보자. 돈을 구걸하는 것을 정파(釘把, 못 잡이) ; 사리에 어두운 것, 좋고 나쁨을 알지 못하는 것을 소렵등(小臘燈, 작은 초) ; 미인을 찰백(擦白, 닦아 하얗다) ; 이 사람을 격당마자(格檔碼子, 막아내는 놈) ; 눈을 파내는 것을 차조자(借照子, 동경을 빌리다) ; 좋지 않은 물건을 좋은 물건이라며 사기 치는 것을 매야인두(賣野人頭, 야인의 머리를 팔다) ; 재미삼아 사람을 희롱하는 것을 타붕(打棚, 막을 짓다) ; 돈을 빌리고 트집 잡아 빚을 갚지 않는 것을 도수흉(到手凶, 불행을 손에 넣다) ; 남편을 잃었다느니 처가 죽었다느니 하면서 구걸하는 것을 타단자(打單子) ; 거짓으로 친척을 방문했으나 만나지 못했다고 말하며 구걸하는 것을 탈축두(脫軸頭, 권축을 벗어나다) ; 재난을 피해서 왔다고 거짓말하며 구걸하는 것을 심반자(尋伴子, 짝을 찾다) ; 병이 들었다고 거짓부렁 하는 것을 묘황(描黃, 황색을 묘사하다) ; 벙어리를 사칭하는 것을 화지(畵指, 손가락을 그리다) 등으로 불렀다. 현대에 와서는 여자와 노는 것을 괘마자(掛馬子, 변기를 걸다) ; 소매치기가 지갑이나 호주머니를 터는 것을 발전(撥栓, 여닫개를 밀어내다) ; 내의 주머니를 터는 것을 번판자(飜板子, 판을 뒤집다) ; 상의 주머니를 터는 것을 개천창(開天窓, 천창을 열다) ; 장기간 한 지역을 불법 점유해 구걸하는 것을 궤점(跪點, 무릎 꿇다) ; 근거지를 산두(山頭) ; 소매치기 하는 것을 양협(兩夾, 양쪽에 끼다) ; 장물을 파는 것을 매교(賣巧)1) ; 장물을 사는 것을 흘교(吃巧)2) ; 남의 약점을 이용하거나 구실을 빌어 바가지를 씌우거나 재물을 뜯어내는 것을 흘이만(吃二饅, 만두 두 개 먹다) ; 철로를 쌍조(雙條) ; 버스를 단조(單條) ; 피를 파는 것을 도선(挑線, 선을 고르다) ; 백 원을 일간자(一杆子) ; 천 원을 조(槽) ; 만 원을 감(坎) 등으로 부른다. 이런 여러 가지는 거지의 수법(재주), 해당 비밀스런 작업, 심리상태를 충분히 드러내고 있는 동시에 공교롭게도 그 단체의 본 모습을 증명하고 있다. 즉 대단히 복잡하면서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유랑자, 무뢰배 등 다른 흑사회 단체와 본질적으로 일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모두 사회조직에 기생하는 악성 종양이다. 하위문화 범주에 속한 비정상적인 문화 시스템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매교(賣巧)는 한어(漢語) 어휘로 발음은 ‘mài qiǎo’로, 총명을 뽐내며 남의 의향에 영합하다 뜻이다. 능숙한 솜씨를 보이다 뜻도 가지고 있다. 2) 흘교(吃巧)는 한어(漢語) 어휘로 발음은 ‘chī qiǎo’로, 옛날 절강 지역의 풍속이다. 칠석 때 문 앞에 모여서 술을 마셨는데 그를 ‘吃巧’ 또는 ‘끽교(喫巧)’라 하였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 학사, 대만 정치대학교 중문학과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자로 『선총원(沈從文) 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 『재미있는 한자풀이』, 『수달피 모자를 쓴 친구(선총원 단편선집)』, 『음식에 담겨있는 한중교류사』, 『십삼 왕조의 고도 낙양 고성 순례』, 『발자취-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여정』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인간의 생명은 기(氣), 즉 에너지의 작용으로 유지되며 기의 조화와 부조화로 건강이 좌우된다. 지구는 자전과 공전을 반복하면서 기의 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이는 곧 우리 인간이 호흡하는 원리와 같으면서 기적(氣的)인 호흡을 하는 지구상의 생채환경도 매한가지다. 천지 대자연을 바탕으로 시간과 공간의 영향권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자연생태계에서 발산하는 기운, 즉 자연에너지를 활용하여 인생의 번영과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힐링풍수의 궁극적인 지향점이라 할 수 있으며, 자연에서 발산하는 좋은 에너지를 교감하여 보다 건강하고 심리적으로 안정된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함이다. 힐링풍수를 통한 다양한 치유 활동은 자연, 경관, 생태, 인문, 예술에 이르기까지 대상에 제한이 없으며, 풍수와 산림을 결합한 치유의 숲 명상 프로그램 조성은 국민의 건강 증진과 인성 회복 차원에서 필요하다. 산업화와 도시 문명, 각종 공해에 찌든 현대인들에게 힐링 풍수는 지속 가능한 생활환경 개선과 미래 건강 증진 프로그램의 하나로 떠오르고 있다. 치유적 개념에서 힐링풍수는 입지론을 중심으로 지리적 환경과 기후적 조건에서 오는 기(氣)의 특성을 치유라는 개념에서 바라보고 있다. 풍수가 적용될 수 있는 영역은 크게 두 분야로 나눌 수 있는데, 돌아가신 조상을 모시는 음택 분야가 있고, 살아 있는 사람들의 삶의 공간을 풍수의 법에 맞추어 응용하는 양택 분야가 있다. 양택은 우리가 사는 공간인 개인의 주거 형태나 한 나라의 수도 또는 도시의 입지나 형태까지 모두를 포함하는 삶의 공간을 말한다. 이는 생동하는 기운이 잘 모이는 좋은 땅에 대지를 정해 건강과 행운의 복력을 구하고 삶을 윤택하게 하는 풍수법을 의미하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 자면, 주택의 형태나 방위적인 위치, 실내 구조, 색상의 분위기, 주변 환경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풍수의 이치에 맞추어 좀 더 안정적이고 쾌적한 주거 공간을 이루고자 함이다. 본 코너에서는 주로 생활 속 양택풍수를 중심으로 기(氣) 즉, 주택이나 건물을 중심으로 에너지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는 치유적 개념의 힐링 풍수를 다루고 필요에 따라 현대의 장묘문화, 조상의 음택풍수도 살펴보려고한다. 기(氣)는 우주공간에 작용하는 전파와 같은 생명력의 근원으로서 눈에 보이지 않는 근본 미립자와 같은 존재이자 삼라만상을 움직이는 근본 생명체이다.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사물이다. 보이지 않는 어떤 작용은 ‘기’인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다. 또한, 냄새도 없고 귀에 들리지도 않지만, 반드시 공간에는 어떤 유형의 ‘기’가 순행 유통하고 있다. 산천의 기운이 잘 응결된 풍수적 국세도 중요하지만, 어떤 상황을 막론하고 쾌적하고 건강한 삶을 위해 부족한 지형과 구조를 풍수 이치에 맞게 보완하고 개선해 가는 일련의 과정이다. 천혜의 조건을 갖춘 완벽한 명당은 극히 드물다. 명당은 만들어가는 것이며 영원한 명당도 흉당(凶堂)도 존재하지 않는다. 풍수의 이치를 응용하고 활용하여 주거의 조건을 좋은 환경으로 보완하고 개선해 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풍수적으로 조화로운 자연의 생태환경을 통해 심신을 건강하게 하는 주택이나 생활공간의 장소로 활용할 때 힐링풍수는 치유의 생활 문화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살 터를 정할 때는 ‘생기(生氣)’, 즉 좋은 에너지가 모이는 땅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풍(風)’은 공기가 유동하는 현상이며, ‘수(水)’는 물의 흐름을 말한다. ‘기(氣)’는 육안으로는 식별할 수 없는 무형의 지기(地氣)와 공간에 존재하는 미립자인 에너지를 가리킨다. ‘기’는 중국 동양철학의 중요한 개념으로써 풍수를 구성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그 이론과 방법은 모두 산천 대지의 기운이 요긴하게 모이는 곳의 문제를 가지고 전개한 것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 신영대는? = 대한풍수연구학회 편집위원장, 한국역술인협회 공인 역학연구원이다. 중문학 박사와 풍수학자로서 ‘제주의 오름과 풍수’, ‘명리학원리대전’, ‘풍수지리학 원리’, ‘전원시인 도연명 시선', ‘흰 구름 벗을 삼아 읽어보는 당시선’ 등 다수의 저서를 냈다. '한라산 총서'의 구비전승·지명·풍수 분야와 ‘세계자연유산지구 마을일지 보고서’ 중 풍수 분야 공동 집필자로도 참여한 바 있다. 또 제주도 각 마을 '향토지' 풍수 부문에 공동 집필자로 참여하고 있다. 현재 제주관광대 관광중국어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부랑자, 무뢰배와 거지의 자연적 관계 불량배, 무뢰배라는 뜻을 가진 중국어는 ‘유맹(流氓)’이다. ‘맹(氓)’자는 원래 글자 뜻대로 고찰하면 거지와 연대관계가 깊다. 당나라 공영달(孔穎達)은 『모시정의』에서 말했다. “맹민(氓民)의 명칭은 문장 중의 뜻이 다르다.……맹(氓)은 몽(懵)이다. 몽(懵)은 무지한 모양(안 : 사리에 어둡다, 흐리멍덩하다)이다.” 원나라 유근(劉瑾)은 『시전통석(詩傳通釋)』에서 제기하였다. “맹(氓)은 모호하고 무지함을 이르는 말이다.” 청나라 단옥재(段玉裁)는 『설문해자』 주(注)에서 풀이하였다. “다른 지역에서 온 백성을 맹(氓)이라 한다. 그래서 민(民)과 망(亡)을 따랐다.” 근대에 어떤 학자는 단옥재의 설명에 대하여 『시·위풍·맹(氓)』의 맹(氓)은 ‘다른 지역에서 온 백성’에 부합한다고 하였다.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이주하거나 이 마을에서 저 마을도 옮긴 사람을 모두 맹(氓)이라 하였다. 그래서 청나라 훈고학자 주준성(朱駿聲)은 ‘맹(氓)’을 ‘저기에서 여기로 온 백성’이라 하였고 위원(魏源)은 ‘맹(氓)’을 ‘유랑하는 백성’이라 하였다. 현재 통속적인 표현으로 ‘맹(氓)’은 바로 ‘타지인’, ‘외래인’의 뜻을 가진다.(『신화문적(新華文摘)』) 이 해석을 빌면 불량배 뜻인 ‘유맹’은 우매하고 무지하며 정상적인 일을 하지 않으면서 도처로 옮겨 다니고, 심지어 온갖 나쁜 짓을 저지르는 사람을 가리킨다. 물론 이미 ‘맹(氓)’자의 본래 뜻에서는 벗어났다. 거지와 같은 부류는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다. 거지가 사회에 커다란 해악을 끼친다는 것은 사실로 증명되었다. 그들은 단체를 결성하고 흑사회 집단으로 전락하였다. 미국의 인류학자 복(P. K. Bock)은 주장하였다. “사회에서 정당한 단체가 연속적으로 제기되는 사회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을 때는 사회에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단체의 중요성이 두드러진다.” “자발적 단체의 기능은 그 구성원에게 분명하게 행동하게 하거나 다른 형식으로 자아를 표현할 기회를 부여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거지는 떳떳하게 정당한 사회단체에 진입하기 어렵다. 거지 개인도 왕왕 사회에 발붙이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공동의 사회 지위와 운명은 구성이 복잡한 하층 사회 구성원과 연계하여 한 사회 층면에 속한, 특수한 내부 질서를 갖춘 여러 가지 단체를 구성하였다. 자발적이면서 강압적인 성격을 가지는 단체 속에서 그 구성원은 생존해 나가는 데에서, 의지할 수 있는 곳과 자아를 표현할 수 있는 자리를 찾았다. 민국 초기, 상해 거지의 사회조직 상황 본세기 30년대 상해에 있던 거지의 집거지를 조사한 결과 조막에서 거주하던 거지도 파별로 나뉘어져 있었다. 향토(고향)에 따라 산동방(幇), 강북방, 안휘방 등, 각 방파 사이에 자체적인 계통이 있었다. 각 방파에는 우두머리가 있었다. 거지 두목으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두목은 소굴 내부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장악하고 있었다. 모든 일은 두목의 허락을 받고서야 진행할 수 있었다. 각 방파는 촌락과 같았다. 두목이 곧 촌장이었다. 거지의 방파란 ‘개방(丐幇)’을 말한다. 각 개방의 두목은 봉건시대의 제후와 같았다. 당시에 상해의 거지를 이끌던 두목은 육(陸), 주(周), 종(鍾), 왕(王)과 2심(沈), 2조(趙)인 8명의 방주였다. 육 씨가 제일 위에 있었고 다음으로 조 씨가 있었다. 합쳐 8형제라 불렀다. 전체 상해의 거지는 향토(고향)를 근거로 봉양(鳳陽), 회양(淮陽), 산동(山東), 강북(江北), 현지 방파를 합쳐 5대 개방으로 나뉘었다. 방파가 공동으로 제일 높은 우두머리인, 큰형님 ‘노대(老大)’를 추천했다. 두목들을 절충한 전권 대표였다. 두목은 지방의 상인대표와 지보(地保)가 본바닥 깡패 중에서 업무 능력을 인정받은 자를 추천하여 임무를 맡겼다. 부자세습이었다. 그들은 근거지 상해를 동서남북 4지역으로 분할하여, 8형제 중 2사람씩 나누어 각각 한 지역씩 관리하였다. 평상시에 거지 두목들은 내부의 질서를 유지하고 협력하는 책임을 졌고 갈등을 해결하였다. 연말연시가 되면 상점에서 헌납금을 받아다가 일부분을 여러 거지에게 나누어 주었다. 거지들이 평상시에 구걸한 수입도 일부분을 두목에게 납부하면 각계각층에 진공하였다. 만약 개방의 ‘가법’을 복종하지 않거나, 두목이 벽보를 붙인 상점에서 강제로 재물을 요구하거나, 개방에 반대해 다른 단체에 가입하거나, 다른 근거지에 침입하거나, 음란한 행위를 하거나 하면 상황에 따라 처벌하였다. 그들의 처벌 방식은 주로 형구를 쓰는 고문 형태였다. 예를 들어 ‘찰혼돈(扎餛飩)’은 손발을 묶어 하루 동안 밥을 먹지 못하게 하는 것이고 ‘판유배(扳油裵)’는 수 촌 넓이 목판을 등뼈에 끼워 넣는 형벌이었다. ‘판입액(板入額)’은 1촌 정도의 판을 이마에서 피부 안으로 끼워 넣는 것이었다. 더 센 것은 죽을 때까지 때리거나 경외로 추방하였다. 이러한 강력한 관리와 여러 겹으로 겹쳐 있는 조직 계통이 있기 때문에, 거지 두목은 십여 분이면 전 시내의 거지를 불러 모을 수 있었다고 한다. 범위가 그렇게 큰 상해시에서 오토바이 부대도 아닌데 어찌 그리 신속하게 모일 수 있었을까. 그런데 이 말에서 개방 조직의 힘을 엿볼 수 있다. 개방에서 가장 제일 작은 두목이 ‘야숙(爺叔, 숙부 뜻을 가진 상해 방언)’이라 불렀다. 직접 자기 관내에서 여러 거지를 관리하였다. 야숙도 거지이기는 했으나 모두에게서 ‘효경(孝敬)’을 받을 뿐 직접 구걸하지는 않았다. 거지 두목들은 조직 내에서 확고한 자리매김하기 위하여 왕왕 사회에 명망 있는 인물을 후원자로 삼아 도움을 받았다. 보스 즉 ‘노두자(老頭子)’로 모셨다. 상해 거지의 ‘노두자’는 대부분 흑사회의 중심인물이었다. 이렇듯 거지 조직은 처음부터 끝까지 여러 흑사회 조직과 안팎으로 결탁하여 서로 이용하였다. 그러면서 거지 조직인 개방도 자연스레 흑사회 일원이 되었다. 내부적으로는 강권 통치를 실행하고 외부적으로는 온갖 나쁜 짓을 저질렀다. 이것이 바로 강호의 여러 유랑자, 깡패, 무뢰배 조직의 공통적인 특징이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 학사, 대만 정치대학교 중문학과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자로 『선총원(沈從文) 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 『재미있는 한자풀이』, 『수달피 모자를 쓴 친구(선총원 단편선집)』, 『음식에 담겨있는 한중교류사』, 『십삼 왕조의 고도 낙양 고성 순례』, 『발자취-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여정』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바다를 우주로 생각하는 해녀 지구상의 바다는 지구의 3/4을 차지하며, 바다의 평균 깊이는 3700m이고, 부피가 13억 4000만㎦로 지구상의 대부분의 물을 보유하고 있는 막대한 양이다. 이 가운데 눈과 빙하가 2%가량, 이동이 자유로운 담수는 1%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거대한 바다를 우리는 거의 알지 못한다. 바다에는 경계가 없다. 그래서 바다는 전세계가 하나로 연결되지만 다양한 생물층의 지역들로 나눠져 있고, 생물들이 광합성을 하는 빛이 드는 유광층(有光層) 지역과 빛이 없는 무광층 지역으로도 구분된다. 또 다른 분류방식은 해수의 밀도나 화합적 성질의 변화로 구분하여, 햇빛과 강수의 영향으로 수온이 높고 염분이 낮으며, 밀도가 작은 표층(혼합층) 해수와 깊을수록 온도가 차겁고 염분이 높은 심해층으로 구분한다. 사실 바다는 다양한 생물들로 가득찼다. 이 경이로운 바다의 생물들은 가까이는 연안의 조간대에서 멀게는 먼바다 깊은 해저까지 수심에 따르는 생명들의 하모니가 해류를 타고 전지구를 오르내리면서 순환한다. 바다는 우주에 속한 지구 행성 속 물로 된 우주다. 제주 신화의 세계에서는 섬을 중심에 놓으면, 하늘은 천상계가 되고, 땅은 지상계(지하계)이며, 바다는 해양계(용왕)이고, 물속은 해저세계(용궁), 제주 섬 밖은 해양타계(바다 너머 이상향)가 된다. 제주의 잠녀(해녀)들이 믿는 중요한 세계는 바로 바다로써, 즉 해양세계와 해저세계이다. 바다야말로 곧바로 자신의 삶과 연결되는 생존의 지평이며, 잠녀(해녀)들은 거기에서 모든 생명의 원천을 얻는다. 잠녀(해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현실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살려면 바다의 생산력(토대)이 필요하고, 그곳에서 자연히 종교적 믿음이 탄생한다. 위험한 바다에 가려면 심리적인 안전감을 주는 신념체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해녀들은 바다의 신인 용왕을 제일의 신으로 의지한다. 생존을 위해서 믿는 구석, 즉 숭배대상이 있어야 하는 이유이다. 화가 해녀 나경아의 작품세계 화가는 작품으로 자신을 말한다고 했다. 자신의 몸으로 만든 작품인 것이다. 메를로 퐁티는 “모든 기법은 몸의 기법이며, 그러므로 그 기법은 우리 살(肉)의 형이상학적 구조로 형상화하고 확대시킨다”라고 했다. 나경아는 사물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몸의 작용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영혼의 창을 통해 축적된 이미지들을 표현한다. 닮은 것이 아니라 몸이 느낀 행위 자체라고 할까? 나경아의 두 개의 직능으로 합쳐진 ‘바다 표현(화가)’+‘해녀(직능)’ 라는 호칭에서 보면, 화가 해녀라는 말이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그래서 나경아에겐 해녀가 체험이나 놀이가 아닌 실존의 몸부림이고, 화가의 삶은 결코 취미나 여가가 될 수 없다. 나경아는 보다 더욱 자신의 몸으로 바다를 감싸안을수록 몸이 느끼는 바다의 파동은 강렬하다. 그것을 옷감에 비유해서, 그 바다는 자신을 둘러싼 바깥감이고, 몸의 체온은 안감이 돼 자신이 몸의 박동이 바다에 반응하는 방식이 된다. 우리 세계의 물질들은 구상과 추상의 형태를 동시에 갖는다. 모든 것에 시선이 멈추는 순간 어떤 특별한 형태로 각인돼 기억된다. 비록 그 물질의 유체(流體)가 불확실한 구조를 갖더라도 시선이 정지되는 순간, 그 물질의 어떤 구조적인 패턴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체의 추상 형태는 기하학의 변형된 모습들일 것이다. 자연에서 볼 수 있는 척도의 차이에 따라 무분별하게 보이는 프렉탈(fractal) 구조도 축적을 줄여서 보면, 층위적으로 반복되는 같은 패턴을 유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패턴은 모든 자연의 구조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물의 흐름, 파도의 작용, 빛에 의한 물속 물체의 어른거리는 모습도 처음에는 매우 복잡하게 보이지만 사실은 어떤 반복되는 패턴이 있어서 연속적인 단순성을 확인할 수 있다. 나경아의 인식은 우주 창조에서부터 시작되는 빅히스토리적 역사관의 바탕이 되며, 인상으로 받은 느낌에 충실한 추상적 관점은 야수파적인 영향을 보인다. 야수파는 19세기말 후기 인상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아, 강렬한 색채, 꿈틀대는 강한 선, 과감한 보색대비, 그림자 없는 평면적인 색깔 처리, 자극적인 단순한 형태, 마치 즉흥적으로 보이는 감정표현 터치 등은 이후 표현주의와 입체파의 토양이 되었다. 나경아는 신중하게 계산된 심미적인 배색 처리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직관 행위를 높이 사고 있다. 나경아의 '떠다니는 섬' 시리즈는 우주에 떠다니는 자유로운 행성들처럼 보인다. 실제로는 바다에서 주황색 테왁을 보호장구로 삼아 물질하는 잠녀(해녀)들의 무리진 모습이다. 그러나 나경아에게는 그 모습이 우주의 행성들로 보여서 천체 한 공간에 떠다니는 별들로 인식된다. 이 상상은 나경아 자신이 물속에소 몸에 체화된 현실적인 이미지일 것이다. 자신도 해녀의 일상에서 해녀공동체와 인식을 같이 하지만 화가의 인상과 획득된 시선은 일반적인 사실성으로 회귀하지 않는다. 물에 뜨고 지고 하는 것은 먼 거리의 별들이 깜빡거리는 것과 같을 것이고, 해녀들이 이동하는 움직임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어떤 테왁은 유성으로, 어떤 테왁은 공전하는 별로 보는 것이다. 시각을 미학으로 말하는 것을 관점이라고 한다면, “자연은 내면에 있다”는 세잔의 말은 되새겨 볼만하다. 바다는 생산지이자 작업장이다. 산업적인 개념으로 보면, 해녀들이 물질하러 가고 오는 모습은 말 그대로 '출근길'과 '퇴근길'에 다름 아니다. 이 작품들은 해녀들의 모습을 온전하게 드려내는 것이 아니라, 바다, 해안의 현무암 환경에 오롯이 녹아든 인상적인 부분들만 강조를 하고 있어, 마치 해녀들이 우주의 한 부분 아니면, 공간에 흡수돼버려 경계없이 블랙홀로 합쳐지는 형상이 돼버렸다. 이번 개인전 작품들은 물질이라는 작업에서 숱하게 뜨고 잠기는 일과 같다. 마치 화가 자신도 실감하는 행위로써 뜨고, 잠기고(지고), 이동하면서, 때로는 깊은 곳(심연)으로 들어가고, 어떤 경우에는 유영하면서 바다속(우주)을 절대자의 시점으로 보는 것을 경험한 까닦에 탄생한 작품들이다. '나해녀'는 화가 자신의 자화상이다. 그 자화상은 화가의 미학적 사유를 말해준다. 마치 해녀인 자신이 우주인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우주와 물속의 작업이 유사하게 보이는 이 작품은 어쩌면 나경아의 현재 인생에 대한 표상일 것이다. 생존을 위해 응시하는 시선, 깊은 심연이 물속과 우주의 심연이 다르지 않다는 확신에 찬 자화상 말이다. 그러나 이 자화상은 비단 자신이 아니어도 무방한데, 동네, 이웃집의 삼춘들이라고 해도 지구인의 초상화라는 점에서는 결코 틀리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나경아에 대한 정보가 없다면, 그의 작품들은 꽃?, 평야?, 태양?, 산?, 풍경?, 철조망? 호수?라는 등 수많은 상상력으로 돌아올 것이다. 사실 그 무엇이라도 상관이 없다. 나경아가 본 시선은 정돈된 아름다움보다는 직관으로 현실의 물속에서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상상적 확장을 시도한 것이다. 작은 해안 마을의 해녀들의 작업을 통해서 스펙타클한 우주의 바다를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나경아의 시선만이 가능한 일이다. 한 점에서 폭발하여 펼쳐진 빅뱅의 우주를, 테왁 하나로부터, 여러 명의 해녀들이, 우주의 행성이 되는 시선은 미는 매우 도발적인 의미를 갖는다. 고답적인 교육의 보수성을 일시에 걷어차 버린 나경아의 이번 '떠다니는 섬'은 삶과 예술의 합일이라는 점에서, 자신의 영혼의 창을 미술의 새로운 지평을 위해 활짝 열어젖힌 삶의 그림을 보여주고 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유정은? = 최남단 제주 모슬포 출생이다. 제주대 미술교육과를 나와 부산대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술평론가(한국미술평론가협회), 제주문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제주의 무신도(2000)』, 『아름다운 제주 석상 동자석(2003)』, 『제주의 무덤(2007)』, 『제주 풍토와 무덤』, 『제주의 돌문화(2012)』, 『제주의 산담(2015)』, 『제주 돌담(2015)』. 『제주도 해양문화읽기(2017)』, 『제주도 동자석 연구(2020)』, 『제주도 산담연구(2021)』, 『제주도 풍토와 문화(2022)』, 『제주 돌담의 구조와 형태·미학(2022)』 등이 있다.
더 가증스러운 것도 있었다. 거지 무리가 오고, 놀이를 끝내고 돈을 요구할 때에는 반드시 곧바로 지불해야 했다. 그렇지 않고 조금이나마 주저하는 기색이 있으면 욕설이 튀어나왔다. 심지어 시간을 지체했다고 힐책하면서 요구하는 돈의 액수를 올렸다. 예를 들어 처음에 100문을 요구했는데 일각을 지체했다고 곧바로 200문이 되고 400문이 되고 800문이 되었다. 줄 때까지 난장을 부렸다. 가끔 지들끼리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 두고 끝끝내 주지 않는 상대를 만날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그들과 같은 무리가 어찌 한둘인가. A무리가 가기도 전에 B무리가 오고, B무리가 오자마자 C무리가 오고 D무리도 잇달아 도착했다. 매 무리를 4명으로 계산한다해도 네다섯 무리 이상이면 거지 떼가 이삼십 명에 이르렀다. 사람이 많으면 세력도 크다고 하지 않던가. 문 밖에 진을 치면 상가는 장사를 그만 둬야 할 지경에 이르니 어찌 근심이 크지 않겠는가. 제각기 조직된 거지 무리가 처음 도착하면 먼저 거리를 한 바퀴 순찰했다. 거지 두목이 거지 헌납금을 받아오는 곳을 정하는데 그 수는 우두머리와 친분관계에 따라 결정되었다. 조직된 무리 당 삼사 명 혹은 오륙 명씩으로 똑같지 않았다. 무리 내에는 우두머리가 또 있었다. 거지 헌납금은 그 우두머리가 받았다. 매 계절마다 적어도 사오십 무리가 같이 다녔다. 두목이 지출할 총액은 수백 수천 문이었다. 들어오는 돈의 액수는 기가 막힐 정도로 많았다. 한 도시의 점포를 1천이라 가정하면 거지 헌납금은 2천 문이나 됐다. 10분의 3을 지출한다 하여도 천수백 문은 남았다. 가장 천한 직업인 거지가 받아먹는 봄, 가을 두 계절의 잉여금이 이삼천 문이나 되는 거금이니, 어찌 괴이하다 하니 할 수 있으랴. 물론 이삼천 문이나 되는 거액은, 일 년 동안의 비용이기에 모두 잉여금이라고는 볼 수 없기는 했다. 일시적으로 지불해야 하는 금액도 적지 않았다. 예를 들어 거지 두목 한 명에게는 부두목 몇 명이 보좌했다. 이외에 다시 전문적으로 거지를 관할하는 인원을 적지 않게 고용도 해야 했다. 그들은 종일 아편을 피웠다. 계집질에 미쳐 있었다. 도박에도 미쳐있었다. 그런 자금 역시 주지 않을 수 없었다. 도시 근교 몇 군데에 거지 천막을 쳐서, 현지의 병이 들거나 능력이 미약한 거지에게 서식처로 제공하였다. 겨울에 찬바람 불고 눈보라가 몰아쳐서 거지들이 구걸할 수 없을 때에도 죽을 제공해 주었고, 간식거리를 살 수 있는 금액을 나누어줘서 구제했다. 도시에 돌아다니며 구걸하는 거지는 수천이나 되니 매일 그들에게 지불하는 액수도 적지 않았다. 개방이 떠돌아다니듯 구걸하지만 규칙 없이 아무렇게나 돌아다니지는 않았다. 중등인물을 기준으로 하면 일정한 지역이 존재했다. 예를 들어 강소성 오송(吳淞) 각 상업지역에 A무리가 갔다고 하면 B무리는 다시 가지 않았다. 상태(常太) 지역이 B무리에게 돌아갔다면 C무리는 발을 붙일 수 없었다. A주, B현, C촌, D진마다 개방 조직이 움직이는 경계선이 있었다. 아무렇게나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구걸할 수 없었다. 상업지역을 돌아다니는 개방은 자신들이 돌아다니는 지역을 고정적인 부동산으로 봤다. 자기 지역을 보호하고 관리하는 법도 대단히 엄격했다. 다른 사람이 마음대로 돌아다니다가는 죽음의 땅이 될 경우가 많았다. 그런 까닭에 매해 2월, 8월이 되면 각처에서 개방 간에 고투하는 활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예를 들어, 지난 해 2월에 모모 진에서 마음대로 지역을 돌아다니던 개방 A두목이 오륙 명의 형제를 데리고 길거리에서 협박하며 구걸하였다. 그곳의 두목 B가 자기 구역을 제멋대로 돌아다니는 자들이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와 나가라고 했으나 A는 못들은 척하며 계속해서 거리를 돌아다니며 혼란스럽게 했다. 거지 두목의 체면을 조금도 봐주지 않았다. B가 가만히 보니 개방의 법도도 먹히지 않고 무력으로도 제압할 수 없으니 될 대로 되라고 내버려 두었다. 당시 시내의 상인 모두 매우 놀랐다. 다음날,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살려달라고 부르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상인들이 일어나 등을 켜고 보니, 새벽의 동터오는 햇빛이 나기 시작했는데 오륙 명이 벌거벗겨진 채로 10여 명에게 에워싸여 동쪽으로 끌려가는 게 어렴풋이 보였다. 살려달라는 소리가 계속 울려왔다. 잠깐 있으니 날이 밝았다. 주민들이 문을 열고 살펴보니, 거지 무리가 동쪽에서 보무당당하게 몰려오고 있었다. 어제 거지 B두목이 이끄는 부하 거지 무리였다. B두목과 안면이 있는 사람이 살려달라는 소리는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었다. B두목이 대답은 이랬다. 어제 반항하면서 명령을 듣지 않는 강도 같은 거지들을, 오늘 생매장해 버렸다고 했다. 듣는 사람 모두 놀랐다. 그것이 거지의 법이었다. 이처럼 당시 거지 집단인 개방, 강호의 흑사회, 부패한 관부는 한통속이었다. 서로 이용하면서 무뢰하고 강도 같은 짓을 저질렀다. 그런 깡패 무리들 앞에서 무슨 강호의 의협을 얘기할 수 있겠는가. 강소, 절강 두 성 백여 주현은, 거지와 방회 무리가 거지 헌납금을 받으러 다니지 않는 날이 거의 없을 정도로 시달렸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 학사, 대만 정치대학교 중문학과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자로 『선총원(沈從文) 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 『재미있는 한자풀이』, 『수달피 모자를 쓴 친구(선총원 단편선집)』, 『음식에 담겨있는 한중교류사』, 『십삼 왕조의 고도 낙양 고성 순례』, 『발자취-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여정』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