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광표 작가의 '돌하르방이 전하는 말'은 제주의 상징이자 제주문화의 대표인 돌하르방을 주인공으로 내세웁니다. 석상 '돌하르방'을 통해 '오늘 하루의 단상(斷想)'을 전합니다. 쉼 없이 달려가는 일상이지만 잠시나마 생각에 잠기는 순간이기를 원합니다. 매주 1~2회에 걸쳐 얼굴을 달리하는 돌하르방은 무슨 말을 할까요? 독자 여러분의 성원을 기다립니다./ 편집자 주 가만히 앉앙 보기만 헐거냐 (가만히 앉아 보기만 할 거니) We can't just stand by and watch, can we ☞ 고광표는? = 제주제일고, 홍익대 건축학과를 나와 미국 시라큐스대 건축대학원과 이탈리아 플로렌스(Pre-Arch)에서 도시/건축디자인을 전공했다. 건축, 설치미술, 회화, 조각, 공공시설디자인, 전시기획 등 다양한 분야로 활동하는 건축가이며 예술가다. 그의 작업들은 우리가 생활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감정에 익숙한 ‘무의식과 의식’ 그리고 ‘Shame and Guilt’ 등 현 시대적인 사회의 표현과 감정의 본질을 전달하려 하고 있다.
중국 고대 사회에서 ‘거지’〔걸개(乞丐)〕는 단순한 빈곤층을 넘어, 제국의 흥망성쇠를 비추는 거울이자 독특한 하류 문화를 형성했던 존재였다. 중국 거지의 역사는 단순한 빈곤의 기록이 아니라, 왕조의 흥망과 도시 경제의 발전, 그리고 종교적 변화와 궤를 같이한다. 시대별 흐름을 요약하면 이렇다. 첫째, 춘추전국부터 한나라까지는 초기 형성기라 할 수 있다. 생존을 위하여 구걸하였다. 초기에는 전쟁이나 천재지변으로 농토를 잃은 ‘유민(流民)’들이 일시적으로 구걸하는 형태였다. 오(吳)나라의 오자서(伍子胥)가 복수하기 위해 정체를 숨기고 시장에서 퉁소를 불며 구걸했다는 설화가 이 시기 거지의 전형적인 ‘고난’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한나라 때에 수도인 장안 등에 고정적인 빈민층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둘째, 당나라 때의 불교의 영향으로 종교와 복지가 결합하였다. 불교가 국교 수준으로 숭상되면서 ‘보시(자선)’ 문화가 정착했다. 사찰 주변에 거주하며 시주를 받는 거지가 급증했다. 국가 차원에서 최초의 구휼기관 ‘병방(病坊)’ 등 빈민과 병자를 수용하는 기관을 운영하여 거지를 제도권 안에서 관리하려고 했다. 셋째, 송나라 때에는 거지가 조직화 되고 직업화 되었다. 송나라에 와서 도시경제가 발달하고 상업이 고도로 발달하면서 거지가 하나의 ‘직업’으로 고착화되었다. 거지 왕〔개두(丐頭)〕이 등장하였다. 거지들이 구역을 나누고 조직을 관리하는 자치 조직이 생겨났다. 이들은 명절이나 경조사에 돈을 받는 대가로 소란을 피우지 않는 등의 규칙을 만들었다. 그리고 상업적 구걸이 성행하였다. 단순히 구걸만 하는 것이 아니라 노래, 춤, 기예를 선보이며 돈을 받는 ‘예능형 거지’가 등장했다. 넷째, 명·청나라 때에는 구조화 되었다 문화적 완성을 이뤘다. 엄격한 계급화가 이루어졌다. 거지 조직은 더욱 공고해져서 ‘개방(丐幇)’과 같은 형태가 실질적인 사회 하층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정치적 도구가 되기도 했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거지 출신이었던 만큼, 이 시기 거지는 때로 정치적 정보원이나 군사 보조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문학적 상징이 되었다. 이때부터 무협 소설이나 민간 설화에서 거지는 ‘세속을 초월한 고수’나 ‘의로운 무리’로 묘사되기 시작했다. 결국 중국 고대 거지의 역사는 ‘어떻게 하면 굶지 않고 조직적으로 살아남을 것인가’에 대한 처절한 생존전략의 진화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역사성을 가진 거지는 ‘사회의 지표’ 역할을 하였다. 거지는 한 왕조의 건강 상태를 알리는 신호였다. 중국 고대 정치에서 거지의 등장은 ‘천명(天命)’의 위기를 의미했다. 태평성대에는 거지가 적었고 난세나 폭정기에는 유랑민이 급증하여 거지 떼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거지는 결국 고향을 떠나 유랑하는 ‘유민(流民)’의 종착지였다. 가혹한 세금, 가뭄, 전쟁으로 농토를 잃은 농민들이 도성으로 몰려들어 거지가 되었다. 그렇기에 통치자들은 거지가 너무 많아지면 민심 이반과 반란의 전조로 받아들여 민감하게 반응했다. 종교적인 관점에서는 거지는 시험과 공덕의 대상이었다. 불교와 도교의 확산은 거지에 대한 인식을 ‘사회의 골칫덩이’에서 ‘수행과 자비의 대상’으로 바꾸어 놓았다. 도교의 신선설화에 따르면 신선들이 추레한 거지의 모습으로 나타나 사람들의 도덕성을 시험한다는 설화가 많다. 팔선(八仙) 중 하나인 이철괴(李鐵拐)가 대표적이다. 불교 보시(布施)의 방편이기도 했다. 거지에게 적선하는 행위는 개인의 업보를 닦고 공덕을 쌓는 가장 쉬운 길로 여겨졌다. 하층민인 거지는 결국 조직화 되었다. ‘개방(丐幇)’이 그것이다. 무협 소설 속 ‘개방’은 허구지만 실제로 중국 고대에는 거지들의 자치 조직이 존재했다. 송나라와 명나라 시대에는 거지들을 관리하는 ‘개두(丐頭)’나 ‘단주(團主)’가 존재했다. 그들은 구걸하는 구역을 나누고 분쟁을 조정했다. 또한 거지는 정보의 유통망 역할을 했다. 길거리에 상주하는 특성상, 거지들은 성 안팎의 모든 소문을 수집하고 유통하는 ‘바닥 민심의 정보센터’ 역할을 했다. 그런 거지는 ‘비참’과 ‘자유’라는 이면적인 문화적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거지는 문학적으로도 두 가지 극단적인 이미지를 가진다. 하나는 비극적 현실이다. 두보(杜甫)와 같은 시인들의 시에서 거지는 백성의 고통을 상징하는 비참한 존재로 묘사된다. 다른 하나는 해탈의 상징이다. 비참함과는 반대로 세속의 명예와 부를 버린, 구속 없는 삶을 사는 ‘자유인’으로 미화되기도 했다. 결국 중국 고대 거지는 제국이 돌보지 못한 그림자인 동시에, 사회 전체의 자비심을 측정하는 척도였다. 그들은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적나라하게 시대의 진실을 목격하던 집단이라 할 수 있다. 앞서 잠깐 언급했던 이철괴(李鐵拐)는 도교의 여덟 신선(팔선) 중 가장 파격적이고 상징적인 인물이다. 겉모습은 초라한 ‘절름발이 거지’이지만 속은 깊은, 지혜를 가진 반전 매력의 소유자이다. 이철괴는 처음부터 거지는 아니었다. 원래는 풍채 좋고 잘생긴 도사였다. 어느 날 이철괴는 스승인 태상노군을 만나러 영혼만 몸 밖으로 나가는 ‘유체이탈’ 수련을 떠난다. 제자에게 “7일 동안 내 몸을 잘 지키고, 만약 7일이 지나도 안 오면 화장하라”고 당부하였다. 그런데 6일째 되는 날, 제자의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이 온다. 마음이 급해진 제자는 하루를 못 참고 스승의 몸을 화장해 버리고 고향으로 달려가 버렸다. 7일째 돌아온 이철괴의 영혼은 타버린 자신의 몸 대신, 근처에서 막 굶어 죽은 절름발이 거지의 시신 속으로 급히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 학사, 대만 국립 정치대학교 중문학과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자로 『선총원(沈從文) 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 『재미있는 한자풀이』, 『수달피 모자를 쓴 친구(선총원 단편선집)』, 『음식에 담겨있는 한중교류사』, 『십삼 왕조의 고도 낙양 고성 순례』, 『발자취-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여정』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제주특별자치도 출범 20년이다. 2006년 7월1일 출범한 특별자치도 제주는 대한민국의 제주를 향한 집념의 깃발이다. 그 이면엔 대한민국의 예인선이 되기를 바라는 '제주개발'의 성장사가 있다. 1991년 말 제주개발특별법이란 외피를 걸친 제주호의 항해가 시작된 지도 어언 35년이다. 법과 제도, 구조와 내용으로 제주를 만들어간 변천사를 이제 되짚어본다. 제주개발특별법 탄생에 관여했던 김승석 변호사가 그 일련의 역사를 정리한다. 중단없는 제주의 새로운 전진을 새 연재에서 모색해본다. / 편집자 주 제주도개발특별법(이하, ‘구법’이라 한다)은 2002년 1월26일 법률 제6643호로 전면 개정돼 법의 이름이 "제주도국제자유도시특별법(이하, ‘신법’이라 한다)"으로 변경됐다. 신법은 2002년 4월 1일부터 시행하지만, 예외적으로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의 설립 준비를 위한 기구는 이 법의 공포와 동시에 활동을 시작했다. 먼저, 「개정이유」를 살펴본다. 제주도를 국제적인 관광·휴양도시, 첨단지식산업도시 등의 복합적인 기능을 갖춘 국제자유도시로 육성·발전시키기 위하여 출입국절차를 간소화하고, 제주첨단과학기술단지 및 제주투자진흥지구의 입주기업 등에 대하여 국유재산의 임대·매각에 대한 특례 등을 정하며, 필요시에는 관련법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조세감면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등 각종 지원 대책을 마련함으로써 국가의 발전과 제주도민의 복지증진을 도모하기 위함이다. 이 법은 제주도를 관광·휴양과 비즈니스, 물류·금융 등 다양한 기능이 융합된 홍콩이나 싱가포르와 같은 복합형 국제자유도시의 조성을 설계하지 않고 있다. 친환경적·관광·휴양 중심의 국제자유도시 개발에 관한 법이다. 이 법 제1조(목적)에 그 제정이유가 함축되어 있다. 제1조 (목적) 이 법은 제주도를 국제자유도시로 개발함으로써 국가발전에 기여함과 동시에 제주도민이 주체가 되어 향토문화와 자연 및 자원을 보전하고 지역산업을 육성하며 쾌적한 생활환경을 조성하여 제주도민의 복지향상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다음, 신법의 주요 골자를 살펴보면서 구법과 다른 점을 밝혀 보겠다. ① 제주국제자유도시종합계획의 수립·변경 등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에 관한 주요사항을 심의하기 위하여 국무총리 소속하에 제주국제자유도시추진위원회를 설치한다(법 제10조). 중앙정부가 컨트롤 타워(control tower) 역할을 하겠다는 뜻이다. ② 관광 등의 목적으로 제주도에 체류하기 위하여 제주도에 입국하는 외국인은 법무부 장관이 지정하는 국가의 국민을 제외하고는 사증(visa) 없이 입국할 수 있도록 하고, 사증 없이 입국한 외국인은 법무부 장관의 허가를 받아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정하고 있다(법 제14조 및 제15조). ③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외국인투자가 등의 편의증진을 위하여 제주도 안에서 외국어로 작성된 공문서를 접수·처리하는 경우에는 외국어서비스를 제공하도록 정하고 있다(법 제20조). ④ 제주도에 설립하는 외국인학교의 입학자격에 대하여는 초·중등교육법에 대한 특례를 정할 수 있도록 하고, 초·중등학교 교원의 임용권자는 교육공무원법·사립학교법 등에 불구하고 외국인을 기간제 교원으로 임용할 수 있도록 하며, 제주도에 대하여는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을 특별 지원할 수 있도록 정하고 있다(법 제21조 내지 제25조). 제주도를 교육개방의 전초기지로 설정하여 외국으로 빠져나가는 젊은 영재들을 제주도 안으로 흡인하고, 또 외국의 저명한 학자들을 장기간 제주도에 체류하게 함으로써 국제적 학문이나 기술교류에 획기적인 기여를 하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런 전략은 제주도를 역사적·문화적 공동체로 보지 않고 경제지역의 단위로 보겠다는 시각이다. 나아가 헌법 제31조, 교육기본법 제8조에서 정하는 의무교육의 예외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교육의 불평등 문제를 야기하거나 교육이념(교육기본법 제2조)과 상충되는 국적 없는 세계시민을 양성하는 역(逆) 기능을 낳을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한 것으로 보여 진다. ⑤ 제주첨단과학기술단지를 조성하고, 또 제주도에 지정되는 자유무역지역에 대하여는 외국인투자기업이 아닌 기업이 입주할 수 있도록 하며, 이들 입주기업에 대하여는 조세 감면의 수혜를 두고 있다(법 제41조·제44조 및 제65조). 이는 기존의 1차 산업 중심의 개발전략을 대폭 수정하여 첨단과학기술의 혁신이나 관광산업의 경쟁력 제고와 같은 민간 기업이나 시장부분의 개발전략이라 할 수 있겠다. 1차 산업의 전면 개방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에 소홀이 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⑥ 투자 촉진전략의 하나로 투자가가 희망하는 지역을 제주투자진흥지구로 지정할 수 있도록 하고, 동 진흥지구에 입주한 기업에 대하여는 수의계약으로 토지 등을 임대하거나 매각할 수 있도록 국유재산법 및 지방재정법에 대한 특례를 규정하며, 동 입주기업에 대하여는 조세특례제한법·지방세법 등이 정하는 바에 따라 조세를 감면할 수 있도록 정하고 있다(법 제42조·제45조 및 제65조). ⑦ 제주도를 여행하는 내국인을 위한 면세점 운영의 특례(법 제51조)와 도내 골프장 입장행위에 대하여는 조세특례제한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국세의 일부와 부가금을 면제할 수 있도록 정하고 있다(법 제52조). ⑧ 국가가 제주도를 ‘세계 평화의 섬’으로 지정할 수 있고, 그 기능과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국제평화와 협력기구의 유치, 제주평화포럼의 정례화 등을 법제화 한 것(법 12조, 13조)은 제주국제자유도시의 구상과 연계시킬 필요가 있어서이다. 국가는 제주도를 2005년 1월 27일 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했다. 4·3사건의 아픔을 겪은 제주사람들에겐 특별한 의미가 있다. 정부는 평화실천사업을 지원하고 있다. 제주평화연구소 및 제주국제평화센터 건립, 제주평화포럼 개최 등의 다양한 사업을 추진함으로써 ‘세계평화의 섬’의 얼개를 갖췄다고 볼 수 있겠다. 다만 경제특구로서의 ‘세계 평화의 섬’은 자유무역항과 자유무역지대의 설치, 국제물류기지의 조성, 전도의 면세지역화 등으로 가시화되어야 하는데, 여기까지는 미완의 상태로 남아 있다. ⑨ 제주국제자유도시 개발을 위한 각종사업과 지정 면세점의 운영 등 각종 수익사업을 행하는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JDC)의 설립과 운영이 특례를 정하고 있다(법 제72조 내지 제100조). 이로써 제주 개발은 중앙정부의 잣대와 시각에 의해 결정될 운명, 즉 개발신탁 통치에 처하게 됐다. 이후 JDC가 국제자유도시 육성을 위하여 어떠한 기능과 역할을 수행하였는지의 여부, 그리고 공과(功過)에 대하여는 할 말이 많아서 후술하겠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승석은? = 제주불교신문 편집인이자 변호사다. 인터넷신문 <제주의 소리> 발행인 겸 대표, 제주도 정무부지사를 역임했다. 저서로는 대한문학 제53호 신인문학상을 받은 '나 홀로 명상'(2009년, 불광출판) 수상집이 있다
제주특별자치도 출범 20년이다. 2006년 7월1일 출범한 특별자치도 제주는 대한민국의 제주를 향한 집념의 깃발이다. 그 이면엔 대한민국의 예인선이 되기를 바라는 '제주개발'의 성장사가 있다. 1991년 말 제주개발특별법이란 외피를 걸친 제주호의 항해가 시작된 지도 어언 35년이다. 법과 제도, 구조와 내용으로 제주를 만들어간 변천사를 이제 되짚어본다. 제주개발특별법 탄생에 관여했던 김승석 변호사가 그 일련의 역사를 정리한다. 중단없는 제주의 새로운 전진을 새 연재에서 모색해본다. / 편집자 주 제주도개발특별법의 시행 10년간 예측된 제주경제의 대내외적 여건은 마치 자궁 밖으로 갓 태어난 아이가 잦은 병치레하듯이 그 예측의 범위를 훨씬 벗어나 1992년 이후 급속한 변화가 진행됐다. 특히 1997년 구제금융(IMF) 위기를 겪으면서 제주의 발전 모델은 정부 주도와 신자유주의적 성격이 혼재한 방향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IMF 위기 극복의 수단으로 1998년 제주의 개방화를 통한 외자유치와 국가경쟁력을 강화하는 한편 제주경제를 한 단계 도약시키기 위한 획기적 조치로써 제주국제자유도시 조성 방침을 천명했다. 1999년 3월 민선 2기 우근민 도정은 제주도의 미래상(vision)으로 동북아 최고의 사계절 휴양지, 세계를 향한 개방된 출발지, 미래형 친환경적 “Clean Restopia"라는 세 가지의 이상을 제시하고 이를 그릇에 담기 위한 새로운 경제발전의 모델로서 싱가포르, 홍콩 등과 유사한 국제자유도시 건설을 구상한다. 나아가 이를 법·제도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가칭 ‘제주도 국제자유도시 개발 및 운영에 관한 특례법’의 제정 필요성을 중앙정부에 건의하고 도민의 공감대 형성과 역랑 집중에 사활을 걸다시피 했다. 그때를 돌이켜보면, 제주경제사회에는 검은 먹구름이 짙게 깔려 있었다. 1990년대 초경 제주도개발특별법의 제정 논쟁에서 얻은 소중한 경험을 통해 제주사회의 진로와 비전을 제시하고 이를 위한 장기 전략을 마련하였으나 1997년 11월 발생한 IMF 사태의 후유증으로 제주의 발전과 성장은 제자리걸음의 상태였다. 여기에다 경제통합의 가속화, WTO의 뉴라운드 협상, 시장개방의 압력, 남북정상회담(2000. 6.)에 따른 남북교류의 증대, 인천의 허브공항, 부산·광양만의 국제자유항 건설이라는 대내외적 환경 변화의 파도가 밀려오고 있어서 우리 제주는 새 천년의 100년을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할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만 했다. 그 당시 지방언론에 표출된 여론의 큰 줄기는 향후 10∼20년 국제관광 및 회의의 섬, 평화의 섬, 독특한 문화에 천혜의 환경 보존의 섬, IT(정보·기술)의 섬으로 도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근민 도정은 혹시라도 오키나와에 뒤질세라 21세기 제주경제의 비전과 전략을 제주형·복합형 국제자유도시의 건설에 두고 ‘제주도 국제자유도시 개발 타당성 조사 및 기본계획’에 대한 용역’에 착수했다. 이에 따라 건설교통부와 제주도는 1999년 미국의 존스 랑 라살(Jones Lang Lasalle)사에 국제자유도시 타당성 연구용역을 의뢰하였고, 위 회사는 2000년 6월 제주지역은 국제자유도시로서의 잠재력이 크다는 내용의 용역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보고서에는 제주도는 천혜의 자연경관과 청정 환경으로 국제휴양지로서의 매력이 크며 지리적으로 동북아시아의 주요 도시들과 연결된 중심적 위치에 있고, 공항 · 항만 · 도로 등을 포함한 양호한 사회간접시설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어서 최소의 비용으로 국제자유도시 조성이 가능하며, 인구와 경제규모가 적은 도서지역이어서 다른 지역에 비하여 차별적인 제도를 적용하는 것이 용이하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중앙정부의 주도 하에 성안된 제주국제자유도시특별법(안)이 도내 일간지에 그 모습을 드러낸 때는 2001년 11월15일 경이다. 2001년 정기국회의 통과를 염두에 두고 밀실에서 은밀히 작업을 한 것이 아니냐는 여론의 지적을 받았다. 이 특별법(안)이 제주의 토착사회와 지구촌과의 동화적 통합을 실현하고 도민복지를 촉진하기 위한 법률이라면, 당연히 충분한 여론 수렴 과정이 필수적이어야 한다. 그러함에도 제주인의 운명을 좌우할 이 특별법(안)이 제주사람들의 공감대 형성 없이 고위직 공무원, 전문가, 여당 국회의원 등의 시각과 잣대에 의해 만들어졌음은 절차적 정의에 어긋난다. 야당인 한나라당 현경대 국회의원의 주최로 공청회가 열려 의견수렴이 있었으나 선박등록특구제도(법 47조)를 신설하고, 국제화 교육환경의 특례를 완전 개방에서 부분 개방으로 전환하는 규제 강화를 보충한 것 외에 당초의 초안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지난 1991년 그 입법과정이 투명하게 공개됨으로써 찬반양론이 팽배하게 대립됐던 제주도개발특별법의 제정과정과 대비해 본다면, 2002년 6월 4대 지방선거를 앞두고 제주민심을 추스르기 위한 집권 여당의 선거 전략적 측면이 엿보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여당의 날치기 통과가 아니라 여야 공동 발의로 2002년 1월26일 국회를 통과하였다는 점이다. 국제자유도시의 개념을 입법화한 최초의 법률이라는 점에서 제주국제자유도시특별법은 그 의의가 매우 크다고 보여 진다. ‘국제자유도시’라 함은 사람·상품·자본의 국제적 이동과 기업 활동의 편의가 최대한 보장되도록 규제 완화 및 국가적 지원의 특례가 실시되는 지역적 단위를 말한다(법 2조 1호). 일국양제(一國兩制)가 시행되고 있는 ‘홍콩특별행정기구기본법’(1990.4.4.제정)과 같이 특별행정(자치) 제도를 채택하지 않고 단지 경제활동의 영역과 각종 세금 등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여 세계 시장과의 경제통합을 꾀하고 있다. 다른 한편, 제주도내 보존자원의 도외 반출 금지(법 32조 5항), 도내 1차 산업의 생 생산·출하의 조정과 품질검사 등에 대한 법적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규정(법 50조, 111조 2항)을 두고 있어서 외국 농축수산물의 자유로운 이동과 대비할 때 국제자유도시의 출범에 역행한다는 비판도 없지 않다. 외국인에 대한 무사증 입국을 확대하고(법 14조), 내국인 면세점 운영(법 51조), 대중 골프장 건설의 특례와 이용에 관한 감세조항(법 39조, 52조), 휴양 펜션업의 권장(법 53조) 등의 혁신적 입법은 2002년 하반기부터 실시될 예정인 주5일 근무제와 맞물러 가족단위의 국내외 관광객 유입에 마중물이 될 것이라는 게 그 당시의 전문가 예측이다. ‘제주국제자유도시’는 이후 우리 사회의 거대 담론이 되었다. 우리가 그렇게 염원했던 이상향, 이어도가 코앞에 닥친 것일까? 아티스트 김영갑의 <이어도의 비밀>에 실린 다음의 글로 필자의 소회를 대변하고 싶다. “도둑도 거지도 대문도 없는 땅에서 살았던 제주 토박이들은 부지런히 일해도 배가 고프고 절약하고 검소해도 늘 부족한 생활에 섬에 태어난 것이 원통하다고 탄식했다. 그렇게 섬을 떠나려 했다. 그러나 떠날 수 없는 이들은 마음속에 이어도의 꿈을 키웠다.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고단한 삶에 눌려 주저앉는 대신, 이어도라는 꿈을 통해 살아갈 힘을 얻었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더욱 충실하게 현재의 삶을 일궈 나갔다. 그렇게 나는 그들이 누리는 평화로움의 비밀이 바로 이어도였음을 깨달았다. 관광산업이 제주 사람들의 생명산업이 되었다. … 제주사람들은 이제는 이어도를 이야기 하지 않는다. 방목장으로 사용되던 드넓은 초원은 골프장으로 변하고 아름다움이 빼어난 중산간 들녘은 리조트와 펜션과 별장으로 변해가고 있다. 제주사람들의 마음에서 이어도는 지워지고 있다. 이 땅에서 제주다움이 사라질수록 제주인의 정체성을 잃어 갈수록 사람들의 기억에서 이어도의 비밀은 잊어지고 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승석은? = 제주불교신문 편집인이자 변호사다. 인터넷신문 <제주의 소리> 발행인 겸 대표, 제주도 정무부지사를 역임했다. 저서로는 대한문학 제53호 신인문학상을 받은 '나 홀로 명상'(2009년, 불광출판) 수상집이 있다.
봄 기운이 완연한 지금, 오늘 하루는 다섯 날을 쉼 없이 산 당신을 위한 시간입니다. 여유로운 주말, 시 한 편의 여유를 선사합니다. 당신의 주말을 위하여. 매주말 허유미 시인이 전하는 '잠시의 여유'를 전합니다. [편집자 주] 숨비소리 허유미 파도는 조용히 철썩인다 엄마는 숨비소리 작게 내쉬고 다시 물속으로 들어간다 살기 위해 죽기 위해 매달리는 바다 파도가 철썩 치는 소리는 물결이 끝나는 소리일까 시작하는 소리일까? 파도마다 누군가의 몸이 잠겼다 올라왔다 한다. 물 위로 잠깐 올라와 공기를 훔치듯 들이마시고, 다시 바다 속으로 몸을 밀어 넣는 그 짧은 틈은 생존이라기보다 어떤 삶의 방식에 더 가깝다. 살아야 해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방식이 바다와 함께 묶여 있는 사람의 리듬처럼 느껴진다. 숨비소리는 고요한 소리가 아니다. 겉으로는 들리지 않을 만큼 작지만, 그 안에는 숨을 건 시간들이 있다. 물속에서 버티는 몸과 물 위에서 겨우 이어지는 호흡이 한 사람의 하루를 만들고 그 하루는 바다의 리듬과 어긋나지 않는다. 살기 위해 물속으로 들어가고, 동시에 그 안에서 자신을 죽어지게 가라 앉혀야 살아지는 삶. 이 문장은 역설 보이지만, 바다를 삶의 자리로 삼은 사람들에게는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방식이다 바다는 사람을 품는 동시에 시험한다. 숨을 내어주지 않으면서도 숨을 가르쳐 주는 곳. “살기 위해 / 죽기 위해 매달리는 바다”는 어느 하나로만 규정 지을 수 없다. 생과 죽음이 서로를 놓지 않은 채, 같은 물결 위에서 함께 흔들리고 있다 ☞허유미는?=제주 바닷가 마을 모슬포에서 태어났다. 수평선, 물너울, 등대, 섬은 나의 첫 친구들이었다. 말문이 트였을 때 엄마라는 말보다 바다라는 말을 많이 했다. 물질하는 엄마를 기다리는 동안 바다는 파란 요람, 파란 집, 파란 놀이터였다. 청소년 시절 유난히 말수가 적어 엄마 아빠가 걱정했다. 말수가 적은 대신 사람들의 말을 많이 듣고 남들이 쉽게 지나치는 풍경이나 사물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 시절부터 시집을 읽는 시간이 많았다. 책꽂이에 시집이 많아지면서 시인이 되겠다는 꿈을 갖고 국문학과에 진학했다. 2016년 제주작가 신인상, 2019 서정시학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우리 어멍은 해녀」, 「바다는 누가 올려다보나」. 한국작가회의 회원, 제주작가회의 회원.
▲ 좋은 기를 유도하는 풍수적 배치 ☞ 중앙과 서북쪽은 최고 대표자의 자리로 적합하다. 다음으로 동쪽, 동남쪽, 남쪽의 순으로 배치하면 비교적 좋다. 동쪽은 주로 정신적인 노동을 하는 아이디어맨이나 연구실로 적당한 방위이다. 동남쪽은 판촉과 마케팅을 담당하는 영업 담당자나 전무이사, 상무이사, 거래와 관련된 영업 분야 모든 담당자에게 적당한 방위라고 볼 수 있다. 남쪽은 회사의 인사관리와 기획실의 위치로 적합하고, 지적인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들에게 적당하다. 서남쪽과 동북쪽은 기운이 설기 되는 귀문방(鬼門方)이라고 하여 회사의 대표자가 이곳에 앉게 되면 하극상(下剋上)을 당하거나 오히려 사원들의 눈치를 보게 되거나 사원들이 지시를 따르지 않고 게을리하게 되는 흉 방위라고 할 수 있다. △ 전통적인 양택의 행운 방위 ☞ 옛날부터 재운과 부인 덕을 보려면 서쪽의 집 모양이 좋아야 한다고 하고, 집안의 장남을 출세시키려면 동쪽의 집 모양을 중시했다. 동쪽은 종교적인 분야나 학술연구 등 교수나 의사, 예술가 등에에게도 좋은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시험을 앞둔 입시생이나 고시생은 주택의 중심점에서 시계방향으로 120도 방위가 문창귀인방(文昌貴人方)이 되는데 이 방위를 사용하면 기운을 유도하는 데 좋다. 특히 결혼한 신혼 초 부부에게는 북쪽 방위가 좋은데 이것은 북쪽이 물에 속하기 때문에 신체의 신장과 방광을 주관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신장과 방광이 왕성하면 건강한 아기를 출산할 수 있고 왕성한 부부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의 사례(事例) 전라남도 여수시 소라면 현천1리 중촌마을.은 쌍둥이 마을로 아주 유명한 곳이다. 이곳은 마을의 지형이 연꽃이 물 위에 또 있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의 형국인데 이곳 마을 사람들이 두 개의 큰 봉우리로 이루어진 쌍태봉(雙胎峰)의 정기를 받아 쌍둥이를 많이 낳는 곳으로, 세계적으로도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마을로 알려진 곳이다. 이것은 풍수적으로 지형·지세에 의해 땅 기운이 사람에게 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경주 교동에는 경주 최부잣집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9대 진사가 나온 곳이고 9대로 만석꾼이 나온 집터로 유명한 곳이다. ☞ 사실 경주는 원래 신라가 한때 황금시대를 이루어 온 명지로 알려져 있으며 산세나 지맥으로 출중한 곳인데 경주에서도 최부잣집은 경주의 중심 혈(穴)을 이루고 있는 명당에 있다. 지세적으로 명당은 말할 것도 없고 집터를 들여다보아도 남향집에 대문도 남향으로 나 있고 동쪽에는 주방과 부엌이 있어서 동쪽 방위의 주택 요건을 두루 갖추고 있는데 남쪽의 화기(火氣)가 강한 것이 흠으로 본다면 볼 수 있다. △ 행운의 책상 방향과 잠자리 방향 ☞ 대학 수험생, 승진 시험, 국가고시 패스, 선거에서의 승리, 사업 발전 등 하고자 하는 일들이 잘 풀려 갈 수 있도록 하는 행운의 방위는 책상이 놓이는 위치나 잠을 자는 방위에 매우 관련이 있다. 물론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다른 조건과 함께 심적으로도 정성과 열정을 다해 노력해야 한다. 태어난 띠별로 말하자면 먼저 호랑이띠, 말띠, 개띠는 책상 방위를 북동쪽으로 바라보게 하면 좋고 잠잘 때 머리를 두는 방향은 남서쪽으로 하면 좋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원숭이띠, 쥐띠, 용띠는 책상 방위를 남서쪽으로 바라보게 하면 좋고 잠잘 때 머리 방향을 북동쪽으로 두는 것이 좋다. 또 돼지띠, 토끼띠, 양띠는 북서쪽으로 책상 방향을 두고 잠자리 머리 방향은 남동쪽으로 두면 좋다. 끝으로 뱀띠, 닭띠, 소띠는 책상 방위를 남동쪽으로 향하게 하고 잠자리 머리 방향은 북서쪽으로 하면 좋다. ▲ 경제적 행운을 부르는 풍수 지혜 ☞ 몸에 착용하는 안경이나 반지, 귀걸이, 팔찌류 등 액세서리를 할 때 가능한 은이나 금으로 된 것을 선택하고 지갑, 열쇠고리, 라이터 등도 황금색으로 하면 재력을 유도하는 힘이 작용한다. 가구는 가능한 한 원만하고 둥근 것으로 선택하고 날카로운 것을 되도록 배제한다. 포근하고 원만한 느낌이 드는 물건들을 진열하면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두둑한 포용심이 향상되므로 주변의 사람들과 사회적 관계가 좋아진다. ☞ 집문서나 패물, 통장 등 귀중품은 북쪽 방위에 보관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북쪽은 비밀, 감춤, 저축, 안전의 상징이므로 북쪽 방위에 보관하면 도난의 위험이나 기타 물건을 잃어버리거나 하는 가능성을 최대한 방비하는 기운의 특색이 있다. ☞ 재화의 취급 또는 계약이나 문서 등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인감도장, 신용카드, 통장, 귀금속 등의 패물류는 가능한 초록색 천으로 싸서 보관해야 금전운이 들어온다고 본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 신영대는? = 대한풍수연구학회 편집위원장, 한국역술인협회 공인 역학연구원이다. 중문학 박사와 풍수학자로서 ‘제주의 오름과 풍수’, ‘명리학원리대전’, ‘풍수지리학 원리’, ‘전원시인 도연명 시선', ‘흰 구름 벗을 삼아 읽어보는 당시선’ 등 다수의 저서를 냈다. '한라산 총서'의 구비전승·지명·풍수 분야와 ‘세계자연유산지구 마을일지 보고서’ 중 풍수 분야 공동 집필자로도 참여한 바 있다. 또 제주도 각 마을 '향토지' 풍수 부문에 공동 집필자로 참여하고 있다. 현재 제주관광대 관광중국어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서인희의 작품 세계, 얽힘과 설킴의 아름다움 예술은 화가 자신의 정신세계의 표현이라고 헤겔은 말한다. 그 예술을 담아낸 것이 바로 작품이라면, 그 작품은 화가의 영혼이 담긴 하나의 파일과 같다. 그래서 곶자왈은 곧 서인희가 영혼으로 만든 자연 정원이인 것이며, 그 곳 자연의 이름다움에서 그의 정신세계가 빛나는 것이다. 서인희 작품에는 제주 풍토에서 나오는 강렬한 색, 자연환경이 만든 얽키고 설킨 넝굴의 선, 양치류 식물들의 아름다운 질서, 하늘을 향해 자유로운 해방감을 발산하는 나무, 마소의 방목(放牧)을 관리하기 위해 쌓은 곶담(고자왈의 돌담)의 정겨운 형상, 곶자왈에 무질서가 오히려 아름다운 질서가 되는 느낌 등은 돌과 식물이 오랜 시간에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면서 생성한 자연 형상들이 있다. 그래서 서인희의 곶자왈에서는 공간이 곶자왈을 만든 것이 아니라 곶자왈의 식물이나 사물 형상들이 공간을 만들었기 때문에 화가의 영혼이 그 정원을 걸어간다고 말할 수 있다. 주어진 공간에 그대로 주어진 자연이라고 생각한다면, 작품이 예술가의 정신세계의 산물이라고 말하기가 어렵다. 결국 예술가의 해석이란 자연을 대하는 화가 자신의 삶 전체에서 나오는 존재의 울림이었다는 것이 타당한 평가이다. <유기적 순환>은 오래된 돌담과 그 위에 세월이 이룬 넝쿨 식물들의 하모니를 보여준다. 청색의 하늘은 변화무쌍한 하늘의 기후를 보여주고, 오랜 돌담, 아마도 잣담이나 캣담으로 는 보이는 마소 관리용 돌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돌담을 감싸 안은 듯 잎사귀가 떨어져 버린 칡넝쿨이 고리처럼 돌담을 싸고 있다. 줄기(선), 돌담(괴체:덩어리), 하늘(암시)은 겨울로 접어둔 곶자왈의 상황을 말하고 있다. <얽힌 희망의 숲> 곶자왈에 옛사람이 다니던 길은 없다. 곶아왈에서는 여름 한 개절이면 공간을 뒤덮어버린다. 넝쿨은 리좀(Rhizome)으로 사방에 번지면서 서로를 연결시켜 하늘을 가려 버린다. 리좀은 가지가 흙에 닿는 순간부터 뿌리가 내려 줄기가 나는 지피식물에서 착안한 철학개념인데 중심이나 시작이 없고, 시작과 끝이 분명하지 않으며, 어느 지점에서든 자라나고 끊어져 다시 자랄 수 있어 특정 중심이나 주체가 거부되는 전복적인 개념으로 현실 세계의 복잡성을 설명하는데 매우 유용하다. <켜켜이 쌓은 생명의 흔적>은 돌담가 넝쿨, 나무가 섞여 얼핏 어지러운 상황인 것처첨 보이지만 조금 천천히 들여다보면 식물의 신기함을 볼 수 있다. 어느 것 하나 겹쳐서 힘겹게 견디는 줄기나 가지가 없다. 식물은 어떤 식으로는 작은 틈이라도 만들어 광합성 작용으로 생명을 유지하려고 애쓴다. 나무가 흙에서 자라지만 아름드리 나무도 그것의 성장은 흙이 아니라 물과 산소와 이산화탄소가 전부였다는 것을 알면 놀라게 된다. 식물들은 복잡하게 얽혀있지만 서로를 침범하지 않고 상생하여 공존하고 있다. <겨울의 기억>은 나무가지가 거꾸로로 늘어진 선들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다. 버드나무같이 원래 나무의 속성이 아니라 바람 많은 환경이 나무의 속성을 바꿔버린 경우이다. 매우 역동적인 선묘들이 땅을 향하고 있다. <계절은 끝내 꽃을 품는다>는 겨울 동백을 그린 작품이다. 온 화면은 청색으로 채워지고 어렴풋이 잎사귀 선묘 사이에 붉은 동백 꽃망울이 군데군데 피어 있어 시각적으로 더욱 붉게 느끼게 한다. 색의 대비가 아름다운 매력 있는 작품이다. <겨울 흔적>은 곶자왈에 가장 흔한 양치식물인 고사리 잎의 패턴이 아름다운 작품이다. 고사리 잎 위에 살짝 하얀 눈이 내려앉아 형태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한 작품이다. 동일계통의 색에서는 형태가 잘 보이지 않지만 흰 눈이 내림으로써 고사리의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작품이다. <겨울 속 꺼지지 않는 생명>은 한겨울인데도 푸른 식물이 자라나는 것을 보고 생태의 강인함을 표현한 작품이다. 곶자왈은 식물이 보라(寶庫)고 할 만큼 아열대 종들이 섞여 있어서 겨울에도 푸른 잎을 볼 수 있는 식물들이 많다. 한라산이나 산악을 제외하고는 영하로 내려가는 날이 드물며, 대체로 겨울 온도가 섭씨 1도~5도여서 겨울 무나 배추도 파랗게 자라나 제주도 방문자들은 놀라게 한다. 서인희의 목판화 작업은 마치 회화 작업의 사전 준비작업으로 보인다. 판화로 회화의 느낌을 보여주어서 그런지, 아니면 판화의 재료가 목판을 선택해서 그런지 차가운 느낌보다는 정갈하면서 절제된 느낌을 주고 있다. 서인희 판화는 선묘의 미학이 잘 드러나는 데 동양화의 철선묘(鐵線描)적인 단정함과 예리함이 깃들어 있다. 서인희 판화는 회화와는 달리 모노크롬의 대비적인 효과 때문에 직선이 주는 맛이 강렬하고 단색의 바탕색이 오히려 식물 줄기들의 속도감을 강화해줌으로써 판화는 맞지만. 점점 회화의 영역으로 옮겨가는 전조를 보여주고 있다. 바이오필리아가 판화에서 준비되는 과정이라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서인희의 바이오필리아(생명 사랑)는 곶자왈의 생태에서 생명의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장인의 굴기(屈起) 정신으로 표현한 작품들이다. 특히 얽힘과 설킴은 곶자왈의 특성 가운데 겨울이면 더욱 잘 드러나는 식물들의 생태의 모습인 나무와 넝쿨의 구조라고 할 수 있는 가지와 줄기의 하모니를 주제로 삼고 있다. 물론 목판화 작업에서도 얽힘과 설킴을 보여주었지만, 거기에서는 정리되고 관리되는 작업 패턴을 보여주었다. 자연에서와 달리 인간 세상에서 얽힘과 설킴은 사건으로 연결돼 결말이 험악하게 끝나기도 한다. 그러나 자연에서의 얽힘과 설킴은 그 관계도 다른데 서로서로 누르지 않고, 조금이라도 부딪치지 않게 피하면서 각자 살길을 모색하는 걸 보면, 비로소 얽힘과 설킴이 왜 아름다운 관계가 되는지 생명 사랑의 교훈을 깨닫게 한다. 작가의 말대로 자신이 곶자왈을 걸을 때마다 행복한 희열을 느끼는 것은 세상살이에서 맺힌 가슴을 자연이 풀어주기 때문에 편안하다고 했다. 자연은 분명 인간이 모르는 생명 사랑의 비밀을 가지고 있다. 우리 인간이 바로 자연에 근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자연 앞에만 서면 스스로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바이오필리아는 가르쳐 주고 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유정은? = 최남단 제주 모슬포 출생이다. 제주대 미술교육과를 나와 부산대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술평론가(한국미술평론가협회), 제주문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제주의 무신도(2000)』, 『아름다운 제주 석상 동자석(2003)』, 『제주의 무덤(2007)』, 『제주 풍토와 무덤』, 『제주의 돌문화(2012)』, 『제주의 산담(2015)』, 『제주 돌담(2015)』. 『제주도 해양문화읽기(2017)』, 『제주도 동자석 연구(2020)』, 『제주도 산담연구(2021)』, 『제주도 풍토와 문화(2022)』, 『제주 돌담의 구조와 형태·미학(2022)』 등이 있다.
고광표 작가의 '돌하르방이 전하는 말'은 제주의 상징이자 제주문화의 대표인 돌하르방을 주인공으로 내세웁니다. 석상 '돌하르방'을 통해 '오늘 하루의 단상(斷想)'을 전합니다. 쉼 없이 달려가는 일상이지만 잠시나마 생각에 잠기는 순간이기를 원합니다. 매주 1~2회에 걸쳐 얼굴을 달리하는 돌하르방은 무슨 말을 할까요? 독자 여러분의 성원을 기다립니다./ 편집자 주 "가만히 보민, 소문은 언제나 조그만 일 가졍 시작행 커지는 거라 마씀." (가만히 보면, 소문은 언제나 조그마한 일 가지고 시작해서 커지는 법입니다.) "Rumors always start from a small thing." ☞ 고광표는? = 제주제일고, 홍익대 건축학과를 나와 미국 시라큐스대 건축대학원과 이탈리아 플로렌스(Pre-Arch)에서 도시/건축디자인을 전공했다. 건축, 설치미술, 회화, 조각, 공공시설디자인, 전시기획 등 다양한 분야로 활동하는 건축가이며 예술가다. 그의 작업들은 우리가 생활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감정에 익숙한 ‘무의식과 의식’ 그리고 ‘Shame and Guilt’ 등 현 시대적인 사회의 표현과 감정의 본질을 전달하려 하고 있다.
다른 사례도 있다. 중국 북방의 어떤 지역의 주민들은 ‘기근으로 살 던 곳을 떠나 구걸한다’는 말을 대단히 금기시한다. 심지어 어떤 때에는 말만 듣고도 얼굴빛이 달라지기도 한다. 그런데 다른 지역에서 구걸하러 온 사람에게는 성심성의껏 접대한다. 마치 제집에 돌아온 것 같이 마음 편하게 대접한다. 그곳에 거주하는 모든 세대의 사람들은 모두 기근을 피하여 구걸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지에게 성대하게 대접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에 속했다. 현지사람처럼 똑 같이 대하기도 한다. 살아갈 만 하다는 듯이 차려입은 중년 남자가 문을 두드리지도 않고 자기 집처럼 농가 안으로 들어선다. 아무 것도 개의치 않는 듯이 큰 쌀 포대를 들고 주인에게 “돈 좀 버셨나요?”, “수확은 좋아요?”와 같은 길한 말을 건넨다. 인사를 나누는 셈이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땅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말아 피우면서 주인의 ‘도움’을 기다린다. 주인은 웃으며 맞이하면서 불을 피우고 밥을 한다. 밥이 다 되면 한 가족을 돌보듯이 그릇과 접시를 나무 쟁반에 올려놓고 부엌 가운데에 차려서는 편안하게 밥을 먹을 수 있도록 해준다. 식사가 끝나면 진한 전차 한 사발을 마시게 하고 잎담배를 피운 후 다시 큰 사발로 쌀이나 밀가루를 담아서 건넨다. 어떤 때에는 일상적인 이야기를 늘어놓기도 하고 즐거웠던 이야기나 정겨웠던 시절의 이야기를 건네기도 한다. 한 고향 사람인 양 그렇게 편하게 얘기 나눈다. 판을 두드리며 노래하지도 않고 아이들이 떠들어대면서 뒤따르지도 않는다. 애걸하지도 않고 고맙다고도 하지 않는다. 강요하지도 않고 인색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구걸하러 다니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서너너덧이 한패를 이루어 다닌다. 낮에는 흩어지고 밤에는 만나 농가의 곁채나 텃마당 판잣집에서 잠잔다. 그들은 현지 증명서를 가지고 다닌다. 위에 쓰여 있다 : 이 사람은 본 마을의 빈농 ×××로 그곳으로 구걸하러 가니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들은 도둑질도 하지 않고 강탈도 하지 않는다. 젊거나 힘이 있는 사람들은 현지 농가에서 수확이나 집고치는 것을 도와줄 수도 있다. 그들은 하루 이틀 구걸하면 마대 하나를 다 채운다. 그러면 부근 시장에 나아가 팔아서는 돈이나 식량 배급표로 바꾼 후 집으로 붙인다. 가끔은 ‘성대모사’하면서 시골로 내려가 구걸하기도 한다. 목표는 현금과 식량 배급표이다. 그들은 주로 이웃 성, 비교적 빈한한 섬서(陝西) 북쪽 신목(神木)이나 부곡(府谷), 감숙성 민근(民勤)현에서 온 사람들이다. 그 시골 지방은 구걸이 이미 풍속이 되었다. 그들이 구걸하는 지역의 주민들은 고향 사람인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광서(光緖) 초년에 상해의 광동성이나 광서성 출신 거지들이 전문적으로 현지에 살고 있는 동향인을 찾아가 구걸하는 일을 떠올리게 된다. “이 사람들은 구걸하는데 대체로 공공 조계지의 북쪽 사천로, 천동로 일대에서 한다. 그 지역의 교민은 광동 출신이 많다. ……광동 거지들은 살피며 길을 따라 걸으며 용모를 보면서 광동인인지 살피고, 말을 듣고서 광동인인지 살피며, 옷과 신발을 보면서 광동인인지 살핀 후 광동어를 하면 가서 구걸한다. 잠시 말을 건넨다. ‘나는 공과 같은 고향사람입니다. 직장을 잃어 여기에 왔습니다. 곤궁하게 되어 의지할 데가 없습니다.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까? 구조 바랍니다.’ 수십 원을 주지 않으면 쫓아다니며 놓아주지 않는다.” 같은 처지, 동향의 정은 구걸하는 자본이 되고 보시하는 이유가 되었다. 이처럼 거지 근성은 얼마나 많은 구걸하는 잔재주로 변화했는지 알 수 있다. 다른 한 사례도 있다. 청나라 말기의 일이다. “강소성의 회안, 서주, 회해 등 지역에 해마다 기근을 피하여 업으로 삼는 자 수백 명이 무리를 이루어 각 주현에서 구걸하였다. 인근 여러 성에서 구걸하는 사람 수는 광서 초년에 가장 많았다. ……관인이 있는 증명서를 들고 이르는 곳에서 반드시 관례에 따라 구제를 구했다. 한 마을에 이를 때마다 관리가 위에 관인을 찍고 다음 고장에서 구제하는 곳으로 삼았다. 그 사람들은 가을과 겨울에 구걸하고 봄이 되면 귀농하였다. 그 지방 사람들은 무뢰한 생원과 감생의 감언에 속아 자신들의 행동에 따라 지원하였다. 구제에서 얻은 것은 대부분 자신을 배불리는 데에 썼고 다른 사람들은 백분의 십일도 얻지 못하였다.” 원래 ‘증명서’를 발급받아 구걸하는 것은 현재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청나라 말기에 이미 유행하였다. 이처럼 ‘맹목적으로 이동해 들어온 사람’이 구걸하는 것은 오래 전에 이미 여러 지역의 습속이 되었다. 오늘날에 이르러 이러한 케케묵은 낡은 풍습이 다시 떠오르고 있다. 당대의 구걸하는 새로운 조류를 이루었다. 부랑자 근성도 현대 자회의 잠재적인 공공의 해악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 점은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된다. 당초에 『열자·황제』에 ‘이때부터 범씨 문도는 길에서 거지와 마의를 만나며 감히 모욕을 주지 않았다’라는 기록에서 이미 거지 단체의 부랑자 근성이 중국민족의 문화 토양에 이식되었고 풍속 미담이 됐다면 오늘날에 파생된 나쁜 결과는 뚜렷해졌다. 중국은 협의(俠義) 정신을 숭상하는 전통심리를 가지고 있다. 사마천이 『사기』에 ‘유협열전’을 기술하였다. 유협정신도 부랑자 의식이 파생된 형태의 하나임에는 틀림없다. 역대로 ‘무협’, ‘유협’, 혹은 ‘강호 협객’으로 허풍 떨거나 높이 평가하여 전송한 자는 ‘유개 재주’가 적지 않다. 그 정신의 실질은 모두 부랑자 근성의 기본 궤적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 학사, 대만 국립 정치대학교 중문학과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자로 『선총원(沈從文) 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 『재미있는 한자풀이』, 『수달피 모자를 쓴 친구(선총원 단편선집)』, 『음식에 담겨있는 한중교류사』, 『십삼 왕조의 고도 낙양 고성 순례』, 『발자취-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여정』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제주특별자치도 출범 20년이다. 2006년 7월1일 출범한 특별자치도 제주는 대한민국의 제주를 향한 집념의 깃발이다. 그 이면엔 대한민국의 예인선이 되기를 바라는 '제주개발'의 성장사가 있다. 1991년 말 제주개발특별법이란 외피를 걸친 제주호의 항해가 시작된 지도 어언 35년이다. 법과 제도, 구조와 내용으로 제주를 만들어간 변천사를 이제 되짚어본다. 제주개발특별법 탄생에 관여했던 김승석 변호사가 그 일련의 역사를 정리한다. 중단없는 제주의 새로운 전진을 새 연재에서 모색해본다. / 편집자 주 1990년대 초부터 중국, 일본, 필리핀,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 동아시아의 여러 국가들은 21세기에 대비한 비전과 국가전략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하여 왔다. 대체로 그 공통점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국가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그랜드플랜(Grand Plan)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하고 있다는 점이 그 하나이고, 세계적 거점 도시로서 도약하기 위하여 필수적인 국제공항, 국제항만 등의 거대한 인프라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는 것이 그 둘이고, 글로벌 경제에 대응하기 위하여 기업하기 자유롭고 편리한 여건을 조성하여 외자유치를 위한 적극적이고 개방적인 노력을 전개하고 있는 점이 그 셋이다. 예를 들면, 중국 상해의 푸동 지구 개발, 싱가포르의 자유무역항 확장, 말레이시아의 ‘라부안’ 국제금융센터 건립, 필리핀의 ‘수비크만’ 자유무역지대 건설 등이다. 한 사회의 변화는 주로 경제의 성장과 발전을 기초로 하여 이루어진다. 90년대 초입에 제주사회는 계속 변화할 뿐만 아니라 그 변화의 속도가 빠르고, 또 변화의 질적 내용도 우리가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을 정도로 판이했다. 이러한 경제사회의 변화는 이에 상응하는 새로운 법의 형성을 낳게 한다. 그 법이 바로 제주도개발특별법이다. 이웃 일본의 경우에는 낙후된 도서 지역의 개발을 위하여 1951년 ‘북해도 개발법’을, 1971년 ‘오키나와 진흥개발특별조치법’을 각 제정하여 시행했던 경험이 있다. 오키나와 특별조치법은 제정 이후 10여 차례 개정되었으나 헤이세이 10년(1998년) 3월 대폭 개정을 하여 오키나와의 경제·사회의 현상에 입각하고 제조업·정보통신산업·관광산업을 중심에 두고 국내외에서 기업 입지나 투자의 촉진, 현지 기업의 경영체질이나 경쟁력 강화를 도모하고 특색 있는 산업이나 무역진흥에 이바지하기 위하여 세제상의 우대 조치를 법제화하여 제주 도개발특별법에 비해 한 발 앞서 가고 있었다. 제주도와 오키나와는 모두 천혜의 지정학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각자를 중심에 놓고 지도 위에 원을 그리면 비행시간 2시간 정도인 반경 1,500㎞안에 서울, 동경, 북경, 마닐라, 홍콩, 상해, 대만 등이 들어온다. 오키나와는 일본 쪽에 치우쳐 있으나 제주도는 환(環) 동해·환 황해권 교류의 중심지라는 유리한 점을 갖고 있음에도 오키나와보다 국제자유도시 조성에 한 발 뒤지고 있었던 셈이다. 1945년 종전 후 오키나와는 25년간 미군의 군사 통치 하에 놓여 섬 면적의 20%가 미군기지화 되었다. 실업률은 일본 본토의 2배에 달하고 지역산업이라곤 기지·관광 산업뿐이고 1인당 GNP는 일본 최하위의 섬이었다. 오키나와는 새로운 디지털 산업문명을 꽃피우겠다는 웅대한 비전을 세우고 1998년 3월 「오키나와 진흥개발특별조치법」을 대폭 손질하여 그 비전을 법·제도화함으로써 1999년 말경에 이르러 개발 전략적 측면에서 제주도보다 한 발 앞서 나갔다. 특히 ‘차별과 고난의 섬’ 오키나와가 ‘미군기지 경제’의 오명을 씻고 휴양지 ‘부세나’ 해안에서 2000년 7월 G8(선진 7개국 + 러시아) 정상회담을 열기 위하여 국제회의의 섬, IT의 섬으로 변신 중이라는 사실은 우리 제주사람들을 충격에 빠트릴 만했다. 3多3無의 섬, 제주도는 종전 후 4.3사건의 유혈과 고통을 극복하고 70년대 들어와 감귤산업과 관광산업을 양대 축으로 하여 지역경제를 일으켜 세웠다는 점에서 그 처지가 오키나와 섬과 비슷하다. 숱한 우여곡절 끝에 1991년 12월31일 공포된 제주도개발특별법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① 제주경제의 정서(整序, Raumordnung)에 관한 행정법이다. 이 법은 제주도민이 달성하려고 하는 이상적인 생활공간의 상태에 관한 지표를 정하고 그 실현을 위한 제반조건을 형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수단의 총체를 뜻하기 때문이다. ② 이 법은 지방화 시대에 부응하는 지역개발의 3원칙, 즉 주민참여의 원칙(민주성), 지역적합성의 원칙(합목적성), 복지향상의 원칙(사회복지성)을 선언하고 있다. ③ 이 법은 지역개발계획의 수립과 집행에 관한 단행법으로서 국내에서는 최초의 법률이다. 제주도개발특별법의 제정 후 2회 소폭 개정, 그리고 1999.년 12월28일 법률 제6249호로 대폭 개정되기 전까지 이 법이 수행한 【순기능】을 예시하면 다음과 같다. ① 이 법은 1백만 내외 도민뿐만 아니라 민간 기업자들에게 21세기 제주의 미래상에 대한 예측가능성을 부여하고 종합개발계획의 수립 및 시행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에서 도민의 주체적 참여를 유도하여 경제적 민주화를 이룩하였다. ② 이 법은 중앙집권적 경제규제에서 탈피하여 자율적으로 지역 경제질서 ‧ 경제기반 ‧ 문화환경 ‧ 자연환경을 정비, 개선, 보전하고 형성함으로써 환경이 지속 가능한 자립경제의 기반을 조성하였다. 다른 한편, 이 법의 시행조례와 제주도종합개발사업 시행승인지침, 개별허가시행지침 등에 개발사업 승인절차를 복잡하고 까다롭게 규정하거나, 개발사업자에게 지역개발채권의 매입을 강제하거나 관광사업자로부터 관광진흥기여금을 징수함으로써 오히려 기업의 창업을 어렵게 하는 등으로 【역기능】을 낳기도 했다. 계획기간(1992년~2001년)동안 관광산업에 대한 민간투자가 기대에 훨씬 못 미쳤고, 특히 이 특별법 제30조(국고보조금의 인상지원 등)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중앙정부의 무관심으로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충분한 공공투자 재원을 마련하지 못함으로써 21세기 제주발전에 필요 불가결한 사회기반시설의 확충이나 쾌적한 생활환경조성 등을 미완성으로 남긴 점은 못내 아쉽다. 그리고 1999년 12월28일 대폭 개정된 특별법(2000. 1. 28. 시행)은 개발사업의 승인절차를 간소화하고 ‘통합영향평가제도’를 도입함으로써 기업의 진입과 활동에 대한 규제 완화의 세계적 추세에 보조를 맞추고 있기는 하나, 민자유치 촉진을 위하여 도입한 조세‧부담금의 감면, 융자 등 재정지원, 국‧공유재산의 임대 등의 각종 ‘인센티브’ 제도는 개정 전의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는 점에서 미흡하다. 개정 내용 중, 중산간 보전지역 및 그 이외 지역에 구축된 GIS시스템을 바탕으로 지하수보전지역, 생태계보전지역, 경관보전지역을 지정하여 환경이 지속 가능한 토지이용을 규제하고 있으나(법 22조 내지 24조), 한편 개발 욕구를 수용하여 절대‧상대보전지역에서의 개발행위를 완화할 수 있도록 도조례에 위임받음으로써 환경보전의 의지가 퇴색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다른 한편, 도내 지하수 자원의 체계적인 관리(법 26조 내지 28조)와 1차 산업 생산물의 수급조정(법 35조) 및 청정지역 유지를 위한 방역제도의 근거 등(법 36조)을 규정함으로써 생명산업인 감귤 등 1차 산업에 대한 강력한 행정지도‧감독‧조장‧지원활동을 할 수 있게 되어 향후 도정의 지역경제활동에 미치는 긍정적 효과가 기대되고, 새로운 농외 소득원으로 부상되는 펜션업(법 37조) ‧ 유어장(법 38조) 경영은 새로운 관광 소득원으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전망된다. 그리고 외국인투자촉진법상 한정된 업종을 개정특별법(45조)에서 확대하고 외자유치신고, 외자도입기간을 연장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기는 하였으나, 수익성이 기대되는 제반 경제여건이 성숙되지 아니하는 한 자본의 회임기간이 긴 관광산업에 대한 외자유치는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것으로 예상되고, 제주도가 연도별투자계획(법 7조)의 정부예산 의무반영을 요청하였음에도 기획예산처가 거부함에 따라 향후 10년간 종합개발계획에 의한 공공투자가 계획대로 이루어질지 극히 불투명하다고 전망된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승석은? = 제주불교신문 편집인이자 변호사다. 인터넷신문 <제주의 소리> 발행인 겸 대표, 제주도 정무부지사를 역임했다. 저서로는 대한문학 제53호 신인문학상을 받은 '나 홀로 명상'(2009년, 불광출판) 수상집이 있다
제주특별자치도 출범 20년이다. 2006년 7월1일 출범한 특별자치도 제주는 대한민국의 제주를 향한 집념의 깃발이다. 그 이면엔 대한민국의 예인선이 되기를 바라는 '제주개발'의 성장사가 있다. 1991년 말 제주개발특별법이란 외피를 걸친 제주호의 항해가 시작된 지도 어언 35년이다. 법과 제도, 구조와 내용으로 제주를 만들어간 변천사를 이제 되짚어본다. 제주개발특별법 탄생에 관여했던 김승석 변호사가 그 일련의 역사를 정리한다. 중단없는 제주의 새로운 전진을 새 연재에서 모색해본다. / 편집자 주 1987년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된 이한열 열사의 이야기처럼 양용찬 열사의 결기는 제주도특별법 제정의 흐름에 변곡점이 됐다. 16개월간의 특별법 제정반대 도민운동으로 제주도개발특별법 내용은 당초의 시안과 비교할 때 크게 달라졌다.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으로 나누어 정리를 해보겠다. 제주도 개발특별법의 제정 목적은 제주도를 국제적인 관광휴양지로 조성하기 위한 종합개발계획의 수립과 추진 동력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고자 함이다. 이런 정책 가치와 목표가 제주도민들의 사회적 가치와 크게 괴리됨으로써 도민들의 적극적 제정 반대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고 보여 진다. 제주도 관광종합개발계획(1973∽1982년)과 제1차 제주도종합개발계획(1985∽1991년)을 중심으로 한 20여 년 동안의 관광주도형 지역개발은 지역 간 또는 산업 부문 간의 불균형 발전을 더욱 심화시켰다는 도민들 다수의 부정적 인식이 깊었다. 그러함에도 1990년 8월 공개된 제주도 시안조차도 균형발전의 제도적 장치 설계에 소홀이 했다. 이뿐만 아니다. 개발이익의 불공평한 배분을 완화시키기보다 오히려 더욱 심화시킬 것이라는 우려까지 생겨났다. 개발사업의 시행으로 종전의 토지이용이 제한되거나 심지어 토지수용으로 생활터전을 빼앗겨 타지로 이주하거나 개발 주변의 자연파괴와 환경오염으로 몸살을 앓아야 하는 고통까지 겪어야 했던 도민들이기에 두 번째의 화살에 찔리지 않으려고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도민들의 반대가 저항적 지역이기주의에 기초하고 있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특별법 제정을 반대하는 각종 성명이나 홍보물의 내용에 「도민」과 「외지인」, 「도내 기업」과 「외지 대자본」이라는 이분법적 개념이 표출되고 있어서 반대운동의 발단이 지역이기주의에 연원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지역이기주의와 전혀 무관하다고는 볼 수 없다는 시각이 있어서 그렇다. 하지만, 특별법 제정 반대가 지역주민의 생존권과 환경권의 보전이라는 헌법적 가치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그 반대운동을 지역이기주의로 매도하는 것은 매우 편향적 시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입법은 국회의 전유물이고, 또 그 입법의 동기나 배경이 국가 및 지역의 상생 발전을 위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수혜자인 국민이나 도민들의 ‘법 감정’을 무시하면 결과적으로 ‘죽은’ 법(死法)이 되고, ’살아 있는‘ 법(生法)으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 제주도개발특별법 제정반대운동은 그 기간이 1년 4개월이고, 반대시위에 참가한 연 인원이 1만 8000여 명이며, 점거와 농성 등의 물리적 투쟁으로 다수의 구속자와 부상자가 함께 발생하였다는 점에서 비폭력, 평화운동이라 할 수 없겠다. 여기에다 대중매체의 특별법에 대한 높은 관심과 양용찬 열사의 분신사건은 반대 운동의 향방을 제시하였음을 물론, 대중운동의 기반을 전국적으로 확대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고 보여 진다. 이 반대운동은 도민여론을 찬·반 양쪽 분열시켜 사회통합을 저해하는 역(逆)기능을 낳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 당초의 시안과 달리 도민주체 개발방식이나 개발이익의 도민 환원 등의 제도적 장치를 신설함으로써 진일보했다는 긍정적 측면도 없지 않다. 35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그 공과(功過)를 저울질하기가 두렵다. 왜냐하면 필자도 그 시안 작성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가 그 현장에서 체험한바 그대로 순(順)기능과 역(逆)기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고자 한다. 먼저, 긍정적 측면을 살펴본다. 무조건 반대운동이 아닌 적극적 참여 투쟁은 사회적 갈등의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으나 새로운 대안을 만드는 힘이 됐다고 보여 진다. 지역사회와 의 직접적 이해관계를 가지는 새로운 법률의 제정이나 공공정책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관(官) 주도형 ‘결정-통보-방어(decide,announce, and defend)’와 같은 프레임이 깨지고 민주주의 훈련이라는 학습 효과를 낳아 그 후에 전개된 전국적 시민운동의 모델케이스가 되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겠다. 둘째, 부정적 측면을 살펴본다. 16개월 동안의 반대운동은 제주도가 추진하는 각종 개발사업과 정책 집행을 지연시킴으로써 행정능률과 정책의 공신력을 추락시켰다고 보여 진다. 특별법 제정 과정에는 가치관의 갈등, 이해관계의 갈등, 구조적 갈등 등의 종류와 원인이 복합적이었음에도 갈등 당사자 사이의 효과적인 의사소통 기술은 뒷전으로 밀리고 1차 산업 종사자들을 중심으로 한 반대 측과 상공인과 개발이익의 직·간접적 수혜자들로 구성된 찬성 측의 쌍방 형 감정적 대립으로 인해 지역사회가 균열되는 아픔을 낳았다는 점이 그렇다. 1991년 10월3일 9장 48조 부칙으로 구성된 제주도 개발특별법(정부안)이 공개되었다. 이 시안은 기초협의회(안)을 중앙 관련 각 부처의 협의와 법제처의 심의를 거치고 국무총리 행정조정실의 최종 검토를 거쳐 나온 것이다. 정부 시안은 기초협의회(안)에 대비하여 종합계획의 수립에 있어 중앙정부의 통제권이 강화되고 또 개발 지향적 성격이 강화되었다. 구체적으로 기초협의회(안) 내용 중 8개 조항(예컨대, 종합개발계획안에 대한 의견제출, 계획의 폐지·실효에 따른 피해 구제 조항, 사업계획에 대한 이의신청, 보상금 지급 등)을 삭제하고, 4개 조항은 신설하였으며 11개 조항에 대한 하부 법령의 위임을 기초협의회(안)이 ‘도조례’로 정하도록 한 것을 모두 고쳐 ‘대통령령’으로 변개하였다. 나아가 이 정부 시안은 기초협의회(안)에 포함되어 도민들의 반발을 샀던 토지 소유자에 대한 개발 촉구 조항을 삭제하기는 했으나 개발지구내의 용도지역 행위 제한 배제 조항은 그대로 존치하고 도민 주체의 개발을 상징하는 8개 조항을 삭제함으로써 오히려 도민들의 거센 저항에 직면하게 됐다. 그런 까닭에 정부 시안에 약간의 부분 수정을 가미한 민자당 시안이 공개되었으나 반대 여론을 잠재우기는 역부족이었다. 1991년 11월5일 정부와 민자당은 당정회의를 열고 특별법을 정기국회에 상정하기로 하고, 대통령령 위임조항 중 4개 조항은 ‘도조례’의 위임으로 변경하고 개발제한구역의 행위 제한을 완화하는 방향으로 특별법 시안을 확정하였다. 1991년 12월 31일 「제주도개발특별법」이 국회 의결을 통해 제정됐다. 이 법은 우리 헌정사에서 최초로 제주도에만 적용되는 한지법(限地法)이자 한시법(限時法)이다. 부칙 제2조에는 “2001년 12월 31일까지 효력을 가진다.”라고 규정하여 그 수한(壽限)을 명시하고 있으나, 2002년 1월 26일 법률 제6643호로 전부 개정된 ‘제주국제자유도시특별법’ 부칙에서 경과조치를 둠으로써 명실공이 제주국제자유도시의 출범과 동시에 구(舊) 제주도개발특별법은 마치 모태 속에서 10개월을 자란 태아가 옥동자로 태어난 것처럼 동일성을 승계하며 신법에 계승되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승석은? = 제주불교신문 편집인이자 변호사다. 인터넷신문 <제주의 소리> 발행인 겸 대표, 제주도 정무부지사를 역임했다. 저서로는 대한문학 제53호 신인문학상을 받은 '나 홀로 명상'(2009년, 불광출판) 수상집이 있다.
봄 기운이 완연한 지금, 오늘 하루는 다섯 날을 쉼 없이 산 당신을 위한 시간입니다. 여유로운 주말, 시 한 편의 여유를 선사합니다. 당신의 주말을 위하여. 매주말 허유미 시인이 전하는 '잠시의 여유'를 전합니다. [편집자 주] 여름비 허유미 할머니 잇몸으로 수박 반 통 잡수시고 밤새 수국 같은 요강에 오줌을 계속 누셨네 오늘 빗소리처럼 나비잠 자겠네 요즘 제주에는 수국이 한창이다. 비를 머금은 수국들은 섬의 여름을 깊고 푸르게 만든다. 제주 수국은 유난히 크다. 축구공만 하기도 하고 수박만 하기도 하다. 나는 가끔 담장 밖으로 늘어진 수국을 수박 들 듯 두 팔로 안아 들곤 했다. 할머니 집 앞 수국도 그랬다. 마루 구석에 요강처럼 크고 둥글게 피어 있었다. ‘수국 같은 요강’이라는 표현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할머니는 여름이면 이가 없어도 잇몸으로 수박을 오래 드셨고, 밤에는 몇 번씩 일어나 요강을 찾으셨다. 어린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두 팔 벌려 잠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한 사람의 늙어가는 몸이 내는 소리였지만, 그때의 내게는 아득하고 편안한 인기척이었다. 이제는 할머니가 안 계신다. 그런데 여름비가 내리면 오래전 그 소리가 다시 들려오는 듯하다. 빗소리는 지나간 시간을 데려오고, 사람은 떠난 뒤에도 소리로 남았다. 사람과 함께 산다는 것은 서로의 소리를 기억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방문 여닫는 소리, 부엌에서 국 끓는 소리, 밤중의 기침 소리 같은 사소한 기척들. 함께 살 때는 미처 귀 기울이지 못했던 소리들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한 사람의 존재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점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는 삶 속에서, 여름비는 오래전 곁에 있던 사람의 체온과 인기척을 다시 데려오는 소리다. 여러분의 마음에는 어떤 여름비가 내리고 있습니까? ☞허유미는?=제주 바닷가 마을 모슬포에서 태어났다. 수평선, 물너울, 등대, 섬은 나의 첫 친구들이었다. 말문이 트였을 때 엄마라는 말보다 바다라는 말을 많이 했다. 물질하는 엄마를 기다리는 동안 바다는 파란 요람, 파란 집, 파란 놀이터였다. 청소년 시절 유난히 말수가 적어 엄마 아빠가 걱정했다. 말수가 적은 대신 사람들의 말을 많이 듣고 남들이 쉽게 지나치는 풍경이나 사물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 시절부터 시집을 읽는 시간이 많았다. 책꽂이에 시집이 많아지면서 시인이 되겠다는 꿈을 갖고 국문학과에 진학했다. 2016년 제주작가 신인상, 2019 서정시학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우리 어멍은 해녀」, 「바다는 누가 올려다보나」. 한국작가회의 회원, 제주작가회의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