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인류사회는 방대하면서도 끝이 없는 풍속화이다. 다른 역사의 단면, 다른 자리나 모퉁이, 다각적인 생활공간은 모두 다양한 인류의 활동무대다. 변화하고 발전하는 멈추지 않는 무대에서 단장하거나 발가벗은 채로 다른 사회 층면, 다른 직업, 다른 연령, 다른 성별의 사람들의 양태를 표현하고 있다. 역사의 풍속화에 들어간 후, 정지된 스틸 속에 여러 양태가 매 시간 매 장소마다 언어, 행위, 사상, 심리상태를 묘사하지 않은 경우가 없다. 예부터 지금까지 거지가 구걸하는 수단과 방식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하층 사회 단체의, 하위문화의 여러 군상의 양태를 분명하게 드러내 보인다. 진짜도 있고 가짜도 있으며 눈물도 있고 웃음도 있다. 각양각색인 다양성도 있기는 하지만 결국에는 비극으로 끝을 맺는다. 여러 가지 가식적인 면사를 벗겨내면 대부분 희극적 형식의 추태를 연출해 내면서 울 수도 웃을 수도 없게 만든다. 아주 오래 전에 거지는, 참고삼아 이용할 만한 여러 가지 구걸 방식을 채용하면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수단(예나 지금이나 거의 비슷한 구걸 예술)을 이루었다. 독특한 하위문화 전승 형태로, 구걸 습속과 관례를 형성하였다. 당대에 기괴하고도 다양한 구걸 수단과 방식은 대부분 예전의 선례나 역사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은 감탄할 만한 기적이며 실재다. 보도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시인 뉴욕에 전문적으로 거지를 훈련시키는 ‘거지 학교’가 있다고 한다. 학교는 뉴욕의 외진 지역에 위치해 있다. 입학신청하려면 학비 100달러를 내야하고 졸업하면 증서까지 발급한다. 그 학교는 6일 과정이며 야간에 공부한다. 교실에서 이론을 강의한다. 마지막 이틀 저녁에는 거리에 나가 실습한다. 강사가 나누어 강의한 내용을 길가는 사람에게 구걸하는 기술을 실연해 보인다. 그때 교장은 곁에서 실습하는 상황을 지켜보고 그중의 오류를 찾아내어 다시 구체적으로 지도하여서 졸업생 모두를 구걸하는 데에 합격할 수 있도록 완벽하게 학습시킨다. 그중 가장 성공적인 기술은 병원이나 약국을 가기 위하여 급히 돈이 필요하다고 가장하여 구걸하는 것이었다. 목석간장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아픈 사람에게는 동정심을 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사람들의 그런 선량한 본능을 십분 이용했다. 성공한 거지가 될 수 있는 비결은 이렇다 : 말솜씨가 유창하고 기민하게 반응하며 인내심이 있고 얼굴이 두꺼워야 한다. 그리고 너무 가난하고 초라하게 분장해서는 안 된다. 중산층 인물로 분장해 갑자기 곤경에 빠져서 급히 타인의 도움을 필요한 것처럼 가장하는 것이 쉽게 구걸할 수 있는 비결이었다. 거지 학교를 세운 사람은 40세인 오마(Omar)로 제약공장에서 여러 해 동안 근무하였다. 학교를 설립한 주지를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공공사업이다. 나는 어려운 처지에 놓여 살아갈 방도를 찾지 못하는 사람을 구하려고 세웠다. 우리 학생은 절대로 부도덕한 일은 하지 않는다. 도둑질도 강도짓도 하지 않는다. 단지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선량한 마음을 내게 한 후 보잘것없는 돈 몇 푼을 받을 따름이다.” 그런데 도둑질이나 강도질을 가르치지 않는다하여도 세상 사람들의 아름다운 착한 마음에 사기를 치는 것을 가르친다면 ‘도덕적인 일’이라고는 할 수는 없지 않는가! 하물며 그 ‘학생’들이 거지가 된 후, "도둑질도 안 하고 강도질도 안 한다"라고 장담할 수 있는가. “절대 부도덕한 일을 하지 않는다”라고 장담할 수 있는가. 사기란, 일정한 조건 아래 법률이 정하지 않은 ‘도덕’ 범주에 속한다하더라도 직접 사기를 치는 수법으로 타인에게 재물을 얻는다면 다른 차원의 범죄행위가 된다. 중국에는 아직까지 거지 기법을 가르치는 전문 훈련 기관은 없다. 그러나 구걸 기술은 역사상 하위문화 내부에서, 민간에서 전승되어 온 궤적이 분명하게 남아있다. 종적을 찾아 근원을 찾아내면, 많고도 어지러운 세상사 속의 하층사회 단체의 여러 군상을 명확히 알 수 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 학사, 대만 정치대학교 중문학과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자로 『선총원(沈從文) 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 『재미있는 한자풀이』, 『수달피 모자를 쓴 친구(선총원 단편선집)』, 『음식에 담겨있는 한중교류사』, 『십삼 왕조의 고도 낙양 고성 순례』, 『발자취-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여정』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민간 비밀 사회단체는 각자 일련의 규정과 직업 은어를 가지고 있었다. 하위문화에서 전승된 기본적인 상징이며 내용 중의 한 가지다. 거지 단체도 그렇다. 당대 미국학자 래리 A. 사모바, 리처드 E. 포터의 공저 『문화 간 커뮤니케이션』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 사람들이 주로 이상 행위에서 구성된 하위문하로 생각하는 것 중에서, 해당 문화의 언어 유형이 은어(argot)로 발전한다. 유랑자와 거지는 여러 가지 표준에 따르면 범죄자는 아니지만, 그들은 주류문화와 도무지 맞지 않는다. 모종 은어가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은어는 특정 하위문화와 그 단체 내부에 한해서 사용하는 언어이고, 구성원은 주류문화 밖에 있다. 하위문화와 문화 단체를 이해하려면 은어를 이해하여야 한다. “은어 언어의 특정 형식일 뿐만 아니라 특정 생활방식을 반영하고……심리상태, 사람과 사회에 대한 평가, 사유방식, 사회조직과 기술능력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관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은어는 언어와 행위가 서로 결함된 방식이다. 하위문화는 특수한 언어 코드를 사용하여 요구를 만족시키기에 은어는 중요하다. 그러한 기능은 첫째, 은어로 표현하면서 반주류문화를 돕기에 자위의 수단이 된다. 둘째, 공동으로 습득한 언어 코드를 통하여 하위문화 단체 내에서 일치성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셋째, 진정으로 생존에 적합한 사회적 실체의 단체를 만드는 데에 도움이 된다. 일정한 하위문화 혹은 하위단체는 구체적인 환경 속에서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 대한 태도도 그들의 직업 언어 중에 반영된다. 여러 거지 단체의 은어(속어)는 강호 흑사회의 하위 언어문화 형태를 이룬다. 그렇기에 강호 여러 부류와 깊은 본질적 관계를 직관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예를 들어 명나라, 청나라 이래로 보이는 은어는 다음과 같다. 구걸을 괘한(掛熯, 걸어 말리다), 쇄산(碎山, 산을 부수다) ; 앉은뱅이 거지를 피가(披街, 거리를 나누다) ; 곤경에 빠졌다고 가장해 구걸하는 것을 탑상(搽相, 얼굴을 바르다), 목후(沐猴, 원숭이를 씻기다) ; 편지로 사정을 써서 구걸하는 것을 마가당(磨街黨, 길을 가는 무리) ; 여성을 데리고 다니면서 구걸하는 것을 관음당(觀音黨), 소개장을 가지고 돈을 구걸하는 것을 칭고상(稱古相, 예스럽고 수수한 상을 칭하다), 부모를 데리고 다니면서 구걸하는 것을 상문당(喪門黨), 읍하면서 구걸하는 것을 주권당(丢圈黨, 원을 던지는 무리), 울며불며 하소연하면서 구걸하는 것을 소원당(訴寃黨), 신의 이름을 빙자해 구걸하는 것을 동자당(童子黨), 뱀을 가지고 공연하면서 구걸하는 것을 차류(扯溜, 손으로 들다, 임분(臨汾)지역 방언) ; 원숭이를 부리며 공연하면서 구걸하는 것을 사노자(耍老子, 노자를 가지고 놀다) 등으로 불렀다. 이런 언어 코드는 비단 거지에게만 유행한 것이 아니라 강호 비밀 사회에서는 대부분 통용되었다. 단지 거지의 직업 특성에 국한된 언어일 뿐이다. 이 사이에 본업에 대한 은어들이 섞여있다. 예를 들어 보자. 돈을 구걸하는 것을 정파(釘把, 못 잡이) ; 사리에 어두운 것, 좋고 나쁨을 알지 못하는 것을 소렵등(小臘燈, 작은 초) ; 미인을 찰백(擦白, 닦아 하얗다) ; 이 사람을 격당마자(格檔碼子, 막아내는 놈) ; 눈을 파내는 것을 차조자(借照子, 동경을 빌리다) ; 좋지 않은 물건을 좋은 물건이라며 사기 치는 것을 매야인두(賣野人頭, 야인의 머리를 팔다) ; 재미삼아 사람을 희롱하는 것을 타붕(打棚, 막을 짓다) ; 돈을 빌리고 트집 잡아 빚을 갚지 않는 것을 도수흉(到手凶, 불행을 손에 넣다) ; 남편을 잃었다느니 처가 죽었다느니 하면서 구걸하는 것을 타단자(打單子) ; 거짓으로 친척을 방문했으나 만나지 못했다고 말하며 구걸하는 것을 탈축두(脫軸頭, 권축을 벗어나다) ; 재난을 피해서 왔다고 거짓말하며 구걸하는 것을 심반자(尋伴子, 짝을 찾다) ; 병이 들었다고 거짓부렁 하는 것을 묘황(描黃, 황색을 묘사하다) ; 벙어리를 사칭하는 것을 화지(畵指, 손가락을 그리다) 등으로 불렀다. 현대에 와서는 여자와 노는 것을 괘마자(掛馬子, 변기를 걸다) ; 소매치기가 지갑이나 호주머니를 터는 것을 발전(撥栓, 여닫개를 밀어내다) ; 내의 주머니를 터는 것을 번판자(飜板子, 판을 뒤집다) ; 상의 주머니를 터는 것을 개천창(開天窓, 천창을 열다) ; 장기간 한 지역을 불법 점유해 구걸하는 것을 궤점(跪點, 무릎 꿇다) ; 근거지를 산두(山頭) ; 소매치기 하는 것을 양협(兩夾, 양쪽에 끼다) ; 장물을 파는 것을 매교(賣巧)1) ; 장물을 사는 것을 흘교(吃巧)2) ; 남의 약점을 이용하거나 구실을 빌어 바가지를 씌우거나 재물을 뜯어내는 것을 흘이만(吃二饅, 만두 두 개 먹다) ; 철로를 쌍조(雙條) ; 버스를 단조(單條) ; 피를 파는 것을 도선(挑線, 선을 고르다) ; 백 원을 일간자(一杆子) ; 천 원을 조(槽) ; 만 원을 감(坎) 등으로 부른다. 이런 여러 가지는 거지의 수법(재주), 해당 비밀스런 작업, 심리상태를 충분히 드러내고 있는 동시에 공교롭게도 그 단체의 본 모습을 증명하고 있다. 즉 대단히 복잡하면서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유랑자, 무뢰배 등 다른 흑사회 단체와 본질적으로 일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모두 사회조직에 기생하는 악성 종양이다. 하위문화 범주에 속한 비정상적인 문화 시스템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매교(賣巧)는 한어(漢語) 어휘로 발음은 ‘mài qiǎo’로, 총명을 뽐내며 남의 의향에 영합하다 뜻이다. 능숙한 솜씨를 보이다 뜻도 가지고 있다. 2) 흘교(吃巧)는 한어(漢語) 어휘로 발음은 ‘chī qiǎo’로, 옛날 절강 지역의 풍속이다. 칠석 때 문 앞에 모여서 술을 마셨는데 그를 ‘吃巧’ 또는 ‘끽교(喫巧)’라 하였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 학사, 대만 정치대학교 중문학과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자로 『선총원(沈從文) 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 『재미있는 한자풀이』, 『수달피 모자를 쓴 친구(선총원 단편선집)』, 『음식에 담겨있는 한중교류사』, 『십삼 왕조의 고도 낙양 고성 순례』, 『발자취-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여정』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인간의 생명은 기(氣), 즉 에너지의 작용으로 유지되며 기의 조화와 부조화로 건강이 좌우된다. 지구는 자전과 공전을 반복하면서 기의 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이는 곧 우리 인간이 호흡하는 원리와 같으면서 기적(氣的)인 호흡을 하는 지구상의 생채환경도 매한가지다. 천지 대자연을 바탕으로 시간과 공간의 영향권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자연생태계에서 발산하는 기운, 즉 자연에너지를 활용하여 인생의 번영과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힐링풍수의 궁극적인 지향점이라 할 수 있으며, 자연에서 발산하는 좋은 에너지를 교감하여 보다 건강하고 심리적으로 안정된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함이다. 힐링풍수를 통한 다양한 치유 활동은 자연, 경관, 생태, 인문, 예술에 이르기까지 대상에 제한이 없으며, 풍수와 산림을 결합한 치유의 숲 명상 프로그램 조성은 국민의 건강 증진과 인성 회복 차원에서 필요하다. 산업화와 도시 문명, 각종 공해에 찌든 현대인들에게 힐링 풍수는 지속 가능한 생활환경 개선과 미래 건강 증진 프로그램의 하나로 떠오르고 있다. 치유적 개념에서 힐링풍수는 입지론을 중심으로 지리적 환경과 기후적 조건에서 오는 기(氣)의 특성을 치유라는 개념에서 바라보고 있다. 풍수가 적용될 수 있는 영역은 크게 두 분야로 나눌 수 있는데, 돌아가신 조상을 모시는 음택 분야가 있고, 살아 있는 사람들의 삶의 공간을 풍수의 법에 맞추어 응용하는 양택 분야가 있다. 양택은 우리가 사는 공간인 개인의 주거 형태나 한 나라의 수도 또는 도시의 입지나 형태까지 모두를 포함하는 삶의 공간을 말한다. 이는 생동하는 기운이 잘 모이는 좋은 땅에 대지를 정해 건강과 행운의 복력을 구하고 삶을 윤택하게 하는 풍수법을 의미하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 자면, 주택의 형태나 방위적인 위치, 실내 구조, 색상의 분위기, 주변 환경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풍수의 이치에 맞추어 좀 더 안정적이고 쾌적한 주거 공간을 이루고자 함이다. 본 코너에서는 주로 생활 속 양택풍수를 중심으로 기(氣) 즉, 주택이나 건물을 중심으로 에너지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는 치유적 개념의 힐링 풍수를 다루고 필요에 따라 현대의 장묘문화, 조상의 음택풍수도 살펴보려고한다. 기(氣)는 우주공간에 작용하는 전파와 같은 생명력의 근원으로서 눈에 보이지 않는 근본 미립자와 같은 존재이자 삼라만상을 움직이는 근본 생명체이다.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사물이다. 보이지 않는 어떤 작용은 ‘기’인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다. 또한, 냄새도 없고 귀에 들리지도 않지만, 반드시 공간에는 어떤 유형의 ‘기’가 순행 유통하고 있다. 산천의 기운이 잘 응결된 풍수적 국세도 중요하지만, 어떤 상황을 막론하고 쾌적하고 건강한 삶을 위해 부족한 지형과 구조를 풍수 이치에 맞게 보완하고 개선해 가는 일련의 과정이다. 천혜의 조건을 갖춘 완벽한 명당은 극히 드물다. 명당은 만들어가는 것이며 영원한 명당도 흉당(凶堂)도 존재하지 않는다. 풍수의 이치를 응용하고 활용하여 주거의 조건을 좋은 환경으로 보완하고 개선해 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풍수적으로 조화로운 자연의 생태환경을 통해 심신을 건강하게 하는 주택이나 생활공간의 장소로 활용할 때 힐링풍수는 치유의 생활 문화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살 터를 정할 때는 ‘생기(生氣)’, 즉 좋은 에너지가 모이는 땅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풍(風)’은 공기가 유동하는 현상이며, ‘수(水)’는 물의 흐름을 말한다. ‘기(氣)’는 육안으로는 식별할 수 없는 무형의 지기(地氣)와 공간에 존재하는 미립자인 에너지를 가리킨다. ‘기’는 중국 동양철학의 중요한 개념으로써 풍수를 구성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그 이론과 방법은 모두 산천 대지의 기운이 요긴하게 모이는 곳의 문제를 가지고 전개한 것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 신영대는? = 대한풍수연구학회 편집위원장, 한국역술인협회 공인 역학연구원이다. 중문학 박사와 풍수학자로서 ‘제주의 오름과 풍수’, ‘명리학원리대전’, ‘풍수지리학 원리’, ‘전원시인 도연명 시선', ‘흰 구름 벗을 삼아 읽어보는 당시선’ 등 다수의 저서를 냈다. '한라산 총서'의 구비전승·지명·풍수 분야와 ‘세계자연유산지구 마을일지 보고서’ 중 풍수 분야 공동 집필자로도 참여한 바 있다. 또 제주도 각 마을 '향토지' 풍수 부문에 공동 집필자로 참여하고 있다. 현재 제주관광대 관광중국어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부랑자, 무뢰배와 거지의 자연적 관계 불량배, 무뢰배라는 뜻을 가진 중국어는 ‘유맹(流氓)’이다. ‘맹(氓)’자는 원래 글자 뜻대로 고찰하면 거지와 연대관계가 깊다. 당나라 공영달(孔穎達)은 『모시정의』에서 말했다. “맹민(氓民)의 명칭은 문장 중의 뜻이 다르다.……맹(氓)은 몽(懵)이다. 몽(懵)은 무지한 모양(안 : 사리에 어둡다, 흐리멍덩하다)이다.” 원나라 유근(劉瑾)은 『시전통석(詩傳通釋)』에서 제기하였다. “맹(氓)은 모호하고 무지함을 이르는 말이다.” 청나라 단옥재(段玉裁)는 『설문해자』 주(注)에서 풀이하였다. “다른 지역에서 온 백성을 맹(氓)이라 한다. 그래서 민(民)과 망(亡)을 따랐다.” 근대에 어떤 학자는 단옥재의 설명에 대하여 『시·위풍·맹(氓)』의 맹(氓)은 ‘다른 지역에서 온 백성’에 부합한다고 하였다.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이주하거나 이 마을에서 저 마을도 옮긴 사람을 모두 맹(氓)이라 하였다. 그래서 청나라 훈고학자 주준성(朱駿聲)은 ‘맹(氓)’을 ‘저기에서 여기로 온 백성’이라 하였고 위원(魏源)은 ‘맹(氓)’을 ‘유랑하는 백성’이라 하였다. 현재 통속적인 표현으로 ‘맹(氓)’은 바로 ‘타지인’, ‘외래인’의 뜻을 가진다.(『신화문적(新華文摘)』) 이 해석을 빌면 불량배 뜻인 ‘유맹’은 우매하고 무지하며 정상적인 일을 하지 않으면서 도처로 옮겨 다니고, 심지어 온갖 나쁜 짓을 저지르는 사람을 가리킨다. 물론 이미 ‘맹(氓)’자의 본래 뜻에서는 벗어났다. 거지와 같은 부류는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다. 거지가 사회에 커다란 해악을 끼친다는 것은 사실로 증명되었다. 그들은 단체를 결성하고 흑사회 집단으로 전락하였다. 미국의 인류학자 복(P. K. Bock)은 주장하였다. “사회에서 정당한 단체가 연속적으로 제기되는 사회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을 때는 사회에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단체의 중요성이 두드러진다.” “자발적 단체의 기능은 그 구성원에게 분명하게 행동하게 하거나 다른 형식으로 자아를 표현할 기회를 부여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거지는 떳떳하게 정당한 사회단체에 진입하기 어렵다. 거지 개인도 왕왕 사회에 발붙이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공동의 사회 지위와 운명은 구성이 복잡한 하층 사회 구성원과 연계하여 한 사회 층면에 속한, 특수한 내부 질서를 갖춘 여러 가지 단체를 구성하였다. 자발적이면서 강압적인 성격을 가지는 단체 속에서 그 구성원은 생존해 나가는 데에서, 의지할 수 있는 곳과 자아를 표현할 수 있는 자리를 찾았다. 민국 초기, 상해 거지의 사회조직 상황 본세기 30년대 상해에 있던 거지의 집거지를 조사한 결과 조막에서 거주하던 거지도 파별로 나뉘어져 있었다. 향토(고향)에 따라 산동방(幇), 강북방, 안휘방 등, 각 방파 사이에 자체적인 계통이 있었다. 각 방파에는 우두머리가 있었다. 거지 두목으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두목은 소굴 내부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장악하고 있었다. 모든 일은 두목의 허락을 받고서야 진행할 수 있었다. 각 방파는 촌락과 같았다. 두목이 곧 촌장이었다. 거지의 방파란 ‘개방(丐幇)’을 말한다. 각 개방의 두목은 봉건시대의 제후와 같았다. 당시에 상해의 거지를 이끌던 두목은 육(陸), 주(周), 종(鍾), 왕(王)과 2심(沈), 2조(趙)인 8명의 방주였다. 육 씨가 제일 위에 있었고 다음으로 조 씨가 있었다. 합쳐 8형제라 불렀다. 전체 상해의 거지는 향토(고향)를 근거로 봉양(鳳陽), 회양(淮陽), 산동(山東), 강북(江北), 현지 방파를 합쳐 5대 개방으로 나뉘었다. 방파가 공동으로 제일 높은 우두머리인, 큰형님 ‘노대(老大)’를 추천했다. 두목들을 절충한 전권 대표였다. 두목은 지방의 상인대표와 지보(地保)가 본바닥 깡패 중에서 업무 능력을 인정받은 자를 추천하여 임무를 맡겼다. 부자세습이었다. 그들은 근거지 상해를 동서남북 4지역으로 분할하여, 8형제 중 2사람씩 나누어 각각 한 지역씩 관리하였다. 평상시에 거지 두목들은 내부의 질서를 유지하고 협력하는 책임을 졌고 갈등을 해결하였다. 연말연시가 되면 상점에서 헌납금을 받아다가 일부분을 여러 거지에게 나누어 주었다. 거지들이 평상시에 구걸한 수입도 일부분을 두목에게 납부하면 각계각층에 진공하였다. 만약 개방의 ‘가법’을 복종하지 않거나, 두목이 벽보를 붙인 상점에서 강제로 재물을 요구하거나, 개방에 반대해 다른 단체에 가입하거나, 다른 근거지에 침입하거나, 음란한 행위를 하거나 하면 상황에 따라 처벌하였다. 그들의 처벌 방식은 주로 형구를 쓰는 고문 형태였다. 예를 들어 ‘찰혼돈(扎餛飩)’은 손발을 묶어 하루 동안 밥을 먹지 못하게 하는 것이고 ‘판유배(扳油裵)’는 수 촌 넓이 목판을 등뼈에 끼워 넣는 형벌이었다. ‘판입액(板入額)’은 1촌 정도의 판을 이마에서 피부 안으로 끼워 넣는 것이었다. 더 센 것은 죽을 때까지 때리거나 경외로 추방하였다. 이러한 강력한 관리와 여러 겹으로 겹쳐 있는 조직 계통이 있기 때문에, 거지 두목은 십여 분이면 전 시내의 거지를 불러 모을 수 있었다고 한다. 범위가 그렇게 큰 상해시에서 오토바이 부대도 아닌데 어찌 그리 신속하게 모일 수 있었을까. 그런데 이 말에서 개방 조직의 힘을 엿볼 수 있다. 개방에서 가장 제일 작은 두목이 ‘야숙(爺叔, 숙부 뜻을 가진 상해 방언)’이라 불렀다. 직접 자기 관내에서 여러 거지를 관리하였다. 야숙도 거지이기는 했으나 모두에게서 ‘효경(孝敬)’을 받을 뿐 직접 구걸하지는 않았다. 거지 두목들은 조직 내에서 확고한 자리매김하기 위하여 왕왕 사회에 명망 있는 인물을 후원자로 삼아 도움을 받았다. 보스 즉 ‘노두자(老頭子)’로 모셨다. 상해 거지의 ‘노두자’는 대부분 흑사회의 중심인물이었다. 이렇듯 거지 조직은 처음부터 끝까지 여러 흑사회 조직과 안팎으로 결탁하여 서로 이용하였다. 그러면서 거지 조직인 개방도 자연스레 흑사회 일원이 되었다. 내부적으로는 강권 통치를 실행하고 외부적으로는 온갖 나쁜 짓을 저질렀다. 이것이 바로 강호의 여러 유랑자, 깡패, 무뢰배 조직의 공통적인 특징이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 학사, 대만 정치대학교 중문학과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자로 『선총원(沈從文) 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 『재미있는 한자풀이』, 『수달피 모자를 쓴 친구(선총원 단편선집)』, 『음식에 담겨있는 한중교류사』, 『십삼 왕조의 고도 낙양 고성 순례』, 『발자취-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여정』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바다를 우주로 생각하는 해녀 지구상의 바다는 지구의 3/4을 차지하며, 바다의 평균 깊이는 3700m이고, 부피가 13억 4000만㎦로 지구상의 대부분의 물을 보유하고 있는 막대한 양이다. 이 가운데 눈과 빙하가 2%가량, 이동이 자유로운 담수는 1%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거대한 바다를 우리는 거의 알지 못한다. 바다에는 경계가 없다. 그래서 바다는 전세계가 하나로 연결되지만 다양한 생물층의 지역들로 나눠져 있고, 생물들이 광합성을 하는 빛이 드는 유광층(有光層) 지역과 빛이 없는 무광층 지역으로도 구분된다. 또 다른 분류방식은 해수의 밀도나 화합적 성질의 변화로 구분하여, 햇빛과 강수의 영향으로 수온이 높고 염분이 낮으며, 밀도가 작은 표층(혼합층) 해수와 깊을수록 온도가 차겁고 염분이 높은 심해층으로 구분한다. 사실 바다는 다양한 생물들로 가득찼다. 이 경이로운 바다의 생물들은 가까이는 연안의 조간대에서 멀게는 먼바다 깊은 해저까지 수심에 따르는 생명들의 하모니가 해류를 타고 전지구를 오르내리면서 순환한다. 바다는 우주에 속한 지구 행성 속 물로 된 우주다. 제주 신화의 세계에서는 섬을 중심에 놓으면, 하늘은 천상계가 되고, 땅은 지상계(지하계)이며, 바다는 해양계(용왕)이고, 물속은 해저세계(용궁), 제주 섬 밖은 해양타계(바다 너머 이상향)가 된다. 제주의 잠녀(해녀)들이 믿는 중요한 세계는 바로 바다로써, 즉 해양세계와 해저세계이다. 바다야말로 곧바로 자신의 삶과 연결되는 생존의 지평이며, 잠녀(해녀)들은 거기에서 모든 생명의 원천을 얻는다. 잠녀(해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현실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살려면 바다의 생산력(토대)이 필요하고, 그곳에서 자연히 종교적 믿음이 탄생한다. 위험한 바다에 가려면 심리적인 안전감을 주는 신념체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해녀들은 바다의 신인 용왕을 제일의 신으로 의지한다. 생존을 위해서 믿는 구석, 즉 숭배대상이 있어야 하는 이유이다. 화가 해녀 나경아의 작품세계 화가는 작품으로 자신을 말한다고 했다. 자신의 몸으로 만든 작품인 것이다. 메를로 퐁티는 “모든 기법은 몸의 기법이며, 그러므로 그 기법은 우리 살(肉)의 형이상학적 구조로 형상화하고 확대시킨다”라고 했다. 나경아는 사물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몸의 작용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영혼의 창을 통해 축적된 이미지들을 표현한다. 닮은 것이 아니라 몸이 느낀 행위 자체라고 할까? 나경아의 두 개의 직능으로 합쳐진 ‘바다 표현(화가)’+‘해녀(직능)’ 라는 호칭에서 보면, 화가 해녀라는 말이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그래서 나경아에겐 해녀가 체험이나 놀이가 아닌 실존의 몸부림이고, 화가의 삶은 결코 취미나 여가가 될 수 없다. 나경아는 보다 더욱 자신의 몸으로 바다를 감싸안을수록 몸이 느끼는 바다의 파동은 강렬하다. 그것을 옷감에 비유해서, 그 바다는 자신을 둘러싼 바깥감이고, 몸의 체온은 안감이 돼 자신이 몸의 박동이 바다에 반응하는 방식이 된다. 우리 세계의 물질들은 구상과 추상의 형태를 동시에 갖는다. 모든 것에 시선이 멈추는 순간 어떤 특별한 형태로 각인돼 기억된다. 비록 그 물질의 유체(流體)가 불확실한 구조를 갖더라도 시선이 정지되는 순간, 그 물질의 어떤 구조적인 패턴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체의 추상 형태는 기하학의 변형된 모습들일 것이다. 자연에서 볼 수 있는 척도의 차이에 따라 무분별하게 보이는 프렉탈(fractal) 구조도 축적을 줄여서 보면, 층위적으로 반복되는 같은 패턴을 유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패턴은 모든 자연의 구조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물의 흐름, 파도의 작용, 빛에 의한 물속 물체의 어른거리는 모습도 처음에는 매우 복잡하게 보이지만 사실은 어떤 반복되는 패턴이 있어서 연속적인 단순성을 확인할 수 있다. 나경아의 인식은 우주 창조에서부터 시작되는 빅히스토리적 역사관의 바탕이 되며, 인상으로 받은 느낌에 충실한 추상적 관점은 야수파적인 영향을 보인다. 야수파는 19세기말 후기 인상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아, 강렬한 색채, 꿈틀대는 강한 선, 과감한 보색대비, 그림자 없는 평면적인 색깔 처리, 자극적인 단순한 형태, 마치 즉흥적으로 보이는 감정표현 터치 등은 이후 표현주의와 입체파의 토양이 되었다. 나경아는 신중하게 계산된 심미적인 배색 처리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직관 행위를 높이 사고 있다. 나경아의 '떠다니는 섬' 시리즈는 우주에 떠다니는 자유로운 행성들처럼 보인다. 실제로는 바다에서 주황색 테왁을 보호장구로 삼아 물질하는 잠녀(해녀)들의 무리진 모습이다. 그러나 나경아에게는 그 모습이 우주의 행성들로 보여서 천체 한 공간에 떠다니는 별들로 인식된다. 이 상상은 나경아 자신이 물속에소 몸에 체화된 현실적인 이미지일 것이다. 자신도 해녀의 일상에서 해녀공동체와 인식을 같이 하지만 화가의 인상과 획득된 시선은 일반적인 사실성으로 회귀하지 않는다. 물에 뜨고 지고 하는 것은 먼 거리의 별들이 깜빡거리는 것과 같을 것이고, 해녀들이 이동하는 움직임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어떤 테왁은 유성으로, 어떤 테왁은 공전하는 별로 보는 것이다. 시각을 미학으로 말하는 것을 관점이라고 한다면, “자연은 내면에 있다”는 세잔의 말은 되새겨 볼만하다. 바다는 생산지이자 작업장이다. 산업적인 개념으로 보면, 해녀들이 물질하러 가고 오는 모습은 말 그대로 '출근길'과 '퇴근길'에 다름 아니다. 이 작품들은 해녀들의 모습을 온전하게 드려내는 것이 아니라, 바다, 해안의 현무암 환경에 오롯이 녹아든 인상적인 부분들만 강조를 하고 있어, 마치 해녀들이 우주의 한 부분 아니면, 공간에 흡수돼버려 경계없이 블랙홀로 합쳐지는 형상이 돼버렸다. 이번 개인전 작품들은 물질이라는 작업에서 숱하게 뜨고 잠기는 일과 같다. 마치 화가 자신도 실감하는 행위로써 뜨고, 잠기고(지고), 이동하면서, 때로는 깊은 곳(심연)으로 들어가고, 어떤 경우에는 유영하면서 바다속(우주)을 절대자의 시점으로 보는 것을 경험한 까닦에 탄생한 작품들이다. '나해녀'는 화가 자신의 자화상이다. 그 자화상은 화가의 미학적 사유를 말해준다. 마치 해녀인 자신이 우주인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우주와 물속의 작업이 유사하게 보이는 이 작품은 어쩌면 나경아의 현재 인생에 대한 표상일 것이다. 생존을 위해 응시하는 시선, 깊은 심연이 물속과 우주의 심연이 다르지 않다는 확신에 찬 자화상 말이다. 그러나 이 자화상은 비단 자신이 아니어도 무방한데, 동네, 이웃집의 삼춘들이라고 해도 지구인의 초상화라는 점에서는 결코 틀리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나경아에 대한 정보가 없다면, 그의 작품들은 꽃?, 평야?, 태양?, 산?, 풍경?, 철조망? 호수?라는 등 수많은 상상력으로 돌아올 것이다. 사실 그 무엇이라도 상관이 없다. 나경아가 본 시선은 정돈된 아름다움보다는 직관으로 현실의 물속에서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상상적 확장을 시도한 것이다. 작은 해안 마을의 해녀들의 작업을 통해서 스펙타클한 우주의 바다를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나경아의 시선만이 가능한 일이다. 한 점에서 폭발하여 펼쳐진 빅뱅의 우주를, 테왁 하나로부터, 여러 명의 해녀들이, 우주의 행성이 되는 시선은 미는 매우 도발적인 의미를 갖는다. 고답적인 교육의 보수성을 일시에 걷어차 버린 나경아의 이번 '떠다니는 섬'은 삶과 예술의 합일이라는 점에서, 자신의 영혼의 창을 미술의 새로운 지평을 위해 활짝 열어젖힌 삶의 그림을 보여주고 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유정은? = 최남단 제주 모슬포 출생이다. 제주대 미술교육과를 나와 부산대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술평론가(한국미술평론가협회), 제주문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제주의 무신도(2000)』, 『아름다운 제주 석상 동자석(2003)』, 『제주의 무덤(2007)』, 『제주 풍토와 무덤』, 『제주의 돌문화(2012)』, 『제주의 산담(2015)』, 『제주 돌담(2015)』. 『제주도 해양문화읽기(2017)』, 『제주도 동자석 연구(2020)』, 『제주도 산담연구(2021)』, 『제주도 풍토와 문화(2022)』, 『제주 돌담의 구조와 형태·미학(2022)』 등이 있다.
더 가증스러운 것도 있었다. 거지 무리가 오고, 놀이를 끝내고 돈을 요구할 때에는 반드시 곧바로 지불해야 했다. 그렇지 않고 조금이나마 주저하는 기색이 있으면 욕설이 튀어나왔다. 심지어 시간을 지체했다고 힐책하면서 요구하는 돈의 액수를 올렸다. 예를 들어 처음에 100문을 요구했는데 일각을 지체했다고 곧바로 200문이 되고 400문이 되고 800문이 되었다. 줄 때까지 난장을 부렸다. 가끔 지들끼리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 두고 끝끝내 주지 않는 상대를 만날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그들과 같은 무리가 어찌 한둘인가. A무리가 가기도 전에 B무리가 오고, B무리가 오자마자 C무리가 오고 D무리도 잇달아 도착했다. 매 무리를 4명으로 계산한다해도 네다섯 무리 이상이면 거지 떼가 이삼십 명에 이르렀다. 사람이 많으면 세력도 크다고 하지 않던가. 문 밖에 진을 치면 상가는 장사를 그만 둬야 할 지경에 이르니 어찌 근심이 크지 않겠는가. 제각기 조직된 거지 무리가 처음 도착하면 먼저 거리를 한 바퀴 순찰했다. 거지 두목이 거지 헌납금을 받아오는 곳을 정하는데 그 수는 우두머리와 친분관계에 따라 결정되었다. 조직된 무리 당 삼사 명 혹은 오륙 명씩으로 똑같지 않았다. 무리 내에는 우두머리가 또 있었다. 거지 헌납금은 그 우두머리가 받았다. 매 계절마다 적어도 사오십 무리가 같이 다녔다. 두목이 지출할 총액은 수백 수천 문이었다. 들어오는 돈의 액수는 기가 막힐 정도로 많았다. 한 도시의 점포를 1천이라 가정하면 거지 헌납금은 2천 문이나 됐다. 10분의 3을 지출한다 하여도 천수백 문은 남았다. 가장 천한 직업인 거지가 받아먹는 봄, 가을 두 계절의 잉여금이 이삼천 문이나 되는 거금이니, 어찌 괴이하다 하니 할 수 있으랴. 물론 이삼천 문이나 되는 거액은, 일 년 동안의 비용이기에 모두 잉여금이라고는 볼 수 없기는 했다. 일시적으로 지불해야 하는 금액도 적지 않았다. 예를 들어 거지 두목 한 명에게는 부두목 몇 명이 보좌했다. 이외에 다시 전문적으로 거지를 관할하는 인원을 적지 않게 고용도 해야 했다. 그들은 종일 아편을 피웠다. 계집질에 미쳐 있었다. 도박에도 미쳐있었다. 그런 자금 역시 주지 않을 수 없었다. 도시 근교 몇 군데에 거지 천막을 쳐서, 현지의 병이 들거나 능력이 미약한 거지에게 서식처로 제공하였다. 겨울에 찬바람 불고 눈보라가 몰아쳐서 거지들이 구걸할 수 없을 때에도 죽을 제공해 주었고, 간식거리를 살 수 있는 금액을 나누어줘서 구제했다. 도시에 돌아다니며 구걸하는 거지는 수천이나 되니 매일 그들에게 지불하는 액수도 적지 않았다. 개방이 떠돌아다니듯 구걸하지만 규칙 없이 아무렇게나 돌아다니지는 않았다. 중등인물을 기준으로 하면 일정한 지역이 존재했다. 예를 들어 강소성 오송(吳淞) 각 상업지역에 A무리가 갔다고 하면 B무리는 다시 가지 않았다. 상태(常太) 지역이 B무리에게 돌아갔다면 C무리는 발을 붙일 수 없었다. A주, B현, C촌, D진마다 개방 조직이 움직이는 경계선이 있었다. 아무렇게나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구걸할 수 없었다. 상업지역을 돌아다니는 개방은 자신들이 돌아다니는 지역을 고정적인 부동산으로 봤다. 자기 지역을 보호하고 관리하는 법도 대단히 엄격했다. 다른 사람이 마음대로 돌아다니다가는 죽음의 땅이 될 경우가 많았다. 그런 까닭에 매해 2월, 8월이 되면 각처에서 개방 간에 고투하는 활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예를 들어, 지난 해 2월에 모모 진에서 마음대로 지역을 돌아다니던 개방 A두목이 오륙 명의 형제를 데리고 길거리에서 협박하며 구걸하였다. 그곳의 두목 B가 자기 구역을 제멋대로 돌아다니는 자들이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와 나가라고 했으나 A는 못들은 척하며 계속해서 거리를 돌아다니며 혼란스럽게 했다. 거지 두목의 체면을 조금도 봐주지 않았다. B가 가만히 보니 개방의 법도도 먹히지 않고 무력으로도 제압할 수 없으니 될 대로 되라고 내버려 두었다. 당시 시내의 상인 모두 매우 놀랐다. 다음날,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살려달라고 부르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상인들이 일어나 등을 켜고 보니, 새벽의 동터오는 햇빛이 나기 시작했는데 오륙 명이 벌거벗겨진 채로 10여 명에게 에워싸여 동쪽으로 끌려가는 게 어렴풋이 보였다. 살려달라는 소리가 계속 울려왔다. 잠깐 있으니 날이 밝았다. 주민들이 문을 열고 살펴보니, 거지 무리가 동쪽에서 보무당당하게 몰려오고 있었다. 어제 거지 B두목이 이끄는 부하 거지 무리였다. B두목과 안면이 있는 사람이 살려달라는 소리는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었다. B두목이 대답은 이랬다. 어제 반항하면서 명령을 듣지 않는 강도 같은 거지들을, 오늘 생매장해 버렸다고 했다. 듣는 사람 모두 놀랐다. 그것이 거지의 법이었다. 이처럼 당시 거지 집단인 개방, 강호의 흑사회, 부패한 관부는 한통속이었다. 서로 이용하면서 무뢰하고 강도 같은 짓을 저질렀다. 그런 깡패 무리들 앞에서 무슨 강호의 의협을 얘기할 수 있겠는가. 강소, 절강 두 성 백여 주현은, 거지와 방회 무리가 거지 헌납금을 받으러 다니지 않는 날이 거의 없을 정도로 시달렸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 학사, 대만 정치대학교 중문학과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자로 『선총원(沈從文) 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 『재미있는 한자풀이』, 『수달피 모자를 쓴 친구(선총원 단편선집)』, 『음식에 담겨있는 한중교류사』, 『십삼 왕조의 고도 낙양 고성 순례』, 『발자취-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여정』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새 연재를 시작합니다. 신영대 교수의 '기(氣)가 흐르는 치유풍수'입니다. 풍수전문가의 시선으로 우리의 삶과 운명, 과거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반추합니다. 풍수(風水)는 우리 전래 삶의 지혜입니다. 만물의 이치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거기에 얽힌 사연, 더불어 살며시 깃든 과학도 알려드립니다. 독자 여러분의 애독을 바랍니다./ 편집자 주 글을 시작하며 ... 작가노트 기(氣)는 우주공간에 작용하는 전파와 같은 생명력의 근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근본 미립자와 같은 존재이자 우주 만물을 움직이는 근본 생명체다.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사물이다. 보이지 않는 어떤 작용은 에너지, 즉 기인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다. 또한 냄새도 없고 귀에 들리지도 않는다. 하지만, 반드시 공간에는 어떤 유형의 기가 순행하며 유통하고 있다. 산천의 기운이 잘 응결된 풍수적 국세도 중요하지만, 어떤 상황을 막론하고 쾌적하고 건강한 삶을 위해 부족한 지형과 구조를 풍수 이치에 맞게 보완하고 개선해 가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천혜의 조건을 갖춘 완벽한 명당은 극히 드물다. 명당은 만들어가는 것이며, 영원한 명당도 흉당(凶堂)도 존재하지 않는다. 풍수의 이치를 응용하고 활용하여 주거의 조건을 좋은 환경으로 보완하고 개선해 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풍수적으로 조화로운 자연 생태환경을 통해 심신을 건강하게 하는 장소로 활용할 때 풍수지리가 행복한 삶을 위한 치유의 생활 문화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생활 속에서 쉽게 응용할 수 있는 양택풍수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해 가는 장묘 문화, 음택풍수 등을 소개한다. 심신의 건강과 쾌적한 주거 환경 개선을 위한 풍수적 방법을 알리고자 한다. 가능한 쉽게 풀어쓰려 노력하려 한다. 주로 생활 속 힐링풍수를 중심으로 기(氣), 즉 주택이나 건물을 중심으로 에너지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는 치유적 개념의 힐링 풍수를 다루고자 한다./ 작가 주 고대 원시사회로부터 인간은 자연의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오랜 기간 경험과 지혜를 축적해 왔다. 풍수의 태동은 바로 인류의 생존에 관련된 자연의 생태환경에서 기인했다. 풍수지리는 물, 바람, 땅 등 대자연의 순환 원리를 이용하는 자연합일의 심오한 자연과학이라 할 수 있다. 동시에 풍수는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중시하는 학문이며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고 동화하는 대자연의 깊은 철학적 의미가 담겨 있다. 풍수의 원시적인 출발점이 천, 지, 인을 이론의 지침으로 삼고 있는데 천문, 지리, 인거(人居)의 구체적인 사물의 특징으로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류가 생존하는 데는 바람 즉, 유동하는 공기와 인체의 혈맥에 비교되는 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고대에는 풍수를 '감여(堪輿)' 또는 '지리' 등으로 불렀는데 현대에 와서 혹자는 '우주자장과 인류관계학' 등에 연관 지어 부르기도 한다. 특히 민간에 뿌리내린 전래의 풍수는 화복의 영향을 중시한 발복풍수가 주류를 이루었다. 땅을 써서 잘되고 못되었다는 수많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데 이것은 속신(俗信)처럼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다. 집안이 편안하고 자손들이 하는 일마다 잘되고 또는 집안이 쇠퇴하여 자손들이 번성하지 못하고 하는 모든 길흉화복의 주원인이 대체로 조상의 묘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대부분 조상의 유체를 땅 기운 즉, 지기가 왕성한 곳에 모셔 묘를 잘 써서 가문이 번창했다든지 혹은 문중에서 여러명의 군수나 장관이 나왔다든지 뛰어난 문장가나 호걸이 나왔다고 하는 것이 모두 기운이 잘 모이는 풍수의 적지(的地)를 골라 그에 따른 영향으로 복을 누렸다는 발복에 관한 내용이다. 인위적인 물질문명과 첨단과학이 최고조에 이른 오늘날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 기준은 극도의 혼돈에 빠져 있다.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은 극에 달하여 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자연환경 파괴로 이어져 이로 인한 생태계는 조화와 균형이 깨지고 인류 생존을 위협할 만큼 지구 환경 곳곳이 오염과 공해로 몸살을 앓고 있다. 자연의 황폐화는 인류의 존망 문제로까지 퍼져 엄청난 자연의 보복과 재해가 인간을 기다리고 있다. 인간과 자연이 함께 공존하고 상호 교감하며 삶의 질을 높이고 자연의 에너지와 심신을 조화롭게 하여 건강한 삶을 도모하는 것이 힐링 풍수의 지향점이다. 우리가 사는 주택을 풍수적인 조건으로 말한다면 먼저 집 안에 통풍이 잘 이루어지고 햇빛이 잘 들어야 하며 그늘이 지거나 습기가 차지 않는 쾌적한 환경을 만들어준다면 심신이 편안하여 건강한 삶을 누리게 되는 이치와 같다. 또한 주택이 자리한 지세의 위치와 형세도 매우 중요하다. 다시 말해서 뒤로는 산이나 언덕을 의지하고 앞으로는 감싸 도는 물을 맞이해야 한다는 배산임수(背山臨水)와 강하고 거친 바람을 막아주거나 고르게 하는 지형지물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의 장풍(藏風)이 잘 이루어져야 한다. 결국 이 말은 산과 물이 포근하게 감싸주어 바람과 기운의 순환을 고르게 한다는 뜻이다. 힐링 풍수는 사회, 환경, 지리, 물리, 인문 등의 요소를 더욱더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자연과학을 토대로 우리가 사는 주거 형태나 도시의 형태까지도 다양하게 연구하는 분야로서 바람, 물, 태양, 산 등에서 발산하는 다양한 에너지의 관계를 활용하는 학문이며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한 분야라고 할 수 있다. 힐링 풍수의 목적은 천지 대자연을 바탕으로 시간과 공간의 영향권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자연생태계에서 발산하는 기운 즉 에너지를 활용하여 인생의 번영과 행복을 추구하는 데 있다. 자연에서 발산하는 좋은 에너지를 교감하여 더욱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한 운명 개척의 한 방법이다. 힐링풍수를 통한 치유 활동은 자연경관, 생태, 인문, 예술에 이르기까지 대상에 제한이 없다. 이를테면 풍수와 의학적 근거에 기초한 산림 요법, 식물 요법, 온열요법, 지형 요법, 수욕 요법, 숲 치유, 물 요법, 조화요법, 호흡 요법, 심리요법, 기후요법, 식이요법, 정신요법, 운동요법, 명상, 기공, 태극권, 요가 등을 비롯하여 풍수 실내장식 주택의 구조와 형태, 그림, 원예 가구 배치, 입지, 환경, 지맥, 자기장, 오행 색채, 식물, 음식, 의상, 조형물, 광물, 나무 등에 이르기까지 지구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소재와 자연물로 풍수와 융합한 치유 활동을 전개할 수 있다. 본 코너에서는 치유의 개념 및 힐링 풍수의 입지환경과 조건을 살피고 기운이 잘 모이는 땅의 조건, 산과 물의 조화, 쾌적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건물의 공간 배치 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어서 자연환경과 에너지에 대해 개괄하고 자연 환경과 풍수의 융합을 통해 심신의 건강 증진과 더불어 행운을 유도하고 복을 부르는 힐링풍수의 방법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 신영대는? = 대한풍수연구학회 편집위원장, 한국역술인협회 공인 역학연구원이다. 중문학 박사와 풍수학자로서 ‘제주의 오름과 풍수’, ‘명리학원리대전’, ‘풍수지리학 원리’, ‘전원시인 도연명 시선', ‘흰 구름 벗을 삼아 읽어보는 당시선’ 등 다수의 저서를 냈다. '한라산 총서'의 구비전승·지명·풍수 분야와 ‘세계자연유산지구 마을일지 보고서’ 중 풍수 분야 공동 집필자로도 참여한 바 있다. 또 제주도 각 마을 '향토지' 풍수 부문에 공동 집필자로 참여하고 있다. 현재 제주관광대 관광중국어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역대로 강호(江湖)의 여러 부류는 어중이떠중이가 모여 있는 사회 단체였다. 사람들이 숭상하는 의협의 부류도 적지 않았으나 대부분은 불량배요 무뢰한 무리였다. 근대의 거지 단체는 흑사회(黑社會)의 일원으로 변질된 후 불량배 단체의 본성을 드러냈다. 사회생활 중 거지 단체는 왕왕 관부를 이용했다. 여타 흑사회 단체와 서로 결탁하여 한패를 이루어서는 사회에 해악을 끼쳤다. 예를 들어 『청패류초』에 기록은 이렇다. “하남(河南) 주현에서 총괄하여 체포하라는 문서를 내리면 해포(海捕)에 넘겼다. 해포는 대체로 걸식하는 거지들로, 관부도 표를 줬다. 서너너덧씩 무리를 이루어 향진으로 갔다. 상점에 가서 향가지 하나를 주면 반드시 10문이나 8문을 내줘야 했다. 평상시의 거지와 비교하면 다루기가 실로 쉽지 않았다. 일여 년이 지난 후 돌아와 표를 반납하고 조금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체포했는지 여부만 다루지, 원래 상황은 묻지 않았다.” 관부가 거지를 이용해 어물쩍 책임을 때워버리는 짓거리를 말하고 있다. 거지도 그런 기회를 이용하여 협박하고 재물을 손에 넣었다. 서로 이익과 혜택을 얻는 것이지만 재난을 당하는 것은 결국 평민이요 일반 사회인들이었다. 민국 이래로 청홍방(靑紅幇)은 신해혁명에 참가해 공을 쌓았다. 관부와 개방이 결탁하여 서로 이용하면서 근대 중국에서 일시에 창궐하여 흑사회 세력이 됐다. 사회에 커다란 재앙을 되었다. 그중 각지의 개방도 결탁하여, 거지 단체의 폭력배적인 성향을 확연히 드러냈다. 여기에서는 거지 기부금을 받는(활동을 시작하는) 것을 예로 들어 그 문제를 설명하려 한다. 기록은 이렇다1) : 방파를 이룬 도적〔방비(幇匪)〕들이 하는 사업은 대체로 정착해 있는 파와 떠돌아다니는 파, 두 파로 나뉜다. ……먼저 문차(文差)2) 중의 ‘개마두(開碼頭)’3)를 알아보자. ‘개마두’도 몇 가지로 나뉜다. 마술을 부리거나 무술을 시범보이거나 하는 등 모든 삼교구류를 포함한다. 종합적으로 그것을 ‘강호에 돌아다닌다’(走江湖)라고 한다. 이 무리는, 법도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는 것을 피할 수 없을지라도 표면상으로는 범법행위가 적다. 그들이 얻는 소득은 대개 타인이 자원해서 한다. 처음에는 강압적으로 협박하여 재물을 얻지는 않는다. 다만 매년 2월, 8월 두 달 동안 무리를 이루어 각지로 잇달아 내려가 상인과 일반 백성에게 사취한다. 그 행태는 가증스럽기 그지없다. 원류를 따져보면 홍방(紅幇) 문차의 개마두 방법 중 하나다. 즉 분담하여 각지로 가서 여러 점포와 주민에게 억지스럽게 이런저런 명목으로 돈을 갈취하였다. 각 현에 거지 두목이 없으면 대부분 현지의 안면 있는 불량배로 충당하였다. 특별히 매년 두 번, 매번 매 집마다 2천 문(文)의 거지 헌납금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 헌납한 집에는 거지 두목이 붉은 종이에 검은 도장을 찍은 개조(丐條)를 대문에 붙였다. 그 까닭을 물으니 개조를 붙인 집은 매년 2월, 8월에 거지들이 와서 돈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매년 정월, 7월에 거지 두목은 공개적으로 무리들을 데리고 각각 어깨에 보따리를 메고서, 한 집 한 집 빠짐없이 찾아다니며 거지 헌납금을 받았다. 돈을 내면 개조를 새로 발급하여 문에 붙였다. 부잣집이라도 예외는 없었다. 부잣집이야 헌납금을 쉽게 낸다하여도 일반 백성의 집은 그리 쉽지 않았다. 헌납할 돈이 없으면 편의를 봐줘서 외상으로 해주고, 먼저 개조를 붙이게 한 후 약속한 기일 내에 돈을 받았다. 정말 가난한 사람은 헌납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어중간한 집에서 요령을 부려 헌납하지 않으면 2월, 8월에 거지 떼가 몰아닥쳤다. 거지 두목은 고의로 무리에게 지시해 종일토록 방문하면서 강압했다.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최후의 해결 방법은 거지 두목을 초청하는 것뿐이었다. 거지 두목은 좋은 기회를 얻었기에 조건을 내세우기 마련이다. 특별한 가격을 불렀다. 원래 정한 2천 문 액수보다 수배 이상을 불렀다. 받아들이면 명령을 내려 철수하고 그렇지 않으면 개의치 않고 딴청을 부렸다. 상점과 민가는 그런 소란과 손해를 한 번씩이나마 받아봤기에, 다음에 헌납할 때에는 시키면 시키는 대로 절대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집에서도 그런 상황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요령부리지 않고 제때 헌납하였다. 도시의 중산층 이상은 거지 헌납금을 내지 않는 집이 없었으니 거지 두목은 부자가 되었다. 2월, 8월에 개방이 도착하면 먼저 여러 거리를 돌아다니며 ‘개조’가 있는지 없는지를 시탐하였다. 만약 없으면 기회가 도래한 것이었다. 사기와 강제적인 수단을 동원하는데 온갖 기기묘묘한 방법을 다 동원하였다. 표창을 상점 앞에 늘어놓고 길 가는 사람들에게 그곳에 가지 말라고 공개적으로 알리거나 칼, 창, 검, 극 등 무기를 진열해놓고 문 앞에서 하나하나씩 가지고 무술을 연마하기도 했다. 패문, 높은 의자 등의 물건을 이마나 콧등에 세워 중심을 잡으면서 아무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거나 경조, 곤곡 등을 노래하고 비파를 켜면서 주인에게 자신의 노래를 잘 들으시라고 강짜를 놓기도 했다. 그런 소란의 대가는 일이백 문으로 해결할 수 없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김노불(金老咈)이라 서명된 『삼교구류강호비밀규구(三敎九流江湖秘密規矩)』의 기록이다. 2) 거지나 깡패 집단을 두 부류로 나누는데, ‘문차(文差)’와 ‘무차(武差)’다. 강탈, 강도, 소매치기, 절도 등은 독자적으로 움직이거나 무리를 짓더라도 소수이고 기본적으로 개별적 기술(?)에 의존하기에 ‘무차’라 한다. 그 외의 주류를 이루는 부류가 ‘문차’다. ‘문차’에는 무리를 짓고 정착해 협박 등으로 재물을 얻는 부류가 있고, 돌아다니면서 상점이나 부잣집에서 재물을 얻는 부류가 있다. 3) 개마두(開碼頭)는 ‘마두를 열다’ 뜻이다. ‘마두’는 옛날에 특별히 깡패, 불량배들이 강점해 활동하는 장소, 근거지를 말한다. ‘개마두’는 근거지를 연다는 말로 ‘활동을 시작하다’ 의미를 갖는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 학사, 대만 정치대학교 중문학과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자로 『선총원(沈從文) 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 『재미있는 한자풀이』, 『수달피 모자를 쓴 친구(선총원 단편선집)』, 『음식에 담겨있는 한중교류사』, 『십삼 왕조의 고도 낙양 고성 순례』, 『발자취-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여정』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나경아는 1977년생으로 화가이면서 해녀다. 서귀포시 남원읍 태흥리 현직 해녀로서 물감을 사기 위해 물질하면서 그림을 그린다. 추계예술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영국으로 건너가 디자인과 순수회화를 전공하여, 스쿠버 다이빙을 배운 후 해녀 학교를 나와 테흥리 해녀가 되었다. 그녀는 매우 강렬한 바다속 자연의 역동적인 느낌을 온몸으로 표현하듯 작업을 한다. 물질은 하루에 4시간 정도, 돌아와선 밤에 그림을 그린다. 이번 '떠다니는 섬'은 지난 4일부터 오는 31일까지 설문대여성문화센터 여성작가 발굴 지원전의 일환으로 기획초대전 ‘바다의 색-우주의 호흡:해녀가 본 바다’을 열고 있다. 게재된 작품들은 이번 전시에 출품하는 작품들이다. 4년차 현직 해녀인 나경아는 세계 최초의 화가 해녀가 되었다. 화가의 시선, 영혼의 창(窓) 우리가 오늘 하루도 깨어있다는 것에 감사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사는 세계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황홀한 일이다. 그 아름다움을 몸이 느끼게 하는 것이 눈이다. 눈이 곧 몸이기 때문이다. 화가라는 이름은 영혼의 눈인 창을 열고 사는 자이며, 몸으로 느끼는 사람, 그가 그리는 그림은 영혼의 울림이 된다. 수년 전 삶을 바닷속으로 가져와 화가로 살면서 해녀(잠녀)가 된 여성이 있다. 서귀포 태흥리의 이주 정착민 해녀이기도 한 그녀는 소라를 따서 물감을 사는 화가이다. 그녀는 바다를 심연의 우주에서 떠다니는 작은 행성으로 생각한다. 삶은 힘에 부치지만 그래도 생활은 늘 즐겁다. 사실 우리 모두의 삶은 존엄한 것이다. 존엄함은 모든 살아가는 것들에 동등하게 부여돼야 한다. 인간 누구도 삶을 피할 수 없는 것은, 생물학적 존재의 최고의 목적이야말로 생존이라는 하나의 절대적인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삶에는 어떤 식으로든 신분의 귀천(貴賤)이 있어서는 안 된다. 본다는 것은 위대한 것이다. 자신이 정경(情景)을 바라봄으로써 상대방 풍경의 사물들도 나를 본다. 화가의 영혼은 눈을 통해 사물에서 뿜어대는 파동을 만나고 그 순간적인 느낌은 자신의 몸에 흡수된다. 그래서 본다는 것은 시각에 맺힌 인상(印象)이 몸으로 각인되는 순간적 기억 활동이며, 그것이 무의식에 남아 비로소 대상에 대한 관념이 된다. 우리의 삶은 경험적 관념이며, 그런 관념은 미학의 토양이 된다. 보는 것은 어떤 표상을 만들어내는 일이며, 이 표상은 사상에 선행한다. 표상은 상징이나 기호 이미지가 된다. 그래서 화가가 표현한 형상들은 그의 경험적 아름다움이 된다. 화가는 수많은 삶의 흔적(인상)들이 혼돈처럼 흩어져 있는 것들을 봄(인상을 모음)으로써 하나의 형태 적인 리듬을 갖게 된다. 본다는 것은 조화로운 리듬의 구조를 만드는 일이다. 세계 최초의 화가 해녀 모든 직업은 자신이 선택한다. 그러나 그 직업에서 필요충분조건이 갖춰지기는 어렵다. 나경아는 화가로 살기 위해 해녀를 직업으로 선택한 여성이다. 그래서 해녀가 화가가 된 것이 아니라, 화가가 해녀가 된 것이다. 그래서 단연 세계에서 최초로 화가 해녀가 되었다. 화가가 해녀가 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세상의 관념과 삶의 기술들을 해결해야 하므로. 사실상 화가로 살려면 생계와 작업에 필요한 재료를 위해 노동을 해야만 한다. 바로 나경아의 경우가 그렇다. 그녀가 화가로 살기 위해서는 해녀가 돼 자신의 생활비와 물감값을 충당해야 했다. 화가가 해녀가 될 수밖에 없는 조건에는 두 가지가 있다. 먼저, 재료 공급이 필요한 경제적인 원인이 있고, 두 번째는 그림을 그리려는 주제가 바다에 있다. 남들보다 화가 해녀가 수월하게 될 수 있었던 것은, 나경아가 이미 화가로 살아왔고, 해저를 즐길 수 있는 직능수행(스쿠버 다이빙)의 기술이 갖춰졌기에 화가 해녀라는 이름을 얻을 수 있었다. 반면에 일반인 해녀가 화가가 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해녀라는 직능으로써 생계만을 위해서 바다에 가는 목적이 다르고, 해녀가 화가가 되기 위해서는 따로 예술교육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해녀가 취미나 여가 활동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어서 해녀가 화가는 될 수 있을 지 모르지만, 나경아의 경우처럼 이미 현역 화가로 활동하면서, 스쿠버 다이버로써 바다의 기술과 지식을 갖춰진 전문 화가라는 해녀가 되기는 어려운 일이다. 삶은 지고하고 존엄한 것이다. 세상의 모든 미물(微物)의 삶도 다르지 않다. 자연은 커도 하나다. 큰 것에서 작은 것이,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들과 서로 얼개로 연결되고, 그 상호교감으로 우주 만물을 이루고 있다. 우주의 실체란 모든 생명체와 사물이 서로 작용하면서 그것들의 순환 변화하면서 나타나는 본질에 대한 현상 운동일 것이다. 자연에서는 하나의 과정 속에 결과가 있고 다시 새로운 것이 생성된다. 그러므로 세계, 곧, 우주의 신은 바로 자연자체인 원리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자연 만물이 각자의 이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사실만으로도 대단한 것이다. 그러나 애써 탄생한 생명체라도 자연선택으로 도태되지만, 안타깝게도 더욱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은 인간들이 저지르는 사회적 결과에 의해서이다. 자연의 생명을 무자비하게 파괴하게 하는 것은 사람이며, 탐욕스런 사상으로서의 체제이자 특정 종교이다. 오늘날 생태계의 위기는 인류 진화된 사회적인 결과에 다름아니다. 그렇다면 삶이란 무엇일까. 삶(life)은 생물의 전략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일이다. 생물은 생명을 지키기 위해 영양을 받고 자라면서 번식하는 동물과 식물들이며, 그 가운데 사람은 한 생명체로서 생존의 지평을 열어가는 영장류 포유동물이다. 또한 삶이란 사람이 일상에서 살아가는 그대로의 모습이나 형편을 말한다. 삶의 문제는 인생에서 매우 어려운 문제일 것이다. 그래서 삶의 문제에 대해 일찍이 공자는 인간의 죽음을 알기는 커녕 “삶도 모른다”라 했고, 화가 폴 세잔은 “산다는 건 끔찍하다”라고 했다. 물 위에 사는 제주섬의 여성들은 사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살암시민 살아진다”라고 덤덤히 말했다. 그만큼 삶의 유형은 많으며, 그 형태가 다양한 만큼 구절양장(九折羊腸) 같은 사연도 넘칠 것이다. 또 인생길에 생노병사라는 고통이 있어서 욕망이 많은 우리들로서는 어떤 삶이 좋은 삶인지 해답을 알지 못한다. 누구라도 우리에게 영원한 삶은 주어지지가 않는다. 지구상의 인구수만큼 삶에는 이유가 있으므로, 목적과 열망을 가지고, 지금, 여기 존재하는 의미만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현재에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여전히 삶이란 무엇이냐?라고 물을 테고, 그것을 새로이 찾을 것이다. 어쩌면 삶이란 저마다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기억하고 기념하는 사회적 동물의 궤적일테니까. 그렇다면 화가의 삶은 무엇인가? 사실상 이 질문은 모든 사람에게 통용되는 물음과 같을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 그럼으로써 자신이 잘하는 것, 소망하거나 욕망하면서 좌절을 겪고, 그래서 인생에서 고통과 함께 슬픔과 기쁨을 맛보며 죽음을 맞이하는 날까지 그림을 그리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삶에는 형용사와 수식어가 현란하다. 화가의 삶은 미적으로 쾌를 누리는 것이며, 그 즐거움은 성취욕일 수도 있고, 자신감일 수도 있으며 희망이 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즐거운 인생이 목표가 아닌가?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유정은? = 최남단 제주 모슬포 출생이다. 제주대 미술교육과를 나와 부산대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술평론가(한국미술평론가협회), 제주문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제주의 무신도(2000)』, 『아름다운 제주 석상 동자석(2003)』, 『제주의 무덤(2007)』, 『제주 풍토와 무덤』, 『제주의 돌문화(2012)』, 『제주의 산담(2015)』, 『제주 돌담(2015)』. 『제주도 해양문화읽기(2017)』, 『제주도 동자석 연구(2020)』, 『제주도 산담연구(2021)』, 『제주도 풍토와 문화(2022)』, 『제주 돌담의 구조와 형태·미학(2022)』 등이 있다.
광주(廣州) ‘4대 도적(寇)’ 반대로 많은 거지들은 장걸아와는 달랐다. 심지어 도적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청패류초』 기록이다. “4대 도적은 광주에 있는데 거지다. 거지이면서 도적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흉악했기 때문이다. 처음에 4명이 발기했기에 사대구(四大寇)라 불렀다. 월(粤, 광동 광서)지역 출신이 아니고 모두 외지 사람이다. 월에서 관직에 있던 관원의 자손으로 가난해져서 돌아갈 곳이 없게 되자, 양성(羊城)으로 흘러들어가 구걸하며 지내는 자들이다. 그런데 구걸하는 방식이 일반 거지하고는 달랐다. 꼭 결혼식이나 장례식이 있는 부잣집을 골라 구걸하였다. 순서에 따라 결손 된 인원을 뽑는 ‘사우(私寓)’1)는 어느 외지인인지를 불문하고 동향으로 여겼다. 그곳에 가면 수판을 내밀며 행하를 요구했다. 수판에 성명, 원적을 쓰고 위에는 선대의 품계 명호를 붙였다. 예를 들면 ‘원임 남해현 모모 자, 모모의 아들, 모 처, 모모이다’이다. 안으로 들어서면 대개 장삼을 두르고 절뚝절뚝 신을 지르신었다. 결당한 자가 많으면 수십 명에 달했다. 은화 수십 원을 주지 않으면 떠나지 않았다. 그중 관리의 자손이 분명 존재했지만 역시 대부분은 사칭하는 자들이었다. 그중에 표준어를 할 줄 아는 광동사람이 끼어들어있다.” 이런 무리들은 분명 거지가 아니라 불량배요 무뢰한들이다. 앉은뱅이 거지, 모탄자(毛癱子) 다시 청나라 초기에 살았던 거지 모탄자(毛癱子)를 보자. 기록은 이렇다. 모탄자는 천장(天長)현 사람이다.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였다. 나중에 두 손으로 땅을 짚어 몸을 지탱하며 걸었다. 평상시에는 앉아서 구걸하였다. 그는 의협심이 있었다고 전한다. 순치(順治) 16년(1659), 해적이 강녕(江寧)을 공격하자 천장현도 염효(鹽梟, 명나라와 청나라 때의 사염업자) 유택(劉澤)에게 점령당했다. 현령은 거리에서 목매어 죽었고 버려진 시체들은 수일이 지났는데도 거둬줄 사람이 없었다. 때마침 모탄자가 지나다가 보고는 연무청(演武廳)에서 울며 시체들을 염해주었다. 난이 평정된 후 새로 온 현령이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현령이 죽판을 써서 모탄자를 양제원(養濟院) 원장에 임명하여 표창하였다. 이때부터 모탄자가 오고갈 때는 다시는 땅을 짚고 다니지 않고 다른 거지의 어깨에 올라타서 다녔다. 모탄자가 관방이 임명한 거지의 우두머리가 된 후, 현에서 매년 재물을 공급했을 뿐 아니라 시에서도 선례대로 매월 공물을 바쳤다. 그러자 모탄자는 3칸 초가집을 짓고 1처 1첩을 두었다. 매년 생일 때면 처첩이 술자리를 마련하면 여러 거지들이 모여 생일을 축하하였다. 사치스럽고 안일한 현귀 생활을 즐겼다. 명나라 때에 의협을 행한 거지 장이가 국가를 위하여 죽을 고비를 넘겼으면서도 공을 탐하지 않은 것과 비교해보면 분명 무뢰한 무리에 속한다고 보아야하지 않을까.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백 년 전의 ‘사우(私寓)’는 경성(京城)에서 비교적 고급스런 성애(性愛) 업소였다. 경영자는 대부분 이원항(梨園行, 옛날 경극에 종사하는 사람들) 인사들이었다. 종사자는 ‘상고(相姑)’라 부르는 미소년이었다. 근 백 년 이래로 경극의 남단(男旦) 명가들은 이 화제를 대부분 피했다. ‘사우’와 관련된 속사정은 역사적으로 말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다시 말해 ‘사우(私寓)’, ‘가랑(歌郎)’, ‘상고(相姑)’ 등은 모두 일반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쉬이 접하기 어려운 성애와 관련된 어휘다. 중국 명청(明清)시대 북경 ‘이원항’이 유행했던 시대의 산물이다. 일례로 ‘상고(相姑)’는 ‘남기(男妓)’, 즉 남창이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 학사, 대만 정치대학교 중문학과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자로 『선총원(沈從文) 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 『재미있는 한자풀이』, 『수달피 모자를 쓴 친구(선총원 단편선집)』, 『음식에 담겨있는 한중교류사』, 『십삼 왕조의 고도 낙양 고성 순례』, 『발자취-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여정』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자 이성의 동물이기도 하다. 생각하고, 느끼고, 깨달을 수 있다. 살아있다는 것은 사물 자신에게 생기가 있다는 말이다. 생의 에너지가 삶이다. 살아있음은 감각 지각을 느끼게 하는 기분과 느낌, 판단과 결정인 것이다. 도판화(陶板畵)는 흔하지 않은 작업방식이지만 그림 타일(tile)도 이의 방식에서 나왔다. 도판은 내구성이 강해서 건축 내·외장재로도 사용한다. 고대로부터 재료의 내구성 때문에 테라코타라는 이름으로 성행하기도 했다. 사람의 개성과 재료적 특성은 표현이라는 이름으로 예술이 되었다. 여전히 표현은 창의적인 곳에 활용되는 인간의 지성적인 행동이다. 자기 정서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만의 중요한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시간을 이용할 줄 아는 지혜는 지금의 우리 문명의 결과이다. 김현자의 정서는 대상을 관찰함으로써 느끼는 감정, 즉 사물을 본 인상이다. 인상은 대상을 보면서 생각하고 느낀 감각 지각의 결과이며, 도판 그림이라는 형식은 회화적이어서 붓으로 선과 면, 형태를 그리고 유약이 색채가 된다. 도자예술이 형태를 다루는 것과 달리 김현자는 도자를 회화판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은 미술교사 시절 도자벽화의 제작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김현자의 작업은 시간의 흐름을 타고 있다. 아침, 낮, 저녁, 밤이라는 점에서 자신의 일상을 상징하고 있는데, 아침은 자연 사물이나 인간이나 시작을 알리는 시간으로 소소한 것들 모두가 분주하고, 햇살이 강한 낮에는 작가의 사유로는 정원도, 산도, 바다도 존재하는 이유가 있다. 그렇지만 자연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은 변화무쌍하게 다양한 감정의 색으로 다가온다. 자연을 안온하게 느끼면 색이 따뜻해지고, 형태가 부드러워진다. 또 자연이 강한 느낌으로 다가오게 되면, 그것을 대하는 감정도 세게 나타난다. 선묘나 느낌, 모두가 감정의 상태에 따라 강하게 표현된다. 이미 우리의 일상은 각 개인이 다른 삶의 모습이라고 했다. 삶은 이야기이며, 희노애락 인생의 노래가 된다. 김현자의 도판 그림은 그녀가 등단한 소설가이기도 한 까닭에 잔잔한 일상의 삶으로 구성되었다. 볼 때마다 달리 보이는 오붓한 풍경들. 강아지, 꽃, 숲, 바다의 모습도 새롭고, 꿈을 꾸거나 의자에 대한 의미도 나무가 서 있는 존재에 대해서도 다르게 느낀다. 그녀의 문학적 감수성 때문이다. 우리는 각자의 경험으로 완성된 존재였다. 경험은 감정도 지각도 모두 다르게 느끼도록 만든다. 그래서 아름다움에 대한 관념도 다르게 느끼도록 한다. 그러므로 작가는 다르게 볼 수 있으며, 다르게 표현되는 이 지점에서 자신의 미학이 드러난다. 결국 우리는 시간이 흐르는 공간 속에서 어떤 삶의 경험을 가지고 살아가는 지가 판명된다. 여전히 삶이라는 시간은 지나갈 것이고 어떤 공간 환경 속에서 사건들이 일어나고, 다시 잊혀지거나 소멸될 것이다. 하루에도 여러 번 반복되듯 어떤 것은 기억에 남고, 어떤 것은 사라지거나 무의식에 잠길 것이다. 삶에는 미와 추가 함께 있어서 때로는 황홀하기도 하고, 때로는 혐오스럽기도 할 것이다. 또 우아하거나 편안하게 느낄 것이고, 때로는 조잡하거나 불편하기도 할 것이다. 감정은 이처럼 여러 번 옷을 바꾸고, 지각은 여러 번 다른 느낌으로 인지될 것이다. 이런 변화가 인간 자체의 본성이리라. 김현자의 은유는 자신의 인생 노래이다. <숨겨진 시간> 긴 <겨울 지나고> 찾아온 <짧고 예쁜 봄>에 <설레는 마음>으로 <길에서 길을 찾다>. 삶에 <모든 것은 다 이유가 있다>, 그러나 <처음은 다 어렵다> 그래도 우리 곁에는 <섬의 친구들>이 있고, 다시 <섬은 이어지고>, <별을 기다리는 바다>를 만난다. 드디어 <은하를 기다리는 산>에서 그녀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의 의자를 찾으셨나요?>. 김현자의 도자 회화는 세계를 자기에게 투영한 섬의 일상의 시간 안에서 향유하고 있다. 여기 일상의 시간은 김현자 혼자만의 경험이지만 나와 다른 남들의 얼굴이기도 하다. 우리 세계는 모두의 경험들이 서로 교환되고 충돌하는 자리이다. 그것이 평화라는 이름으로 타협하고 있는 장소여서 거기에 우리 인간의 마음에 무엇이, 어느 만큼 아로새겨질지는 여전히 모른다. 김현자의 일상은 경험된 한 사람의 삶의 이야기이지만, 역으로 우리들의 살아온 날들의 역사이기도 하다. 오늘, 그녀는 꿈꾸던 섬에서 묻는다. “과연 숨겨진 정원 어디에 당신을 기다리는 의자가 있나요?” 섬의 시간은 도판 속에서 말없이 흐르는데.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유정은? = 최남단 제주 모슬포 출생이다. 제주대 미술교육과를 나와 부산대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술평론가(한국미술평론가협회), 제주문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제주의 무신도(2000)』, 『아름다운 제주 석상 동자석(2003)』, 『제주의 무덤(2007)』, 『제주 풍토와 무덤』, 『제주의 돌문화(2012)』, 『제주의 산담(2015)』, 『제주 돌담(2015)』. 『제주도 해양문화읽기(2017)』, 『제주도 동자석 연구(2020)』, 『제주도 산담연구(2021)』, 『제주도 풍토와 문화(2022)』, 『제주 돌담의 구조와 형태·미학(2022)』 등이 있다.
조고가 상황을 자세히 살펴본 후 급히 관제묘로 달려가 기도하였다. 누금구가 일찍부터 관제묘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척 놀라하며 조대에게 알렸다. “정말 이상해요. 어제 저녁에 괴상한 꿈을 꿨거든요. 꿈에 관우께서 노기등등하여 주창(周倉)에게 욕을…….” 조고는 참지 못하여 급히 물었다. “주창에게 뭐라고 욕하던가?” 누금구는 너무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주창이 북쪽 호수에서 물에 빠져 죽은 물귀신을 만났다하대요. 물귀신이 어장을 강점하고 있는 나쁜 놈의 상앗대와 발목을 잡고 있더래요. 주창이 물귀신에게 겁을 주니 잡혀있던 나쁜 놈이 도망쳤나 봐요. 관우께서 그 말을 듣고는 화가 나서 주창에게 괜한 일을 했다고 욕을 했어요. ‘왜 물귀신이 그 나쁜 놈을 물에 빠져 죽게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느냐? 힘을 믿고 어민을 억압하는 나쁜 놈이지 않느냐. 오늘 이후도 밤에 몇 놈이 물고기를 잡으러 호수로 갔다가 몇 명 더 물에 빠져 죽을 것이다. 네가 이후 밤마다 호수에 가서 지키고 있으라. 마음 약해져서 도와주지 말고.’ 주창이 연거푸 고개를 끄덕이며 답합디다.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그랬지요.” 조고가 그 말을 듣고 놀라 당황해 어쩔 줄 모르다가 누금구에게 말했다. “아이고! 아우님. 아우님이 관제묘에서 관운장을 여러 해 모셨잖소. 말 좀 잘 전해주오. 오늘 이후로 절대 어장을 강점하지 않을 거고, 밤에 다시는 물고기를 잡으러 가지 않을 거라고, 말씀 좀 잘 전해주소. 관대하게 봐달라고 부탁 좀 해주오. 아우님의 큰 조카를 용서 좀 해달라고 부탁 좀 해주오.” 누금구가 듣고도 대답이 없자 조고는 황망하게 무릎을 꿇었다. 누금구는 그제야 말했다. “일어나세요. 한 고향 사람인데. 이 문제, 제가 알아서 하리다! 내가 관운장께 두어 번 더 절하면 가엾이 여겨 용서해 주실 겁니다. 자비를 베풀 거외다.” 이렇게 해서, 누금구가 물귀신을 가장해 조대를 놀라게 하고 어장을 마을사람에게 돌려준 이야기가 지금까지도 전해오고 있다. 거지 누금구가 의협심을 발휘하여 의로운 일을 한 전기적인 이야기는 민간고사 중에서 기지(機智)고사의 유형이다. 광범위하게 내려오는 그 이야기 자체는, 세상 사람들의 선악에 대한 비난이면서 영리한 인물인 거지의 의협 정신에 대한 찬양이다. 출신과 지위의 귀천 여부를 막론하고 그저 의협의 인격을 갖출 수 있다면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거지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것이 중국문화전통 중 기본적인 인격 유형이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의협 정신을 숭상하였다. 낡고 오래된 원시 사유 유형에 근거해 전기화(傳奇化) 되었다. 그렇게 하면서 각별히 광범위하게 전해질 수 있는 날개를 달았다. 거지의 의협 이야기에 대한 전기화는, 그런 행동 중에서 악한 인물이 쓰고 있는 껍질을 벗겨 내는 것이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거지 중에 좋은 사람이 있고 능력이 있는 인물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물론 그중에 시정의 불량배 무리들이 섞여있다는 것도 의심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청나라 때에 왕도(王燾)라는 이름을 가진 거지는 부녀자들에게는 구걸하지 않았다. 대장부라 자부하면서 부녀자에게 구걸하는 것은 부끄럽다고 느꼈기 때문에 그랬을까? 아니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겨 묻자, 답했다. “부녀자는 이미 타인에게 빌붙어 살지 않소. 내가 어찌 또다시 부녀자에게 빌붙을 수 있겠소?” 거지에는 어중이떠중이가 다 모여 있기에 독특한 도덕의식을 가진, 유별난 사상을 가진 사람도 적지 않았다. 왕도의 인식은 괴이하다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봉건사회에서 부녀자의 경제적 지위가 자립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인식했던 것이다. 독특하지 않은가. 또 다른 의협 인격의 체현이라 볼 수 있다. 장걸아(張乞兒), 거지 단체와 어울리지 않았다 청나라 초기에 장걸아(張乞兒)가 있었다. 초릉(譙陵) 사람으로 옹정(雍正) 2년(1724)에 다리 한쪽을 절며 주가구(周家口) 시내에서 구걸하였다. 거지 단체와 어울리지 않고 강제로 얻어내려도 하지 않았다. 얼굴에는 가련한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밤이 되면 시내 서쪽 의총 옆 구멍에서 지냈다. 당시 사람들은 그 거지가 유별나다고 생각하였다. 왜 그런가? 그에게는 불량스런 면이 없었다. 한 번은 한 척이나 쌓인 많은 눈이 내렸다. 사람들은 그가 얼어 죽었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호사가가 눈을 치워보니 눈 속에서 편안히 잠자고 있지 않은가. 사람들은 앞 다퉈 그에게 먹을 거 입을 거를 건네주었으나 그는 거의 받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풍설을 막아줄 막을 쳐주겠다고 했으나 받지 않았다. 그는 사절하며 말했다. “나는 하늘과 땅을 집으로 삼고 있소. 막이 필요하지 않소. 황야에서 살며 새 옷을 입는다면 강도에게 주겠다는 것과 다름없소.” 사람들은 왜 그를 동정했을까? 장걸아가 다른 거지와 다르기 때문이었다. 사회를 소란케 하고 무뢰하게 굴며 의로움을 추구하지 않는 거지와 달랐기 때문이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 학사, 대만 정치대학교 중문학과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자로 『선총원(沈從文) 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 『재미있는 한자풀이』, 『수달피 모자를 쓴 친구(선총원 단편선집)』, 『음식에 담겨있는 한중교류사』, 『십삼 왕조의 고도 낙양 고성 순례』, 『발자취-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여정』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