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어머니와 벌이는 전쟁 중 가장 치열한 전투는 옷 입기와 벗기기다. 입고 또 입고 다시 껴입는 어머니를 상대로 벗기고 또 벗기는 나는 결국 두 손을 들고 만다. 완전한 항복이다. 오로지 안방에 앉아서 입기에만 집중할 수 있는 어머니의 수비 작전에 비해 나는 이방, 저방, 부엌, 마당, 개집, 쓰레기통 등 공격해야 할 대상들이 산재하다. 오늘 아침도 어머니는 웃옷 5벌, 아래옷 4벌을 입으시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콩 고르기를 하신다. 하기야 요즘 같은 날씨에 깨·조·고구마 밭에 앉아서 숨이 턱턱 막히도록 헐떡거리면서 김을 매던 일과 비교하면, 선풍기 두 대가 마주 서서 바람을 일으키는 거실에서 하는 소일거리란, 아이들의 소꿉장난에 진배없으리라. 아, 새벽같이 밭으로 나가서 불볕더위에 불한당처럼 뒤덮은 잡초들을 뽑다 보면, 온몸이 땀에 절어서 체열과 지열이 합쳐질 즈음 재열(매미)이 목청을 다해 위험을 경고하던 그때가 생각난다. ‘매앰 매앰 매앰, 지금 당장 땡볕과의 싸움을 중단하고, 어서 이 나무 그늘로 피신하시오. 그러다가 숨이 막혀서 쓰러지거나 죽을 수도 있음을 경고합니다. 맴 맴 맴'라고 급하게 울어대던 그 소리가 얼마나 고맙고 시원하던지..... 그제야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어머니를 따라 재빨리 일어나 허리를 펴면, 서늘한 바람을 일으키며 달려와 ‘어서 와, 물때야!’라고 소리치던 바다. 일찌감치 물질 채비를 하고 오신 어머니가 테왁과 망실이를 담은 구덕을 등에 지고 와랑와랑 바다로 달려가면, 뒤따라서 눈썹을 휘날리며 신바람 나게 언덕을 내달리던 우리들의 여름이여! 기상청의 일기예보에 의하면 오늘 현재 제주도에는 폭염특보가 발효 중이며, 최고 체감온도가 33도 이상(제주도동부 35도 이상)으로 올라서 가혹하고 지독하게 무덥겠단다. 더욱이 당분간은 전국 대부분 지역에 열대야가 나타나겠으니 건강관리에 유의하란다. 국가기관의 국민에 대한 당부에도 불구하고 며칠 전부터 고장난 우리집 에어컨은 성수기의 대기행렬이 무려 일주일 이상 길어져서 목요일이나 되어야지 담당기사가 방문할 수 있다는 비보 앞에 그저 죄송할 뿐이라고 묵묵부답 고개를 떨구고 있다. 어찌할 것인가? 게다가 각종 매체들은 ‘기온이 30∼32도일 때 사망자가 급격히 증가하여 36도가 되면 30도일 때보다 50% 증가한다. 특히 고령자, 노약자 및 어린이 등이 체력적으로 적응이 힘들기 때문에 피해가 상대적으로 크며, 65세 이상 노인은 일반인에 비해 폭염에 4배 이상 더 취약하다’라며 오늘은 꼼짝 말고 집에 있으라 한다. 이런 날은 집에서 허송세월을 할 수밖에 없을 터. 김훈의 산문집 ‘허송세월’을 펴니, ‘여름편지’란 제목이 가슴을 두드린다. ‘책을 읽다가 눈이 흐려져서 공원에 나갔더니 호수에 연꽃이 피었고, 여름의 나무들은 힘차다. 작년에 울던 매미들은 겨울에 죽고 새 매미가 우는데, 나고 죽는 일은 흔적이 없었고 소리는 작년과 같았다./호수의 물고기들 중에 어떤 놈은 내가 물가로 다가가면 나에게로 와서 꼬리 치는데, 아 저 사람 또 왔구나, 하면서 나를 알아보고 오는 그놈이라고 나는 믿는다/여름 나무들은 이제 막 태어난 시간과 공간 속에서 빛났다. 나무들은 땅에 박혀 있어도 땅에 속박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김훈의 여름 편지는 스스로에게 쓴 것이다. 이 무더위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자기에게 편지를 쓰기란, 그만한 저력이 있는 유명 작가에게나 가능한 일이 아닐까. 노인의 초입에 서서 깜박거리는 기억력의 한계를 절감하는 나에게, 편지란 쓰기보다 받을 때가 좋다. 오늘 같은 날 나에게도 편지 한 통 날아든다면, 가슴 속으로 시원한 바람이 솔솔 들어올 터이다. 편지를 보내지 않았으니 올 리도 없겠지..... 혹여 하는 마음으로 인터넷 바다에 들어가서 낚싯대에 ‘여름 편지’를 드리워본다. 아하, 이혜인 수녀님의 편지가 그분을 닮은 미소를 머금고 살며시 고개를 든다. '움직이지 않아도 태양이 우리를 못 견디게 만드는 여름이 오면, 친구야, 우리도 서로 더욱 뜨겁게 사랑하며, 기쁨으로 타오르는 작은 햇덩이가 되자고 했지?/산에 오르지 않아도, 신록의 숲이 마음에 들어차는 여름이 오면, 친구야, 우리도 묵묵히 기도하며, 이웃에게 그늘을 드리우는 한 그루의 나무가 되자고 했지?’라고 속삭이면서. 7월 22일 중복을 사흘 앞둔 여름날 정오에 어머니와 나는 선풍기 두 대가 요란하게 돌아가는 거실에 앉아서, 어찌하면 이 더위를 버텨낼 수 있을까 근심스레 서로의 얼굴을 살피면서 눈동자를 맞춰본다. 어머니에게 이 여름은 어떤 의미일까? 혹여 마지막은 아닐까? 요즘 들어 어머니가 뜬금없이 “니네 아방은 어디 가시니?”라고 물으시니, 그때마다 무심한 가슴을 밀치면서 써늘한 기운이 스며든다. 그래 이럴 때 아버지로부터 편지가 날아든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버지가 볼티모어 공원에 묻힌 지도 어언 22년. 그래 아버지가 보내온 지난여름의 편지를 찾아보자. 그동안 모아둔 수십 통의 편지들이 색 바랜 봉투에 담겨서 저마다의 추억을 그려내고 있다. 세상에! 그중에서 유독 봉투가 누렇게 되어 오래된 이야기가 담겨 있을 듯한 게 시선을 끈다. 1988년 소인이 찍힌 아버지의 편지에 낚시 바늘이 꽃혀 있다. 세상에! ‘날 좀 보소’하며 고개를 치켜드는 편지에는 미국으로 이미 가신 직후의 그리움이 뚝뚝 떨어진다. 아, 보고 싶은 우리 아버지. “정옥 앞 어제, 그러니 6월 8일자, 낚시질 갔다 와보니, 어머니가 ‘네가 전화해 왔더라’고 기뻐하더라. 나도 퍽 기뻤다. 고향에서 별 문제가 없다니 다행한 일이다. 이곳도 모두가 잘 지내고 있다. 그저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는 것 뿐이다. (중략). 그런데, 내가 좀 유치한 부탁을 하고 싶구나. 요는 일이 없어서 집에만 있자니 시간이 얼마나 지루한지 힘이 들어 낚시를 가는데....,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세월을 보내기 좋으니, 여름 내내 다녀볼 작정이다. 그런데 내가 한국에서 올 때 제주에서 낚시줄 200원어치를 샀다. 1개 10원이라면서 주인이 세어보지도 않고 그저 집어주는데, 한 50개가 되겠더구나. 이거면 하고서 왔는데, 써보니 너무 쉽게 떨어져 버려서, 여기 걸로 써보니, 아무래도 내 소견에는 한국산만 못하구나. 그러니 네가 미국 올 때, 내가 견본을 보내니, 꼭 이만큼 한 걸로 한 포만 사 가지고 오너라. 한 포가 약 1천원 될 거여. 큰 것도 말고 작은 것도 말고 맞추어 보고서 사기 바란다. 네 앞 길을 우리 하나님께서 늘 지키시고 돌보고 계시기를 믿고 기도한다. 머지않은 시간에 만나서 즐겁게 대화하자. 6.9일, 父 書.” 이 편지를 읽어드리는 동안, 눈가에 이슬이 가득하도록 그리움이 가슴 저린 어머니가 편지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리신다. “이 종이도 미국에 갔다 왔구나.....” 아버지의 손때가 묻은 그 편지가 부럽기라도 한 듯 어머니는 한참 동안 쓰다듬고 안아도 보고, 낚시를 소중하게 만져보신다. 아, 부부란 죽음도 갈라놓을 수 없는 영원한 사랑의 화신이로다. “정옥 앞 3일 전 네 편지를 잘 받아보았다. 강씨 사진도 받아서 본인한테 우송했으니 오늘쯤 도착할 것이다. 어머니는 네가 옷을 여러 벌 사서 보내주니 너무도 좋아서 입을 때마다 고마움을 느낀다. 금년 내로 네가 미국으로 와서 원하는 공부를 계속하고, 우리의 기대를 이루어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드린다. 이곳 식구들도 다 평안하고 잘 지낸다. 어머니는 직장(교포가 운영하는 군복 공장)에 나가는 것이 매우 즐거운 것 같다. 미국에도 한 차례 비가 내려서 대지를 푸르게 하여서 한시름 놓게 되었다. 고향 소식을 자주 전하여 주렴. 여기서는 편지라는 불편이 그만저만 아니다. 영준 엄마나 아빠가 차로 가서 부쳐주지 아니하면 아니 되는 형편이니, 그리 알고 고향에서 자주 편지하여 주기 바란다. 내가 온 지 벌써 20일이 지났는데, 네 소식밖에 못 받았다. 서로 언니들한테 연락해서 편지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이모가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몸이나 편안한지 전해주렴. 네 어머니가 무척 궁금해 하는구나. 다음 소식 기다리며 이만 쓴다. 8월 1일, 父 書" 여기서 강씨는 어느 목사님의 소개로 나와 맞선을 보기로 약속된 볼티모어의 교포 청년이다. 무슨 영문인지 내 사진을 받았을 그로부터는 감감 무소식이었다. 학교 내 한국인 교수는 나를 보자 뜻밖의 장담을 하였다. “서른이 넘어서 혼자 유학을 왔다면, 실컷 놀아도 석사는 문제 없을 터. 노는 게 남는 것이다” 그의 예언처럼 1년 4개월만에 MBA(경영학 석사)를 마친 나는 졸업을 하자마자 귀국해 복직하였다. 은행원으로. 이 결정은 내 인생의 가장 잘못된 판단으로 ‘인생에 3번 기회가 온다’는 시쳇말 중 한 번에 해당하는 거였으니.... 인생을 돌아보는 노년에 이르러 나는 솔직해지고 싶고, 청년들에게 나의 실패 사례를 전해주고 싶은 것이다. 지금 나에게 중요한 현안은 어머니와 내가 어떻게 이 무더위를 잘 견뎌낼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 글을 마칠 즈음 어머니는 국수에 옥돔을 얹어서 점심을 완료할 것이다. 어머니는 늘랜내(비린내) 나는 것만 있으면 어떤 장애나 문제도 이겨내고 밥 한 그릇을 뚝딱 드실 수 있다. 해녀 출신인 어머니에게 생선이나 게장은 밥도둑인 셈이다. 부디 오늘도 무사히... 그리고 이 글을 마치고 섶섬 앞으로 나가서 바다에게 여름 편지를 들려줄 수 있기를 빌어 본다. 아버지가 보내주신 여름편지를!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허정옥은? = 서귀포시 대포동이 고향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뭍으로 나가 부산대학교 상과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하고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미국 볼티모어시에 있는 University of Baltimore에서 MBA를 취득했다. 주택은행과 동남은행에서 일하면서 부경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이수했고, 서귀포에 탐라대학이 생기면서 귀향, 경영학과에서 마케팅을 가르치면서 서귀포 시민대학장, 평생교육원장,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3년간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의 대표이사 사장과 제주컨벤션뷰로(JCVB)의 이사장 직을 수행한데 이어 제주평생교육장학진흥원장을 거쳤다. 현재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서비스 마케팅과 컨벤션 경영을 가르치고 있다. 한수풀해녀학교와 법환좀녀학교도 다니며 해녀로서의 삶을 꿈꿔보기도 하고 있다.
‘옜다’하고 던져 주는 음식은 먹지 않는다 중국에 “‘옜다’하고 던져 주는 음식은 먹지 않는다”는 유명한 전고가 있다. 모욕적인 베풂은 받지 않는다는 말로, 멸시하거나 모욕적인 보시는 결코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전고는 『예기(禮記)·단궁(檀弓)』에 기록돼 있다. 춘추시대 때에 제(齊)나라에 큰 기근이 들었다. 식량이 부족하여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에 쓰러졌다. 검오(黔敖)가 길가에 음식을 늘어놓고는 지나가는 배고픈 사람을 기다렸다. 하루는 굶어서 부황이 든 사내 한 명이 찾아왔다. 너덜너덜한 옷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다 해진 짚신을 신고 있었다. 지팡이에 의지한 그의 몸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 모습을 본 금오가 왼손에는 밥, 오른손에는 마실 것을 들고 사나이에게 거만한 태도로 말했다. “이봐라, 이리 와서 이걸 먹어라.” 그러자 사내는 오히려 굶주림을 잊은 듯 허리를 쭉 펴고 머리를 곧추세운 후 검오를 매섭게 쏘아보면서 자못 경멸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이런 차래지식(嗟來之食) 따위를 먹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꼴이 되었다. 가짜 선심은 그만두어라”하고는 그대로 가버렸다. 금오는 황급히 그 사나이를 뒤쫓아 가서 자신의 무례를 사과하고 음식을 받아주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사나이는 결코 음식에 손을 대려 하지 않았다. 끝내 굶어죽었다. 이렇듯 곤경에 빠졌으나 지조를 잃지 않는 거지처럼 의사(義士)와 같은 부류가 사림에도 있었다. 예를 들어 전국시대에 제(齊)나라 은사 검루(黔婁)가 그랬다. 그는 가정 형편이 빈한했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제나라, 노(魯)나라 국군이 내리는 하사품도 받지 않았다. 죽은 후에 몸을 덮은 이불이 너무 작아, 머리를 덮으니 발이 삐져나왔고 발을 덮으니 머리가 삐져나왔다. 증자(曾子)가 문상 가서 상황이 그러한 것을 보고는 검루의 아내에게 말했다. “이불을 비스듬히 해서 염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검루의 아내가 말했다. “비스듬히 해서 여유가 있는 것보다 바르게 해서 부족하게 하는 편이 낫습니다.” 이불을 옆으로 비스듬히 하면 머리와 발을 전부 덮을 수 있지만 다 덮을 수 없다하여도 비스듬히 하는 것보다 바르게 하는 것이 좋다는 말이다. 현(弦) 밖에 소리가 있다지 않는가. 말에 숨은 뜻이 있으니. 내포된 뜻이 깊고도 깊다. 사람들은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다’(以食爲天)고 하지 않던가. 백성이 살아가는 데에는 먹는 것이 가장 소중하다. 사인은 ‘쌀 다섯 말을 위하여 허리를 굽히지 않는다’지만 세상에서 화식을 먹지 않고 살아갈 수 있던가. 그렇기에 거지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다. 벼슬에 나가기 전에 걸식하며 살아가는 경험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다. 괴이한 빈사(貧士) 동경(董景) 진대(晉代, 266~420)에 가난한 사인이 있었다. 성은 동(董), 이름은 경(景), 자는 위련(威輦)으로, 어느 지역 사람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일찍이 농서(隴西) 계리(計吏)와 함께 낙양의 백사〔白社, 현 하남 언사현(偃師縣) 내〕에서 살았고 도학(道學)에 능했다. 진자서(陳子敍)가 그에게 도를 배웠다. 먹을 것이 없어 그는 늘 길거리에서 걸식하였다. 머리를 풀어 헤치고 얽매임 없이 자유롭게 행동하며 시를 읊었다. 조각난 풀솜을 얻으면 몸을 덮었다. 완전한 명주는 받지 않았다. 당시에 저작랑(著作郞) 손초(孫楚)1)가 편지를 써서 같이 지내거나 관직이라도 얻으라고 권했지만 거절하였다. 몇 년이 지난 후 어디로 갔는지 행방을 알 수 없었다. 그저 머물던 곳에 대나무 한 섬과 시 두 편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가난한 은사였던 동경은 차라리 길거리에서 걸식하면서 살지언정 벼슬길에 나가기를 원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한 시대의 괴인이었다. 그의 일은 괴사로 전해져 온다. 공(孔) 씨 아들, 무학무능 해 평생 거지로 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청대 옹정(雍正), 건륭(乾隆) 연간에 호남, 호북의 빈사(貧士)가 배움의 기회를 잃게 되자 밖에 나가 유학하였다. 서당이 보이면 들어가 훈장을 배알해 돈을 구걸하고 서당에서 밥을 얻어먹고 하룻밤 묵은 후 떠났다. 사방을 유랑하며 탁발하는 스님과 같았다. 지방의 재력가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이 공부하기를 원하지 않아 결국 거지가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청대 가경(嘉慶) 연간에 남회(南匯)현 주포(周浦)진에 돈 많은 공(孔) 씨가 살고 있었다. 만년에 아들을 얻으니 지나치게 귀여워했다. 여러 차례 스승을 초빙해 공부를 가르치려 했으나 수업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선생은 아무 일도 않으면서 밥을 먹기가 부끄러워 시 한 수를 썼다. “학당은 낡은 절 같아, 와서 주지승이 되었구나. 그저 하루 3찬, 환혼이며 등 한 잔. 경 읽는 소리 본래 들리지 않으니 불호를 무빙(無憑)이라 지었노라.” 어느 날, 선생이 공 씨 아들이 뜰에서 노는 것을 보고는 강제로 공부시켰다. 아들이 화가 나 욕을 하자 선생은 질책하며 꾸짖었다. 그러자 아들이 어머니에게 일러바쳤다. “선생이 나를 때렸어요. 반드시 보복하고 말거예요.” 어머니는 위로하며 말했다. “아버지가 돌아오시거들랑 다시 얘기하자.” 아버지가 밖에서 돌아와서는 아들을 교육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선생의 친한 친구를 초정하여 한 대만 맞아주고 참아달라며 선생에게 뇌물을 주었다. 아들이 성장했으나 무학무능 그 자체였다. 그저 밖에서 빈둥거릴 뿐이었다. 재산이 많으면 뭘 할 것인가. 빈둥거리며 앉아서 까먹으면 산이라도 말아먹지 않던가.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놀고먹으면 없어지나니. 많던 재산 다 사라진 후에는 어쩔 수 없이 길거리에서 구걸하며 죽을 때까지 살았다. 자식이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으랴, 모든 사람이 자식이 잘 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보다 사람구실을 할 수 있는 교육이 우선 아니겠는가. 익애하여 보호만 한 결과 거지로 전락했으니 슬픈 일이다. 지방 재력가 가문에서 태어났다하여도 거지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손초(孫楚. ?—293), 서진(西晉)시기의 태원(太原) 중도(中都) 사람으로 자는 자형(子荊)이다. 글 짓는 재주가 탁월하고 성격이 호탕하였다. 무리를 짓지 않았으며 의기양양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나이 40여 세에 진동군사(鎭東軍事)에 참여했다가 저작랑(著作郞)으로 옮긴 후, 남을 시기하고 도도하게 굴면서 알력을 조장하니 한동안 버려졌다. 나중에 부풍왕(扶風王) 사마준(司馬駿)이 옛 정을 생각해 참군(參軍)으로 기용했다. 혜제(惠帝) 초에 풍익(馮翊)태수를 지냈는데, 은거한답시고 ‘수석침류(漱石枕流 : 돌로 양치질하고 흐르는 물을 베개 삼는다는 뜻, 억지 부리는 것을 꼬집는 말)’한 이야기로 유명하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서양화가 백성원의 제5회 개인전이 제주시 아라갤러리(대표 이숙희)에서 신작 15점, 오브제 9점 등 총 24점을 가지고 2024년 7월 13일부터 7월 28일까지 2주간 열리고 있다. 제주를 시각혼합 기법으로 바라보는 백 화가는 새로움을 시도하기 위해 신촌을 미학적으로 방황하던 시절 만난 제2의 회화의 고향으로 여기고 있다. 백성원은 세계미술사에서 점묘법이라는 신인상주의 방법을 수용하면서도 제주적인 회화의 창작방법론으로 전환하려는 현대미술의 응용적인 개척자가 돼 고뇌하고 있는 작가이다. 오늘따라 신천의 기운이 리듬을 타고 맑은 기운이 느껴진다. <편집자 주> 그림은 마음 속 언어, 존재 드러내기 보는 것은 최고의 즐거움이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속엣 말을 해버리면 후련한 것과 같이 말이다. 아름다움에는 내면적 즐거움을 주는 황홀함과 감미로움이 숨어있는데 그림은 시를 읽으면 떠오르는 기쁨처럼 어떤 형태를 그려 바라보는 즐거움이 있다. 그것은 매우 감미로운 감정이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즐거운 미적 감정은 때로 신비롭기도 하다. 우리 인간에게는 어떤 영성(靈性)이 있다. 자신마저도 그 깊이를 모르는 창조적 본능이 그것을 일깨운다. 우리의 정신활동이 영혼이 깃든 행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창조적 본능에서 나오는 힘이다. 인간은 호모 파베르와 호모 사피엔스라고도 하는데 이 둘은 서로가 서로에게 높은 단계의 정신적 활동을 부여하는 역할을 했다. 그래서 문명사의 원조(元祖)를 이 둘의 결합인 노동이라고 하는 것이다. 예술의 창조적 본능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한 것도, 예술이 고결한 영혼의 활동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한 것도 이 노동 때문이었다. 미술은 그림이라는 언어로 말하는 방식이다. 회화를 ‘그림으로 된 시(詩)라고 하는 이유가 틀린 말이 아니다. 화가는 언어가 있어 자기를 표현하는 수단이자 소통의 역할을 수행한다. 바로 표현이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집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화가는 색깔과 형태가 있는 집에서 늘 지내고 있다. 그 집에는 포근한 색의 온화함과 터치의 격정적 감정도 살고, 냉철한 이성과 논리의 색깔도 같이 지내고, 점들의 서로 생동하는 강약의 리듬도 함께 있어서 열정적인 기운도 있다. 화가의 집은 다양한 감정의 벗들도 방문하고, 집에는 그 집의 독특한 성격도 풍기고 있다. 사람들이 자기의 집을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이용하면 변화가 가능한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가의 집은 실험실과 같아서 언제 어떤 결과를 얻을 지 알 수가 없다. 우리는 언제나 새롭게 꿈을 꿔야만 자기집을 확장할 수 있다. 때로는 익숙하지만 알지 못하는 미지의 감정, 생각치 못한 무의식의 모습에 이따금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전혀 다른 느낌의 나의 집 그림자에 놀라기도 한다. 화가들에게 목표가 있다면 평생 나의 언어로 말해보고 싶은 충동(compulsion)일 것이다. 충동은 창조적 본능을 자극시키는 긴장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화가들은 매력적인 긴장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때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마음속에 숨어있는 말을 고백하기 위해서이다. 말을 하지 않으면 자기 존재를 알 수가 없고, 오히려 다하지 못한 말을 찾아 표현행위로 나를 드러내려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다할 수 없는 말이 남아 있다. 그것은 자아를 찾기 위한 참을 수 없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욕망은 현재 자신에게 숨쉬는 것 중 가장 적극적인 활동인자(活動因子)이고, 존재에 대한 생존의 지평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현재 진행형인 자기 삶의 모습이기에 내가 무엇이고,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는 행위가 된다. 그래서 화가는 누가 뭐래든 수행자가 돼야만 한다. 나를 찾고 나를 바로 세우려는 존재, 그 수행하는 행위가 바로 존재자의 결과가 되면서, 쾌(快)를 누리는 현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림을 육필(肉筆)이라고 하는 것은 정신과 육체가 공동으로 만들어 낸 수행의 결과인데 보이는 행위가 보이지 않는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백성원의 수행적 회화(performative painting) 색 물감을 붓으로 바르게 되면 붓에 따라 터치들이 다르고, 화가 자신의 손의 힘에 따라 강약이 다르게 나타난다. 다양한 터치의 움직임에는 강약의 호흡처럼 감정이 따른다. 찍기와 긋기는 긴장과 흐름이 오로지 화가의 마음에 달려있다. 직선, 곡선, 자유곡선, 점, 점의 크기에 따라 혹은 당시 화가의 감정에 따라 화면의 분위기는 달라진다. 즉흥적 감정은 우연성이 많아서 화면의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데 그것을 멈춰야만 자신이 어디까지 온 것인지 알 수가 있다. 수행에는 변화무쌍한 동작이 병행된다. 백성원은 신인상주의(Neo-Impressionism) 분할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분할주의는 혹은 '분할묘사법'이라고도 하는데 오늘날은 점묘법(點描法)이라고 부른다. 한 화가가 어떤 유파의 영향을 받는 것은 처음부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기법을 찾는 실험적 시도로부터 점점 자신의 성격과 취향에 맞는 스타일로 이동하게 된다. 분할주의는 조르죠 쇠라나 폴 시냐크가 오그던 루드와 외젠 슈브뢸들의 이론에 따라 추구했던 19세기말 물리적 색채의 작용을 활용한 창작방법이다. 이 분할주의는 캔버스 위에 원색을 혼합하지 않고, 그대로 보색 점들만 찍어서 화면의 색상이 상호교감의 효과를 보는 회화기법으로 색채의 동시대비(simultaneous contrast of colors)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색채의 동시대비 현상이란 화면의 색점들이 감상자의 눈으로 보게 되면 색깔과 색깔이 서로 혼합하여 다른 색상으로 보이는 착시(錯視) 효과를 말하는 데 우리는 이를 눈에서 섞인 색이라고 하여 ‘시각혼합(visual mixing)’이라고 부른다. 이는 그림이란 느끼는 감정의 작용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점묘법이라고 말할 때, 색점(色點)이라는 표현행위 시각에서 보면 동양화에서 말하는 묵점(墨點)과 유사한데 쌀방울 점인 미점준(米點皴)과 빗방울 모양의 우점준(雨點皴)과도 유사하다. 물론 여기에 검은 색으로만 점이 찍힌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백성원이 점묘법을 선호하게 된 것은 색상들의 어른거리는 움직임이 대상을 볼 때마다 다른 감정들이 누적되는 것처럼 중첩되는 느낌을 강하게 받기 때문이다. 자신의 감정을 색 자체에서 찾는 구상화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내 감정이 마치 눈이 내리듯 중첩되는 느낌을 덮어씌우는 행위에서 찾는다. 고정돼 보이는 정지된 광경이 아니라, 계속 움직이고 꿈틀되는 유기체의 운동을 화면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화면의 움직움은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감정이 시시각각 다르듯이, 그의 점들은 크기에서 다르고, 점이 점 위로, 또는 꼬리를 늘이듯이 점점들의 사이사이와 그 위를 지나친다. 감정이 북돋았다가 서서히 눅여지는 것처럼 화면에 표현행위를 할 때마다 다른 느낌을 거듭 부여하는 것이다. 백성원은 색은 풍경을 재현하는 색이 아니며, 형태 또한 그와는 거리가 먼 실루엣의 불명확한 움직이는 형상이 된다. 대상을 볼 때마다 변화하는 감정의 색과 행위의 움직임을 화면에 중첩되도록 하는 작업을 한마디로 ‘수행적 회화(performative painting)’라고 말할 수 있다. 화면의 진행에서 감정이 꺼지지만 않거나, 혹여 감정이 식어버렸더라도 다시 새로운 느낌으로 감정이 되살아나게 되면 그 대상의 상태는 다시 그때의 다른 감정의 모습으로 변할 수 있게 한다. 대기의 변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화가 자신의 감정을 대상 위에 몇 번이고 입히는 것이다. 바라보면서 다르게 느끼는 그때그때 감정들이 바로 ‘중첩된 감각’의 실체가 된다. 중첩된 감각-신촌, 인간적으로 느껴보기 인간은 자연에서 타 생물과 다른 것이 없다. 단지 영장류라는 사실에서 특별하게 부여된 도구 사용, 인문과 문화의 차이가 어떤 포유류보다도 월등한 능력이 있다는 것뿐이다. 지금까지 호모 사피엔스의 지구 지배는 생물계의 폭압이기도 했다. 동물들은 자연적응에 놀라운 감각을 보여주지만 호모 사피엔스의 감각은 자연감각이 퇴화됐지만 오히려 문명적이면서 문화적으로 발달해 있다. 인간의 감각으로 돌아오면, 감각은 보통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이라는 오감(五感)으로 나뉘며, 시각은 색과 형태를 인지하고, 청각은 소리를, 후각은 냄새를, 미각은 맛, 촉각은 만져서 재질을 감지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감각 중에 시각을 말하는 것이다. 시각 감각은 어떤 대상을 보면서 끌림, 감탄, 즐거움, 쾌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한다. 회화 또한 시각 작용으로 느낄 수 있는 여러 감정들이 우러난다. 포근함, 서늘함, 투박함, 부드러움, 무서움 등 미추(美醜)의 감각이 있다. 니체의 표현대로 '이성은 감각들의 증거를 날조하는 원인이지만 감각들이 생성, 소멸, 변화를 보여줄 때 그것들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감각은 우리 몸의 실제 작용이므로 논리와 상상으로만 판단하는 이성의 밑바탕에 있기 때문이다. 밑바탕이 없이는 어떤 새로운 집도 기초가 불안할 수밖에 없다. 바로 백성원의 ‘신촌’은 감각의 중첩을 추구해온 작품들이다. 신촌은 제주의 해안가 마을이다. 사람들은 자연광 아래 마을이라면 되도록 빛이 해석해 낸 그대로 자연적인 색상의 풍경을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색이 빛의 작용 때문에 보이는 것이어서 한라산, 숲, 오름, 바다, 마을, 집, 돌담 등이 충실하게 재현하게 된다. 그렇지만 백성원은 신촌 풍경을 바라볼 때 순간의 인상(印象)을 중시 여긴다. 인상은 기억을 통해서 저장되지만 볼 때마다 계속 새로운 인상이 기억으로 중첩되는 것이다. 인상은 순간적인 감정을 동반하여 미추(美醜)의 감정으로 교차하기도 한다. 이런 감각의 중첩 상태는 감성적인 경험들이 다른 새로운 감각을 자극함으로써 숨어있는 감각을 일깨우는 것이다. 감각의 레이어(Layers)라고나 할까, 여기서 레이어란 기술적인 과정에서 쌓기처럼 처음의 것들이 그 위로 계속 겹쳐지는 현상을 감각에 빗댄 말인데, 처음의 느낌이 다시 기억으로 남아 또다시 다음 시각경험을 받아들인 기억과 더불어 새롭게 연계하는 혼합된 감정을 표현하는 창작방법을 의미하는 말이다. 백성원의 작법을 보면, 맨 처음 먹이나 아크릴 물감을 혼합하여 바탕에 드로잉 작업을 하고, 옐로우(황색계열), 마젠타(적색계열), 싸이안(블루계열)의 점들과 속도 있게 작은 선들의 율동이 마치 공간과 공간을 이어주듯이 즉흥적인 감정의 스펙트럼을 화면에 보여준다. 물감이 겹쳐짐은 경험적 인상의 시간을 나타내며, 색들의 하모니는 즉흥적인 즐거운 감정상태의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백성원의 이런 수행적 회화는 서양미술사에서의 점묘법을 몸이라는 물리적 동작과 결합시킨다는 점에서 몸의 기호가 만드는 표현의 특징을 내포하고 있다. 먼저 화면은 자연에서 생명력의 대상을 찾고, 분할된 많은 점들을 그 드로잉된 대상 위에 찍으면서, 다시 그 위로 점들이 눈발같이 내리는데 그때 바람이 불어와 그것을 흐트리듯 점들이 거듭 쌓이고 서로 교차한다. 사실 중첩은 반복이 아니다. 새로운 것 위에 다시 씌움이다. 이 덧씌움은 아래 것이 덮여서 보이지 않지만 여기저기 새어 나오고 그 안에 겹으로 존재한다. 사라지는 것은 퇴화이다. 우리는 영원히 소멸되기 전에 그것을 되살리는 새로운 관계를 물색해야만 한다. 부단한 수행은 새로운 개념으로 되살아나는데 이는 백성원에 의해서 서구 미술사조로만 남게 되는 분할주의 미학이 제주 신촌에서 변형된 형태로 부활하고 있다. 이렇듯 백성원은 달라지는 화면의 기억들로 제주 해안 마을 신촌 풍경을 통해 퇴화된 인간의 감각을 되찾고자 한다. 바로 그의 감각은 끊임없이 덧씌워지는 시각적 욕망으로 미추를 넘나들면서 몸의 언어로 표현되고 있다. 신촌에서.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유정은? = 최남단 제주 모슬포 출생이다. 제주대 미술교육과를 나와 부산대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술평론가(한국미술평론가협회), 제주문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제주의 무신도(2000)』, 『아름다운 제주 석상 동자석(2003)』, 『제주의 무덤(2007)』, 『제주 풍토와 무덤』, 『제주의 돌문화(2012)』, 『제주의 산담(2015)』, 『제주 돌담(2015)』. 『제주도 해양문화읽기(2017)』, 『제주도 동자석 연구(2020)』, 『제주도 산담연구(2021)』, 『제주도 풍토와 문화(2022)』, 『제주 돌담의 구조와 형태·미학(2022)』 등이 있다.
고광표 작가의 '돌하르방이 전하는 말'은 제주의 상징이자 제주문화의 대표인 돌하르방을 주인공으로 내세웁니다. 석상 '돌하르방'을 통해 '오늘 하루의 단상(斷想)'을 전합니다. 쉼 없이 달려가는 일상이지만 잠시나마 생각에 잠기는 순간이기를 원합니다. 매주 1~2회에 걸쳐 얼굴을 달리하는 돌하르방은 무슨 말을 할까요? 독자 여러분의 성원을 기다립니다./ 편집자 주 "경허지 맙서" (그러지 마세요) “Don't do that” ☞ 고광표는? = 제주제일고, 홍익대 건축학과를 나와 미국 시라큐스대 건축대학원과 이탈리아 플로렌스(Pre-Arch)에서 도시/건축디자인을 전공했다. 건축, 설치미술, 회화, 조각, 공공시설디자인, 전시기획 등 다양한 분야로 활동하는 건축가이며 예술가다. 그의 작업들은 우리가 생활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감정에 익숙한 ‘무의식과 의식’ 그리고 ‘Shame and Guilt’ 등 현 시대적인 사회의 표현과 감정의 본질을 전달하려 하고 있다.
단백질은 생체 내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물질이다. 단백질은 20종류의 아미노산으로 구성되는데, 단백질을 건물에 비유하자면 아미노산은 건축에 필요한 벽돌, 창문, 문, 타일 등등의 다양한 재료로 보면 될 것이다. 현실에서도 건물에 들어가는 재료가 거의 같음에도 크기, 모양, 기능이 각각 다른 건축물이 지어지는 것은 설계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즉, 같은 재료를 가지고 건물을 세우더라도 설계도에 따라 학교가 될 수도 있고 공장이나 아파트가 될 수도 있다. 생체에서 단백질을 만드는 설계도의 역할을 하는 것이 유전자인 DNA이다. 유전자에는 어떤 아미노산을 어떻게 연결하여 어떤 단백질을 만들지에 대한 모든 정보가 들어있다. 설계도(유전자 DNA)에서 필요한 부분을 일부 복사한 것이 전령 RNA이고, 여기에 있는 정보를 인부(운반 RNA)들이 해석하여 정해진 위치에 맞는 재료(아미노산)를 차곡차곡 쌓아 올리면 건물(단백질)이 되는 것이다. 설계도가 저절로 건물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재료도 필요하고 공사를 하는 인부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DNA에 있는 모든 정보가 단백질을 만드는데 이용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인체의 세포 수는 약 60조로 알려져 있고, 모든 세포들은 같은 유전자를 가진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 수정이 된 하나의 세포로부터 모든 인체 세포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같은 유전자를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기 때문에 범죄 현장에 떨어진 머리카락 유전자를 분석하는 것만으로 범인을 잡을 수 있는 것이다. 한 개체의 모든 세포는 같은 유전자를 갖지만 세포에 따라 만들어지는 단백질이 다르기 때문에 각기 하는 일도 다르다. 예를 들어 시각 세포는 보는 역할을 하고, 후각 세포는 냄새 맡는 일을 하는데 서로 모양, 크기, 기능이 완전히 다르다. 눈 세포와 코 세포는 모두 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지만 분화 과정을 거치면서 각 세포의 기능에 맞도록 특화된다. 눈 세포는 눈에 필요한 유전자만 풀어놓고 나머지는 닫아버림으로써 눈의 기능을 하는 단백질만 선택적으로 만드는데 이것을 유전자 발현이라고 한다. 즉 눈 세포는 세포 생존과 보는 기능에 관련된 DNA(설계도)만 복사가 가능하도록 열어 놓고 나머지는 금고 속에 넣어 잠궈 버리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가 병에 걸리는 대표적인 이유는 외부에서 적이 침입했는데 이겨내지 못해서이다. 체내에 바이러스나 세균이 들어 왔는데 우리 면역 체계가 이기지 못하면 병에 걸리게 되는데, 인류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백신, 항생제, 항바이러스제를 개발하였고 이는 인류의 수명을 획기적으로 늘려주었다. 외부의 적뿐만 아니라 내부의 문제에 의해서도 병이 발생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상처가 나면 피부 세포가 증식하여 상처 부위를 덮으면 낫겠지만 다 덮고도 그치지 않고 계속 증식하면 암 덩어리가 된다. 정상적인 세포는 필요한 만큼 증식되면 유전자를 잠궈서 세포 증식에 관련된 단백질이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도록 하고, 암 억제 유전자에 의해 세포 증식을 억제하는 단백질이 만들어져 세포 증식을 꼭 필요한 만큼만 하고 중단한다. 세포증식 유전자에 이상이 생겨 조절이 되지 않으면 암 유전자가 되는 것이고, 암 유전자에 의해 세포 증식에 관련된 단백질이 계속 만들어지면 결국 암으로 진행된다. 이렇듯 유전자에 이상이 있거나 약한 유전자가 있으면 내부의 문제로 생기는 병에 취약해진다. 물론 환경, 식습관 등의 다양한 요소가 관여하지만 암뿐만 아니라 당뇨, 고지혈증, 고혈압, 통풍, 면역질환 등도 유전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주위에 어르신들 중에 흡연을 즐기는데도 큰 병 없이 장수하는가 하면, 담배를 전혀 피우지 않는데도 주방에서 발생하는 미세먼지로 인해 폐암에 걸리는 주부도 있다. 사람마다 암 유전자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암에 걸리는 확률이 다른 것이다. 암 유전자가 취약한 경우에는 소량의 발암물질에 노출되더라도 방아쇠로 작동하여 암을 유도할 수 있기 때문에 발암 물질에 노출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내 유전자가 어떤 질병에 강한지 또는 약한지 모르기 때문에 올바른 식습관을 유지하고 일상 생활에서 위험 요인을 제거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유전자를 파악하면 어떤 질병에 취약한 지 알 수 있기 때문에 한 생명체의 전체 유전자를 연구하는 유전체학(genomics, 제노믹스)이 필요하게 되었다. 개인의 유전체 분석을 통해 특정 유전자 변이나 유전자 상호작용이 암, 당뇨, 심혈관계 질환 등과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는지 파악함으로써 개인 맞춤형 예방 및 치료 방법을 개발하는데 적용할 수 있다. 하지만 단백질 발현, 유전자-유전자 상호 작용과 다양한 환경 요인 또한 질병 발생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유전체 연구만으로는 질병 발생과의 인과 관계를 완벽하게 설명하는 것이 어렵다. 따라서 이를 보완하기 위해 생체 내의 모든 단백질을 분석하여 연구하는 단백질체학(proteomics, 프로테오믹스)이 부각되고 있다. 건축에 빗대어 보면, 유전체학은 설계도를 연구하는 것이고, 단백질체학은 건축물을 연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인간의 유전자 수는 약 2만~2만5000개로 알려져 있고, 단백질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은 100만개 이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가지고 있는 설계도에 비해 지어지는 건축물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다. 예를 들면, A빌딩과 B빌딩의 설계도는 각각 하나씩 존재하지만 A빌딩 1층의 설계도와 B빌딩 2층의 설계도를 조합하면 새로운 2층 건물을 만들 수 있듯이 한정된 설계도만으로도 다양한 건물을 지을 수 있다. 또한 설계도에 따라 10평짜리 방을 만들더라도 집기, 기구나 표지판에 따라 강의실이 될 수도 있고 카페나 휴게실이 될 수도 있다. 이렇듯 단백질은 유전자의 정보를 기반으로 만들어지지만 유전자 수에 비해 월등히 많은 종류의 단백질이 존재하게 된다. 생체 내에서 다양한 생화학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은 유전자가 아니라 단백질이기 때문에 단백질체를 연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설계도가 없는 건축물이 있을 수 없듯이 유전자가 없다면 단백질도 만들어 지지 않는다. 따라서 한 생명체에 다른 개체의 유전자(설계도)를 도입하여 발현할 수 있게 하면, 그 생명체는 원래 만들지 못했던 다른 개체의 단백질(건축물)을 만들 수 있게 되는데 이것이 유전공학이다. 예를 들면, 어린 아이들의 키를 크게 하는 성장 호르몬은 단백질인데 생체에서 매우 소량 만들어진다. 우리 애의 키를 키우기 위해 다른 아이들로부터 혈액을 뽑아 성장 호르몬을 얻어내는 것은 윤리적으로도 기술적으로도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현재 성장 호르몬이 시판되어 병원에서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사람의 성장 호르몬을 만드는 유전자를 분리하여 미생물의 유전자에 끼워 넣음으로써 미생물로 하여금 사람의 성장 호르몬을 만들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인슐린, 항체, 백신 등이 만들어지고, 또한 제초제 내성 콩과 같은 GMO로 불리는 유전자 재조합 농산물도 생산된다. 유전자(설계도)에 이상이 생기면 지어지는 건축물(단백질)도 잘 못 되기 때문에 기능을 못하거나 떨어져서 병에 걸리게 된다. 예를 들면, 혈액에서 산소를 운반하는 헤모글로빈(단백질)의 유전자에 변이가 생기면 제대로 된 헤모글로빈이 만들어 지지 않아 산소 운반 능력이 떨어지는 겸상적혈구 빈혈증에 걸리게 되는데 이는 철분을 먹는다고 낫는 것이 아닌 유전자의 결함에 의해 발생한 유전병이다. 내가 이러한 유전자를 가졌을 경우 정상적인 유전자를 가진 배우자와의 결혼을 통해 내 자손은 이러한 결함을 극복할 수 있지만 내 자신은 유전자를 고치는 수 밖에 없다. 현재 암이나 난치성 유전질환, 류마티스 관절염과 같은 자가면역 질환에 유전자 치료가 시도되고 있다. 인체는 수십조개의 세포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어마어마하게 많은 세포의 유전자를 한꺼번에 치료하는 것은 쉽지 않다. 수 많은 세포에 특정 기능의 유전자를 집어 넣거나 목적 세포의 손상된 유전자를 잘라내고 수정하는 유전자 가위를 들여보내기 위해 인체에 해가 없는 바이러스나 운반체가 이용된다. 성인의 경우 수십조개 세포의 유전자를 치료해야 하는 반면 정자와 난자의 수정으로 만들어진 인간 배아는 초기에 16개 정도의 세포 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것만 유전자 치료를 하면 여기서부터 분화되어 만들어지는 수십조개의 인체 세포는 모두 치료된 유전자를 갖게 된다. 따라서 매우 드물기는 하지만 인간 배아에 유전자 치료를 시도한 사례가 있다. 인간 배아에 대한 유전자 치료는 법적, 윤리적, 과학적 제약으로 인해 시도 자체가 어렵고, 많은 규제와 규정을 따라야 하기 때문에 매우 제한적이다. 여전히 일부 과학자들은 인간 배아의 유전자 치료에 대한 유혹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 배아에 대한 유전자 치료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신의 영역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고 있다. 배아는 인간 생명의 초기 단계로 존엄성을 가진 생명의 형태이므로 배아에 대한 유전자 수정은 생명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행위로 인식될 수 있다. 또한 질병 예방 및 치료를 위한 인간 배아의 유전자 치료에 대해서도 윤리적인 문제가 제기되지만, 이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우수한 유전자를 갖도록 개량하거나 인간의 특정 능력을 강화하는데 유전자 수정이 시도될 수 있는데 이야 말로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심각한 윤리적 및 종교적 문제가 될 것이다. <끝> (연재를 마치며) 이제 14개월에 걸쳐 이어온 연재를 끝내려고 합니다. 식품과 바이오에 대한 이야기를 쉽게 쓴다고는 했지만 읽기에 어려운 부분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보아 주신 독자 분들과 미흡한 글을 실어 주신 <제이누리> 식구들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필자 주 ☞ 김동청 교수는? = 연세대 생화학과를 졸업했다. 연세대 대학원 생화학과 이학석사 및 서울대 대학원 농화학과 농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대상㈜ 중앙연구소 선임연구원, 순천제일대 조교수, 영국 캠브리지대 방문연구원, 성균관대 기초과학연구소 연구교수를 거쳐 현재 청운대 인천캠퍼스 화학생명공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식품기술사 자격도 갖고 있다.
‘사(士)’는 오래된 한자다. 한나라 때 허신(許愼)은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일하다, 섬기다(事)이다. 숫자는 일(一)에서 시작해 십(十)에서 끝나니 일(一)과 십(十)을 따랐다. 공자는 ‘십(十)을 미루어 일(一)을 합하면 사(士)가 된다’고 하였다.”라고 풀이하였다. 숫자 기록에서 퍼져 나온 ‘일하다, 섬기다(事)’가 본뜻이라 여겼다. 양백준(楊伯竣)의 『논어역주(論語譯注)』 통계에 따르면 『논어』 중에 단독으로 ‘사(士)’자 하나만 사용한 곳은 두 가지 상황이라 한다. 3차례는 일반 인사(人士)를 총괄하여 가리키고 있고 12차례는 일정한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거나 수양한 사람을 특별히 지칭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사(士)’자의 갑골문 원형은 뜻밖에도 생식 숭배를 상징하는 생식기로 보는 학자도 있다. 먼저 남자의 통칭으로 발전한 후, 나중에 사회에서 일정한 지위를 가지거나 수양한 사람을 가리키는 미칭으로 사용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이른바 사회에서 일정한 지위를 가지거나 수양한 사람은 중국문화전통 중 관직을 근본으로 삼아 귀한 것으로 여기는 관점인 관본위(官本位)의 전형적인 구현이다. 『논어·자장(子張)』에 “벼슬하면서 여력이 있으면 학문하고, 학문하면서 여력이 있으면 벼슬하라.” 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형병(邢昺)·소(疏)에서 “사람이 관리가 되어 자기의 직무를 행하고 유유하여 여력이 있으면 선황의 유훈을 배운다.”라고 풀이하였다. ‘사(士)’와 ‘사(仕)’는 통한다. ‘사(士)’는 일찍부터 중국사회의 계층이 되었다. 이른바 ‘사민’〔四民, 사농공상(士農工商)〕 중에서 가장 높은 사회 계층이다. 예를 들어 『구당서(舊唐書)·최융전(崔融傳)』에서 “사농공상(仕農工商) 넷은 직업이다. 배워서 높은 자리에 앉으면 사(仕)라 하고 토지를 개간하여 곡식을 심으면 농(農)이라 하며 기교를 부려서 쓸모 있는 그릇을 만들면 공(工)이라 하고 돈을 변통하여 상품을 팔면 상(商)이라 한다.”라고 하여 등급 구별을 설명하고 있다. 동시에 이 사회 계층은 벼슬한 자를 포괄하고 있을 뿐 아니라 벼슬을 구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평생 관직에 앉아보지 않은 사람인 은사(隱士), 신사(紳士)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그런 사람은 ‘관본위’ 제도 아래에서 파생된 ‘사(士)’의 부류로 모두 ‘아사(雅士)’라 자처하였다. 도연명(陶淵明)이 관직에서 물러나 전원으로 귀거래 했어도 결국 농, 공, 상 계층에 속하지 않고 3개 계층 위에 있는 ‘사(士)’의 부류에 떠있다. 곤궁해진 사인이 세속에 영락하여도 그 ‘사기(士氣)’는 여전히 존재하였다. 한어 단어 중에 ‘사자(仕子)’, ‘사호(仕戶)’, ‘사녀(仕女)’, ‘사림(士林)’, ‘사문(仕門)’, ‘사빈(仕貧)’, ‘사은(仕隱)’ 등은 ‘사(士)’가 중국사회에서 특정한 계층에 속했다는 역사의 반증이라 하겠다.1) 사림(士林), 즉 사대부 계층이 아사로 자처한다. 그런데 일단 가난해져서 초라하게 되거나 재난을 당하여 곤궁해지면 일순간에 지위는 천 장이나 떨어져 사회 저층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것이 사인이 가장 고통스러워하고 두려워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에 상응하는 많은 피휘(避諱) 언어가 존재한다. 가난〔빈(貧)〕을 “집이 본래 빈궁하다”, “자금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군곤(窘困)을 “절박하게 고통스럽다”고 말하고 빈사(貧士)를 “쑥 위에 머물고 흰옷을 입는 사인”이라거나 “콩잎을 먹는 사람”이라 부른다. 먹을 것이 없어 춥고 배고픈 것을 “배고프고 추워서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한 삶”이라고 말한다. 지극히 가난한 거지를 “벗고 다니며 초식한다” 말하며 거지를 “바가지를 사용해 구걸한다”고 말한다. 걸식하는 것을 “오원(伍員, 오자서)이 퉁소를 부는 것을 본받는 놀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송나라 때 임광(任廣)이 편찬한 『서서지남(書敘指南)』 권10의 ‘기한빈천(飢寒貧賤)’만 보더라도 옛 서적 중에 유사한 상용 어휘가 200여 종이나 된다. 그러나 인간세상은 상전벽해가 아니던가. 세상사는 몹시도 심하게 변한다. 세간 풍운의 변화가 무궁하다고 말할 필요 없이 한 시기 제왕 옆에서 영예롭게 영광스런 은총을 다툰다하여도 ‘군주를 모시는 것은 호랑이 옆에 있는 것과 같다.’ 하물며 많고도 많은 사림이야 더 말할 나위 없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뒤엎어 버릴 수도 있다하지 않는가. 사림 중에 있으면서 지위를 얻거나 재야에서 수양하거나, 그리 지내다보면 근본을 지지하고 있던 지위를 잃고 민간 하층 사회로 떨어지거나 심지어는 거지로 전락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호랑이도 평지에서는 개에게 물리고 털이 빠진 봉황은 닭보다도 못하듯이 권세가도 일단 지위를 잃으면 약한 자도 넘보게 되는 법이다. 사인이 거지로 전락하여 달갑지 않게 사회 저층에 머물게 되면 처참한 지경에 빠지는 게 당연하다. 제왕조차도 거지와 인연이 있는데 하물며 일인지하의 사림에 있는 사람들이야 말하며 무엇 하겠는가. 그런 사람은 부지기수다. 기연이 많고도 많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종관해보면 아사와 거지는 직접적인 관련을 맺는 경우가 많다. 일반적으로 다음 몇 가지 유형이 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한어 단어 중에 ‘사자(仕子)’는, 벼슬한 사람 ; ‘사호(仕戶)’는, 벼슬한 집안 ; ‘사녀(仕女)’는 귀족 부녀자 ; ‘사림(士林)’은, 사대부 계층 ; ‘사문(仕門)’은, 벼슬한 가문 ; ‘사빈(仕貧)’은 곤궁해 벼슬에 나아가 봉록을 받다 ; ‘사은(仕隱)’은 출사하고 은퇴하다 뜻이다. 이 단어들은 ‘사(士)’가 중국사회에서 한 계층에 속했다는 역사의 반증이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세상이 좁다’는 건 매스컴의 세계에 더 적합한 말이 아닐까. 적어도 이 글을 게재해 온 <제이누리>에 관한 한은, 그렇지 않을까 싶다. 그동안 어머니의 백세 일기를 여기에다 기록해 온 건, 순전히 어머니를 요양보호하면서 함께 버텨내는 삶이 버거운 탓이었다. 기실은, 어머니가 요양원의 주간보호(아침 9시~오후 5시)에 다니는 동안 몇 차례의 긴급 호출이 있었다. 내용은 ‘아무래도 병원에 모시고 가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것인데, 정황은 돌봄에 대한 애로와 곤란의 우회적 표현이었다. 주간보호는 활동력과 인지력이 단체 생활에 가능한 정도라서 사회복지사 한 사람이 여러 어르신을 돌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머니처럼 손이 많이 가는 경우는 요양원에 입소해서 생활 전반을 전적으로 기관에 의존하는 게 적절하다. 다만 비용도 많이 요구되고, 집을 떠나야 하는 문제가 걸림돌이다. 더욱이 어머니는 ‘요양원에 보내지 않기’를 약속하고 한국으로 모셔 왔다. 보통 미국에서는 노인이 아프다 해서 병원으로 갔는데, ‘요양원으로 옮겼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얼마 없어 장례식장의 부고장이 날아든다. 바로 이 ‘병원-요양원-장례식장’의 루트가 어머니에게는 가장 견디기 힘든 미국 생활의 두려움이었다. 어쩌면 다니던 직장을 은퇴할 즈음, 내 손에 가장 먼저 잡혀들어온 게 요양보호사표준교재였음도 이 때문일 것이다. 평균 합격률이 90%에 달하는 요양보호사 시험은, 가족요양과 일자리를 동시에 해결해 주는 비결이었다.(실은 어느 요양원에 입사해 1주일쯤 근무를 하면서 요양원의 일상을 경험할 수 있었는데, 거동의 자유가 없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들어갈 때 2층이나 3층에 배정되면, 거의 그 자리가 생명이 꺼지는 날까지 고정석이 되었다. 1층으로 내려와서 땅을 밟아보는 일이란 도무지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 같았다. 우리 어머니처럼 농사를 짓고 물질을 하면서 몸이 재빠르고 손발이 부지런한 사람에게, 요양원이란 그야말로 갇혀 지내는 감옥소나 다름없을 터였다. 요양병원을 일컬어 노인들 시체보관소란 말이 떠도는 현실 또한 이러한 상황을 암시하는 말이 아닐까.) 어느덧 어머니와 함께 살아온 지 22년. 아버지를 미국의 볼티모어 공원묘지에 매장하던 날, 땅속으로 들어가는 관을 얼싸안고 함께 묻히려는 어머니를 끌어내어 함께 돌아온 게 엊그제만 같다. 그동안 80세 어머니는 102세가 되셨다. 처음 10년 동안은 마치 서정주 시인의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님’처럼 살림과 육아의 자리를 담담하게 감당하셨다. 아이들은 “할머니 김치찌개가 최고!”라며 엄지척을 하였고, 삶의 생기를 회복하신 어머니는 마치 미국으로 이민 가시던 60대 초반의 제주 여인으로 되돌아왔다. 물때가 되면 바당으로 나가서 보말을 잡으셨는데(그때는 동네 사람들이 썰물이 진 바다로 나가서 보말을 잡는 게 허용되었다), 그 바당 덕분에 어머니의 귀향은 급속히 제 자리를 잡는 듯 순조로웠다. 또한 전 재산을 팔고서 이민을 떠났던 어머니를 위해, 자녀들이 힘을 모아 고향 땅처럼 친근해 보이는 밭뙤기를 하나 사드렸다.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마을 안의 감귤밭은, 비탈진 게 미안한지 햇볕과 바람을 야무지게 끌어들였다. 눈을 뜨면 밭으로 가서 잡초를 뽑고, 물때가 되면 바다로 가서 보말을 잡는 사이, 어머니의 슬픔은 일상 속으로 스며들며 잦아들었다. 그 사이 마당의 잔디밭은 배추와 상추, 고추, 파 등이 자라는 우영팥(채마밭)으로 변했고, 집 주변의 바닷가는 칸나가 만발한 꽃밭이 되었다. 요즈음 올레꾼들은 이중섭 화백의 그림으로 유명한 ‘섶섬이 보이는 풍경’ 앞에서, 파도와 구름과 바람을 배경으로 칸나를 벗 삼아 사진을 찍는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하지만, 꽃 덕분에 사진 속 얼굴 위로 미소가 피어난다. 김종두 시인의 ‘제주여인 6’은 어머니의 젊은 시절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어두룩헐 때 일어낭(어스름에 일어나서), 물항 고득 물질어 나뒁(물항아리 가득 물을 길어 놓고), 솖아 낸 보리밥 혼 직 뜨는둥 마는둥(삶아 낸 보리밥 한 숟갈 뜨는 채 마는 채), 갈중이 걸치멍 빌레왓으로 내돌아십주(갈옷을 걸치면서 돌짝밭으로 내달렸습니다). 불벹 더위에 나앉앙(불볕 더위에 앉아서), 혼나절 지신검질 매당 보믄(한 나절 웃자란 잡초를 뽑다 보면), 4.3사태 때 죽은 아방(남편) 생각 남니께.’ 어쩌면 어머니는 그 질긴 잔디 뿌리를 캐내고 흙을 골라서 채소를 심으면서, 아버지와 함께 일하며 땀 흘렸던 시절- 주상절리를 에워싸고 도는 대포마을에서 농사짓고, 물질하고, 10명을 낳아서 2남 7녀를 키웠던 때를 떠올리셨는지 모르겠다. 어머니는 아홉 자녀 중에서 가장 당신의 도움이 필요한 나의 삶터에다 당신의 마지막 땀과 기도를 쏟으셨다. 한편, 어머니와 내가 살아가는 일상의 소소함이 누군가에게는 모녀의 특별한 사랑 이야기로 비칠 수도 있음을, 나는 눈곱만큼도 헤아리지 못하였다. 어머니의 요양보호사가 될 적에는, ‘그 삶이 서너 달쯤이나 이어질 수 있을까’하는 아쉬움이 내 삶을 통째로 차지했으니까. 아침에 일어나서 맨 먼저 하는 일이, 어머니의 기저귀를 갈아드리고, 따뜻한 물수건으로 온몸을 닦아드리는 거다. 옷을 갈아입히고 거실로 나와서 흔들의자에 앉혀드린 후 아침을 준비하는 동안, 어머니는 콩 고르기를 하신다. 까망·하양·주홍·노랑색 콩 중에서 같은 색깔의 콩을 별도의 그릇에 담아 놓는 게 작업이다. 그중에서 ‘주홍색 팥으로 저녁밥을 짓는다’는 게 나의 요구사항이고, 어머니는 부지런히 팥을 골라내신다. 마치 그 일이 당신의 존재 이유가 되는 것처럼 눈에 불을 켜고서 부지런히 손을 놀리신다. 안쓰러운 마음에 ‘이 일은 노는 것처럼 쉬엄 쉬엄 해도 되는 놀이’라고 이실직고를 해드려도, 어머니는 괘념치 않으시고 당신의 방식을 꿋꿋하게 밀고 나가신다. 그러저러한 일상을 <제이누리>에 실으면서, 내심 양심이 저려올 때가 있었는데, ‘어쩌면 어머니와 나의 생활이 글을 통해서 적당히 걸러지고 미화되고 있다’는 인식이었다. 이따금 어머니에게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머리를 감거나 목욕을 할 때는 시간을 지체하지 않으려고 대충 하기도 했으니까. 어쩌면 따뜻한 욕조 안에서 물장구도 치고, 머리는 여러 번 헹궈서 시원함을 만끽하고, 손과 발은 더 불려서 굳은살도 덜어내야 직성이 풀리실 터인데..... 그러나 이 모든 비리를 뒤덮고서 우리의 일상이 MBN의 특종세상이나 JTBC 등에 백세 어머니와 효녀의 아름다운 삶으로 묘사되었다. 그나마 이들은 짧은 에피소드 정도라서 적당히 넘어갈 만도 하였다. 하지만 지난 3월, KBS의 인간극장에서 ‘엄마의 102번째 봄’으로 송출된 어머니의 이야기는, 섶섬을 배경으로 펼쳐진 꿈결 같은 바다와 유채꽃이 무리 지어 흐드러진 들판, 고향 동네 친척과의 제주도다운 만남, 어머니의 전형적인 제주할망 역할로 인해 뜻밖의 고공행진을 기록하였다. KBS1에서 주도한 촬영이 KBS2에도 방영이 되어, 지나가던 올레꾼들이 어머니를 만나보기 위해 집으로 들어오기도 하였다. 90세 노모를 모시고 여행을 온 어떤 가족은, 어머니와 함께 사진을 찍으면서 장수를 기원하는 효심을 드러냈는데, 어머니는 십 년은 더 젊어진 함박웃음으로 내년을 기약하며 ‘나보다 더 오래 살라’는 덕담을 해주셨다. 또 어느 교수님은 ‘햇살이 그리울수록’이란 시집에서 ‘어머니’란 제목을 손수 골라 한지에다 붓글씨를 쓰고 와서 어머니께 선물하였다. ‘만약에 나에게도 다음 생(生)이 있다면, 한 번만 한 번만 더 당신 자식이 되고 싶지만, 어머니 또 힘들게 할까 봐 바랄 수가 없어라’는 내용이, 우리의 심금을 울려서 한동안 말을 잃게 하였다. 요즘 들어 어머니는 인간극장이 무색하게 심신이 쇠약해지셨다. 엊그제는 콩을 고르다가 바늘로 이리저리 찔러보더니, 속상한 듯 내던지며 푸념을 하셨다. “이 고매기는 아명해도 못 까키여게(아무래도 못 까겠다). 무사 잡앙 와시니(왜 잡아 온 거니)? 가져당 데껴불곡(가져가서 던져버리고), 다신 잡아오지 말라 이! 얼마 먹지 못허게 생겼져. 대포바당 고매기영 하영(많이) 틀리네. 경해도 혼 번 더 솖아그네 다시 열어보카 이(그래도 한 번 더 삶아서 다시 열어볼까)?” 오늘은 마당을 가리키며 기분 좋은 얼굴로 나를 부르신다. “호박잎이 어랑어랑 국 끓이민 좋키여. 고루 카 놩 끓이민 맛 이실 건디 이!(가루를 타 놓고 끓이면 맛이 있을 건데) 고루 어시민 쏠 씻은 튼물에 끓여도 좋은디(가루 없으면 쌀 씻은 뜨물에 끓여도 좋은데)....”라고 하신다. 아무래도 우리 어머니는 할 일이 있으면 기운이 나시는 게, 영락없는 제주도 할망이시다. 인간극장을 하고 나서부터 지나가는 사람들이 가끔 우리를 알아보고 아는 체를 한다. 미안스럽다. 어떤 분들은 나를 보고 효녀라 부르기도 하는데, 솔직히 민망스럽다. 본의 아니게 속이는 것도 같아서, 마음 한 켠에 그늘이 내려앉는다. 그러던 차에 문자가 한 통 날아들었다. ‘요즈음 어머니는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안부가 궁금합니다. 다시 소식을 읽을 수 있으면 하는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만....’이라고. 문득 ‘커튼콜’이란 말이 떠올랐다. 연극이나 음악회 같은 공연에서, 관객들이 찬사의 표시로 환성과 박수를 보내어, 무대에서 퇴장한 출연자를 무대의 막 앞으로 다시 나오게 하는 일이다.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어느 한 사람이 우리를 불러낸다면, 있을 때 잘해야 하는 일임이 분명하다. 오랜만에 이 자리로 돌아오고 보니, 어느새 봄이 지나 여름도 중반을 지나고 있다. 모처럼 돌아온 이 자리에 기대어서, 어머니가 올여름도 무사히 보내실 수 있기를 두 손 모아 빌어본다. 모녀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마음 기울여 들어주는 여러분들 덕택에, 오늘도 어머니는 열심히 콩고르기를 하신다. 마치 그래야만 당신의 하루에 밥 먹을 자격이 부여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어서 일어나서 호박잎을 따다가 밀가루를 풀어놓아 국을 끓여야 하겠다. 제주도 어머니들이 한결같이 추천하는 이 계절의 보양식, 호박잎국을.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허정옥은? = 서귀포시 대포동이 고향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뭍으로 나가 부산대학교 상과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하고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미국 볼티모어시에 있는 University of Baltimore에서 MBA를 취득했다. 주택은행과 동남은행에서 일하면서 부경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이수했고, 서귀포에 탐라대학이 생기면서 귀향, 경영학과에서 마케팅을 가르치면서 서귀포 시민대학장, 평생교육원장,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3년간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의 대표이사 사장과 제주컨벤션뷰로(JCVB)의 이사장 직을 수행한데 이어 제주평생교육장학진흥원장을 거쳤다. 현재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서비스 마케팅과 컨벤션 경영을 가르치고 있다. 한수풀해녀학교와 법환좀녀학교도 다니며 해녀로서의 삶을 꿈꿔보기도 하고 있다.
곧바로 두 사람에게 금란전(金鑾殿)에서 배를 올리도록 하였다. 예를 마치자 황제가 말했다. “너처럼 뛰어난 사람은 거지 중에는 물론이고 관리 중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과인이 그런 훌륭한 점을 보고서 어찌 발탁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지금 곧바로 이부에 명해 네게 청환(淸宦) 요직에 앉히려 한다. 백성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고 거지들에게도 의를 중하게 여기고 재물을 가볍게 보는 풍조를 강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자 ‘궁불파’ 고개 숙여 절하며 말했다. “만세이시여, 다른 하사품은 얼마든지 감사히 받겠사옵니다. 단지 이 일만은 명을 받기 어렵나이다. 의관은 조정의 진귀한 기물입니다. 어찌 거지에게 쉽게 하사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거지가 된 후 10년 동안 천하를 두루 돌아다녔습니다. ‘궁불파’가 유명한 거지임을 모르는 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일단 관을 쓰고 띠를 둘러 벼슬아치 사이에 서면, 사람들이 관복을 더러운 기물로 보게 되고 봉록을 먹다 남은 찌꺼기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거지 중에 현자와 어리석은 자가 섞이게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조정에는 귀천의 구분이 없어지게 됩니다. 만일 현인군자가 관직을 그만 두고 숨어버리기 시작하면 만세께서는 누구와 함께 천하를 다스리겠습니까? 신이 거지들을 이끌고 조정에 와서 일해야만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이것만큼은 신이 절대로 명을 받들 수 없나이다.” 황제는 그 말이 이치에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은 알았으나 마음속으로는 아쉬움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잠시 주저하다가 말했다. “관리가 되지 않겠다는 것은 그대의 뛰어남이오. 짐은 지금, 다른 상을 그대에게 내리려 하오. 기녀 유 씨는 이미 나와 함께 궁으로 들어왔소. 지금 귀비에 앉혔소. 일찍이 그대는 그녀와 의남매를 맺었소. 나는 그대에게 유 씨 성을 내리려하오. 다른 성씨와 연결시켜 동족으로 만들어 황제의 국척으로 삼으려 하는데, 어떤가?” ‘궁불파’는 잠시 생각하다가 어렵사리 대답하였다. “황친 국척은 영예롭고 귀한 자리이지만 직책이 없는 관직인지라, 백성과 나라를 다스리는 것과 다릅니다. 예부터 ‘황제도 짚신을 신는 가난한 친척이 있다’라고 했으니 좀 비천하다해도 지장이 없을 것입니다. 신이 명을 받들겠습니다.” 곧바로 황제에게 감사하다 말하고 주(周) 씨와 결혼하였다. ‘궁불파’가 황친에 봉해지자 조정의 문무백관이 모두 경하하였다. 나중에 황제가 더 총애하고 배려해 더 많은 은상을 내렸다. 저택도 하사해 황성 안에 머물게 하였다. 그야말로 다 누릴 수 없는 부귀와 영화를 가지게 되었다. ‘궁불파’에서 과분한 부귀와 영화까지 누리게 됐지만 반대로 두려워지기 시작하였다. 이런 감당하기 어려운 복을 누릴 만한 운이 없어 의외의 재앙이 닥치고 일반적이지 않은 화를 불러올까봐 사람을 만날 때면 모조리 ‘나리’라고 불렀고 자신은 ‘소인’ 이라 불렀다. 황친이 된 후, 자주 거지로 분장하고 밖으로 나가 민간의 이해를 남몰래 탐문하였다. 일으켜야 하는 이로운 일이나 없애야 하는 해로운 일이 있으면 입궁한 후에 황제에게 알렸다. 나중에 ‘궁불파’의 아들 3명도 높은 관직에 앉았다. 본인은 88세까지 천수를 누렸다. 이것이 바로 거지 중 첫 번째 뛰어난 사람, 첫 번째 기이한 일을 기록한 『거지가 좋은 일을 행하고 황제가 중매를 서다』”는 전기적인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에서 받는 느낌은 세 가지다. 첫째, 작가 이어는 소설 서두에서 하류 천민이기는 하지만 거지를 창녀, 강도 위에 있는 부류로 보고 있다. “가난은 비웃어도 창녀는 비웃지 않는다.”라는 전통 관념에 반하는 관점이다. 그러나 전개되는 이야기의 내용은 정 반대다. 명기 유 씨가 받은 은혜에 감사해 ‘궁불파’를 구한 인연으로 마침내 거지는 부귀영화를 누린다. 유 씨가 입궁해 귀비가 되면서 황친이 되었다. 결국 ‘가난은 비웃지만 창녀는 비웃지 않는다’는 결론이요 창녀가 거지보다는 지위가 높다는 이야기가 된다. 여전히 과거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자기 모순적 관념이다. 관념과 ‘증과(證果)’의 불일치는 중국 전통문화에서 자주 나타나는 여러 가지 모순적 구성임을 쉬이 알 수 있다. 이러한 창녀와 거지의 지위가 거꾸로 된 현상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둘째, ‘궁불파’는 원래 부유하였다. 자신의 재물을 내놓아 의로운 일을 하다가 거지로 전락하였다. 사람이 궁하다고 뜻까지 궁할까, 아무리 가난해도 포부는 변하지 않았지만, 나쁜 짓을 하려하지 않고 명기 집에서 기식하려 하지도 않았지만, 결국에는 정덕 황제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으로 결론을 맺는다. 이런 전통 관념 중의 ‘정통(正統)’ 논리는 당시 사람들은 벗어날 수 없었다. 청대의 이어조차도 벗어날 수 없었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유풍은 여전히 존재한다. ‘궁불파’의 몸에 기인 기사로 덧씌웠지만 당시 사회의 병폐와 전혀 어울리지 않게 보이는 듯하다. 협골(俠骨)로 세상에 이름을 날리고 ‘충군보국’으로 ‘정과’를 맺으면서 전통 관념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위로는 고관, 귀인, 선비에서부터 아래로 거지와 같은 천민까지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복잡한 역사의 비극은 끊임없이 연출되었다. 셋째, 이어의 소설은 전편에 걸쳐 거지를 동정하고 애호하며 업신여기지 않았다. 거지 중에도 장룡와호(藏龍臥虎), 즉 숨은 인재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의에 빠진 후 철저하게 타락하지 않고 새로이 다시 뜻을 이룰 수 있기에 그렇다. 당시 거지의 의로운 면만 서술하고 있다. 명나라 때의 거지들은 이미 변질돼 있었고 각양각색의 선하지 않은 사람들이 뒤섞여 있었다는 면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전기적인 이야기 전체를 통관하면, 구전일 뿐이며 믿을 만한 역사적 사실이 아닐지라도 역사문화 배경에 상응하지 않는 것이 없다. 황제가 민간에서 암행하고 기녀의 집에서 기숙하는 일은 명나라 정독 황제 이전에 이미 송나라 때에도 전례가 있지 않던가! 황제가 금란전 앞에서 친히 백성을 심문하고 거지에게 상을 내린다는 이야기는 기이하고 황당한 상황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명 왕조 개국 황제가 거지 항렬이 아니던가! 청나라에 이르러서도 강소와 절강 접경지역에 매년 겨울이 되면 봉양(鳳陽)의 유랑민, 거지들이 도시에 나가 걸식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고 전해온다. 걸식하는 이유는, 명 태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풀이하는 사람도 있다. 주원장이 호주(濠州)지역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슴에 새겼다. 봉양 지역은 그의 발상지이기에 재난과 전란이 발생한 이후에 인구가 줄어들고 토지가 황폐해지자, 강남의 부유한 백성 14만을 강제로 이주시켜 그 지역을 보강하였다. 사사로이 도망치면 중벌로 다스렸다. 그렇게 이주한 사람들 중에서 매해마다 귀성해 성묘하러 갈 수 없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거지로 분장해 몰래 고향으로 돌아갔다. 겨울에 떠나 봄이면 돌아가는 것이 습속이 되었다. 그렇게 구걸하면서 강화를 돌아다니는 봉양 사람들은 역사 현상이 되었다. 물론 이야기 자체가 사실일 수 있다. 봉양 지역은 예부터 가난하기로 유명한 지역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주원장이 자신이 젊었을 때 유랑하며 걸식했던 지역을 감사하는 마음에 가슴에 새겼다는 것도 인정상 맞다. 더군다나 거지로 전락한 고통의 경험은 죽을 때까지 가슴에 새겨져있어 잊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주원장은 자신의 그런 경험을 꺼리거나 숨기지도 않았다. 그러한 역사배경의 조건과 문화 환경에서 『거지가 좋은 일을 행하고 황제가 중매인이 되다』와 같은 민간 전설이 나타난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다시 말해 명나라는 정덕, 가정 연간에 이르면 나날이 몰락하기 시작해 쇄미해 졌다. 사회를 지탱하는 강상이 이미 문란해 졌다. 그런 사회 분위기가 황제와 민간의 창기, 거지가 인연을 맺었다는 이야기의 단초를 제공하였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풍경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조화 풍경화는 눈 앞에 펼쳐진 전경(前景)을 그린 그림이다. 그것이 자연 경관일 수도 있고, 사회적인 경관일 수도 있는데 인간이 눈에 그대로 보이는 경치를 서양화의 한 장르로 표현한 것이다. 풍경은 자연 속에서도 변하고, 삶의 공간에서도 변한다. 숲이 자라고 하천이 물길을 바꾸고 해안이 침식되며, 산과 계곡이 깎여나간다. 그 어떤 것도 그대로 인 것이 없다. 변화의 크기와 속도가 다를 뿐 지구 공간을 구성하는 사물들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시골 또는 도시의 형태도 늘 달라진다. 풍경은 한자 바람 풍(風)자와 경치 경(景)자로 구성되었다. 풍(風)은 여러 가지 뜻이 있는데 바람, 흘레하다, 울리다, 뜨다(汎), 풍속, 경치, 위엄, 병풍, 모양을 말하고, 주로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을 나타내는 표현을 말한다, 경(景)이란 ‘경치, 빛, 밝다, 크다, 형상하다, 사모하다’ 로도 읽는다. 주로 사실적으로 눈에 보이는 대상을 표현할 때 쓰는 말이다. 그러므로 풍경이란 보이지 않는 의미와 보이는 대상의 아름다움을 서로 어울리도록 조화시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풍경화의 개념이 서양화를 그리는 한 방식이라는 점에서 재료의 특성을 들 수가 있다. 주 재료인 수채(水彩)와 유화(油畫)이다. 수채는 물에 물감을 타서 종이에 그림을 그리는데 맑고 투명하여 시원한 느낌을 준다. 또 유화는 기름으로 녹여쓰는 물감으로 늦게 마르는 기름인 린시드와 빨리 굳게 하는 테레핀을 적절히 혼용하면서 물감의 색과 강도, 굳기와 마르는 속도를 조절하면서 그림다. 그 바탕은 아마포로 만든 캔버스인데 이 둘은 서양화의 핵심 재료가 되며, 수채는 빨리 마르기 때문에 단숨에 그리는데 유리하고, 유채(油彩)는 발색이 아름답고 보존력이 뛰어나다는 장점 때문에 대형 작품에 적합하다. 풍경화는 자연이든, 인간 공동체의 모습이든, 바라보는 사람의 세계관이 투영된다. 바라보는 사람의 경험에서 얻어지고, 그 인식은 당대의 시대정신을 반영하며 표현된다. 이를 테면 풍경화에도 화가의 정신세계와 로컬 컬러가 분명하게 나타나게 된다. 일제강점기는 우리 민족이 음울하고 어두운 시대였다. 일본 군국주의의 지배를 받을 때에는 일제 앞잡이들이 장밋빛 미래가 열릴 것 같았고, 해방된 후에도 진짜 그렀게 살고 있다. 연합국에 의한 일제의 태평양 전쟁 패배로 한반도의 새로운 미래가 열리고 있었지만 금새 그 미래는 먹구름으로 덮여 버렸다. 36년간 주권없는 설움에서 해방의 기쁨을 맞은 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미소 점령군의 한반도 통치, 친일파의 미청산, 좌우이념의 갈등은 끝내 분단과 한국전쟁이라는 괴물이 탄생하여 2024년 이 시점까지도 해방공간에서 예견되었던 나쁜 결과가 그대로 존속되고 말았다. 청산하지 못한 빚은 시간이 지날수록 이자가 붙어 더 무거워진다. 통일이라는 미해결 과제는 납덩이가 되었고, 다시 자유와 민주주의를 짓누르는 반공이념에 가려 제 등장한 친일파의 금빛 귀환으로 우리의 친일 청산을 더욱 멀어지고 말았다. 역사는 국면마다 정리하고 넘어가야 하지만 그렇지 못한 우리는 ‘친일에서 반공’으로 얼굴을 바꾼 이들에 의해 오늘날 극도로 민주주의가 파괴되고 있다. 해방공간의 풍경화 일제식민지 36년 동안 우리는 알게 모르게 나쁜 일본물이 들었다. 해방을 맞았으나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우리는 좌우대립의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림에도 사상이 있다. 해방공간에선 미술인들의 작품이 보기 어려울뿐더러, 이념의 선택으로 인해 그들의 행적마저 불투명했다. 그러나 한 사람에게 스며든 역량은 시대가 정치적으로 변했다고 해도 그 몸이 있는 한 문화적으로 이어진다. 어제 일본에서 배워온 서양화가 오늘 해방 정국이 되었다고 해서 금방 달라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여전히 화가들은 배운대로 추구하는 이상을 향해 그림을 그릴을 것이고 거기에는 새로운 민족 정체성이 자리할 것이다. 해방공간에 제주에 왔던 육지미술인들이 몇 있었다. 해방을 맞아 남쪽 제주로 처음 온 화가은 박노사(朴魯史)와 이석주(李奭柱, 1918~ ?)가 있었다. 그들이 제주에 머문 기간은 길지 않았지만 격동기임에도 불구하고 개인전을 여는 열정을 보여주었다. 제주를 주제로 그린 풍경화 작품이 한 점 있다. 1948년 해변에서 불턱에서 몸을 녹이고 있는 조병덕의 <해녀>라는 작품이 그것이다. 제작 연대가 1948년이면 4‧3이 있던 해인데 잠녀(해녀)들이 물옷을 입고 모여앉아 불을 쬐고 있는 모습을 그리 풍경화이다. 조병덕이 제주에 왔다면 4‧3과 관련돼 왔다가 해변에서 본 잠녀들의 인상일 것이다. 잠녀의 시선이 정명으로 쏠려 있는 것으로 보아 방문자나 사진기를 의식한 포즈이다. 조병덕(1916~2002)은 서울 출신으로 1940년 태평양미술학교를 졸업하고 1941~1945년 조선미술전람회(鮮展) 출품, 1942년에는<저녁준비>로 조선미술전람회(鮮展)최고상인 조선총독부상을 수상했다. 1949~1954년까지 국전 추천작가를 역임하였고, 1955~81년 국전 초대작가와 심시위원을 지냈다. 1954~1981년 이화여대 미대교수를 역임했다. 박노사는 1946년 5월 20일~25일까지 제주북국민학교에서 <돌하르방>, <풍경>, <인물> 등의 작품으로 개인전을 가졌는데 육지 화가에 의해 해방 후 첫 개인전이 열린 것이다. 박노사라는 화가는 이름만 알려졌을 뿐 그가 무슨 이유로 제주에 왔으며, 어디에 살았고 언제 제주를 떠났는지 알 수가 없다. 또 1947년 민족통일이라는 염원 속에 점점 정국이 불안해지는 상황에서도 제주인 김광추의 인연으로 광주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허백련의 문하생 허두정(許斗正)이 7월에 제주북국민학교에서 동양화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이석주 또한 1947년 부인과 아들을 데리고 입도하였는데 제주공립농업학교 미술교사로 지내면서 미술부 학생들과 제주의 풍경을 찾아 야외로 자주 나갔다. 이석주는 이렇게 그린 그림으로 1948년 2월 7일부터 2월 8일 양일간 제주북국민학교에서 도쿄문화학원 출신인 이정규(李政圭)와 함께 자신의 작품 30점을 가지고 2인전을 열자 ‘관람객들이 몰려들어 성황을 이루었다’라고 제주신보는 전한다. 그런데 박노사와 이석주에 대한 기억을 그의 제자였던 강용택(1931~2021)이 몇 가지를 기억하고 있었다. 강용택은 제주공립농업학교 4학년이었는데 당시 그 학교의 미술선생이 박노사와 이석주였다. 강용택은 제주공립농업학교 2학년때 미술활동을 시작하여 1947년 미술교사 이석주의 지도아래 같은 해 11월 21일 남조선 과도정부에서 주최하는 전국신교육전람회에 출품하여 도화부문 가작에 입상하기도 했다. <사진2 이석주 얼굴> 이석주는 서울시 종로구 통의동에서 출생하여, 1931년에 충청남도 홍천군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중학교를 다니다가 4학년때 중퇴하였다. 이미 중학교 1학년 때에 학교미술소조에 들어가고, 2학년 때에는 교내미술전람회에서 2등을 했으며, 4힉년 때에 당시 동아일보가 주최한 전국학생미술전람회에서 유화로 이조백자를 그린 <정물>이 2등에 당선되었다. 이석주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술선생님의 권고에 따라 화가의 길로 들어서서 서울의 ‘엔도회화연구소’와 중국의 ‘사까이노 화숙’의 연구생으로 1938년까지 있었다. 그 후 장춘에 있던 신경예술학원 서양과에서 3년 동안 공부하고 졸업 후 심양에서 처음으로 개인전을 가졌다. 1941년 이석주는 제21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산(山)>이라는 작품을 출품하여 입선했다. 이때 서양화부에서 같이 입선한 화가로는 조병덕(趙秉悳), 김경승(金景承), 김인승(金仁承), 심형구(沈亨求), 주경(朱慶) 등이 있었다. 북한미술자료에는 이석주가 선전(鮮展)에 입선한 작품에 대해 “전문 창작자로서 내놓은 처녀작은 유화 20호짜리 <서울교회의 산>”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북한의 기록과 다른 강용택의 증언에 의하면, 이석주는 일본 태평양 미술학교를 졸업하였고, 일전(日展)에서 작품 <만추(晩秋)>로 특선한 그림을 제주도까지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북한의 기록과 다른 것은 일전이라든가 일본 태평양미술학교에 다닌 프로필을 일부러 빼버렸을 것이라고 한다. 심양에서 열린 개인전에는 유화 <청량리 풍경>(1942년), <조선아동>(1943년, 40호) 등 30점을 출품하였다. 또 1944년 전라남도 순천에서 유화 <인왕산>(1943년), <반점>(1944년), <농촌>(1944년, 25호) 등 30점으로 두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해방후 이석주는 서울에서 진보적인 미술가들과 함께 조형미술가동맹을 조직하였고, 1946년에는 남조선미술가동맹 대전시지부장으로 활동하였다. 이 시기에 대전중학교, 경기상업학교 교원으로 근무했다. 1949년에 유화 <건조기>(1947년), <풍경>(1947년), <정물화>(1947년), <석류>(1948년), <한라산>(1949년) 등 30여점을 가지고 서울에서 개인전을 열었다(이제현;1999). 2020년 5월 5일 한국화가 강용택의 증언에 의하면, “이석주는 공립농업중학교(제주농업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하였는데 그 기간은 1947년 9월 26일에서 1948년 3월 12일까지였고, 이석주는 제주에서 <한라산>을 두 점 그렸다고 한다. 한라산 그림 하나는 용연에서 원경으로 그렸고, 다른 하나는 동문에서 아라 남쪽으로 본 한라산을 그렸다”고 한다. 이 두 점의 한라산 그림을 그릴 때는 강용택이 동행했는데 1947년~1948년 3월 사이라고 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월북한 이석주는 서울제1국장 지배인, 청진미술제작소 소장으로 있으면서 유화 <농촌에도>(1952년, 50호), <풍어>(1952년) 등을 그렸다. 전후 이석주는 조선미술가동맹 현역미술가, 평안남도 미술창작사 미술가 등으로 있으면서 1981년까지 그림을 그리다가 그 후의 행적을 알 수 없게 되면서 언제 타계했는지 그 시점도 모른 채 깡마른 얼굴의 사진 한 장을 남긴 채 역사 속에 묻히고 말았다. <사진4 강용택 작품> 다시 강용택의 박노사와 이석주에 대한 회고로 돌아가보면, 서양화가 박노사는 제주인보다도 먼저 남다른 돌하르방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1946년 말부터 1947년 중반까지 제주에 머물렀고, 학생이던 나의 자취방에서 팥 한 알도 넣지 못한 맨 좁쌀밥을 나누어 먹으며 미래를 논하던 그는 47년 봄 제주시북국민학교 동관(지금은 철거)에서 개인전을 가진 것을 끝으로 소식이 없다.” 강용택은 동문의 돌하르방의 위치도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은 병원이지만(1990년) 몇 년 전에는 동양장여관 왼쪽으로 계단길이 있었는데 좌‧우에 중형 돌하르방이 세워져 있었다. 계단을 다 오르면 측후소가 있는 곳이다. 허술한 기와집 한 채 외에는 나무가 무성하여 음지가 되어 파란 이끼가 끼어 있어 여름철에도 시원한 느낌을 주는 <돌하르방>을 유화로 그렸는데 이 돌하르방은 제주도 상징이라며 화가 자신이 이 작품을 소장하겠다고 했다.” 이석주에 대한 강용택의 기억을 보면, 이석주는 유화 개인전을 제주시 북초등학교 본관 교실에서 열었다. 전시를 마치고 제주를 떠난 이석주를 찾아서 1948년 8월 여름방학때 제주를 떠날 때 적어준 서울 효자동 전차 종점 근처의 주소를 찾아갔지만 만나지 못했다. 이석주에 대한 강용택의 당시 기억은 선명했다. “1947년 9월부터 1948년 3월말까지 저는 줄곧 선생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사라봉, 용연, 용두암, 동문통 거리 등 선생님은 이젤과 Box(화구상자)를 들고 다녔습니다.” 강용택은 이석주에게 공개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해방 전에 일전(日展)에서 특선된 작품은 잘 소장돼 있습니까? 제주에 함께 오셨던 kahsla과 아드님(5~6세)도 궁금합니다. 이제 아드님도 초로의 나이가 되었겠습니다.” 2020년 5월 5일 한국화가 강용택은 필자에게 미술교사 이석주 지도로 받은 남조선 과도정부 상장을 보여주며 그 때 회상을 행복하게 기억한 채 90살의 생애로 2021년 타계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유정은? = 최남단 제주 모슬포 출생이다. 제주대 미술교육과를 나와 부산대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술평론가(한국미술평론가협회), 제주문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제주의 무신도(2000)』, 『아름다운 제주 석상 동자석(2003)』, 『제주의 무덤(2007)』, 『제주 풍토와 무덤』, 『제주의 돌문화(2012)』, 『제주의 산담(2015)』, 『제주 돌담(2015)』. 『제주도 해양문화읽기(2017)』, 『제주도 동자석 연구(2020)』, 『제주도 산담연구(2021)』, 『제주도 풍토와 문화(2022)』, 『제주 돌담의 구조와 형태·미학(2022)』 등이 있다.
고광표 작가의 '돌하르방이 전하는 말'은 제주의 상징이자 제주문화의 대표인 돌하르방을 주인공으로 내세웁니다. 석상 '돌하르방'을 통해 '오늘 하루의 단상(斷想)'을 전합니다. 쉼 없이 달려가는 일상이지만 잠시나마 생각에 잠기는 순간이기를 원합니다. 매주 1~2회에 걸쳐 얼굴을 달리하는 돌하르방은 무슨 말을 할까요? 독자 여러분의 성원을 기다립니다./ 편집자 주 "맨도롱 헐 때 호로록 들이킵서" (따뜻할 때 후루룩 마시세요. ) “Drink it while it's warm.” ☞ 고광표는? = 제주제일고, 홍익대 건축학과를 나와 미국 시라큐스대 건축대학원과 이탈리아 플로렌스(Pre-Arch)에서 도시/건축디자인을 전공했다. 건축, 설치미술, 회화, 조각, 공공시설디자인, 전시기획 등 다양한 분야로 활동하는 건축가이며 예술가다. 그의 작업들은 우리가 생활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감정에 익숙한 ‘무의식과 의식’ 그리고 ‘Shame and Guilt’ 등 현 시대적인 사회의 표현과 감정의 본질을 전달하려 하고 있다.
사정을 이해한 ‘궁불파’는 급한 상황에서 방법을 생각해 냈다. 얼마 전에 굶어 죽을 뻔 할 때 목숨을 구해준 구명은인이 건넨 원보(元寶)를 꺼내어 부인에게 주었다. 원보를 배경으로 해서, 글쪽지를 가지고 거리를 다니면서 원조를 받아 문제를 해결하라 하였다. 위에 큰 글씨로 “해내에 유명한 거지 ‘궁불파’가 딸의 몸값으로 10량을 의롭게 원조했다.”라고 써줬다. 그런데 사람들은 거지가 선수를 친 것이 못마땅했던지 거지가 준 원보의 내력이 불분명하다며 아무도 호응하지 않았다. 헛수고가 되어버렸다. ‘궁불파’는 어쩔 수 없이 구명은인이 건넨, 함부로 사용하지 말하고 한 금가락지와 새로 구걸해서 얻은 부수입을 함께 부인에게 건네주면서 몸값을 지불해 딸을 집으로 데리고 가라고 하였다.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부인이 궁불파가 준 돈을 가지고 가 몸값을 지불하고 딸을 데리고 오려 할 때 그 향신이 내력을 캐묻고는 부인에게 이튿날 오라하였다. 다음 날, ‘궁불파’가 딸을 데리고 왔는지 확인하려고 부인 집에 갔을 때 한 무리가 달려들어 돈과 양식을 강탈한 강도라면서 부인과 함께 묶어 현의 아문으로 데리고 갔다. 알고 보니 반년 전에 고향현에서 돈과 양식을 경성으로 호송하다가 도중에 향마(響馬)1)에게 모두 강탈당했었다. 범인 호송원이 가산을 탕진해 배상하고 원보(元寶)를 만든 후에야 경성으로 호송하여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궁불파’가 건네준 원보 위에는 호송원과 은장(銀匠)의 이름이 교묘하게 새겨져 있었던 것이었다. 지현(知縣)은 그것을 근거로 온갖 방법을 동원해 고문을 가하면서 ‘궁불파’에게 허위자백을 받아냈다. 그런 후 부인을 보증인으로 세우니 ‘궁불파’도 이제 죽음을 기다릴 도리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궁불파’가 가지고 있던 물건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이전에 ‘궁불파’는 한 집에 두 번 찾아가 구걸하지 않으며 의협을 행한다는 소문이 퍼져있었다. 그가 산서 태원(太原)에 가서 구걸하기 전부터 그의 이름을 사칭하여 이미 많은 재물을 구걸한 후 떠난 자가 있었다. 나중에 진짜 ‘궁불파’가 그곳에 나타나 걸식하자, 현지인들은 사기꾼이라 단정하고 1문도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모욕주고 푸대접 했다. ‘궁불파’는 배고파서 혼절해 쓰러졌다. 현지의 지방 총갑(總甲)2)도 어수선한 기회를 이용해 곳곳에서 세금을 징수하면서 도중에 어부지리를 얻고 있었다. 당일에 유(劉) 씨 성을 가진 창부의 집에 세금을 거두러 갔다. 마침 명기(名妓)가 표객(嫖客) 한 명과 바둑을 두고 있었다. 산동의 거지 ‘궁불파’가 죽었다는 말을 들은 명기는 예전에 그가 은전을 마련해 관을 사서 어머니의 장례를 치렀던 은혜가 떠올랐다. “그저께 걸식하러 왔는데 나를 알아보지 못하더군요. 머무르게 하여 밥 한 끼 차려주고 다음에 다시 오기로 약속도 받았지요. 다시 오면 예전 일을 이야기하고 후하게 갚으려고 했는데, 누가 알았겠습니까, 며칠 못 본 사이에 굶어 죽을 지를.” 표객이 전후사정을 알고 나서 같이 온 사람에게 5량 은자를 지방 총갑에게 건네주었다. 관을 마련하여 장례를 치르고 스님을 초청해 망혼을 달래주도록 명했다. 명기는 지방 총갑이 착복할까 염려돼서 집안사람에게 직접 가서 장례를 치러주라고 부탁하였다. 관을 들고 갔을 때 다행히도 ‘궁불파’는 절명하지 않고 숨이 붙어있었다. 죽을 먹이자 얼마 없어 깨어났다. 사람에게 부탁해 은인에게 감사의 뜻을 표할 수 있게 데려가 달라고 하여 명기를 찾아갔다. 표객이 그와 명기를 의남매를 맺게 한 후 집에 머물도록 하였다. ‘궁불파’가 생각하기를, 기녀에게 공밥을 얻어먹고 유곽 주인의 친속이 되는 것은 절의와 명성을 잃는 짓이요, 10여 년 동안 쌓아온 거지의 공력이 헛되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며칠 지나지 않아 핑계를 대고 떠나려 하였다. 떠나려 할 때 표객이 50량이나 되는 대원보를 꺼내어 친히 건네면서 그것을 밑천으로 삼아 장사하고 다시는 걸식하며 다니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사양하다 마지못해 받았다. 명기는 예전처럼 아무렇게나 남에게 동냥 줄까 염려되어 금가락지를 빼서 그의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은자를 사용할 때마다 금가락지를 보면서 자신이 말한 당부를 잊지 말라는 뜻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아무렇게나 보시하면서 자신은 굶어죽는 경우는 만들지 말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그 물건이 지금, 자신이 목숨을 잃는 재앙이 될 줄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고문에 못 이겨 거짓일지라도 자백해버렸으니 그저 죽음을 기다릴 밖에. 지현은 형방에게 내걸라는 포고에 ‘궁불파’를 도적의 우두머리라 부르고 백성에게 그 도당, 의심스러운 사람과 의심 가는 물건을 고발하라고 명시하였다. 그런데 뜻밖에 그날, ‘궁불파’는 지현, 향신, 그 부인, 딸과 함께 경성으로 압송되었다. 하찮은 지방 사건이 천자를 놀래게 했단 말인가? 예측 못한 일이 발생하였다. 실제로 정덕 황제 주후조가 친히 보좌에 앉아 심문하는 게 아닌가! 먼저 지현에게 물은 후 향신에게 묻고 다시 부인에게 묻고서야 ‘궁불파’에게 물었다. ‘궁불파’는 바닥에 엎드려 처음부터 끝까지 있는 그대로 말하고서는 억울하다고 하였다. 갑자기 성상이 고개를 들라하였다. 용안을 보고 원보를 건넨 예전에 만난 표객과 닮지 않았는지 확인해 보라고 하였다. ‘궁불파’는 감히 직언하지 못했다. 결국 황제가 웃으면서 자초지종을 얘기하였다. “만약 짐이 네가 예전에 만난 표객과 닮지 않았다면 그대는 어리석은 관리와 권세를 부리는 향신의 농간 때문에 감옥에서 죽음을 맞았을 것이다. 여기까지 올 수가 없었을 테지. 짐이 사실을 얘기해 주마. 너에게 원보를 건네준 그 표객이 바로 과인이니라. 과인은 민간의 이해를 파악하려고 개인적으로 출궁했었느니라. 우연히 태원까지 가게 되어, 유 씨 기녀의 집에서 몇 개월 머물렀기에 성명을 말하기 어렵더구나. 유 씨 기녀조차도 내가 정덕 황제라는 것을 알지 못했으니 먼 곳에 온 손님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고. 그날 생각 없이 원보를 네게 건네주고는 가만히 생각해보니, 네게 해가 갈까 염려가 되더구나. 구걸하고 다니는 거지가 원보를 가지고 다니면 어찌 일이 생기지 않겠느냐. 나중에 고양을 유람할 때 포고문을 읽고는 염려한 대로 네게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과인이 그 지방에서 하루를 더 머물면서 네가 해를 당한 연유를 세세하게 확인하고 경성으로 돌아왔느니라. 경성으로 돌아온 후 관리를 파견하여 너를 구한 것이고. 지금은 억울함이 깨끗이 씻겼고 재앙에서도 벗어났다. ‘궁불파’의 뛰어남도 천하가 다 알게 되었다. 짐이 그대에게 권하고 싶은 게 있다. 이후에는 그런 위험 일에 끼어들지 말고 목숨을 유지하여 남은 생애를 배불리 먹으면서 살아가거라.” 그런 후에 금의위에게 명하여 지현의 관직을 박탈하고 곤장 40대 형에 처했다. 허실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여 형벌을 바르게 집행하지 않은, 공평무사하지 못한 관리에 대한 경고였다. 백성의 자녀를 차지하고 양민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워 해를 끼쳤으니, 형부에 명하여 향신을 곧바로 참수토록 하였다. 세력을 믿고 백성을 학대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였다. 바닥에 엎드려 있는 부인과 딸을 보았다. 비록 오랫동안 고통 받기는 했어도 본래부터 지닌 자색은 감출 수 없었다. 황제가 ‘궁불파’에게 말했다. “그대에게 처자가 없다고 들었다. 저 여인을 보니 복상이구나. 그대가 애당초 저 여인을 위하여 여러 가지 고통을 받았으니, 그대에게 시집가지 않으면 누구에게 시집가겠느냐? 과인이 중매를 설 테니, 경사를 이루도록 하여라.”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향마(響馬), 북방의 마적(馬賊)으로, 그들이 약탈을 할 때는 먼저 ‘향전(響箭)’을 쏘아 기세를 올렸기 때문에 이렇게 불렸다. 2) 총갑(總甲), 원(元)·명(明) 이래로 사용한 하급 관리 명칭이다. 명(明)·청(清)의 부역제도를 보면 110호를 1리(里)라 하고 리는 10갑(甲)으로 나누었다. 총갑은 관부에서 나누어진 1리의 세금과 노역을 담당하였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고광표 작가의 '돌하르방이 전하는 말'은 제주의 상징이자 제주문화의 대표인 돌하르방을 주인공으로 내세웁니다. 석상 '돌하르방'을 통해 '오늘 하루의 단상(斷想)'을 전합니다. 쉼 없이 달려가는 일상이지만 잠시나마 생각에 잠기는 순간이기를 원합니다. 매주 1~2회에 걸쳐 얼굴을 달리하는 돌하르방은 무슨 말을 할까요? 독자 여러분의 성원을 기다립니다./ 편집자 주 "호꼼만 이십서게" (조금만 기다리세요) “Please stay for a while.” ☞ 고광표는? = 제주제일고, 홍익대 건축학과를 나와 미국 시라큐스대 건축대학원과 이탈리아 플로렌스(Pre-Arch)에서 도시/건축디자인을 전공했다. 건축, 설치미술, 회화, 조각, 공공시설디자인, 전시기획 등 다양한 분야로 활동하는 건축가이며 예술가다. 그의 작업들은 우리가 생활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감정에 익숙한 ‘무의식과 의식’ 그리고 ‘Shame and Guilt’ 등 현 시대적인 사회의 표현과 감정의 본질을 전달하려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