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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의 '길 가는 그대의 물음' ... 제주문화이야기(13) 영원 회귀의 한 점 우주를 그리는 화가

 

바람의 길

 

나는 보았네

바람의 뒤편에 서서

우주의 한 점이 마침내

여럿이 돼 흩어지는 것을,

결국 그것은 근원, 모두 네 개의 아톰

우주의 실체가 되어 사방으로 퍼져 나갔네.

 

보여주지 않으면 결코 볼 수 없는 것

어떤 이들은 그것을 숨기려고 하여

발버둥쳐도 그럴 수가 없었네.

하지만 화가는 엠페도클레스가 되어 물, 불, 에테르, 흙을

캔버스의 대지에 가득채웠네.

 

우리 사랑과 불화의 세계를 이루고 있는 물질이여

지금은 백 여개 원소의 이름으로,

마침내 황톳빛 세상을 완성했네.

온 누리에 바람이 불어

이제 비로소 인간을 지배했던 어둠의 세력들의

합의된 그 권력은 불안에 떨며

불씨 꺼지듯 서서히 블랙홀로 사라지고 있네

 

그 하늘에서 저녁이면 영롱하게 반짝이는 눈들이 나오자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도 마침내 마음의 길잡이가 되었네.

언제부터인가 모두에게 기쁨이 흘러나오네

중세의 하늘을 감쌌던 공포가 고작 인간이 만든 음모였다니

태초의 말씀을 믿는 자들이

아무리 영험한 기도를 올린들 하늘은 알 리가 없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뭉쳐진 존재의 비밀, 세계의 실체가 이 한 점에서 시작되었네.

살아있을 때 사람들은 부분만을 응시했지만

죽어서는 세상 모두를 바라보는 수 많은 눈이 되었네.

진리는 당연한 것, 불변하는 것도 없고, 영원히 사라지는 것도 없다네.

이 우주, 당신의 고향에선 여전히 바람이 불고

사람들은 모두가 거기 바람의 냄새를 그리워하네.

 

아아 세계는 사랑과 불화의 관계로 이루어진 까닭에

어느 것 하나만으로 설명할 수가 없는데

혼돈과 조화는 하나이면서 둘, 둘은 한 몸이 돼

아름다운 동행 그 회귀의 길을 영원히 가겠네

 

문득 바람의 뒤편에 화가가 있어

사물과 땅과 바다가 이어진

제주 바람이 불어가는 하늘 너머에서 그의 그림자를 보았네.

화가는 위대한 땅의 기억을 남기며

보이지는 않지만 언제나 우리 곁에 서서

바람의 붓으로 영원 회귀의 한 점 우주를 그리고 있었네,

 

 

두 개의 시간

 

모든 예술가에게는 두 개의 시간이 있다. 하나의 시간은 실존의 시간이요. 다른 하나는 이 세상에 없는 시간이다. 실존의 시간은 내 앞에 있는 시간이고, 피안의 세계로 가버린 자의 시간은 부재의 시간이다. 한 예술가에게 두 개의 시간은 너무나도 큰 차이가 있다. 실존의 시간에서는 존재자 자신이 관여할 수 있고, 행동할 수 있는 시간이지만, 떠나버린 자의 시간에서는 이름만 남을 뿐 모든 것이 남은 자들의 몫이 된다.

 

나의 이름은 하나이지만 두 개의 시간에서는 그 이름도 다르게 쓰이는 것이다. 실존의 예술가에게는 모든 것이 현존재인 내 앞에서 일어나고 내가 관여할 수 있으며, 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자신의 지위를 누리고 가치관의 자부심도 가질 수 있으며, 능력대로 실행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인생의 명예도 스스로 자신의 노력해서 쌓은 것인데 사소한 자존감도, 무거운 주체성도, 일시적인 자격지심도 마음대로 가질 수 있었다. 반면에 떠나버린 자에게는 그 어떤 것도 현실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스스로 쌓은 명예나 작은 욕망도 지닐 수가 없어서 남은 자의 처분에 맡겨버린 신세가 된다.

 

행여 이름을 드높인 것은 자신이었지만, 결국 이름을 높이거나 혹은 내리깎는 것은 남은 자의 몫이 된다. 자신의 쏟은 시간은 언제나 순간일 것이고 맡겨진 시간은 영원할 수도 아니면 눈깜짝하는 찰나일 수가 있을 것이다. 시간은 영원하지만 시간을 타고 가는 인간은 영원하지가 않다. 그래도 우리 인간은 오롯이 영원을 꿈꾼다.

 

예술가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는 순간과 영원속에서 이 두 개의 시간에 산다. 무릇 인생이 찰나라면, 죽음은 영원한 대상이 된다. 그러나 죽음 자체는 영원하지만, 죽은 후의 기억 자체는 찰나가 된다. 영원을 사는 방법은 그 기억을 지배할 수 있으면 가능하다. 기억을 지배하는 것이 역사에 남기는 것이라면, 실망하지 말라. 우리에게 영원한 기억은 없다.

 

당신은 우리가 기억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지난 어느 시간까지 기억할 수 있는가? 네안데르탈인, 아니면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중 누구 한 사람의 이름이라도 기억할 수 있었던가? 또, 아니면 시대를 내려서 탐라국 시대의 어느 누구를 기억할 수 있으며, 불과 몇 년 전의 기억도 못하는 우리에게 하나의 소망일 뿐인 것이 바로 영원에 대한 환상이다.

 

 

영원의 가장자리

 

영장류 인간에게는 다른 동물에게 없는 담론이 있는데 그것은 기념비성을 갖는 것이다. 기념비성은 영혼의 절규일 것이다. 망자의 시간은 빨리가고 쉽게 잊혀진다. 내 앞에 없는 존재는 현실에서 멀어진다.

 

세익스피어 말대로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잊혀지지 않기 위해 기념비성이라는 이념을 찾아냈다. 기념비성은 의례와 함께 존재한다. 기념비성이란 자신을, 또는 누군가를 기억하고자 하는 추앙, 기념, 위안, 표상, 격려, 축하, 감사(感謝), 표창, 찬양, 애도, 예배, 해원(解冤) 등 매우 특별한 형이상학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인가 남기는 행위도 영원의 가장자리로 가려는 인간의 노력이며, 작품을 전시하는 노력도 영원을 향한 한 순간의 의례 행위일 것이다. 죽도록 살고자 하는 것이 원초적 본능이라면 죽음으로부터 끝까지 벗어나고자 하는 것도 생명이 벌이는 영원회귀로의 본능일 것이다.

 

변시지 바람의 행로

 

변시지(1926~2013)는 서귀포시 서홍동 출신으로 1931년 여섯살에 아버지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 하나(花園) 고등학교와 1942년 오사카 미술학교 서양화가를 다녔다. 이때 한국인 학생으로는 백영수, 제주 학생으로는 조천 출신 송영옥, 다호 출신 양인옥이 있었다.

 

1945년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도쿄로 가 데라우치 만지로(寺內博治郞) 문하에 들어갔다. 데라우치 만지로는 이레강점기 조선미술전람회 심사위원을 역임한 중견 화가였다. 이 데라우치 만지로의 후광을 얻어 일본 광풍회에서 수상하며 입지를 굳힐 수 있었고, 젊은 나이에 광풍회에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이후 변시지는 일본 도쿄와 오사카를 오가면서 작품 활동을 하다가 1957년 11월 15일 돌연 한국으로 영구 귀국을 하게 된다.

 

그 시기 일본은 한창 태평양전쟁 패망의 재건과 법제 정비를 벌이던 중이었고 곧이어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유엔 전쟁물자 특수를 누리는 경제재건의 토대가 마련되던 시기였다. 변시지는 일본의 태평양 전쟁으로 패망을 복구하는 자리에서, 다시 한국 전쟁의 폐허를 재건하는 자리로 옮겨왔다.

 

변시지는 격동기 두 나라의 전후 재건 시기를 겪었다. 전후 한국 사회는 도시 재건에 정신이 없던 터라서 서울은 모든 것이 새로 시작하는 분위기였다. 변시지는 귀국 후 1958년 서울 화신백화점 화신화랑에서 제4회 유화 회고전을 열었는데 이 전시가 자연스럽게 귀국 발표전이 되었는데 제주를 떠난 지 24년 만의 일이다.

 

그후 1960년 서라벌 예대 미술과 학과장으로 초빙되고, 이 해에 이학숙 여사와 결혼식을 올렸다. 이 시점에서 다시 제주도에 내려 오기까지 서울 생활은 딱 20년이 걸렸다. 그 간에 변시지는 덕수궁 비원을 자주 찾아가서 몇몇 동료들과 함께 그곳의 풍경을 그렸는데 이들이 바로 비원에서 같이 그림을 그렸던 손응성, 이의주, 임호, 장리석, 천칠봉 등이다.

 

변시지는 몸이 불편했던 관계로 도시 속 자연을 쉽게 만날 수 있고, 또 화구들을 쉽게 가지고 다닐 수 없어서 비원에 있는 정자 다락에 화구들을 올려놓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이곳을 선호했다. 고궁 중에 특히 덕수궁 비원을 찾았던 이들을 가리켜 미술평론가 오광수는 속칭 비원파라고 칭했는데, 그로부터 그들을 하나의 유파처럼 부르게 된 것이다.

 

이 때 변시지는 매우 충실한 사실주의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세필의 터치가 매우 섬세한 나머지 나뭇잎을 숫자 세듯이 그려나간 듯 했다. 향수를 느끼다가 고국에 돌아온 탓일까. 물빛은 고요하고 그 물에 어리는 애련정의 자태가 매우 곱다. 적막이 흐르고 나무를 처음 본 듯이 어름쓸며 조심조심 숨을 죽인 표현이 눈에 띈다.

 

이번 변시지 타계 10주기 특별전에 <애련정>이 바로 그런 터치의 유형이었다. 이 <애련정>은 일본 광풍회 출품작이었다. 변시지는 비원의 사계절을 무척 좋아했다. 서울 도심 가운데 가까운 곳이면서 한국 왕실 정원의 자연미가 돋보이면서 한국미의 매력을 한 몸으로 듬뿍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변시지는 비원 풍경과 창경궁 등 사계절 다니면서 다양한 마치 화풍을 개척하듯 실험처럼 그림들을 그렸다. 이를 테면 고궁 시리즈로, 1963년 <창경원>, 1964년 <가을 비원>, 1965년 <가을의 애련정>, <부용정>, <겨울 향온정>, 1966년 <반도지>, 1967년 <경복궁 풍경>, 1969년 <가을 부용정>, 1970년 <경회루>, <설풍경(雪風景)>, <애련정>, <가을의 비원>, 1972년 <창덕궁>, 1974년 <가을 반도지(半島池)>, 1975년 <비원> 등이 있다.

 

급기야 서울에서도 고향 제주의 바람은 지독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사람의 미래는 불확실하다. 그러나 그에게 새로운 인연이 생겨나고 있었다. 귀국 후 초상화를 그려주었던 인척뻘 되는 변시민이 제주대학 학장으로 취임하면서 상황이 변한 것이다.

 

1975년 제주도에 내려오기 전까지만 해도 비원 풍경을 그리고 있을 때였다. 이때 작품들은 일본에서의 그림들이 마티에르를 살리면서 굵고 텁텁한 느낌의 화풍이었는데, 이와는 사뭇 다른 맑고 경쾌한 새로운 풍경화였다. 어쩌면 서울의 고궁 풍경은 무리수를 둔 군부의 집권과 함께 덩달아 부상했던 민족주의 붐과도 영향이 있는 것 같다. 1970년대는 한편으로 서구 추상미술이 한창 기세를 떨쳤고, 또 한편에서는 서서히 외세주의 미학의 폐해에 대항하는 한국미를 탐색하고 있을 때이기도 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유정은?

= 최남단 제주 모슬포 출생이다. 제주대 미술교육과를 나와 부산대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술평론가(한국미술평론가협회), 제주문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제주의 무신도(2000)』, 『아름다운 제주 석상 동자석(2003)』, 『제주의 무덤(2007)』, 『제주 풍토와 무덤』, 『제주의 돌문화(2012)』, 『제주의 산담(2015)』, 『제주 돌담(2015)』. 『제주도 해양문화읽기(2017)』, 『제주도 동자석 연구(2020)』, 『제주도 산담연구(2021)』, 『제주도 풍토와 문화(2022)』, 『제주 돌담의 구조와 형태·미학(202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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