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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의 '길 가는 그대의 물음' ... 제주문화 이야기(7) 돌담을 찾아서 거꾸로 간 시간

1. 섬에 온 선교사

 

제주에 사진이 등장하게 된 것은 서양 열강 세력에 의해서였다.

 

선교사들이 신도들이나 송별 기념촬영한 것, 풍속을 소재로 삼은 것, 중요 인물의 초상 사진과 중요 사건을 찍은 것이 많은 것으로 보아 사진가 역할도 한 것이다.

 

그들은 먼저 선교를 통해 기독교를 전파하면서 서구 자본주의 문명을 이식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사실상 자본주의 제국을 위해서 시장을 넓히려는 식민지의 다른 전략도 있었다. 일찍이 동인도 회사에서 보았던 것처럼 열강들이 동쪽으로 온 까닭은 지난 우리 역사가 말해주었듯이 새로운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구축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1846년 영국은 청나라 개항장마다 한 척의 포함(砲艦)을 배치할 권리를 얻어냈다. 선교사가 현지에서 어려움을 당했을 때 신속하게 무장 함대를 보내어 무력으로 외교 문제를 처리하고자 한 것이다. 또 ‘바다의 안전’을 이유로 함대를 맨 먼저 파견한 나라도 영국이었다. 뒤이어 프랑스와 미국이 따라 들어왔다.

 

선교사들이 개항장에서 포교권을 얻은 뒤에는 현지인처럼 옷을 입고 현지어를 쓰면서 전국으로 포교를 확대하고자 했다. 선교사들은 겉으로 미신을 믿고 있는 야만의 땅을 개척하는 것이었지만 속내는 그들이 현지에서 얻은 정보들을 영국과 프랑스 등의 영사들에게 제공해주었다. 그들 선교사의 배후에는 자국의 정부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선교사들은 '제국주의 첨병'이 된 적이 있었다. “종교가 오고 나면 군대가 온다”라는 말은 19세기 동양을 빗대고 한 말이었다. 선교사들을 부정적으로 본 역사적 사실들이 있는데, 때로 선교사는 전쟁 구실을 만들어준 긍정적인 존재이자, 동시에 말썽을 일으켜 일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신도들로 인해 현지 사회로부터 반서양·반외세의 기운이 일어나면서 통상에 방해되는 부정적인 존재이기도 했다. 기독교 포교 과정에서 선교사들이 현지 사회와 여러 가지 갈등을 일으킨 것을 청나라에서는 ‘교안(敎案)’이라고 불렀다.

 

제주도에 천주교가 들어온 것은 광무 2년(1898)으로 색달리 사람 양 베드로, 신 아오스딩, 그리고 보성리 사람 강 도비아와 김생원이었다. 이들은 당시 조선 교구장이었던 뮈텔 주교에게 제주에 선교사를 파견해 주도록 요청했다. 그래서 1899년 5월 프랑스 신부 빼이네(裵嘉祿)와 우리나라 신부 김원영(金元永)이 입도하여 제주읍에 근거지를 두고 포교를 시작하다가, 빼이네 신부는 건강을 이유로 제주를 떠나고, 1900년 그 후임으로 라크루(具瑪瑟) 신부가 왔다.

 

이들은 포교를 나누어 제주읍 안에서는 라크루 신부가, 홍로(烘爐, 서귀포) 지역에는 김원영 신부가 포교활동을 했다. 그러다가 1년 후 김원영 신부가 다른 곳으로 가고, 뭇세(文濟萬) 신부가 왔다. 조선 정부는 외국인 신부들을 특별히 우대하고 보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러한 특권은 후에 이를 도 넘게 호도(糊塗)한 신도들이 많은 문제들을 유발하면서 급기야 민중 봉기로 이어졌다.

 

2. '도롱이를 입은 농부(farmer Clad in a Straw Raincort)'(1890) 

 

'도롱이를 입은 농부((farmer Clad in a Straw Raincort)'(1890)는 당시 손에는 긴 나무 지팡이를 짚고, 모자를 쓰고 새(茅)로 엮은 우장(雨裝)을 걸쳐 나막신을 신었는데 원시적인 제주인의 모습이 생생하게 살아난다.

 

사진 촬영 연대로 보면, 지금으로부터 123년전 제주도의 삶의 리얼리티를 보여주고 있다. 누가 찍은 사진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수집처가 미국이나 유럽 등 해외에서 수집된 사진 중 일부이다.

 

이 사진은 제주도 현지인을 연출한 사진으로 빛의 방향을 감안하여 촬영각을 정확하게 조절하면서 모델의 시선과 위치, 초가배경의 자연스러운 각도, 화면의 비례, 노출 감도가 계산된 전문가의 사진임을 알 수 있다.

 

도롱이(Straw Raincoat)를 입은 농부 뒤에는 초가가 있는데 초가를 지을 때 벽으로 쌓는 담을 축담이라고 한다. 이 축담은 돌을 한 줄 쌓고는 진흙을 올리고 다시 한 줄을 쌓는 식의 방법으로 조적(造積) 한다. 이 축담은 두 가지 기능을 하는데 집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막고 물을 막기 위해 진흙을 이용하고 있으며, 또 집과 지붕의 지지대 역할로써 견고해야 하는 건축의 특성을 감안한 것이다.

 

축담에 바르는 흙은 찰흙으로 ‘ᄎᆞᆫ헉’, 'ᄎᆞ녁'이라고 발음하는데, 모슬포에서는 찰기가 좋은 신평리나 무릉 2리 인향동의 흙을 선호했다. 먼저 이 찰흙을 마차에 싣고 와서 마당에 둥그렇게 깔고 가운데를 중심으로 물이 고르게 먹을 수 있도록 연못처럼 만들어가면서 점점 펴가고 끝 부분에 이르러 물이 새지 않도록 끝 둑처럼 올리면 물이 천천히 스며든다. 어느 정도 흙이 물을 먹으면 자른 산듸짚나 보리짚을 섞어서 발로 계속 밟아주어야 한다. 흙을 많이 쓸 경우 소를 이용하기도 한다. 이렇게 골고루 밟아서 어느 정도 찰기가 나오면 그 흙을 담돌과 함께 사용한다.

 

사실 이런 축담은 그 자체가 생태건축이다. 돌집이 그렇듯 여름에는 시원하기도 하고 겨울에는 포근하다. 흙은 사계절 습기도 잘 먹어서 공기를 조절하기 때문에 생활하기가 쾌적하다. 자연재를 이용한 건축이므로 환경적으로 풍토적인 조건에 잘 어울린다. 초가의 건축재료가 돌, 나무, 흙이 전부이기 때문에 매우 자연스럽지만, 화재에 취약한 것이 큰 흠이다.

 

또 돌과 흙으로 된 재료이고 보니 베록(벼룩), 게염지(개미), 주넹이·지냉이(지내), 게우리(지렁이), 두메기(풍뎅이), 집읏은 돌뱅이(민달팽이) 등 버렝이(벌레)들과 구렝이(구렁이) 독다귀(도마뱀), 중이·줭이(쥐) 등이 자주 나다닌다. 초가에는 ᄎᆞᆷ생이(참새)가 살고, 처마에는 제비가 집 짓는다. 특히 집 안팎으로 흙을 발랐기 때문에 비가 많이 오게 되면 외벽의 흙은 보수를 해야 한다. 비가 많이 와서 축담에 비가 내리치면 바른 흙이 씻겨나가기 때문이다. 이를 '헉 ᄇᆞᆯ른다(흙 바른다)'라고 한다.

 

3.'제주도(濟州島) 산저포(山底浦), Sanjeopo Harbor in Cheju Island'(1890)

 

 

사진 두 장이 있다. 썰물 때의 산저포(산지포)와 밀 물 때의 산지포가 그것이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부감시(俯瞰視) 각인데 반대편 높은 언덕에서 찍은 것으로 생각된다. 산지천 하류에 위치한 산지포는 하류를 중심으로 돛배(帆船)들이 모여있다. 산지천은 바다와 바로 연결돼 있어 조수 간만의 차이를 심하게 받는 지형이다. 썰물이 되면 건천(乾川)으로 변했다가 밀물 때면 바다와 하나가 된다. 배들은 주로 썰물에는 발이 묶여서 꼼짝하지 못하고, 밀물이 돼야 활동을 시작할 수 있다.

 

정박한 돛배는 주로 삼각 선수(船首)에 두 돛짜리 당도리배들인데 그 사이에 뱃머리가 평평하게 덧판을 대거나 반원의 나무를 덧댄 덕판배도 끼어있다. 산지포 마을은 마치 활대와 같은 타원의 형태로 이루어졌으며 돌담들은 외담으로 쌓아 강한 바닷 바람을 막기 위해 처마를 가릴 수 있게 쌓았다. 초가 지붕은 격자모양으로 촘촘히 묶여 있으며, 집집마다 연료용으로 ‘노람지’를 두른 지들커(떌감) ‘눌’들이 보인다.

 

 

포구 반대편 해안에서는 하역을 하고 있는 듯 배에 천막을 친 당도리배가 있었는데 밀물이 되자 그 배가 이동을 한 듯 보이지 않는다. 산지천 서쪽은 지금의 탑동 해변인데 매립되기 전에 까만 먹돌로 유명했다. 산지포는 큰 배들이 들어오기에는 수심이 얕고 포구가 좁아 일제 강점기가 돼야 본격적인 산지항 축항공사를 하게 되었다.

 

1926년 10월 일제는 약 30만원을 투자하여 제1기 공사로 연장 310m 서부두 방파제를 구축하기 시작, 1929년 3월에 준공하는 계획을 세우고, 또 부대시설을 만들기 위해서 약 5000평의 매립사업까지 병행하였다. 항만 공사는 계속 제2기, 제3기까지 총 120만원을 투입하였고, 이후 동부두일대 1만3594평을 매립하고 서부두 쪽으로 다시 510m의 방파제 공사를 추가로 모두 3차례의 계획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자연 지형이 열악했던 산지항은 1926년 인공항으로 계획되어 18척의 수심을 메우려면 엄청난 돌이 필요했는데 바다를 메울 돌을 확보하는 것이 시급한 일이었다. 급기야 돌을 캘 석산(石山)으로 주정공장 가까운 돌 언덕이 채석 현장으로 지정되었고, 돌을 캘 노동자들을 모집하여 이북 출신들이 채택되었다. 돌을 다루는 일은 숙련된 노동자들이 절실히 필요하다.

 

산지항 공사에 선정된 노동자들은 함경북도 청진 출신들인데 마침 청진항 공사가 마무리된 차에 돌일은 무척 힘들지만 다른 일보다 일당이 좋아 제주도 서부두 방파제 현장으로 급거(急遽) 내려왔다. 변변한 장비도 없던 때라 오로지 목도에 의지해야만 했던 채석 운반 작업을 순수 인력으로 시행하는 것은 대단이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도 일에는 변통(變通)이 있기 마련이어서 오로지 경험밖에 없는 이들은 지난 세월의 역량을 믿기로 했다.

 

이때 이들이 운반 방식은 ‘청진팔(淸津八)목도’였다. 긴 나무에 묶은 돌을 중앙에 걸고는 앞쪽에 4인, 뒤쪽에 4인 모두 팔명이 1조가 돼 동시에 목 뒤 어깨에 걸고 리듬에 따라 돌이 흔들리지 않도록 수평을 잡으면서 영차~영차~ 라는 구령에 맞춰 걸어가야 한다.

 

모두 8인의 힘을 공평하게 분배하는 것이 그들의 터득한 요령이었다. 누군가가 잔꾀를 부리게 되면 돌의 기울기가 한 쪽으로 쏠려서 돌에 깔리는 큰 사고를 당할 수가 있다. 8인 모두의 힘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운반하는 것이 숙련된 그들만의 노하우였다. 이렇게 하루 종일 일한 대가는 3원, 당시 쌀 한 가마 가격이 5원이었으니 힘들지만 큰돈이었다.

 

연이은 공사로 인해 석산으로도 부족하자 일제가 눈독들인 돌은 바로 제주성을 쌓은 성돌이었다. 일제는 이 돌들을 실어다가 서부두와 축항 공사 밑돌로 삼았는데 8·15 해방이 되자 일제의 항만공사 계획은 미로에 빠졌다. 그러나 해방 이후에도 계속 그 성돌을 실어 나르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홍순만, 2014). 산지천 항만개발 재개는 박정희에 의해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의해서 진행될 수 있었다.

 

4.'제주도(濟州島) 도사 입구(島司 入口), Etrance Islahd Office Cheju Island', (1900)

 

이 사진은 제주성 남문루였던 정원루(定遠樓)이다. 남문루(南門樓)는 1512년(중종7) 제주목사였던 김석철(金錫哲, 1556~?)이 새로 건립했다.

 

"제주성 남문에는 옛 누각이 있었는데 허물어서 거기에 새로 정원루를 지어 외적의 침입에 대비했다.”

 

김석철이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있을 때 제포·부산포의 항거왜인(恒居倭人)들이 대마도주의 은밀한 지원을 받아서 삼포왜란을 일으키자 그는 즉각 조정에 보고하고 중앙 군사와 협심하여 신속히 왜인들을 진압함으로써 주위로부터 무재(武才)를 인정 받아 변방 외적에 대비케 하기 위해서 제주목사로 전출시켰다. 그는 변방 제주의 방어에 힘을 기울여 군비를 정비하면서 낡은 정원루를 신축하여 해이한 기강을 바로 세웠던 것이다.

 

제주성에는 3대문이 있었는데 남쪽 성문은 정원루로 남문로터리 북쪽 옛 MBC자리에 있었다. 서쪽 성문은 진서루(鎭西樓)로 무근성 입구 부근이며, 동쪽 성문은 연상루(延祥樓)로 동문 파출소 서북쪽에 있었다.

 

남문인 정원루는 성벽을 뚫어 놓은 개구부(開口部) 상부(上部)가 열려 있는 성문이며 이를 개거식(開据式)이라고 한다. 이런 형태의 성문은 오가는 사람들을 문루에서 쉽게 살필 수 있는 장점이 있어서 출입구와 망루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 할 수 있다. 지붕은 팔작 지붕이며, 성담은 현무암 다겹담으로, 외부 마감돌은 귀물림 방식으로 쌓았다. 특이한 것은 바닥에 현무암을 자연스럽게 판석으로 이용하여 비올 때를 대비하고 있는데 큰 틈새가 곳곳에 보인다.

 

 

이런 개거식 문루(門樓)는 목관아 동헌으로 들어가는 정문에도 있다. 이름은 포정문(布政門). 2층 문루로써 1층에는 사람들이 지나 다니고, 2층 누각에는 종과 북을 매달아 아침과 저녁 성문을 여닫을 때 알리는 역할을 했다. 원래 이 문루는 진해루(鎭海樓)라고 부르다가 1699년(숙종25) 목사 남지훈(南至薰)이 개건하면서 탐라포정사(耽羅布政司)라고 고쳐 부르면서 이후 포정문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문루는 일제 강점기 초까지 남아 있었다가 일제가 도청 청사를 건립하면서 철거해 버렸다. 지붕은 팔작 지붕이고 1층에는 비에 오래 견디도록 둥근 돌기둥 8개로 받치고 있으며, 2층 누각에는 나무로 기둥을 연결하였다. 오른쪽에 하마비가 세워져 있고 옆으로 이어서 좌어청(左衙聽) 영나졸방(營羅卒房)이 길게 돌집으로 쌓은 후 그 위에 붉은 색 기와를 얹었다.

 

사진의 제일 큰 장점은 시간의 기록에 있다. 사람은 가도 사진은 남는 법이라서 한 시절의 영화(榮華)라도 글보다는 이미지로 남는 것이 더 솔직하고 정확할 것이다. 사진이 대중화된 오늘에는 이미지가 둥둥 떠다닐 정도로 범람하고 있다. 각자의 모습, 시대의 역동적인 파노라마가 우리의 꿈 속에까지 어른 거릴 정도다. 그러나 결국 이 마져 모두 언젠가는 다 사라질 것이다. 자연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참고문헌>

가와시마 신 外, 『 동아시아근현대통사』,책과함께, 2017.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우리배 용어사전』, 2020.

김원모·정성길 엮음, 『사진으로 본 백년 전의 한국』, 가톨릭출판사, 1997.

김봉옥, 『증보 제주통사』, 도서출판 세림, 2000.

朴用厚, 『濟州方言硏究』, 高麗大學校民族文化硏究所.1988.

좌승훈, 『제주땅 의미찾기, 포구』, 나라출판, 1996.

홍순만, 『사연따라 七百里』, 제주문화원, 2014.

후에다 코오이치로오 外, 『濟州島의 경제』, 濟州愚堂圖書館, 1999.

 

김유정은?

= 최남단 제주 모슬포 출생이다. 제주대 미술교육과를 나와 부산대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술평론가(한국미술평론가협회), 제주문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제주의 무신도(2000)』, 『아름다운 제주 석상 동자석(2003)』, 『제주의 무덤(2007)』, 『제주 풍토와 무덤』, 『제주의 돌문화(2012)』, 『제주의 산담(2015)』, 『제주 돌담(2015)』. 『제주도 해양문화읽기(2017)』, 『제주도 동자석 연구(2020)』, 『제주도 산담연구(2021)』, 『제주도 풍토와 문화(2022)』, 『제주 돌담의 구조와 형태·미학(202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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