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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의 '길 가는 그대의 물음' ... 제주문화 이야기(12) 헤테로토피아 상징성도 점차 사라지고

 

1. 죽은 자는 빨리 잊혀진다.

 

자기가 실존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 현실 세계와 현재 교감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오래 살고자 하기 때문에 “남(他者)은 먼저 죽어도 내가 먼저 죽는다”는 사실을 전혀 실감하지 못한다. 사실상 죽음은 당위(當爲)이지만 사람들은 현실에서는 관심을 쓰기 조차 싫어한다. 일종의 회피다.

 

요즈음 죽음의 모습은 어떤가.

 

모든 망자에게 죄송스럽게도 장례는 놀라우리만치 상품 사회가 작동하는대로 마치 공장에서 제품을 다루듯 시간 타임에 따라 빨리 빨리 죽음이 처리된다. 이걸로 봐서는 모든 사람들이 오로지 자신만은 결코 안 죽으리라 생각하여 타자의 죽음에 대해서는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은 한 사람의 죽음은 큰 일 중에 제일 큰 일이다. 그러나 죽음이 이상하게도 큰 일이면서 큰 일이지 않게 넘어가는 것을 보면 시대적인 간편 코스가 따라주기 때문이다. 온 세상이 돈에 미친 세상이지만, 시간이 돈이 되면서 시간을 되도록 적게 잡아야만 서로(의뢰자와 의뢰 받은 자)가 이익인 사회가 되다보니 미래에 자신이 죽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죽음이 남의 일처럼 가볍게 여기게 된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과연 우리가 돈을 버는 이유가 뭘까? 우리의 삶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길어야 3일 만에 가까운 사람들이 자신 앞에서 사라진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곁에 있었던 사람을 잃은,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아침 이슬처럼 순식간에 잊어버리는 것은 공포에 다름아니다.

 

2. 산담, 사라지는 헤테로토피아 기념물

 

헤테로토피아(Hétérotopies)는 일종의 비밀스러운 장소의 바깥에 있는 유토피아다. 무덤 또한 장소 바깥의 공간이다. 주변 환경으로부터 고립되지만 열림과 닫힘이 있다. 무덤은 죽은 자만 기거하고 산담은 그들의 울타리 공간이었다.

 

거기에서는 금기가 적용되기 때문에 일종의 산 자들의 반(反)공간이 된다. 무덤은 비장소이기도 하다. 죽은 자와 산 자의 만남이 이루어질 때 열려 있지만 의례가 끝나면 다시 닫힌다. 즉, 의례만 치러지고 일상으로 복귀되는 소멸되는 공간이며, 이후 다시 반공간이 되기도 한다. 망자들에게는 유토피아이지만 산 자들에겐 지워지는 공간이었다.

 

육지의 민묘는 곡장 없이 한 구역의 산등성이를 타서 사성(莎城:흙두둑)을 하고 위계질서에 따라 묻힌다. 가족 공동체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그러나 제주도는 오름 등성이나 밭머리에 산담을 하고 묻힌다. 산담은 제주 사람들의 개인이나 부부의 독립성을 보여주는 혼백의 집으로, 제주 문화의 이녘만썩(개인만의) 문화와 ᄀᆞᆸ가름(분배)의 문화를 잘 보여준다.

 

 

3. 산담, 죽음의 돌문화

 

제주의 문화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돌문화이다. 제주의 돌문화는 제주인의 오랜 역사적 조형물로서 제주사람들의 정신문화와 물질문화를 잘 담아내고 있다. 제주섬 자체가 거대한 돌로 된 타원형의 배처럼 남태평양으로 나아갈 듯한 형세다.

 

화산 섬의 풍토를 그대로 간직한 제주 섬은 현무암 석상의 보물섬이었다. 또한 제주섬은 사방의 돌로 막혀 있어 과거에는 천연 요새의 역할도 했다. 제주의 문화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제주의 돌문화는 크게 4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즉, 생산성, 생활성, 공공성, 종교성의 돌문화가 그것이다.

 

1) 기념비적인 산담이 쓰레기 취급을 당하고

 

불교, 무속, 도교(민간신앙) 등과 관련된 돌문화로서 동자복 미륵, 서자복 미륵, 포제단, 공덕비, 마애명, 갯당, 본향당, 미륵, 돌코냉이, 조천석 등이 있다. 이것들은 신앙행위나 의례행위와 관련이 깊었다.

 

유교의 돌문화는 단연 산담이 최고였다. 산담은 석물을 세트로 거느리고 있었는데 봉분을 중심으로 문석인(간혹 돌하르방 무석인), 동자석, 망주석, 상석, 비석, 돌잔, 토신단 등 산담 속의 돌문화 무리가 있었다. 지금은 그 세트가 비었고 케이스마져 위태롭다. 가장 먼저 동자석이 사라졌으며, 문석인, 망주석 다음으로 산담 차례가 왔다.

 

산담은 기념비성이 있어 집안의 자랑으로써 위세로 삼았다. 벌써 아득한 소리가 돼버렸지만, 한때 조상을 숭배하고, 추앙하는 이념이 담겨 있어서 기념적인 가치를 뽐내기도 했었다. 조상을 잘 모시게 되면 그에 상응하는 은덕을 받는다는 것이다. 자손이 조상을 잘 모시면, 조상도 자손에게 잘 되게 해준다는 것이 동기감응이라는 풍수이론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 효성어린 기념비도 수명을 다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산업이 바뀌면서 일찍부터 혐오시설이 되더니 장묘제도가 달라지면서 화장을 한 후 평장이나 수목장을 거행하고 있다. 산담은 이제 갈 길을 잃어버리고 오히려 처분을 기다리는 쓰레기 취급을 당하고 있다. 600년 전통이 너무나도 허무하게 하루 아침에 무너지고 있고, 산담의 가치를 아는 이 또한 없다. 가장 제주다웠던 제주의 뼈대가 잘려나가고 있다.

 

2) 죽음의 의례도 변해버린 장묘제도와 함께 사라지고

 

상·장례는 통과의례로서 매우 중요하다. 제주인들은 그것을 ‘큰일’이라고 한다. 장례문화는 오랜 역사와 전통이 있으나 제주에는 조선후기에 유교직 관혼상제가 집중적으로 장려되었고, 무속적 여성문화와 유교적 남성문화가 타협을 하게 되면서 영혼관, 의례에 깊이 습합되었다.

 

제주 상장제례의 독특한 의례나 형식을 간단하게 살펴보면 ❶토롱, 헛묘, 망사비 ❷까마귀 모른 식게, 식게밥 돌리기 ❸문전코시, 조왕코시, 칠성상 ❹귀양풀이 ❺팥죽쒀가기, 물부조 ❻철리와 철리터 방법 ❼토신제 지내기 ❽산테우리(상여매기, 봉분, 산담쌓기 하는 마을의 청년들), 암창개, 죽은 ᄒᆞᆫ서 등이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이제는 이런 의례를 하지도 않고, 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산업의 변화는 무서운 속도로 지난 시간의 역사와 문화들을 파괴해 버린다. 이제 그 자리에 건물이 들어서고, 그 안에서는 자본주의 상품이 나날이 우리들에게 행복한 삶을 보장하겠노라고 드라마 광고가 메아리친다.

 

 

4. 무덤과 산담

 

무덤, ‘주검을 묻은 공간’이다. 산 사람을 그대로 묻는 것을 생장(生葬)이라고 한다. 인류의 출현에서부터 이 무덤의 역사는 시작된다. 무덤의 형태는 지역이나 풍토, 생사관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등장했다.

 

제주에서 무덤은 산이라고 부른다. 이 산은 산처럼 봉긋한데서 이름을 붙인 것이다. 육지에서는 이 산을 산소, 봉분, 묘소, 분묘 등으로 부른다. 제주에서 부르는 ‘산(山)’은 중국 진제국 때 이미 ‘산’이라고 부른 사례가 있다. 이후 후대의 제왕들이 분묘는 모두 ‘산릉(山陵)’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그 산릉의 다른 말이 산이다. 제주에 이 용어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신기하다.

 

그렇다면 ‘산’이라고 부르는 봉분은 어떤 이유에서 만들었을까? 봉분을 만든 이유에 대해서는 크게 세 가지로 말할 수 있다. 첫째가 무덤을 보호하기 위함이며, 둘째가 장식하기 위함이고, 셋째가 기념물로 삼기 위함이다.

 

제주의 ‘산’인 경우, 육지처럼 흙더미(莎城)로 무덤 뒤쪽을 병풍처럼 두르지 않고 무덤에 돌담을 두른 것이 다르다. 이 돌담을 ‘산담’이라고 하는데, 산담은 과거 제주 지역의 산업이 목축이 주류였다는데서 무덤보호를 위해서 비롯된 것이다. 들에 마소들이 ‘산’을 파헤치지 않게 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또한, 야화(野火)가 번지거나, 경작지가 침입되는 것을 막는 것 또한 무덤의 보호라는 측면이 강했다.

 

무덤의 장식은 산담의 형태나 조형적인 요소, 망주석, 동자석, 문석인, 돌잔 등 석물을 설치한데서 알 수 있다. 산담의 규모, 석물의 설치에서 알 수 있듯이 가문의 경제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무덤의 기념비성은 비석에 묘주(墓主)의 행적, 벼슬이나 품성, 가족의 계보 등의 기록에서 가문의 자랑과 위엄을 나타내거나 그의 위세를 알리고자하는 무덤 치장이라는 장식적인 측면, 즉 사회적으로 과시하고 있다는 것을 엿볼 수가 있다. 물론 옛 이야기지만.

 

무덤은 인류의 역사를 밝히는 중요한 고리다.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많은 수의 유물은 무덤에서 출토된 부장품이다. 이런 유물들은 ‘명기(明器)’라고 하는데 죽은 자를 위해 사후 세계에서 그 물건을 쓰도록 한데서 비롯되었다. 고대에는 이 명기 말고도 산사람까지 함께 묻었다. 이런 순장(殉葬)에는 왕의 후궁들이나 그의 종들이 많았다. 후궁들에게 생존 시에 많은 부귀와 특혜를 주는 것은 왕이 죽으면 산사람들이 같이 무덤에 가는 조건에서였다.

 

5. 산담, 사자(死者)를 위한 산자(生者)들의 상징

 

온 섬에 뒹구는 제주의 돌은 신의 선물일까 아니면 재앙일까? 농부의 일손을 더디게 할 때는 잠시 재앙이 되지만, 돌이 이처럼 흔치 않았다면 사람과 짐승의 집은 물론 죽은 자의 영혼이 쉴 무덤 또한 제대로 지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제주 사람들은 돌로 울타리를 세운 집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다가 죽으면 다시 돌담이 둘러쳐진 무덤에 누웠다. 그렇게 돌은 제주사람들의 삶과 죽음 모두에 깊숙히 관여해 왔다.

 

제주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돌담 가운데 무덤을 둘러싼 돌담을 ‘산담’이라 부른다. 산담은 여러 용도의 돌담 중 유독 신성시되는 것으로, 무덤 속 혼백을 보호하기 위한 울타리이자 영혼의 집임을 표시하는 경계선이기도 하다. 산담은 한 줄로 쌓은 외담과 겹줄로 쌓은 겹담으로 나뉘는데, 외담은 다시 모양에 따라 원형 산담과 도토리 모양의 산담, 사각형 산담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무덤 뒷부분을 좁게 조성한 사다리꼴의 겹담도 있다.

 

산담에는 영혼이 다니는 신문(神門)인 ‘올레’를 둔다. 올레는 제주에 5개가 있다. 산자들의 골목에 해당하는 집올레, 잠녀들이 바다로 가는 바당올레, 신당으로 가는 당올레, 전설 속에 나오는 해저의 길목 용궁 올레, 그리고 혼백이 사는 집인 산담 올레가 그것이다.

 

올레는 산담 좌측 혹은 우측에 약 40~50cm 정도의 너비로 사이를 터놓은 영혼의 출입 통로를 말한다. 그리고 그 터진 공간 위에 긴 돌 1~4개를 올려놓아 마소나 사람의 출입을 통제한다. 필자는 20년 전에 올레 사이를 가로질러 놓은 긴돌을 ‘정돌’이라고 명명했다. 정돌의 의미는 집올레의 정낭을 빗대어 부른 것이다. 예를 들어 집올레의 정낭이 말의 키 크기에 따라 1~5개를 걸쳐 놓은 것이라면 산담의 올레 또한 너비에 따라 1~4개까지 긴 돌을 걸쳐 놓은 것에서 유추한 것이다. 산담의 너비에 따라 정돌의 숫자가 다르게 된다.

 

올레의 방향이 좌우로 나뉘는 기준은 무덤 주인의 성별이다. 남자의 무덤은 망자의 시점에서 볼 때 좌측에 만들고 여자는 우측에 만들며, 합묘인 경우 남자를 중심으로 좌측에 만든다. 간혹 산담 앞쪽에 올레를 만든 사례도 있으며, 쌍묘에서는 특별히 좌우 양쪽에 올레를 내는 경우도 있다.

 

산담은 원래 밭머리가 아닌 들판에 있었고, 바로 그 때문에 들불놓기로 인한 소실, 또는 마소 등 짐승의 침입으로부터 무덤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했다. 하지만 들판이었던 땅이 점차 경작지로 변하면서 밭머리에 위치하게 된 것이다. 물론 친인척에 의한 관리의 편의성을 도모하기 위해 밭 한쪽에 무덤을 만들고 산담을 조성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인가(人家) 근처에 있더라도 산담의 돌은 어느 누구도 함부로 손댈 수 없는 터부의 대상이다. 타당한 이유나 정해진 날 외에는 허락 없이 산담을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예외는 있었다. 먼 길을 가는 나그네가 길을 잃었을 때에 한해서는 산담 안에 들어가 잠을 자면 무덤 속 영혼이 보호해 준다고 믿었다.

 

산담에는 일반 돌담과는 달리 돌을 다루는 제주 사람들의 기술을 가늠할 수 있는 품격이 다른 조형적 미학이 배어 있다. 그 조형성을 간단히 정의하면 ‘한국적인 선의 미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한국의 기와집은 처마의 선이 좌우로 갈수록 부드럽게 하늘을 향해 들려 있어 마치 가볍게 날아오를 것 같은 리듬감을 느낄 수 있다. 산담의 선도 이와 유사한 아름다운 리듬감을 보인다. 이는 사람들의 본능처럼 물에 뜨도록 직선보다는 양쪽을 살짝 들어 올려서 부드럽게 파도를 타는 듯한 형태가 되는 것이다.

 

산담 측면에서 보면 높이가 낮은 산담 뒤쪽에서부터 천천히 내려올수록 위를 향해 들리듯 올라가면서 앞쪽 좌측 끝에 오면 담장의 각은 하늘을 향해 살아나 유연한 선을 그리며 올라가서 멈춘다. 이 선이 산담 좌측에서부터 중앙으로 이동할수록 서서히 잠기듯 낮아지다가 반대편 우측 끝으로 갈수록 다시 같은 방식으로 살아나서 좌측 끝과 대칭을 이룬 듯 멈춰 선다. 더 나아갈 수 없이 살짝 멈춰 버린 산담의 선은 바라볼수록 유연하여 자연스럽다.

 

혼백의 심부름꾼 동자석

 

산담 안에 세우는 동자석은 이름 그대로 어린 남자 또는 여자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다. 동자석은 여러 기능으로 죽은 이의 영혼을 위해 예를 갖춘다. 그중에는 숭배적 기능, 봉양적 기능, 수호적 기능, 장식적 기능, 교훈적 기능, 주술적 기능, 유희적 기능이 있다.

 

제주의 동자석은 내륙으로부터 온 여러 성씨의 입도 시조나 부임하는 목사(牧使), 제주 출신의 양반 토호나 유배객들에 의해 전파되었다. 하지만 제주 동자석은 불교적 색채가 미처 가시지 않은 채 약간의 지역적 특징만 더해진 내륙의 대다수 동자석들과는 사뭇 다르다.

 

유교 문화의 중심권인 한양 지역에서 잉태된 무덤 조각인 동자석이 멀리 남쪽 끝 변방인 제주까지 흘러오는 동안 각 지역의 독특한 풍습과 여러 신앙이 결합되고, 여기에 제주의 풍토와 사상이 더해지면서 매우 독특한 동자석으로 재탄생했다.

 

다시 말해 제주의 동자석은 불교, 무교, 도교 및 토속 민간신앙의 다양한 요소가 함께 어우러져 반영된 점이 특징이다.

 

제주의 동자석은 매우 친근한 정감을 준다. 특히 18세기 조선 영·정조대에 만들어진 동자석들은 눈이 크고 선이 부드러우며 보다 정교한 특징을 지녔다. 이는 육지 왕래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제주 사람들은 국상(國喪) 때마다 능역(陵役)을 지원하여 육지에 다녀온 적이 있다. 인조 재위 때인 1629년에 내려진 출륙금지령으로 인해 육지 출입이 쉽지 않았던 탓에 능역 자원 봉사는 제주 사람들이 육지로 나갈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때 그들이 왕릉 조성 과정에서 보고 기억한 석상을 재현한 것이 지금의 제주 동자석이다. 문석인을 모방해 만든 것인데, 기술이 부족한 아마츄어 제주 장인들의 손에서 전혀 다른 형태의 석상으로 변모한 것이다.

 

그 결과 제주 동자석은 육지에서는 보기 드문 현무암을 사용해서 매우 다른 모습으로 만들어졌으며. 오늘날에는 고유의 단순미에서 우러나는 건강한 생명력으로 인해 제주의 매력적인 얼굴로 널리 사랑받고 있었으나 지금은 거의 도굴되었고 600년 산담마저 사라져가고 있다. 회복할 수 없는 제주 토착성은 역사속으로 잠기고 있는데 석상의 보물섬이 사라져 버리면서 전국 평균적인 획일적인 땅이 되버렸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유정은?

= 최남단 제주 모슬포 출생이다. 제주대 미술교육과를 나와 부산대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술평론가(한국미술평론가협회), 제주문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제주의 무신도(2000)』, 『아름다운 제주 석상 동자석(2003)』, 『제주의 무덤(2007)』, 『제주 풍토와 무덤』, 『제주의 돌문화(2012)』, 『제주의 산담(2015)』, 『제주 돌담(2015)』. 『제주도 해양문화읽기(2017)』, 『제주도 동자석 연구(2020)』, 『제주도 산담연구(2021)』, 『제주도 풍토와 문화(2022)』, 『제주 돌담의 구조와 형태·미학(202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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