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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 ... 중국의 거지 (3)

옛 한어(漢語)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인 단음사(單音詞), 즉 한 글자가 한 단어가 되는 경우가 많아 지극히 간략하였다. 거지의 뜻인 ‘걸개’를 ‘개(丐)’라고만 부른 고대 문헌이 적지 않다.

 

예를 들어 “하급 관노, 머슴, 거지〔개(丐)〕 모두 부모의 무덤에 가서 성묘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또 “거지〔개(丐)〕 무리가 에워싸 절하며 구걸하였다”1)라고 했는데 거지를 ‘개(丐)’ 한 글자로 표현하였다.

 

현대 한어뿐 아니라 청나라 말기 이전에 거지에 대한 호칭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예를 들어 어떤 책에는 ‘걸인(乞人)’이라는 호칭을 쓰기도 하였다. “발로 차면서 주면 걸인도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음력 11월에 걸인을 만나면 저고리를 벗고 그와 함께 하였다”, “만승의 주인은 길 위의 걸인을 구하였으나 얻지 못했다”2)라는 문장이 그것이다.

 

어떤 책에는 ‘걸아(乞兒)’라고 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범(范) 씨 문도가 길에서 걸아, 마의(馬醫)를 만나면 모욕을 주지 않았다”, “육장 옆에 파리매 모여들어 우레처럼 시끄럽고 걸아들이 다투어 짊어지고 사그라진 재로 향하네", “패루(牌樓) 높이가 20장 … 밑에 걸아 수백이 거처한다”3)라는 구절이 보인다.

 

‘걸색아(乞索兒)’라 부르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은(隱)은 천성이 머뭇거리니, 항(沆)의 문지기와 가복이 싫어해 왕왕 걸색아라 불렀지만 항(沆)은 한결같이 대했다”, "걸색아가 기어이 굶어죽었는데 어찌 나를 이처럼 방치하는가!”4)라는 문장이 있다.

 

‘개인(丐人)’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희종(僖宗) 말기에 광릉(廣陵)에 가난한 두가균(杜可均)이라는 개인이 있었다. 나이가 40여 세였다. 밥은 먹지 않고 술만 마셨다. 매일 술집에 들어가 돌아다니며 술을 얻어마셨다”, "어제 개인을 쫓아가니 어디를 유랑하는지 알겠는가!”5)라는 문장이 보인다.

 

‘개부(丐夫)’라 부르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병폐가 있으니, 개부의 손에 주옥(珠玉)이 있고 황금을 품속에 품고 있으나 길에서 굶어 죽는다”라는 구절이 그것이다.

 

구걸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을 ‘개곤(丐棍)’이라 부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생각지도 않았던 정신혁고(鼎新革故) 이후에 개곤 손수(孫壽)의 수중에 떨어졌다”6)라는 구절이 있다.

 

걸식하는 부녀(婦女)를 ‘걸파(乞婆)’라 부른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네가 듣지를 못했다는 말이냐? 구역질나고 비열한 늙은 걸파를 믿고 나를 욕하는 것이야”, “너같이 늙은 걸파조차 관을 들고 나를 찾아오다니”, “그 늙은 걸파를 누가 모른다는 말이냐. 그러나 공무는 공평하게 처리해야 한다”7)라는 구절이 보인다.

 

거지를 ‘화자(化子)’라 부른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혼자 나를 외로이 버려버리면 어디에서 몸을 편안케 하겠소. 화자가 되어 죽을 때까지 걸식하지 않을 수 없소이다”라는 구절이 그것이다.

 

그런데 원나라 잡극 중에 다른 용례가 있다. 화자(花子)라 부르는 경우다.

 

예를 들어 “야! 말만 번지르르한 화자(花子), 빨리 꺼져!”, “경사(京師)에서는 걸아를 화자(花子)라고 부르는데 어디에서 뜻을 가져왔는지 알 수 없다”8)라고 하였다. 따지고 보면 ‘화(花)’는 ‘화자’의 ‘화(化)’ 발음이 전화한 것으로 본래 ‘화자(化子)’다.

 

‘규화자(叫花子)’는 바로 ‘규화자(叫化子)’이다. ‘규(叫)’를 ‘고(告)’로 쓴 경우도 보인다. 잘못된 전음이다. 옛날에 남에 집에 들어가 구걸하지 않고 길거리에서 행인을 부르며 쫓아가 빌어먹는 거지를 ‘규가(叫街)’라 하였다. 이러한 거지가 ‘규화자(叫化子)’로 나중에 거지를 부르는 총칭으로 사용되었다. ‘규화(叫化)’는 곧 ‘빌어먹다, 동냥하다’이다.

 

그리고 “사문 안통(安通)이 길가에 옻칠을 해서 만든 큰 상을 세우고 재물을 교화(敎化)하였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 또한 구걸하는 방법 중 하나였다.

 

또 “일부러 기회를 잡아 신음하면서 힘없이 지팡이를 짚고 교화(敎化)하였다”9)라는 구절도 보인다. 여기에서 ‘규(叫)’와 ‘교(敎)’는 통용된다.

 

‘화(化)’는 모화〔募化는 (승려·도사 등이) 탁발(托鉢)하다. 보시(布施)를 구하다. 동냥하다 뜻이다. 모연(募緣), 화연(化緣), 구화(求化)와 같이 쓴다〕를 가리킨다. 승려나 도사들이 보시를 구하는 것으로 속세의 일, 천한 일에 대한 아호(雅號)다.

 

불교에서 교화의 인연을 ‘화연(化緣)’이라 한다. 불교와 도교에서는 보시하고 선을 행하는 자는 부처나 신선과 인연을 맺을 수 있다고 여겼다. 이렇듯 거지를 ‘규화(叫化)’나 ‘교화(敎化)’라 부른 것은 행위를 가지고 명명했거나 덕행을 행한다는 의미를 가진 명칭이었다.

 

지금에 이르러서 ‘규화자(叫化子)’는 구어 중의 속칭이 되어 버렸고 ‘걸개(乞丐)’는 서면어로 자주 쓰는 명칭이 되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당대 유종원(柳宗元) 『기허경조맹용서(寄許京兆孟容書)』) ; 청말 황헌조(黃軒祖) 『유량쇄기·오취봉(游梁瑣記·吳翠鳳)』.

2) 『맹자(孟子)·고자상(告子上)』 ; 『남제서(南齊書)·무릉소왕엽전(武陵昭王曄傳)』 ; 청대 당견(唐甄) 『잠서(潛書)·원간(遠諫)』.

3) 『열자(列子)·황제(皇帝)』 ; 송대 범성대(范成大) 「청식재서사(請息齋書事)」 제3수 ; 청대 이두(李斗) 『양주화항록·신성북록중(揚州畵航錄·新城北錄中)』.

4) 오대(五代) 왕정보(王定保) 『당척언·호지기악급제(唐摭言·好知己惡及第)』 ; 『태평광기(太平廣記)』 498권에 인용한 『옥천자‧묘탐(玉泉子‧苗耽)』.

5) 당대 풍익자(馮翊子) 『계원총담·두가균각서(桂苑叢談·杜可均却鼠)』 ; 청대 요섭(姚燮) 『수가칠세아(誰家七歲兒)』

6) 청대 공자진(龔自珍) 『을병지제숙의제십륙(乙丙之際塾議第十六)』 ; 청대 저인획(褚人獲) 『견호사집·가화행(堅瓠四集·嘉禾行)』

7) 원대 무명씨 『화랑단(貨郎旦)』극 제2절(折) ; 청대 이어(李漁) 『신중루·노견(蜃中樓·怒遣)』 극 ; 모순(茅盾) 『손 이야기(手的故事)』

8) 『원잡극(元雜劇)』에 수록된 작자 미상인 명대의 극 『리운경득오승진(李雲卿得吾升眞)』 제3절 ; 『원곡선(元曲選)』에 수록된 「장천사(張天師)」극 제2절 ; 명대 사조쇄(謝肇涮) 『오잡조(五雜俎)』 5권 「인부(人部)」

9) 『북제서(北齊書)』 ; 돈황(燉煌) 변문 『유마힐경보살품변문갑(維摩詰經菩薩品變文甲)』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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