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성 거치처의 초기 단두는 팔기(八旗) 출신 장상(張祥)이었다. 사람들은 ‘점야(占爺)’라 불렀다. 1914년에 장상이 죽자 그의 수양아들 관복길(關福吉)이 계승하였다. 별호는 관사자(關傻子)였다.
관사자는 익살스런 관상을 가지고 태어났다. 극단에서 단역을 맡을 때에 『법문사(法門寺)』 중의 어린 태감 가계(賈桂)역과 『홍란희(紅鸞禧)』 중의 거지 단두 김송(金松) 역을 연기할 정도였다. ‘점야(占爺)’의 의발을 이어받으면서 현관(縣官)과 상회 회장의 환심을 샀다.
처음에는 괜찮게 거지를 관리했지만 나중에는 갈수록 각박해져서 구타하지 않으면 욕을 해댔다. 모든 거지에게 길거리에 나가 구걸하도록 했다. 그리고 구걸해온 밥과 탕을 먼저 그의 조수에게 검사케 하여 고기나 완자 같은 것을 골라내어 자신이 먹었다.
겨울이 오면 거지 방에 땔감을 제한하였다. 언 방에서 추워서 덜덜 떨게 만들어 설사까지 할 지경이었다. 1917년 겨울, 20여 구의 얼어 죽은 거지 시체를 거지 집에 차곡차곡 쌓아둔 후 얼었던 것이 녹을 때쯤에서야 성 밖 귀왕묘(鬼王廟)의 만인갱(萬人坑) 속에 던져 넣었다. 매장할 때 널을 뽑아냈을 뿐만 아니라 입었던 닳아빠진 의복까지 벗겨냈다.
외지에서 구걸하러 온 거지들은 낡은 사찰에서 야숙을 하는 일이 있어도 감히 거지처에는 가지 않을 정도였다.
10년 후, 관복길이 병들어 죽었다. 그때 전대 단두 장상의 손자 장흥방(張興邦)은 40여 세에 이른 나이였다.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는 아편쟁이였다.
장흥방은 상회에 뇌물을 주고 선조의 유산을 이어받아 제3대 단두가 되었다. 그는 관복길보다 더 잔혹하게 거지를 학대하였다. 거지들은 그에게 돈을 벌어주기 위하여 일해야 했다.
만주(滿洲)정부 시절에 격배(袼褙, 헝겊 조각이나 넝마 조각을 붙여서 만든 두꺼운 조각. 주로 천으로 된 신발을 만드는 데에 쓰였다)가 일시에 부족해지자 그는 폐품을 모두 사들여 여러 거지에게 격배를 만들게 한 후 고가로 팔아치워 많은 돈을 벌었다.
그 돈으로 주택을 수리했을 뿐만 아니라 농지 20여 경(垧)을 추가 구입하여 소작을 주었다. 그와 동시에 고리대를 놓아 높은 이득을 얻었다.
1946년 쌍성이 해방군에게 복속되자 당시 거지처에 있던 50여 명의 거지와 소작농들이 한꺼번에 철저한 결산을 요구하였다. 장흥방은 분노한 민중 앞에서 아편을 먹고 자결하였다. 이때부터 3대에 걸쳐 통치한 쌍성의 거지처는 자연스레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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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성부 거치처와 같은 그런 관청에서 경영하는 특수한 개방은 일반 오합지졸이 모인 개방과는 달랐다. 지방 관료와 토호가 자신의 이익을 유지하려고 만든 자선 기구였지만 항방을 우두머리의 방법으로 단두를 임용하고 관리토록 하였다. 개방 전통 관습처럼 권위를 상징하는 ‘간아(杆兒)’(타구봉)를 내세워 단두 권력의 상징으로 삼았다.
당시 거지들을 거지 항방에 대한 신비감과 공포 심리를 이용하여 말도 안 되는 사기를 묵묵히 감내하고 사역하는 노예로 만들었다. 실로 ‘고명(高明)’한 거지 정책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어찌 되었든 간에 그런 개방의 패권은 여전히 본바닥 건달과 불량배들이 장악하고 있는 구조였기에 역시 거지 흑사회의 하나였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