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난하다가 위(衛)나라를 경유할 때, 중이가 예전에 위나라가 건도(建都)하는 데에 진나라가 지지하지 않았던 일을 마음에 두고 있어서 원조를 거절하였다. 중이의 무리가 오록(五鹿)에 다다랐을 때에는 이미 배고픔을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농민에게 구걸했으나 농민은 진흙을 담아 주었다.
어쩔 수 없어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사람과 말 모두 지쳐 기진맥진하게 되었다. 중이가 지치기도 하고 배고프기도 하여 수행인 앞에 쓰러졌다. 수행인들이 산나물을 캐다가 탕을 끓여 허기를 채우려고 할 때 개지추(介之推)가 자신의 허벅지의 살을 베어다 탕에 넣고 끓여 중이에게 바치자 감격해 눈물 흘렸다.
이후 그들은 또 여러 번 방랑하며 평탄치 못한 생활을 하다가 마침내 진목공의 도움을 받아 기원전 636년에 국군이 되었다. 바로 문공이다. 문공은 9년 동안 재위하면서 진(秦)나라와 결맹하였다. 역사상 유명한 ‘진진지호(秦晉之好)’다.1)
이후 왕자대(王子帶)2)의 난을 평정하고 주(周)양왕(襄王)을 받아들였다. 초(楚)나라를 치고 송(宋)나라를 구하여 춘추오패의 하나가 된다. 『좌전』은 ‘하늘이 도와’(天助)서 성공했다고 했으나 사실은 19년 동안 유랑하면서 구걸하고 남에게 얹혀살았던 어려운 경험이 뛰어난 모략과 재지를 갖춘 그를 만들었다.
귀공자 출신이라는 허위, 일시적 안락을 구하는 습성, 유약하고 겁이 많은 본인의 본질을 개조해 일대의 재능을 가진 성숙한 정치가로 만들었다. 그 당시에는 어떤 군주도 중이와 비교되는 공업을 쌓지 못했다. 그 잠재된 기틀은 무엇이었을까? 중이가 만난 여러 가지 고난을 겪었기에 가능하였다 할 수 있다.
이것이 중국역사상 최초로 기록된, 유랑하며 걸식 생활 하면서 단련하여 뜻을 이룬, 끝내 대업을 이룬 한 시대의 제왕이된 거지 이야기이다.
북제 후주, 황음무도해 걸식하는 것으로 유희를 삼다.
당나라 기록3)에 따르면 북제(北齊)의 어린 군주 고항(高恒)은 융화(隆化) 2년(577)에 즉위하여 황제가 됐는데 8세에 불과하였다. 승광(承光)으로 개호하고 후주(後主) 고위(高緯)를 태상황제로 높였다. 그러나 황제 자리에 앉은 지 1년 만에 멸망한다.
나라가 멸망하는 데 8세 황제가 무슨 책임이 있을까? 다른 여러 원인은 논하지 않고 직접적인 책임을 묻는다면 역시 태상황에게 잘못이 있었다.
후주 고위는 우매하기 그지없었고 황음무도 했으며 부패하였다. 그가 집정할 시기에 간신이 권력을 장악해 작당하고 사리사욕을 꾀했다. 정치를 어지럽히고 백성에게 해를 끼쳤다. 고위는 그런 정세에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무엇을 했을까?
모든 시간을 사치와 낭비로 허비하였다. 육욕을 만족시키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고위는 궁중의 하녀를 군군(郡君)으로 봉했다. 궁녀에게 호화롭고 비싼 옷을 입게 했으며 고급스런 음식을 먹게 하였다. 그 수가 500여 명이나 되었다. 치마 한 벌이 만 필 가격이었다. 거울 하나가 천금에 달했다. 모두가 다투어 사치했다. 허영을 다퉜다. 아침에 입었던 옷조차 저녁이면 버려버리고 다시는 찾지 않았다. 황제는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황제 자신은 궁원(宮苑)을 대대적으로 개보수하고 언무수문대(偃武修文臺)를 건축하였다. 여러 비빈은 각자 경전(鏡殿), 보전(寶殿), 독모전(蝳蝐殿)을 세웠다. 단청하고 조각하여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더 기막힌 것은 진양(晉陽)에 화려하기 그지없는 12원을 세웠다는 점이다.
고위는 항심이 없었다. 오늘 건축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헐고 다시 세웠다. 공인들에게 밤 세워 지으라고 하였다. 겨울에는 더운 물로 진흙을 이기라고 하니 곤궁한 공인들은 하루도 쉬지 못했다. 진양의 서산을 파서 불상을 건조하는 데에 하룻밤에 불을 밝히며 소모한 기름이 만 대야나 되었다. 불빛이 황궁까지 비췄다.
또 호(胡) 소의(昭儀)를 위하여 대자사(大慈寺)를 건조하였다. 완성되기도 전에 다시 목(穆) 황후를 위한 대보림사(大寶林寺)로 개축하였다. 지극히 정교하였다. 돌을 나르고 우물을 파면서 소비한 금액이 수만에 이르렀다. 사람과 짐승이 셀 수 없이 죽어나갔다.
고위 황제의 말이 먹는 식물은 10여 종에 달했다. 발정 나 교배할 때에는 특별히 청려(靑廬)를 세워 친히 감상하기도 했다. 고위의 개는 양식과 고기로 배를 채웠다. 말과 매에게는 각기 다른 의동(儀同), 군군(郡君)의 봉호를 하사하였다.
닭싸움, 경마 어느 하나 좋아하지 않는 게 없었다. 각지에서 전갈을 구해오라 독촉하니 하룻밤 사이에 그 양이 3승이나 되었다.
가장 가증스럽고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만드는 것이 있었다. 천자에 자리에 앉아있는 자가 후궁의 화림원(華林園)에 황폐한 마을을 조성하고 쓰러져가는 초가를 만들었다. 황제의 의복을 벗어던지고서 낡은 옷을 걸쳐 자기 스스로 거지처럼 가장하고 걸식하러 다녔다. 배고파 불쌍한 모습으로 분장하고 상점에서 장사하기도 하였다.
고위는 사람에게 검은 옷을 입혀 강(羌)족 병사로 분장시켜서 달아나게 한 후, 북을 치며 쫓아 수치감을 주고 자신이 친히 활을 쏴 맞추기도 하였다. 진양 동쪽으로 순유하면서 단기필마로 내달리고 돌아올 때는 낡은 옷에 산발하였다.
한 왕조의 천자가 된 인물이 백성의 생사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사치를 일삼고 육욕을 채우는 데에 싫증 느낀 나머지 거지와 같이 곤궁해 어쩔 수 없이 걸식하는 비극의 세상사를 가장하여 유희로 삼아 즐겼다. 애환을 기쁨으로 삼는 그런 비정상적인 변태 놀이를 일삼았다.
고위는 실로 중국 역대 제왕 중에서도 진기하기 그지없는 인물이다. 이에 대하여 역사가는 평론하였다.
“근친과 속물에게 조정을 맡기고 위장 사이에서 과도한 사치를 일삼으니 멸망의 징조가 여기에 있지 않은가?”
“제나라의 패망 역시 사람이 만든 것이지 하늘의 이치에 따른 것이 아니다.”4)
어느 누가 아니라고 하겠는가. 만민의 우두머리가 된 자가 백성의 고통을 살피지도 않고 오히려 거지로 분장해 걸식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으니, 어찌 민심을 얻겠는가! 멸망 이외에 다른 결과가 어디 있으랴.
중국역사상 북제의 후주가 거지가 된 것은 환경에 따라 어쩔 수 없이 구걸할 수밖에 없어 된 진짜 거지가 아니라 변태 심리에 의하여 세상 사람을 농락한 것이었다. 거지 무리 중에서 지금까지 그것을 영예롭게 여기지 않는 것은 풍자 편달의 힘을 갖춘 역사의 메아리일 것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진진지호(秦晉之好), 진진지의(秦晉之誼), 진진지연(秦晉之緣), 진환진애(秦歡晉愛)라고도 한다. 춘추전국시대는 천자의 나라인 주(周)나라의 권위가 쇠퇴하고 제후들이 중원의 패권을 도모하던 시기였다. 춘추시대 초기에 진(晉)나라 헌공(獻公)은 진(秦)나라와 우호 관계를 맺으려고 자기 딸을 목공(穆公)에게 시집보냈다. 진(晉)나라는 헌공이 죽은 뒤에 권력 다툼이 벌어져 태자인 신생(申生)이 살해되었고 동생 중이(重耳)는 국외로 도피하였다.
중이는 이후 19년 동안이나 여러 나라를 떠돌아다니다 마지막으로 의지한 곳이 진(秦)나라였다. 목공은 중이가 재능이 출중하며 충후한 인물임을 알아보고 일족의 딸과 혼인을 맺게 하였다. 얼마 뒤, 중이는 목공의 도움을 받아 조국으로 돌아가 폭군을 주살하고 군왕에 올랐다. 문공(文公)이다. 문공은 아들을 태자로 책봉하고 진(秦)나라 왕실의 딸과 혼인시키면서 부자(父子) 모두 진(秦)나라와 인척 관계를 맺었다.
목공과 문공은 나라를 강대국으로 키워 춘추오패(春秋五覇)에 속한다. 열국(列國)이 패권을 다투던 시기에 강대국인 진(秦)나라와 진(晉)나라는 혼인을 맺음으로써 우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여기서 유래하여 ‘진진지호’는 두 집안이 혼인으로 맺어지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2) 숙대(叔帶, ?~BC635), 자대(子帶), 왕자대(王子帶), 태숙대(太叔帶)로도 불린다. 춘추시대 주(周)나라 사람으로 주혜왕(周惠王)의 소자(少子)이고 주양왕(周襄王)의 이복동생이다. 감(甘)에 식읍(食邑)이 있어 감소공(甘昭公)으로도 불린다. 혜공이 태자 정(鄭)을 폐하고 태자로 삼으려고 하다가 제환공(齊桓公) 등의 제지를 받았다. 혜왕이 죽은 뒤 태자 정이 양왕이 되었다. 융적(戎狄)과 양왕을 칠 것을 모의하고 왕성을 공격했다. 진(秦)나라와 진(晉)나라가 와서 구원하자 제나라로 달아났다. 나중에 주나라로 돌아왔다. 양왕 16년에 적(狄)이 주나라를 공격하고 그를 세워 왕을 삼았다. 양왕은 정(鄭)나라로 달아나고 제후들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다음 해 진문공(晉文公)이 양왕을 주나라로 보내 그를 살해하도록 했다.
3) 이백약(李百藥)이 편찬한 『북제서(北齊書)』 8권 「제기제팔(帝紀第八)」
4) 이백약(李百藥)의 말, 『제기(帝紀)』卷8.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