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때에는 대체로 현(縣)을 중심으로 다스렸다. 각 지역의 거지를 관리하는 항방의 수령을 거지 두목이라는 뜻인 ‘개두(丐頭)’라 불렀다. 개두는 대부분 암흑가 흑사회(黑社會) 방회(幇會)의 핵심 인물이나 본바닥 건달, 불량배가 맡았다. 아문의 인가를 받았더라도 세력에 기대어 이루어졌다. 패권을 다투는 중에 각종 수단으로 여럿을 굴복시킨 후 자리를 차지하는 이도 있었다.
개두는 이른바 ‘몽둥이(杆子)’를 권력의 상징으로 삼았다. 사실은 구걸할 때 가지고 다니는 타구봉(打狗棒)의 추상적 숭배에 불과하지만 권력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개방에 속한 사람은 몽둥이로 활동하는 사람이라는 뜻인 ‘간상인(杆上的)’이라 불렀다.
방주(幇主)의 ‘몽둥이’는 ‘상방보검’1)과 같아서 개방의 규율인 ‘방규(幇規)’를 위반한 거지를 징치하여 ‘때려죽여도 원망하지 않을’ 정도의 위력을 가졌었다.
신임 방주는 먼저 조사(祖師)와 ‘몽둥이(杆子)’에게 제사를 지내어 권력을 위임받았다고 명시하였다. 새로 개방에 가입한 거지는 반드시 방주에게 몽둥이를 증송해 관할에 복종을 표시하였다.
사실, 중국전통문화의 배경 속에는 ‘몽둥이(杆子)’는 타구봉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나이〔호한(好漢)〕들이 거의(擧義)하다’는 함의를 가지고 있다. 『사기·진시황기(秦始皇紀)』에 진섭(陳涉)의 봉기를 “나무를 베어 무기로 삼고 장대를 높이 들어 깃발로 삼았다.”라고 기록에서 비롯되었다.
나중에 농민봉기를 ‘장대를 높이 들어 일어났다.’라고 표현하였다. 명나라 때에 녹림이 뜻을 모아 봉기한 사건이나 단체를 ‘납간자(拉杆子)’2)라 한 것도 그러한 표현 습관의 연장이다. ‘간(竿)’이 ‘간(杆)’이 된 것은 글자는 다르나 뜻은 같은 별칭이다.
청나라 때에 경사(京師)에서 활동하는 개방에는 황간자(黃杆子)와 남간자(藍杆子)로 나뉘어 있었다. 만청팔기(滿淸八旗)에서 유래하였다.
황간자는 전문적으로 종실 팔기 중의 거지를 관할한 고급 개방(丐幇)이었다. 황간자 구성원은 팔기 중에서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는 인물이나 시정에서 제멋대로 행동하는 무리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개두는 할 수 없이 그중 권위가 높거나 세력이 큰, 포악하고 고집이 센 왕공 버일러(貝勒)3)가 맡았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 거지를 관할할 수 없었다.
황간자 개방의 거지는 평상시에는 길거리에서 구걸하지 않았다. 단오절, 중추절, 연말에 여러 점포를 돌아다니며 구걸하였다. 명절 때가 되면 세 사람이 한 조가 되어 노래 부르고 고판(鼓板)〔박자판〕을 두드리며 다녔다. 노래 부르는 거지는 손등을 위를 향하게 하고 판을 두드리는 거지는 고판을 평평하게 들고 다녔다. 보시하라는 의사표시였다.
점포 문 앞에 다다르면 상점 점원이 나와서 최소한 고액화폐 5매 이상을 머리 위로 높이 들고 공손하게 고판 위에 올려놓았다. 거지가 다섯 구절을 노래하기 전에 보시하는 돈을 꺼내야만 했다.
그런 규칙을 어기는 점포가 있으면 거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떠났다. 이튿날에는 더 많은 사람이 들이닥쳤고 그 다음날에는 더 많은 거지가 모여들었다.
점포 문을 열 때부터 닫을 때까지 거지 무리는 문 앞을 떠나지 않았다. 못된 장난은 치지 않았지만 돈을 내지 않으면 영업할 방법이 없게 만들었다. 주변 사람과 상점 주인에게 황간자를 잘못 건드리면 화를 초래해서, 사서 고생한다는 것을 제대로 알려 주는 행동이었다.
그러면 상점 주인은 중재해줄 사람을 초청하여 화친을 청하고 수천이나 되는 돈을 건네야 했다. 적게 주면 끝이 없었다. 더 많은 돈을 방주에게 주고 조정하면 빠르고도 순조롭게 해결이 되었다.
경사(京師)의 남간자는 일반 거지를 관할하는 개두(丐頭)〔거지 우두머리〕였다. 새로 온 거지는 3일 이내에 구걸한 물건을 모두 개두에게 보내야 했다. ‘헌과(獻果)’라고 한다. 헌과가 많으면 많을수록 빛이 났다. 평상시에는 구걸해서 얻는 물건의 20%정도만 떼어 내어 개두에게 헌납하면 됐다. 규정에 따라 개두가 걷는 일반적인 수입이었다. 명절이나 설, 결혼식이 있거나 장례식이 있으면 상점 주인이나 상주는 정액 이외에 더 많은 돈을 개두에게 주었다.
개두는 지역을 관할하는 거지 우두머리였다. 밖에서 온 거지가 관내에서 구걸하려면 지역 개두에게 복종하여야 했다. 상점들도 거지의 소란을 피하려면 많은 돈을 개두에게 뇌물로 주고 표주박 형태의 종이를 얻어서 문에 붙여놓았다. ‘조문(罩門)’이라 한다. 어떤 곳에는 ‘모든 형제는 소란을 피우지 마라.’라는 문구를 써놓기도 하였다.
‘조문’이 붙어있으면 거지는 그곳은 건너뛰고 구걸하러 가지 않았다. 개두가 거둔 돈의 일부를 여러 거지에게 나누어 주기 때문이었다. 그 규칙을 위반하는 거지가 생기면 상점 주인은 개두에게 알려서 조정하고 징치하도록 했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조문’이 붙여진 상점에는 다시 가서 소란을 피우는 일은 없었다.
거지가 병이 나거나 죽으면 개두는 의무적으로 적당한 위로금을 주거나 조직에 있는 구성원이 분담하였다.
‘복이 있으면 함께 누리고 어려움이 있으면 함께 감당한다.’라는 ‘고락을 함께 하는’ ‘동고동락’의 의식 중에 실행된 것은, 패주 방식의 봉건 가장 제도였다. 개두는 내부의 권리와 지위를 상징하는 몽둥이를 몸에 지니고 다녔다. 굵고 긴 담뱃대를 늘 사용하면서 거지 내부에서 자신의 신분을 명시하였다.
30년대 초에 여대생 두 명이 거지 문제를 전문적으로 연구하여 「상해(上海) 칠백 거지에 대한 사회 조사」를 발표하였다. 그중 한 대목은 다음과 같다.
“청대에 이르러 거지에게 개두(丐頭)가 생겼다. 대체로 횡포하고 세력이 있어야 자격이 주어졌다. 지방마다 지현(知縣)이 임명하여 파견했는데 구역을 나누어 관할하였다. 개두는 각 구역 내에 있는 거지를 관리하는 절대적인 권위가 주어졌다. 새로 온 거지는 먼저 개두가 있는 곳에 가서 그를 위하여 복무한다고 보고하여야 했다. 매일 수당을 지급하거나 호되게 맞아야 했다. 그가 견뎌내면 그 구역 내에서 구걸할 수 있었다. 개두가 거지가 길에서 구걸하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까닭에 매월 상점에서 ‘개연(丐捐, 거지에게 주는 물품)’을 거두고 도장 찍힌 홍색 종이를 건네주어서 문에 붙이면 거지들은 다시는 그곳에 가서 구걸하지 않았다. 그런데 거지에게 돈을 나누어 줄 때에 개두는 자주 이자를 받았고 여전히 거지들을 내버려두어 길거리에서 구걸하게 하였다. 이렇듯 개두는 거지를 통제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거지를 착취하였다. 그런 개두는 세습 되는 까닭에 그들의 권위는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여전히 지방에서는 세력이 있다.”
이 보고서를 보면 청나라 말기 민국 초기에 상해 개방의 대체적인 상황을 알 수 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