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형적인 개방(丐幇)이 그렇다.
그들은 원래 안정적인 사회 세포 ― 가정에서 분열되어 나와 사회의 불안정한 구성원이 되었다. 동서로 유랑하고 남북으로 떠돌아다니다…, 결국에는 H시에 모여들었다. 만나자마자 합쳐져서 두려운 도둑집단이 되었다.
집단 구성원은 16명, 성년이 된 2명 이외에 모두 소년이었다. 그중 소녀가 2명으로 그 왕국의 왕후였다. 낮에는 구걸하며 ‘근거지를 밟아보고’(정탐), 밤에는 집을 비틀어 열었다. 이것이 그들의 행동 규칙이었다.
16명의 도둑이 밤에 4명씩 짝을 이루어 활동하면서 2번씩 도둑질을 하면 한 도시에 어떤 소란이 일어날까? 한 번 보자.
H시는 연말이다. 그들이 자신들의 천당에서 나와 모 기관 가족이 사는 지역에 파이프를 타고 기어 올라가서는 방사형으로 흩어져서 인근의 집 안으로 스며들었다. 얼마 되지도 않아 그들 모두에게 자전거가 생기자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튿날 아침, H시 공안국은 3개 구역의 공안 파출소에서 보낸 경보를 받는다 : 시 위원회 가족이 사는 구역에서 도둑맞은 자전거가 4대다. 시 방역센터의 썰렁한 숙소도 도둑맞았다. 자전거 2대, 소고기와 양고기 150근, 여러 종류의 배갈 8병, 밀가루 100근, 귤과 사과 200근, 물고기 60근, 그리고 기타 식품 약간이다. 모 공장 문 앞에 있는 소형 매점에서도 도둑맞았다. 귤 세 상자다. 어떤 거리 지청 매점도 도둑맞았다. 해바라기 씨 한 마대, 대추 3상자다. 야근하는 노동자의 집도 도둑맞았다. 고급 옷과 옷감 약간, 600원 가량이다.
그날 밤, 3개 구역에서 도둑맞았다. 온 도시에서 범죄를 저질렀다. 시끌벅적, 극성스럽게 됐다!
설날 전날 밤, 인심은 흉흉하고 원성은 자자해졌다. 설날 지나고 나서 그러한 사건은 몇 차례 더 반복해서 발생하였다.
좋은 일은 좀처럼 세상에 알려지지 않으나 나쁜 일은 이내 널리 알려지지 않던가. 일시에 그 도시의 시민은 긴장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정상 생활과 업무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때 그 ‘양상군자’들은 그들의 지하궁전에서 그들의 ‘왕후’를 품고 있다. 고기가 산더미 같이 쌓여있고 술이 바다를 이룬 듯이 향락을 쫓고 있다! 획득한 물건은 금세 사라져 버렸다. 먹고 마시다 먹을 수 없는 것은 버리고 가지고 다닐 수 없는 것은 팔아치웠다. 컬러텔레비전 1대가 17원이다! 실로 쉽게 얻고 쉽게 사라질지니!
사건을 해결하기가 쉽지 않다. 그들은 특수한 도둑 집단이었다. 그들의 신분도 특이하였다. 낮에는 숨어있고 밤이 돼서야 나타났다. 종적이 일정하지 않았다. 유동성이 너무 컸다. 늘였다 당겼다 마음대로였다. 수사 후 사건이 해결되니 사람들은 놀랄 수밖에…….
법을 집행하는 부서도 태어난 후 처음 보는 사건이었다. 각각의 상황도 다르고 원류도 다르지만 공통점은 분명했다 :
첫째, 처음에는 구걸하다가 나중에 도둑이 되었다.
둘째, 구걸할 때에는 미성년이었다.
셋째, 대부분이 돌아갈 집이 없는 고아였다.(『거지종적』)

산동 요성(聊城)현 장관둔(蔣官屯)에 왕 씨 성을 가진 16세 소년이 있었다. 집안에서 항렬이 가장 낮은 소년이었다. 어릴 적에 응석받이로 자랐다. 조그마한 일로 부모하고 다투게 되자 화가 나서 5원을 훔쳐서는 성도 제남(濟南)으로 도망쳤다.
번화한 밤의 장막 아래서 그는 노란머리 소년 거지에 이끌려 천교(天橋) 부근의 삼각화원(三角花園)으로 갔다. 그때부터 그 지역을 대본영으로 삼은 거지 항방(行幇)의 구성원이 되었다.
그 개방(丐幇) 구성원은 전국각지에서 모인 자들이었다. 산동, 강소, 하북, 산서, 하남, 절강, 안휘, 광동의 어투가 있었고 동북 3성 어투도 있었다. 거의 중국의 절반 이상의 지역에서 모였다. 어투는 다르지만 개방에서는 ‘흑화(黑話)’〔은어(隱語)〕라는 특수한 언어로 소통하고 협력하였다.
예를 들면, 장기간 한 지방에 머물며 구걸하는 것은 ‘궤점(跪點)’, 근거지는 ‘산두(山頭)’, 돈을 모으는 것은 ‘양협(兩夾)’, 돈이 있는지 없는지 물을 때는 ‘유수(有水)’, ‘몰산(沒山)’, 의복의 상중하 주머니를 나누어 ‘상층’, ‘중층’, ‘하층’, 철로 간선은 ‘쌍조(雙條)’, 버스 노선은 ‘단조(單條)’, 100원은 ‘일간자(一杆子)’, 삼오 천 원은 ‘삼오조(三五槽)’, 오륙 만 원은 ‘오륙감자(五六坎子)’, 잠자는 것은 ‘사도(死倒)’, 이익이 많고 적음을 나눠서 ‘쥐’, ‘토끼’, ‘호랑이’로 설명했다.
장물을 파는 것은 ‘매교(賣巧)’, 장물을 사는 것은 ‘흘교(吃巧)’, 피를 파는 것을 ‘도선(桃仙)’, 다투는 것은 ‘초죽강(炒竹杠)’, 남의 약점을 이용하거나 구실을 빌어 바가지를 씌우거나 재물을 뜯어내는 것을 ‘흘이만(吃二饅)’, 준수한 청년은 ‘소말자(小末子)’, 여자와 노는 것은 ‘괘마자(掛馬子) 등등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그 항방에 소속된 인원의 면모를 충분히 알 수 있다.
거지 노파가 매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의자에 앉아 부채를 부치고 있더라도 많은 거지들이 주동적으로 건너가 안부를 전하고 과일을 건네거나 돈을 헌납한다.
원래 개방에는 등급이 삼엄했다. 금자탑식 구조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가장 큰 권위를 가지는 자는 역시 방주로 ‘노야자(老爺子)’라 불렀다. 큰형님부터 아홉째까지 심복인 ‘야문(爺們)’을 임명하고 수양아들로 삼은 교도를 거느릴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그 다음은 ‘저문(姐們)’과 ‘노마마(老媽嬤)’가 있었다. 자색과 연령에 따라 안배했다. 나머지 거지는 나이에 상관없이 똑같이 ‘가문(哥們, 형제들)’이라 불렀다.
그들은 낮에 팀을 만들어 도둑질하여 질탕 먹고 마신 후 밤에는 혼숙했다.
제남 개방의 분소 ― ‘십형제회(十兄弟會)’였다. ‘노대(老大)’는 광주, 심천에서 놀았던 40년 동안 강호를 유랑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상해에서 제남으로 잠입한 이튿날 그 조직을 만들었다.
눈송이가 흩날리던 오후에 10명이 모닥불에 둘러앉아 20개 손을 중첩되게 얹은 후 맹세하였다. 행복은 함께 누리고 고통은 같이 분담하자고, 삶과 죽음을 같이 하자고, 무슨 일이 있어도 헤어지지 말자고 굳게 맹세하였다. 그런 후에 그가 주전자를 들고 술을 따라 모든 사람이 한 잔씩 마셨다.
그때부터 그들은 나뉘어 어울리는 방식대로 짝을 이루어 도둑질 했다. 30여 차례 크고 작은 범죄를 저지르다 체포되었다.
그러나 개방에 가입하는 것은 ‘십형제회’처럼 그렇게 쉬운 게 아니었다.
하룻밤 사이에 미산호(微山湖)에 있는 집에서 가출한 어린 거지가 상해에서 소년 거지들이 개방에 가입하는 의식을 훔쳐보았다.
어두컴컴한 구석에서 거지 10여 명이 개방에 가입하려는 열네다섯 먹은 소년을 둘러싸 있었다. 팔짱낀 사람, 다리를 누르고 있는 사람, 등을 누르고 있는 사람 등 여럿이 있었다. 어린 거지는 아파서 신음했지만 손수건으로 입이 물려 있어 밖으로 새어나오지 않았다. 두 명의 ‘카우보이’가 잭나이프로 어린 거지의 팔뚝을 십자형으로 그었다.
10원 지폐를 가지고 떨어지는 피를 받아서는 불을 붙였다. 그의 식지와 중지 사이에 끼니 불꽃이 손가락을 타고 들어갔다. 곧바로 카우보이가 명세하였다.
“만약 내가 규칙을 어기지 않으면 내 육체는 이 ‘대단결’처럼 타서 없어질 것이다!”
맹세를 마치고나서야 거지들에게 둘러싸여 방주를 만나러갔다.
그 관경을 본 미산호의 거지는 겁이 나 감히 개방에 가입하지 못하고 밤을 이용해 상해를 벗어났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