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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100세 일기] 아들을 위해 미국행을 택했던 어머니, 그리고 지금의 나

 

어머니와 함께 살아 온 지 20년이다. 지난 3월에 만 백 세를 넘기시고, 101세를 살아가시는 어머니. 요즘은, 해가 떨어지면서 하늘 끝에 남기고 간 황혼처럼 어둠의 그림자에 잠길 때가 많다. 누워 있으면 숨 쉬는 게 버거우신지, 벽에 기대어 계실 때도 자주 있다. “어머니, 이추룩 앉앙 이시민 몸이 버치난, 그자 펜안허게 누웡 이십서(이렇게 앉아 있으면 몸이 버거우니까, 그냥 편안하게 누워 계세요)”라고 하면, “고만 이시라게, 홑썰만 숨 돌령 누우키여...(잠깐 있어라. 조금만 숨을 돌려서 누울테니)”라고 하신다. 아, 이제는 삶이 무거우신 게다. 기력이 다하여 숨을 쉬기 조차 버거우시니....

 

문득, 어머니와 함께 지나 온 시간들을 되돌아 본다. 어머니가 없었으면 어떻게 살았을까? 어머니는 2남7녀의 자녀들 중에서, 왜 장남도 장녀도 막내도 아닌 내게로 오셨을까? 요즘 들어 살이 많이 빠져서 주름이 깊어진 얼굴. 고단한 어머니를 무심한 내가 들여다 본다. 지나온 삶의 흔적들이 주름진 고랑마다 화석처럼 남아 있다.

 

“무사 나 얼굴엔 이추룩 시거멍헌 것들이 초기추룩 피엄신고(왜 내 얼굴에는 이렇게 시커먼 것들이 버섯처럼 피어날까) 이?’라면서 화장대에 비친 내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시던 때가 좋았다. 영양크림을 얼굴에 잔뜩 바르고서 거울을 보고 또 보시던 어머니. 그 때가 참 좋았다. 그렇게 어머니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강물처럼 먼 데로 흘러갔다가, 바다처럼 다시 내게로 밀려 들어온다. 어머니가 이 여름을 무사히 보내시기를.... 기도하는 내 가슴 속으로, 파도가 철썩철썩 물보라를 일으킨다.

 

서귀포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을 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어머니 품을 떠났다. 중문에서 서귀포까지 시외 버스를 타면 30〜40분, 서귀포에서 학교까지는 20여분이 걸렸다. 나는 서귀포에 사는 둘째 언니 집에 맡겨졌고, 집에 가는 길은 마음에서 지웠다.

 

5월 어느 날, 어머니가 곤 쌀(흰쌀)을 짊어지고 서귀포로 오셨다. 그 무거운 것을 등에 지고, 대포에서 중문까지 비포장 길을 걸어, 산지동산을 숨가쁘게 넘고, 만원버스에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오신 거다. 집을 떠난 지 두 달이 지나도록 얼굴을 볼 수 없는 딸이, 어떻게 사는 지, 울고 있지는 않은 지, 보고 싶고 궁금도 하셨으리라. 언니 집 마당으로 들어서는데, 한 숨 섞인 목소리가 나즈막하게 울렸다.

 

"어떵 해영이라도, 정옥이, 자이가 가구정 헌 제주시로 보내줘시민 좋아실 건디.... 우리 상에 애돌아신고라, 두 덜 넘게 집에 안 댕기난.... 어떵 살암신고 궁금도 허고, 보구정도 허고.... 어떵 밥이나 잘 먹엉 댕겸시냐?(어떻게 해서라도, 저 애가 가고 싶은 제주시로 보내줬으면 좋았을 텐데.... 우리 편에 서운했는지, 두 달 넘게 집에 안 다니니...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도 하고, 보고 싶기도 하고... 어떻게 밥이나 잘 먹고 다니느냐)." 그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가이는 공부배끼 모르는 아이난, 걱정허지 맙서. 시간 아까완 집에도 안 감실 거우다. 어멍 닮안 욕심이 좀 쎈 거 닮아 마씸!” 샛언니의 커져 가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춰 섰다. “게메이, 물질 허는 거 보민, 욕심이 좀 이신 거 닮아라 만은...., 아직은 두린(어린) 아이 아니냐게. 얼마나 집에 오구정 헐 거니(오고싶어 할거냐).... ” 어머니의 목소리가 잦아들다가 멈췄다. 아마도 옷소매로 눈물을 훔치시는 모양이다.

 

그 때는 공부를 좀 한다 싶은 아이들은 제주시로 진학했다. 명문고라 불리는 S여고, J고에 몇 명을 보내느냐에 따라 지역의 중학교들도 소위 ‘지방 명문’의 서열이 매겨졌다. 교감 선생님은 ‘어린 것이 돈부터 안다’면서, 내 손바닥을 들어 올려서 맵싸하게 때렸다. 아프기보다 서러워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명문고에 가고 싶지 않은 아이가 어디 있으랴. 교복이 소속을 말해주고, 고개의 각도와 얼굴의 기상이 다르지 않은가. 아버지는 ‘고등학교에서 주는 장학금을 모아서 대학에 들어갈 때 등록금으로 주시마’고 약속하며 미안해 하셨다. 하지만, 나는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절대로 집에 가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독한 마음을 먹었다. 그게 얼마나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지도 모르고서.

 

대학에 들어간 후에는 입주 아르바이트를 얻어서 숙식을 해결하였다. 주로 ‘왕’이라 부르는 장남의 성적이 나의 소관이었다. 전두환 정권이 대학생들의 과외를 금지하는 바람에 생겨난 비리였다. 방학이 되면 집으로 내려와서 두 주일 쯤 머무는 동안 벼락치기 과외를 하였다. 고향의 인심이 좋아서 한 학기 용돈이 충분하였다.

 

어머니의 몸베 바지에 얼마간 넣어드리고, 느린 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어떻게 아셨는지, 그 바쁜 어머니가 마을의 버스정류소까지 따라 나오셨다. 한여름의 농촌은 밭일과 바당일이 온 동네를 텅 비게 할 만큼 일손을 요구했다. ‘메뚜기도 한철’이라는 말을 이즈음에 들은 듯 하다. 버스가 떠날 즈음, 어머니가 눈시울을 붉히며 손을 흔들었다. 나도 몰래 눈물이 비져나와서 고개를 딴 곳으로 돌려야 했다. 조금만 더 참아주면 어머니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았을 텐데.... 왜 그렇게 나는 어머니가 애절하시게, 그토록 어머니의 정이 간절했을까?

 

88올림픽이 한창이던 때에 부모님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셨다. ‘두 아이를 돌봐주시면 공부를 좀 더 해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고 싶다’는 아들의 부탁을, 어느 부모가 마다할 수 있으랴. 그렇게 미국으로 가신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장례를 마치고서 나를 따라 고향으로 오셨다. 낯 설고·물 설고·말 모르고·길 모르는 미국은, 17년을 살았음에도 어머니에게는 영원한 타국이었다.

 

아직 아이들이 어린 내게는 어머니가 비빌 언덕처럼 크게 도움이 되었다. 자금 와서 다시 돌아보아도, 그 때는 어머니가 안 계셨으면 어떻게 살았을까 싶게 고단한 시간들이었다. 아이들은 할머니가 해 주신 김치찌개는 ‘바로, 이 맛!’이라며 엄지를 치켜세우며 잘 자라주었다. 그 덕분에 내 생애의 40대는, 그야말로 눈썹을 휘날리며 회오리처럼 날아갔다. 나는 그 때 비로소 ‘하늘에도 눈이 있어서 내 삶을 바라보시나 보다’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10년쯤 지난 어느 날 밤, ‘무서워서 혼자 못 자겠다’면서 어머니가 베개를 안고 우리 방으로 오셨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어린 아이의 얼굴이었다. 그렇게 룸메이트가 되어 10년을 보냈다. 이제는 내가 미국으로 떠나시던 어머니의 그 나이가 되었다. 지금쯤 타국에 사는 자식이 있어서, “우리에게 와서 아이를 좀 돌봐달라”고 하면, 모든 것 다 정리하고서, 훌쩍 떠날 수 있을까? 불가능이리라. 나는 어머니처럼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 진짜 어머니가 될 수 없음을 안다.

 

이 글을 쓰는 시간, ‘오늘은 어디 갈 거냐?’고 물으면서 모자를 하나 더 쓰시는 어머니. 4개나 쓰시고서야 흡족하신지 어린 아이처럼 웃으신다. 소나기를 퍼부을 것 같은 하늘도 어머니의 웃음에 안색을 바꾼다. 해맑게 웃으시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오늘은 고향 바다로 드라이브를 떠나볼까 싶다. 어머니의 젊은 시절 일터였던 약천사, 주상절리로 소풍을 가듯이, 산천을 유람해보는 거다. 어머니의 인생사를 집계해 보면, 일과 땀은 총량을 저만치 넘어섰지만, 놀이와 휴식은 아직도 한참이나 모자라다. 그러니, 황혼에 어둠이 깃들어서 외출이 어려워지기 전에, 후회 없이 원도 없이 부족함을 채워가자.

 

어제는 막내딸이 수박을 한아름 안고 와서 어머니 품에 안겼다. “니, 누개네 똘이고? 얼굴도 곱고 솜씨도 좋은 게, 기와집 손지 닮았져 이!”라는 어머니. 기와집 할머니는 식구가 많은 우리에게 유달리 인정이 많으셨다. 일본에 사는 남편이 일 년에 한 번쯤 귀가를 하면, 돼지를 삶고 떡을 해서 온 동네잔치를 크게 베풀었다. 부엌일을 하는 어머니 편으로 밥이며, 떡, 고기, 국을 바리바리 싸서 보내주셨다.

 

어쩌다 내게는 일본제 앙고라 스웨터를 주셨는데, 우윳빛 도는 빛깔과 부드러운 감촉이 세상에 없는 고급 옷이었다. 천사의 날개처럼 행운이 되어서, 그 옷을 입고 시험을 치러가면 이상스레 수상의 영광이 뒤따랐다. 그렇게 해서 육지까지 날아갔는데, 서울 사는 언니 눈에는 ‘아니, 이런 옷...’이 되고 말았다. “어머니는 어떻게 이런 옷을 입혀서 서울로 보내시냐?”면서, 당장 연희동 백화점에서 새 옷을 사주었다. 그바람에 전국 시험에서 낙방을 먹어, 겨우 ‘노력상’에 머물고 말았으니....

 

오늘도 내 글은 삼천포로 빠지고, 어머니는 아기처럼 잠이 드셨다. 천둥치며 소나기를 한 두 차례 후려치더니, 하늘도 미안한지 얼굴을 바꿨다. 오후에는 어머니와 함께 주상절리로 가서, 어머니가 물질하던 바다를 바라보자. 파도치는 인건이 기정(주상절리를 대포마을 사람들이 부르는 지명) 앞에서 어머니의 바다를 추억으로 담아내고저.

 

사랑 받는 만큼 사랑스러워지는 건, 아이나 노인이나 매 한가지다. 이들을 숙명대로 키워내는 데는 온 동네가 필요하다고 하지 않는가. 오늘도 어머니를 미소짓게 할 무슨 일 한 가지를 만들어 보리라. 사람은 이 세상에 내려와서 한 바퀴 원을 돌고 올라가는 천사이려니..... 오늘은 어머니의 어깨에 두 날개를 달아드리자. 꿈 속에서라도 지팡이를 버리고 날개의 힘으로 자유롭게 날아오르소서...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허정옥은?
= 서귀포시 대포동이 고향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뭍으로 나가 부산대학교 상과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하고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미국 볼티모어시에 있는 University of Baltimore에서 MBA를 취득했다. 주택은행과 동남은행에서 일하면서 부경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이수했고, 서귀포에 탐라대학이 생기면서 귀향, 경영학과에서 마케팅을 가르치면서 서귀포 시민대학장, 평생교육원장,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3년간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의 대표이사 사장과 제주컨벤션뷰로(JCVB)의 이사장 직을 수행한데 이어 제주평생교육장학진흥원장을 거쳤다. 현재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서비스 마케팅과 컨벤션 경영을 가르치고 있다. 한수풀해녀학교와 법환좀녀학교도 다니며 해녀로서의 삶을 꿈꿔보기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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