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향인 대포마을의 어르신이 돌아가셨는데, 서귀포의료원에서 일포를 한단다. 모처럼 고향 분들을 뵙겠구나 싶은 마음에, 장례식인데도 반가운 마음이 저만치 앞서 걸었다.
‘98세를 사시다 가신 고인의 사진이 편안해 보인다’라며, 함께 간 언니도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는 눈치다. 돌아가신 할머니는 언니의 단짝 친구인 고명딸을, 발바닥에 먼지 하나 묻지 않도록 곱게만 키우셨다. 사람도 너무 아끼면 하늘이 질투라도 하시는 걸까? 그 귀한 딸이 40대에 먼저 하늘나라로 떠났다.
장례식장은 그다지 무겁지 않은 분위기였다. 아니, 상주의 표정과 문상객들의 인사로 보아, 호상(好喪)인 듯하였다. 복을 누리며 별다른 병치레 없이 오래 사신 분이시니 그럴 만도 하였다.
오랜만에 뵙지만 낯설지 않은 동네 분들이 우리를 보자마자 이구동성으로 어머니의 안부를 물으신다. 가슴이 뭉클하게 따사롭고 정다웁다. “니네가 맻 성제고(몇 형제니)?”라고 묻는 삼춘은 알 동네에서 이웃해 살았던 춘자 어멍이시다. 몰라서 물으시는 게 아니라 그만큼 반가운 마음을 담아서 하시는 말씀이다.
대포마을은 중심에 향사(리사무소)를 두고, 동서남북으로 동동네, 섯동네, 알동네, 웃동네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리사무소 앞에는 커다란 연못이 있었는데, 마을에 불이 나면 온 동네 사람들이 바가쓰(바켓츠)를 들고서 순식간에 모여들었다. 불을 끄는 데는 남녀노소가 따로 없었다.
리사무소에서 '당당당당'하고 급하게 종을 쳐대면, 들이고 밭이고 간에 있는 자리에서 모두 일어나 불길보다 세차게 뛰었다. 어린아이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달리기로 치면 어른들보다 먼저 현장에 다다랐다. 초가집이라 불길이 금방이라도 모든 것을 삼킬 듯이 날름대지만, 어른들이 달려들면 눈 깜짝할 사이에 불길의 기세를 잡고 만다.
아, 얼마나 어른들, 우리 아버지들이 자랑스럽던지..... 중문면민 체육대회에서는 늘 강정에 밀려서 2등을 하곤 했지만, 아마 동네의 불 끄기가 대회라면 대포가 1등을 했을 것이다. 강정은 대포보다 주민들의 숫자가 훨씬 많았다.
“니네 어멍은 잘 이시냐?”라고 물으시는 삼춘은, 오랫만에 뵙는데도 한눈에 알아보겠다. 영자 어멍이시다. “예, 잘 계시우다. 삼시 세끼 잘 드시고, 이빨이 좋으난 갈비도 뜯으십니께!”라고 대답하자, 얼른 나를 부둥켜 안으신다. “아고, 잘 햄져. 고맙다, 착허다, 이! 경해사 헌다. 니네 어멍이 올망졸망 아홉 성제 키우젠 허난, 오죽 고생해시냐게! 밥이 코로 들어가신디 입으로 들어가신디..... 아니, 먹어나 전 살아신가....” 하시며 주섬주섬 음식을 챙기신다.
장례든 잔치든 큰일이 나면, 집에 계신 웃어른들 몫으로 돼지고기 반을 챙겨서 보내는 게 오래된 제주도 풍습이 아닌가. 그러자 옆에 계신 다른 삼춘도 빵과 떡을 싸시면서 한 말씀을 하신다. “니네 어멍은 대포에서 1등으로 오래 살암신예. 경 허난, 호다(부디) 잘 모시라 이, 무슨 일 나민 꼭 연락허곡!”
마치 잔치 같은 조문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어머니와 함께 있었던 아방(아이들 아빠)이 진지한 얼굴로 돌봄의 상황을 전달한다. “103세 어머니가 오늘 나에게 정색을 하고서 한 말씀을 하셨어요. 니가 나 때문에 니 일을 하지 못하는구나.....라고”.
세상에! 우리는 ‘103세 어머니는 3살과 같다’라고 하면서, ‘어머니가 뭘 아시겠냐’ 싶은 마음으로 얼마나 생각 없이 면전에서 함부로 말들을 내뱉었는가. 실상 남편이나 나는 어머니를 돌보아 드리는 것, 아니 그냥 곁을 지켜드리는 것보다 더 큰 일이랄 것도 없는 은퇴자들인데 말이다.
‘더 오래 살지 말앙(말고서) 제게(빨리) 니네 아방한티 가야 될 건디, 이추룩 오래 살멍 니네만 저둘려점저(이렇게 오래 살면서 너희만 걱정을 끼치는구나)...’라는 중얼거림이, 그냥 애창곡처럼 습관적으로 하시는 말씀인 줄 알았는데..... 어머니는 기실로 당신이 오래 사시는 것, 그야말로 장수가 축복이요 기쁨이 아니라 짐이요 부담이신 게다.
문득 우리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아프리카 속담, ‘한 아이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어디 아이 뿐이겠는가. 요즘은 노인의 경우도 아이들과 유사한 돌봄을 필요로 한다.
통계청에 의하면 한국인의 기대수명과 건강수명 간 격차가 17.5년이나 된다. 오래 살지만 노년에 ‘환자’로 지내는 기간이 길어진 것이다. 기대수명은 82.4세로 10년 전과 비교해 3년 이상 늘어났지만, 건강수명은 64.9세에 불과하다. 요즘 들어 어린이가 없어서 문을 닫는 어린이집이 요양원으로 바뀌는 곳들이 많다는 얘기가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
참고로 제주도는 2024년 12월 말 현재 65세 이상 고령인구가 12만6985명, 인구의 18.9%, 전국 대비 11위다. 또한 85세 이상 초고령노인의 비율로 측정하는 장수도는 전남, 전북, 경북, 충남, 강원, 충북, 제주 순이다. 하지만 100세 이상은 232명으로, 인구대비 1위로 멀찌감치 선두를 달린다. 이제 제주도는 ‘백세의 섬’이 되었다.
백세에 임박한 98세부터 어머니를 재가복지제도에 따라 가족 요양보호를 하면서 느낀 게 바로 노인 문제다. 어머니는 비교적 건강하셔서 하루 세끼, 식사를 잘 하신다. 다행히 이빨이 튼튼해서(어금니 하나를 빼고는 모두가 건재하다) 간식도 좋아하시니, 집에서 모시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그리고 일찌감치 2남7녀를 낳으시고 길러놓으신 덕분에 효녀들이 있어서 나의 부담은 거의 없다.
가까운 곳에 사는 5번째 딸이 반찬·의복·미용(머리, 화장품 등)·여가 등을 도맡아 책임진다. 한림에 사는 4번째 딸은 멀리 있어서 직접 못하는 돌봄의 몫으로 매달 정해진 날짜에 용돈을 듬뿍 보내온다. 어머니도 그 사실을 알고 계신다. 막내는 제주시에서 병원 약을 타오고 맛 나는 간식과 어여쁜 재롱으로 제 몫을 다한다. 6번째인 나는 그냥 집과 손을 내놓는 것 뿐이다. 어머니가 언제나 당당하게 어쩌면 담담하게 당신의 인생을 우리 집에서 보낼 수 있는 데는, 여러 자식들이 저마다 어머니를 모시려는 마음이 충만하기 때문이다. 언제고 내가 잘 못하면,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는 자식에게로 가면 되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22년째 우리 집에 머물러 계시는 이유는 해녀 출신인 당신이 지내기에 바닷가인 보목마을이 안성맞춤이기도 하지만, 보아하니 당신의 도움 없이는 우리가 도무지 살아갈 것 같지 않기 때문이었다. 첫 10년은 돌봄을 받으신 게 아니라 오히려 어린 아이들을 돌봐주시고 가사까지 맡아주셨으니까. 되돌아보면 어머니가 돌봄을 필요로 하는 노인이 되면서부터는 온 식구가, 교회가, 동네가, 나라가 혼디 모다들엉(다함께 모여들어서) 일심동체로 거들어 주었다.
그 때문에 나 또한 지난 2022년 사단법인으로 제주장수복지연구원을 만들어 노인 복지 문제에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제 보니 어머니 덕이었다. 또한 어느덧 노인이 된 내가 어머니를 집에서 요양보호 하면서 국가의 재가복지제도에 의한 고용창출의 수혜자가 되어 있다. 이 또한 어머니 덕분이 아닌가.

문득 어머니가 등에 미역을 짊어지고서 모슬포장, 중문장, 서귀포장을 다니며 팔았던 걸음걸음이 떠오른다. ‘영실 아래 고사리는 우리 어머니가 다 꺾었는데....’ 싶을 만큼 무거웠던 노동의 계절을 생각해 본다. 해가 기울 무렵이면 1100도로 버스에다 고사리 두 포대를 싣고서 연신 고개를 숙이던 어머니의 붉어진 얼굴과 무거운 등허리도 눈시울을 적신다.
이제는 지팡이를 짚고서 103세의 길을 걸으며, 나에게 손을 내미시는 어머니. 그 손을 꼬옥 붙잡고서 이 길 끝까지 함께 걸어가고 싶다. 어느 시인의 귀로처럼, 어머니가 걸어오신 아득한 인생길을, 사월의 저 바다 위에 하염없이 풀어놓고서 가슴 속 바다에다 영원히 담아두고저.
‘어떤 귀로’
새벽 서릿길을 밟으며
어머니는 장사를 나가셨다가
촉촉한 밤이슬에 젖으며
우리들 머리맡으로 돌아오셨다.
선반엔 꿀단지가 채워져 있기는커녕
먼지만 뿌옇게 쌓여 있는데,
빚으로도 못 갚는 땟국물 같은 어린것들이
방 안에 제멋대로 뒹굴어 자는데,
보는 이 없는 것,
알아주는 이 없는 것,
이마 위에 이고 온
별빛을 풀어 놓는다.
소매에 묻히고 온 달빛을 털어 놓는다.(박재삼, 1933∼1997).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허정옥은?
= 서귀포시 대포동이 고향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뭍으로 나가 부산대 상과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하고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미국 볼티모어시에 있는 University of Baltimore에서 MBA를 취득했다. 주택은행과 동남은행에서 일하면서 부경대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이수했고, 서귀포에 탐라대학이 생기면서 귀향, 경영학과에서 마케팅을 가르치면서 서귀포 시민대학장, 평생교육원장,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3년간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의 대표이사 사장과 제주컨벤션뷰로(JCVB)의 이사장 직을 수행한데 이어 제주평생교육장학진흥원장을 거쳤다. 현재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서비스 마케팅과 컨벤션 경영을 가르치고 있다. 한수풀해녀학교와 법환좀녀학교도 다니며 해녀로서의 삶을 꿈꿔보기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