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오래 전, 어딘가에 써두었던 것인데, 우연히 발견하였다. 하루 종일 고개를 수그리고 졸고 계신 어머니를 지켜보며 시간을 헤아리는 요즘, 왜 김광협 시인께서 ‘유자꽃 피는 마을’에서 ‘백발을 인 조모님은 조을고’라고 읊었는 지를 알겠다. 어머니와 하루 하루를 버텨내면서, ‘사는 게 무언가’ 싶은 생각을 할 때가 많다. 정신이 좋으셨을 때 늘 하시던 말씀대로 어머니의 삶을 요약하면, ‘싸는 물 이시민 드는 물 이신다’가 아닐까 싶다. 제주도 해녀, 어머니들의 삶이다. 그 어머니와 20년을 같이 살아내는 동안, 나 또한 이 말에 인생사를 싣게 되었다. ‘밭을 폴 때 이시민, 살 때도 이신다’는 말과 함께. 이 긍정의 정신, 인내, 기다림....으로 우리 어머니가 살아 낸 인생. 이제는 내가 그 바통을 그러쥐고 달려갈 차례다. 그런데, 벌써 지쳐버린 나. 이 글을 쓰는 동안 다시 어머니의 이름으로 일어서고저! |
어렸을 적, 우리 동네에는 왜 그렇게 눈이 많이 내렸을까? 겨울밤은 왜 그다지도 살이 에이게 추웠을까? 새벽 서 너 시, 어머니가 “정옥아, 밤바르 가게” 하고 소리쳐 깨우면, 나는 그 밤바르가 죽기보다 싫었다. 밤바르는 겨울밤에 썰물이 나간 바다에 가서 소라와 해삼 등을 채취하는 일이다.
낮 시간에는 썰물이라 해도 사람 허리나 가슴께쯤 물이 찼던 곳이, 밤이 되면 육지의 마른 땅처럼 물이 쑥 빠져서 바릇잡이가 수월해진다. 우리는 만조와 간조의 물때표에 따라 한밤 2∼3시에서 새벽 5∼6시 사이의 썰물 시간대에 횃불을 들고 나가 해산물을 채취했다. 보통 음력으로 1일과 15일을 전후 한 2, 3일간이 가장 물이 잘 빠지는 때다. 보름을 7물로 해서 9물까지가 바릇잡이의 적기다.
하지만 어머니를 생각해서 얼른 일어나려고 해도, 잠이 온 몸에 달라붙어서 도무지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겨울밤의 잠은 왜 그토록 깊고도 달콤하단 말인가? 어머니가 “어서 일어나라 이, 바당 반착이 다 몰랐저게(바다 반쪽이 다 말랐단다)” 하며 사정을 할수록 나는 사력을 다해 이불로 온 몸을 감쌌다. ‘왜 나만 깨우는 건가. 언니도 있는데. 나도 잠 한 번 실컷 자보자고!’ 하며 속으로 툴툴거리는 나를, 이번에는 동생이 흔들어 깨운다.
솔직히 동생은 밤바르를 가봐야 별로 도움이 안 된다. 그런데도 눈치 없이 일찍 일어나서는 지가 효녀라도 되는 양 어머니를 거든다. “언니, 일어나! 어머니가 속상해서 우실 것 닮아” 하며 이불을 벗기려 안간힘을 쓴다. 그 동생이 얄미워서 벌떡 일어나 동생을 밀치며 고함을 친다. “야, 넌 뭐야, 너나 가!” 하면, 어머니가 애타는 소리로 나를 달랜다.
“가이가 미신 잘못이냐 게. 이게 다 ᄌᆞ식 하영 난 이 어멍 죄 아니냐. 나도 ᄄᆞᆯ 셋만 나시민 니네들 발창에 먼지 ᄒᆞ나 안묻청 서울 대학교까지 보내키여만은. 니가 워낙 눈이 ᄇᆞᆰ앙 물건을 잘 잡으난, 속상해도 영 소정허멍 니만 깨웜저게. 얼마나 자구정 헐거니게. 오죽허민 니가 영 고래고래 욀거냐게. 게무로사 나가 니 속을 모르크냐? 미안허다, 설룬 나 ᄄᆞᆯ아!(그 애가 무슨 잘못이니. 이게 다 자식 많이 낳은 이 어미 탓이다. 나도 딸 셋만 낳았으면 너희들 발바닥에 먼지 하나 안 묻히고 서울대학교까지 보내겠지만. 네가 워낙 눈이 밝아서 물건을 잘 잡으니까, 속상해도 이렇게 사정하면서 너만 깨운단다. 얼마나 자고 싶겠니? 오죽하면 네가 이렇게 고래고함을 지르겠느냐. 아무려면 내가 네 속을 모르겠니? 미안하구나, 서럽게 태어난 내 딸아!)”
어머니의 조근 조근한 말투에 내심 미안해진 내가 헐레벌떡 옷을 입고 와다닥 밖으로 나선다. 휘영청 밝은 달에 눈 덮인 온 세상이 싸늘하게 빛난다. 차가운 바람이 옷 속을 헤집고 들어와 온 몸에 얼음 칠을 해댄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애초에 일찍 일어나서 옷이나 단단히 차려 입고 나올 것을.... 벌써 어머니와 동생은 저만치 앞장서서 걸어가고 있다. 눈길을 밟는 소리가 뽀드득 뽀드득, 적막한 세상을 조용히 울린다. 그 원초적인 고요함이 온 몸에 소름을 돋운다. 눈을 옆으로 조금만 돌려도 누군가 내 쭈뼛거리는 머리카락을 잡아챌 것만 같다.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어머니를 향해 부리나케 달린다.
“어머니, ᄀᆞᇀ이 가게 마씸(같이 가게요)” 하는 내 소리에 어머니가 뒤를 돌아보신다. 달빛을 받은 어머니의 얼굴이 해쓱하니 여위었다. 괜히 늑장을 부려서 오늘도 또 어머니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걸음을 멈추고 기다리던 어머니가 머릿수건을 풀어서 내 목에 감아주신다. “부지런허민 하늘도 돕는 거여. 귀신도 하늘이 돕는 사름은 어떵 허지 못헌다“ 하시며 씩씩하게 앞장을 서신다.
오늘은 당앞개와 자장코지 바다에서 해삼을 잡으려나 보다. 이곳들은 모래가 있어서 겨울철에 해삼이 많이 나는 지대다. 대포(大浦)마을의 바다는 포구가 있는 큰갯물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대시비개, 당앞개, 자장코지, 지삿개코지로 이어진다. 지삿개는 ‘대포·중문 주상절리대’라 불리는 관광지로, 중문마을과 바다밭의 경계를 이루는 지점이다. 수심이 깊어서 주로 상군들이 소라나 전복, 해삼을 채취하는 곳이다.
동쪽으로는 제배낭개, 큰엿도, 배튼개 바다들이 순서대로 늘어서 있다. 비교적 여(바다 밑에 있는 암반 덩어리)가 많아서 미역, 톳, 우미, 감태와 같은 해조류는 물론 소라, 전복, 오분작, 문어 등이 풍부한 지역이다. 약천사가 있는 곳이 대포지경 바다의 동쪽 끝이다. 그러고 보니 대포 바다는 서쪽으로 주상절리, 동쪽으로 약천사를 경계석 삼아 구불구불 기다랗게 경작지를 펼치고 있다. 다른 마을에 비해서 바당밭이 넓은 편이다.
당앞개는 눈을 감고도 어디가 빌레(자갈밭)이고, 어디에 설덕(바위)으로 둘러싸인 물통이 있으며, 어디쯤에 여가 드러나 있는지 다 아는 바다다. 해삼통은 어디이며, 오분작 지경은 어디인지, 소라는 주로 어디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지, 우리는 지도를 그리듯 외우고 있었다.
낮이라면 한 두 질 숨비질을 해야 하는 해삼통이 정강이 아래까지 물이 훌쩍 빠져 있다. 땅바닥을 허옇게 뒤덮으며 기세 좋게 내리던 눈도 바다에서는 맥없이 자취를 감춘다. 제주바다는 겨울에도 섭씨 15도 이하로 내려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눈이 아무리 퍼부어 봐야 염분 묻은 바위들이 오는 족족 녹여버린다.
달빛 어린 밤풍경에 정신이 혼미해서일까? 돌탱이처럼 무심한 해삼들이 모래속이나 바위틈을 기어 나와 한가롭게 달구경 중이다. 걷다보면 미끈거리며 발에 밟히는 놈들도 있다. 마치 거두다 만 고구마를 줍듯이 부지런히 찾아서 비료포대에 주워 담으면 그만이다.
소라도 밤에는 돌 틈 사이의 자기 집에서 기어 나온다. 잘 생긴 것일수록 돌 위에 걸터앉아서 달빛에 체조하듯 여유를 부린다. 주로 식당에서 좋아하는 쌀구제기들이다. 녀석들은 단단한 체구에 뾰족뾰족한 살들을 껍질에 두르고서 식감 좋은 속살을 은근히 자랑한다. 깊은 바다에서 몇 년을 버텨온 문둥구제기나 크기가 작아서 바위구멍에 딱지처럼 붙어 있는 조쿠제기보다 맛있고 쫄깃하다.
가끔은 정강이를 적실 정도의 얕은 물에 웅크리고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문어가 포착된다. 대박이다. 녀석들은 아무리 크더라도 더벅머리(상퉁이)를 뒤집어서 바닷물에 몇 차례 패대기치면, 축 늘어져서 비료포대 한편에 죽은 듯이 뻗는다. 밤바르 할 때는 망실이나 구덕 대신 비료 포대에 잡은 것들을 넣어서 어깨에 매고 다니는 게 편하다.
한 두 시간 정도 부지런히 움직이노라면 밀물이 들면서 희미하게 동이 터 오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그렇게 얼어붙었던 몸에서도 열기가 피어난다. 그래도 여전히 오그라드는 조막손을 겨드랑이에 넣고서 산지동산을 헉헉대며 오를라 치면, 발갛게 상기된 동생의 입에서 새하얀 김이 소올솔 새어나온다. 어머니의 허리가 등짐에 눌려서 꼬부라지게 굽어 있다. 오늘 아침도 어머니는 해삼을 숭숭 썰어서 낭푼에 넣은 후 물을 붓고 간장을 넣어서 국을 만드실 게다.
해삼과 문어로 아침밥을 먹고 나면, 밤새 잡은 물건을 가지고 동생과 함께 중문으로 올라갔다. 장터 안의 미락식당과 천제여관을 거쳐서 천제연에 줄지어 있는 식당에 가서 팔았다. 값은 주는 대로 받는다. ‘자본이 든 게 아니므로 그저 준들 어떠냐’는 게 어머니의 지론이다. 그래도 우리는 제법 물건 값을 받아냈다. 바다에서는 별 볼일 없던 동생이, 물건을 파는 데는 재주가 있었다. 동생의 장사비법은 친절과 품질이다.
우선 90도로 공손히 절을 하고 나서, 해삼과 소라가 든 구덕을 자랑스레 내놓는다. “이거 예, 우리 어머니가 오늘 새벽, 대포바당에서 잡아 온 싱싱한 것들이우다. 삼춘 식당에 가면 잘 해주실 거랜 허난, 이추룩 가졍 와수다” 하며 제일 큰 해삼을 골라 이리저리 들척인다. 그러면 여관주인이 해삼 한 번, 동생 한 번 번갈아 쳐다본 후, 필요한 만큼 골라서 물건 값을 쳐준다.
동생은 두 손으로 돈을 받아서는 코가 땅바닥에 닿을 만큼 큰 절을 한다. 그리고는 해삼 몇 개, 소라 몇 개를 덤으로 건넨다. “이것은 저희 어머니가 고맙수댄 드리는 거우다, 예!” 라면서. 다시 크게 인사를 하는 동생을 향해 주인아주머니가 한마디 덕담을 던진다. “그 어머니에 그 딸이구나. 공부도 부지런히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
우리는 중문에 있는 식당과 여관을 다 돌고도 물건이 남으면, 시외버스를 타고 서귀포로 향했다. 어머니가 미리 길을 터놓은 여관을 차례로 다니며 물건을 넘기려는 거다. 동생은 작은 상인이었고, 나는 짐꾼과 같았다. 중문에 오일장이 서는 날은, 동생과 함께 난전에 앉아서 물건을 팔았다. 여관에 넘기는 것보다 물건 값이 훨씬 좋았다.
동생은 자기가 혼자서 할 수 있다며, 나더러는 멀찍이서 구경이나 하랜다. 두 살 아래인 동생은 초등학생, 나는 중학생이었다. 언젠가 동생이 그랬다. 물건을 잡는 것은 할 만한데, 파는 것은 정말로 하기가 싫었다고. 특히나 아는 애들이 쳐다보면 오히려 더 당당하게 굴었지만, 언니도 힘들어 보여서 마음이 많이 아팠노라고.
우리가 물건을 팔고 집으로 돌아오면, 어머니는 이미 바다에 가고 없었다. 겨울에도 바다가 잔잔하기만 하면 동네 해녀들은 여상으로 언 물에 들었다. 어쩌면 밭일이 많은 여름철과 달리 겨울엔 물질이 해녀들에게 주업이었는지 모른다. 요즘 같은 고무옷이 없어서 눈이 내리는 날에도 속곳을 입은 채 바다에 들었다. 물론 소중이 속에 긴 옷을 입은 분들도 있었지만, 그 얇은 천 조각이 무슨 온기를 더했을까. 바닷물이 바깥 기온보다 따뜻한 게, 해녀들에겐 그야말로 천우신조였다. 제주도 바닷물은 겨울에도 섭씨 15도 밑으로 내려가지 않는다.
보통 겨울 물질은 날씨에 따라 30분에서 1시간가량씩 서너 차례 이어진다. 언젠가 물에서 나온 어머니를 본 적이 있다. 입술이 새파랗게 질려서는 온몸을 와들와들 떨었다. 불턱에 닿자마자, 어머니는 마치 생선을 굽듯이 불 가까이에 몸을 갖다 댔다. 얼마나 얼었으면, 불길이 살갗을 태울 듯 날름거리는데도 뜨거운 줄을 몰랐다.
얼마 없어서 어머니의 팔다리에는 얼룩덜룩한 보라색 무늬가 물방울처럼 피어올랐다. 문어 같았다. 다행히 다른 해녀 분들의 피부도 비슷하게 변해서 마음이 놓였다. 그 와중에도 언제 만드셨는지, 어머니는 꼬챙이에 끼워진 구운 소라를 슬그머니 내 손에 쥐어주셨다. 한없이 고소하고 쫄깃한 맛이,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내 생애 최고의 간식이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허정옥은?
= 서귀포시 대포동이 고향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뭍으로 나가 부산대학교 상과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하고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미국 볼티모어시에 있는 University of Baltimore에서 MBA를 취득했다. 주택은행과 동남은행에서 일하면서 부경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이수했고, 서귀포에 탐라대학이 생기면서 귀향, 경영학과에서 마케팅을 가르치면서 서귀포 시민대학장, 평생교육원장,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3년간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의 대표이사 사장과 제주컨벤션뷰로(JCVB)의 이사장 직을 수행한데 이어 제주평생교육장학진흥원장을 거쳤다. 현재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서비스 마케팅과 컨벤션 경영을 가르치고 있다. 한수풀해녀학교와 법환좀녀학교도 다니며 해녀로서의 삶을 꿈꿔보기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