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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100세 일기] 천국에서도 우리를 지켜보는 아버지, 줄곧 우리와 함게 살아가신다

 

오늘 따라 햇볕이 따사롭게 창가를 두드리며, 어머니의 시선을 끌어당긴다. 정월 바람이 무색하도록 노랗게 피어난 배추꽃도 어머니의 마음을 포근하게 어루만진다. 마당을 비추다가 어머니의 품을 파고드는 햇볕이, 산산이 부서지며 어머니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햇볕과 바람의 재롱에 마음이 녹아든 어머니가 당신의 18번 고백을 노래하듯 털어놓는다.

 

“우리집은 남향이난 이추룩 또똣헌 게 이(이렇게 따뜻하구나)! 경 허난 니네 아방이 집은 남쪽으로 들어앉아사 헌댄 고라신고라(그러니까 너희 아버지가 집은 남쪽으로 자리해야 한다고 말했나 보다). 오늘은 해가 들어왕 굴묵을 때주난(들어와서 난방을 해주니까), 아방이 왕 보민 잘도 좋아허키여만은(아버지가 와서 보면 무척이나 좋아하겠다만은)... 경헌디(그런데), 허태행씨는 어디로 가신고? 난, 니영 살아도 영 궁금헌디(너랑 살아도 이렇게 재미없고 외로운데), 니네 아방도 나추룩 잘 살암신가, 이?"

 

요즘들어 20여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를 들먹이며, 궁금증과 외로움을 드러내시는 어머니가, 한편으론 걱정스럽고, 다른 한편으론 안쓰럽다. 올해 102세가 되신 어머니가 새삼스레 아버지의 안부를 묻고 궁금증을 드러내시니, 무어라 대답할 말이 없어 아버지의 사진만 물끄러미 바라보게 된다. 살아계시다면 103세가 되셨을 텐데.... 아버지는 당신의 삶에 대해 분명한 신념을 갖고 계셨다.

 

“내가 하나님 보시기에 잘못 산다 싶으면 60이고, 잘 산다 싶으면 80이다”라고. 그래서 그런지, 80이 되던 해 6월에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미국으로 갔을 때, 관에 누워 평안하게 눈을 감으신 아버지는 전혀 돌아가신 분 같지가 않았다.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얼굴을 감싸안았을 때에야 비로소 그 딱딱하고 차가운 감촉에, 아, 아버지가 여기에 계시지 않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비록 몸은 이곳에 계시지만, 영혼은 이미 천국으로 가셨음을 깨닫게 되면서, 아버지의 80세론이 심금을 울렸다. 그래, 우리 아버지는 믿음으로 2남7녀를 키우시고 하늘나라를 사모하며 사셨으니, 지금은 천국에서 평안하게 우리들을 바라보고 계시려니 싶었다.

 

최근들어 고향 후배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나보다 더 아버지 이야기를 가슴 따뜻하게 하였다. 가끔 지나가시다 집에 들러서는 이런저런 이야기도 다정하게 해주시고, 어려운 것 같으면 어렵지 않게 슬그머니 도와주시기도 하셨다고....

 

아버지가 안 계셔서 밭을 갈지 못하는 집이 있으면, 우리집 미국소(얼굴이 얌전하고 몸에 얼룩 무늬가 있어서 동네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다)를 데리고 가서 “오늘도 제게 제게(빨리 빨리) 밭을 갈아보게, 이! 이 밭 아지망, 감저도 심곡 깨도 갈앙, 아이들이영 걱정 어시 살아가민 너도 좋고 나도 좋고!” 하면서 유쾌하게 일을 해주셨단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일 손이 잘 맞아서 팀웤을 이루어서 함께 일을 시작하면, 남의 집 보다 두 배로 일을 해내셨다고.... 그런 아버지를, 어머니가 무시로 그리워하는 건, 당연하고 행복스런 기억이리라.

 

이 글을 쓰는 시간, 어머니는 내 옆에서 주무시고 계신다. 요즘은 두루마리 휴지를 펴면서 손아귀에 움켜쥘 만큼 개켜서는 주머니 가득 집어넣는 게 취미요 일거리다. 어머니가 주무시는 방의 이동식 변기 앞에도, 거실의 소파 앞에도, 휴지 가루와 부스러기가 허옇게 떨어져 있다. 걸레질을 해놓으면 다시 떨어지는 휴지들의 몸부림에, 처음에는 잔소리도 하고 소리쳐보기도 하였지만,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야말로 하루의 일과가 휴지와의 전쟁이다.

 

가끔은 식탁 위에 놓아 둔 떡이나 고구마가 사라져서는, 어머니의 양말 속이나 윗옷의 주머니에서 발견되곤 한다. 휴지에 싸여서 곰팡이를 뒤집어 쓴 그것들은, 보릿고개를 겪으며 2남7녀를 키워낸 어머니의 유산이다. 동네 아주머니들끼리 겨울철의 저녁 시간에 계모임을 할 때면, 계주가 공급한 알사탕 서 너개를 기어코 당신의 속 주머니에 고이 숨겨서 가지고 오시던 어머니. 그 사탕을 기대하며 꾸벅꾸벅 쏟아지는 조름을 참아내던 겨울밤의 위장된 공부라니....

 

아, 모슬포·중문·서귀포 오일장을 돌면서 미역을 팔 때는, 손님을 기다릴 것 없이 등에다 잔뜩 짊어지고서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손님을 찾아다니던 종종 걸음이여. 그게 바로 1:1 마케팅이자 고객만족의 대표적 사례가 아닌가. 그렇게 길들여진 다리의 힘으로, 봄이면 한라산 중턱의 고사리밭을 뛰어다니고, 가을이면 오름 기슭의 냇가에 늘어진 동백나무에 매달려서 열매를 따다가 기름을 만들어 시장에다 팔아내던 제주여인의 부지런이여!

 

이제는 ‘나이 들엉 늙으난, 하간디(여기저기) 안 아픈 디 엇져(없다). 손발 절리곡(저리고), 종애 아팡 오멍도 못호키여(무릎 아파서 움직이지 못하겠다). 야개긴 벅벅호곡(목은 뻣뻑하고), 노단짝 웃둑진 무사 요영 절림광(오른쪽 어깨는 왜 이렇게 저린가)..... 복이 따로 읏다(없다). 아프지 말앙 살당, 갈디 가믄 그게 복이여.’라는 김종두 시인의 ‘노환’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어머니도 아버지를 생각하는 것일까? 아버지는 어머니가 아프다는 무릎, 어깨, 엉치에 뜸을 떠주시곤 하셨다. 6.25시절 모슬포의 개인병원에서 3년간 원장의 조수 역할을 하셨던 아버지는 집안 식구들이 배앓이나 감기와 같은 증상에는 간단히 주사를 놔주시곤 하셨다. 식구들의 감기 정도는 아버지가 주치의가 되실만 하였으니까. 우리집 부엌에는 주사기를 삶는 냄비가 따로 있었다. 나중에는 눈치를 챈 동네 사람들이 사정을 해와서 어쩔 수 없이 약이나 주사를 지원해줄 수밖에 없었다. 식구가 열이 펄펄 끓거나 배가 아파서 울고, 다쳐서 소리지르는데, 병원은 없고, 버스는 끊긴 시간, 그 적막한 상황을 어떻게 할 것인가?

 

아버지는 그 일의 불법성과 위험성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기에,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을 무척이나 어려워하고 주저하셨다. 동네에 낯 선 사람이 찾아들면, 혹시나 당신을 잡으러 온 사람이 아닐까 두려우셨다 할 정도였으니까....

 

아버지의 주사약 심부름은 내 차지였다. 초등학교 2학년 시절부터 아버지가 적어주는 메모를 들고, 중문에서 버스를 타고 서귀포 시외버스터미널까지 갔다. 거기에서 내리면 바로 그 앞에 있는 김약국이 아버지의 단골이었다. 낯이 익은 약사는 아버지의 메모를 보고는 이러저런 약을 정성껏 포장해서 건네주었다. “몇 학년이냐? 아버지처럼 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라!”하면서 10원을 주시기도 하였다. 10원은 라면땅을 사먹을 수 있는 금액이었다.

 

현금으로 사온 약은 동네분들에게 생선이나 꿀, 깨, 참기름, 외상으로 제공되었다. 어머니는 늘 아버지의 밑지는 장사를 힘들어 하셨다. 아버지의 현금은 어머니가 바다에 몸을 던져서 벌어들인 물질의 댓가였다. 겨울에는 새벽 2시에서 5시까지 물때에 맞춰서 바다로 나가 밤바를(겨울밤에 횟불을 켜고서 소라, 해삼, 문어 등을 잡는 작업)를 하셨다. 어머니와 함께 밤 새 잡아온 물건들을 언니와 내가 중문의 천제여관과 미락식당, 천제연 주변의 관광 식당들과 서귀포 매일시장에 가서 팔았다.

 

 

아, 오늘도 나는 지난 번에 이 자리에서 펼쳐놓았던 어머니와 우리들의 밤바르 역사를 반복하여 쓰고 있다. 이 기억의 한계, 잊어버림의 중증에 다다른 나의 치매증세라니..... 어머니와 함께 동숙해 온 지난 10년의 수면부족 때문이라고 한숨짓는 내 아픔을 아버지는 알고 계실까? 어쩌면 아버지는 천국에서 우리들의 섶섬 앞 풍경을 재미지게, 조심스레, 긴장하며, 걱정스레 바라보고 계실는지 모르겠다.

 

어머니가 늘 하시는 말씀이 “니네 아방은 늘 사람은 남향집에 살아야 된댄 고랐져(말했다). 경헌디 바로 이 집이 그 남향집이영 똑 닮았져게! 니네 아방이 보민 아고 집 잘 샀댄 헐꺼여. 아명해도 이 집은 니네 아방이 고리쳐 준 거 닮다(가리켜준 것 같단)”라는 우리집의 매입 경위다.

 

이쯤에서 문득 아버지의 담대한 걸음, 웃음진 얼굴이 떠오른다. 그래 아버지께서 하늘에서 이 집을 보시고, 나의 발걸음을 옮겨서 이 앞에 멈춰서게 하셨음에 틀림이 없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62년을 함께 사셨고, 천국에서도 늘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니까. 줄곧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계신 거다. 어머니가 이 집에 살아계시는 한 언제까지나 아버지는 우리 곁을 지키주시리라.

 

당신의 남편, 우리 아버지가 어떻게 살고 있을 지가 궁금하신 어머니. 이 글이 <제이누리>에 실리면 컴퓨터 화면에 나온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진을 보여드려야지 싶다. 쨘! 하고 스크린에 사진이 뜨면, 어머니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 “저 사름, 누게니? 꼭 허태행씨 닮았져!”라고 하실 게다. 그러면 “어머니, 이제부턴 태행씨랜 불러봅서”라고, 요즘 청춘들이 그러듯이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소리쳐 불러보시라 권하리라.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허정옥은?
= 서귀포시 대포동이 고향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뭍으로 나가 부산대학교 상과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하고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미국 볼티모어시에 있는 University of Baltimore에서 MBA를 취득했다. 주택은행과 동남은행에서 일하면서 부경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이수했고, 서귀포에 탐라대학이 생기면서 귀향, 경영학과에서 마케팅을 가르치면서 서귀포 시민대학장, 평생교육원장,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3년간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의 대표이사 사장과 제주컨벤션뷰로(JCVB)의 이사장 직을 수행한데 이어 제주평생교육장학진흥원장을 거쳤다. 현재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서비스 마케팅과 컨벤션 경영을 가르치고 있다. 한수풀해녀학교와 법환좀녀학교도 다니며 해녀로서의 삶을 꿈꿔보기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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