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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100세 일기] 100세에는 한 치 앞도 모른다 (3)

부모를 간병하는 일은 ‘우리들 대부분이 건너야 할 어둠의 긴 터널’이다. 게다가 때로는 10년 이상 이어질 수도 있으므로 혼자서 그 짐을 짊어지려고 해서는 안된다. 가급적 다른 가족들의 관심과 도움을 최대한 이끌어 내서 독박돌봄의 무거운 짐을 나눠 져야 한다.

 

더불어 주간보호, 방문요양, 요양병원, 요양원, 간병인 등 가능한 사회적 지원도 모두 활용할 필요가 있다. 그만큼 간병은 무겁고 힘겨운 여정이다. 오죽하면 노인의 경우는 ‘죽어야 끝나는 전쟁’이라고 하겠는가.

 

어머니를 모셔온 지 20년이다. 아니, 처음 10년은 어머니가 우리를 돌봐주셨다. ‘아이들을 돌봐주면 공부를 더 해보고 싶다’는 아들을 위해, 나이 65세에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신 지 17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는 나를 붙좇아 고향으로 돌아오셨다. 당시 81세의 어머니가 지금은 100세가 되셨다.

 

어머니를 돌보는 것은 보통 자식의 의무로 이해되지만, 나의 경우는 어머니의 권리라 해야 맞다. 어머니는 일찌감치 10년 동안 나로부터 ‘돌봄 받을 권리’를 저금해 놓으셨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늘 ‘고맙다, 미안하다’를 입에 달고 사신다. 96세에 대퇴부골절로 인공관절 수술을 받으신 후부터, 어머니는 가끔 기저귀를 차기 시작하셨다. 하지만 98세 전까지는 당신이 스스로 기저귀를 관리하셨으므로 별다른 애로가 없었다.

 

약 2년 전부터 치매가 심해지면서 내가 기저귀를 갈기 시작했는데, 그때마다 어머니는 항상 ‘고맙다’ 하시면서 미안한 표정을 지으셨다. 나 또한 그러한 어머니의 느낌을 알 것 같기에,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가급적 신속하게 처리를 한다. 이제는 익숙해질만 한데도, 아침마다 치루는 이 작업이 여전히 불편한 어머니와 나.

 

“어머니, 나 두릴 땐 어머니가 똥싼 거, 오줌 기저귀도 다 갈아주지 안헙디강? 100세 할망은 1살 아기나 마찬가지랜 마씸. 경 허난, 아침마다 기저귀 갈 때랑 편안허게 생각헙서. 나는 양, 어머니가 얼마나 정신을 바짝 차렴시민 아직도 똥 기저귀를 만들진 안햄신고 허멍, 막 고맙게 생각햄수다!”

 

그래도 여전히 어머니의 얼굴엔 어쩔 수 없는 미안함과 민망함이 스며 있다. “니가 메누리가 아니라 ᄄᆞᆯ이난 얼마나 다행인고 이! 요양원에서도 나는 ᄄᆞᆯ이영 사난 막 복 좋은 할망이랜 헌다.” “어머니, 메누리도 메누리 나름이곡, ᄄᆞᆯ도 ᄄᆞᆯ 만씩 다 틀려마씸. 효자랜 해영 상 타곡 신문에 나오는 거 보민, 다 메누리들 아닙디강? 어머니, 섭섭허곡 서러와도 ᄄᆞᆯ이난 정 햄신 걸 해영, 다 이해해붑서 예! 대포 부택이 어멍은 102살꼬지 살아시난, 어머니랑 103살꼬지만 살아불곡 마씸! 그게 어머니영 나영 이추룩 붙엉 살멍 ᄀᆞᇀ은 마음으로 해나가사 헐 큰 일이우다 예!””

 

감사하게도 지난 주에 죽음의 강까지 다가갔던 어머니는, 구사일생으로 기력을 회복하셨다. 그 때를 생각하면 마치 007작전처럼, 지금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점심이 좀 지나서, 요양원 주간보호로부터 걸려온 전화는, 마치 어머니의 임종예고처럼 모호하고 사무적인 메시지였다. ‘할머니가 아침부터 지금까지 아무것도 드시지 않고 주무시기만 하세요, 아무래도 이상하니 모시고 가는 게 좋겠어요...’라는.

 

눈을 꼬옥 감은 채 보릿자루처럼 이끌려 나오는 어머니를 싣고 병원으로 내달리던 다급함과 절박함이라니... 병원의 간호사마저 ‘아무래도 이상하다’며 고개를 내젓는 게, 어머니를 부담스러워 하는 것 같아서 섭섭하게도 느껴졌다.

 

하지만 오랫동안 어머니를 진료해 온 의사 선생님의 염려스런 얼굴 앞에서 마음 속의 용기가 발동하였다. “선생님, 저희 어머니에게 아주 좋은 링겔 하나만 놓아주세요. 실은 오랫동안 어머니에게 꼭 해드리고 싶은 일이었거든요. 마지막으로...”. 그렇게 4시간 동안 링겔을 맞고 나서, 세상에, 어머니가 가만히 눈을 뜨셨다. 기적이었다.

 

의사 선생님이 완곡하게 입원이 어떤지를 암시하였다. 그 순간, ‘집으로 가자’는 어머니의 작은 목소리가 웬지 가슴을 크게 울렸다. 그동안 몇 차례 죽음의 골짜기를 보낸 곳이 병원이고 보니, 이상스레 병원이 싫어지기도 하였다.

 

100살까지 살아오신 게 어쩌면 보이지 않는 손의 은혜, ‘천국의 돌보심’이란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집으로 가서 익숙한 방, 편안한 거실, 좋아하는 마당, 기분좋은 바다냄새 속에 머무는 게 ‘지상에서의 마지막 선물, 최고의 명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무엇보다도 어머니의 바램이 아니신가.

 

집으로 돌아오신 어머니는 쓰디쓴 약도 ‘고맙다’며 온 힘을 다 해 드셨다. 밥을 잘 먹을 수 없는 대신 의사 선생님이 처방해 준 식사 보완용 액체-경장영양제(은근히 비위가 거슬리는...)도 최선을 다 해 넘기셨다. 그러기를 일주일 한 끝에, 드디어 기력을 회복하셨다. 참으로 눈물겨운 삶의 의욕, 자식 사랑, 최선의 노력이었다.

 

드디어 어제부터는 요양원 주간보호에 나갈 수 있게 되었다. ‘기적(奇跡; miracle)’이란 말을 여기에 도입한다면, 그 뜻은 백과사전에서 풀이하는 바 ‘1)상식을 벗어난 기이하고 놀라운 일’이기보다 ‘2)신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불가사의한 일’이라 풀이함이 맞을 것 같다. 왜냐하면 살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간구와 살려달라는 딸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신 신의 손길이 은연중에 문득문득 느껴졌기 때문이다.

 

더 다행인 것은, 어머니의 위기를 계기로 형제들이 모여서 ‘어머니를 돌보는 문제’를 허심탄회하게 논의하게 되었다. 그동안 어머니는 나 혼자만의 일이었는데, 이번의 위기를 계기로 ‘어머니 간병과 돌봄’의 문제를 형제들도 개략적으로 알게 된 것이다. 적어도 그동안 나에게만 맡겨졌던 독박 돌봄의 문제를 공유하고 공감하며 관심 갖게 된 일이 어디인가....

 

사실, '오랜 병에 효자 없다’는 옛말처럼 오랜 간병은 극심한 스트레스와 경제적 부담, 가족 간의 갈등 문제 등을 통해 요즘은 여론화 된 사회 현안이 되었다. 한 연구소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국내 5060세대의 73%는 6개월 이상 노부모를 간병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제 5060세대에 있어서 노부모 간병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게 된 것이다. 완치의 희망도 없이 그저 생존만을 연장시키는 간병 기간이 길어지면서 경제적 활동은 줄어들고 비용 부담이 더해지는 상황 또한 늘고 있어서다. 게다가 간병 문제로 인한 황혼이혼, 가족해체 등이 발생하고, 간병에 지쳐서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하거나 부모를 살해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어, 사회 전반적으로 문제의 심각성과 안타까움이 공론화되고 있기도 하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치매 아버지를 10년 동안 간병해 온 어느 청년의 사례가 ‘현대판 효녀 심청’처럼 주목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아픈 가족을 돌보는 이는 중년의 딸이나 며느리, 노년의 아내인 게 통상적이다 보니, 청년 남성이 치매 아버지를 돌보는 경우가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 경우이기도 하다.

 

1992년생 흙수저 청년이 치매 아버지를 8년 동안 간병해 온 사정을, ‘아빠의 아빠가 됐다’는 제목으로 책을 펴내면서 이야기가 널리 알려지기도 하였다. 저자인 조기현씨의 부모는 그가 초등학생일 때 이혼을 하였다. 아버지는 기현씨를 떠맡았고, 어머니는 여동생이 데려갔다.

 

그런데 그가 열아홉 살의 건설 현장 노동자가 되었을 때,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지고 말았다. 삶이 통째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중환자실 입원비 200만원을 감당하기 위해 집 보증금을 헐 수밖에 없었던 게 지진의 시작이었다. 아버지는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었고, 기현씨는 아버지의 삶까지 걸머지게 되었다. 돈에 쪼들리는 가운데 죽을둥 살둥 버티면서 8년을 보냈다.

 

기현씨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한다. 「아빠는 어질러진 일상 속에서 때때로 내게 크게 화를 냈고, 나는 물건을 때려부쉈다. 그리고 한 시간쯤 지나면 또 같이 밥을 먹었다. 그렇게 아들은 아버지의 아빠가 되었다. 아버지는 눈을 떠서 잠이 들 때까지 밤낮 없이 막걸리를 마셨고, 그런 아빠를 보면서 ‘평생 돈을 벌어서 아빠의 병원비로 몽땅 다 바쳐야 하는 걸까’라는 생각을 하였다. 사람들은 나를 ‘의젓한 청년, 보기 드문 효자’라고 하면서 간병생활 8년을 효심으로 미화시켰다. 솔직히 그러한 주변의 반응이 부담스러워서, ‘나는 효자 아니다. 약자를 돌본 시민에 불과하다’는 심정을 공개적으로 토로하기로 했다.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돌보는 게 힘이 들 때면, 거울 앞에서 ‘아빠, 정말 죽이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으니까. 이 책을 계기로 돌봄을 새로운 차원, 즉, 각자의 삶을 사회적인 차원에서 고민해볼 수 있었으면 한다」라고. 바로 이 청년의 바램이, 어느새 나에게 들어와, 깊은 고민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이 기회에, 어쩌다 돌봄의 독박을 뒤집어쓰게 된 5060 며느리, 딸, 아내들의 고단한 현실과 내면의 고민, 그 불편한 진실을 이 시대의 담론으로 드러내 보고자 한다. 우리집의 경우에도 2남7녀 중 일곱 번째인 내가, ‘혼자 자는 게 무섭다’는 것으로 시작된 어머니의 치매와 함께 10년을 살아가고 있다.

 

물론 여건이 허락되었고, 내가 자원하여 얻어 낸 ‘어머니 모시고 살기’이다. 하지만 그 결과, 부족하고 불편한 수면이 누적되면서 초래된 졸음운전이 사고로 이어져 폐차하는 일이 생겼다. 고혈압·고지혈의 건강 문제 또한 불거졌고, 특히 우울하고 암담한 기억력 저하는 오롯이 나만의 문제가 되었다.

 

사실, 식사 시중을 비롯해서 기저귀, 의복, 목욕, 말벗, 놀기, 주말 등이 한 살 아이를 돌보는 것과 같은 정도의 시간과 노력을 요하는 일들이다. 솔직히 말해서 아이를 돌봄에는 생명과 성장의 기쁨과 보람이 있지만, 노인을 돌보는 데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같은 허탈과 노동이 축적될 뿐이다.

 

한밤 중에 소리지르면서 ‘나 살려달라’고 해서 일어나 보면, 다리에 쥐가 나서 주물러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간혹은 ‘아고, 저 사람이 나 잡아가려고 한다’면서 두 팔을 허공에다 대고 고함을 지르기도 하고, ‘니네 아방 어디 가시니? 빨리 나강 찾아 오라’면서 등을 떠밀기도 한다. 그런 어머니를 부둥켜 안고서 ‘여기는 우리방이니 괜찮다, 내가 있다, 알겠다, 걱정 마시라’고 어루만지며 달래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어디를 가느냐’고 졸졸 따라다니는 어머니를 모시고, 갈 데 못갈 데 가릴 것 없이 동반해서 다니는 일 또한 예사가 되었다. 체면도 예의도 없이 어머니와 세트로 다니는 내게, 언젠가 ‘어머니가 껌딱지처럼 달라 붙었다’고 말하는 친구가, 야속하기보다 미안하였다. 그러니까 점점 친구들과의 모임이나 취미, 운동, 휴식, 여행, 그리고 혼자만의 시간은 남의 일처럼 멀어지고 말았다.

 

여기까지 하자. 그래도 우리 어머니 김성춘 권사님은 일요일이면 ‘죽어도 교회조는 것이 예배의 실상이지만, 이따금 목사님의 설교말씀에 ‘아멘!’ 하고 뜬금없이 소리치면, 주변의 성도들도 따라서 ‘아멘’으로 화답해 준다. 그리고 예배가 끝난 후 맨 끝에서 서성이는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목사님. 특별히 어머니를 끌어안고 간절하게 드려주시는 축복의 기도가, 어머니의 치매를 오히려 복으로 만들어 주신다.

 

실은 ‘독박돌봄 10년에 효자는 없다’는 말이, 내게도 진실로 적용된다. 이따금 어머니를 어린 아이처럼 다루고, 소리지르며 훈계하고, 화를 내기도 한다. 하지만, 어머니는 어머니다. 내가 힘들고, 지치고, 고단해 보이면, 가만히 내 손을 붙잡고서 ‘고맙다, 미안하다...’며 고개를 숙이신다. 아, 그게 서러워서, 아니 어머니의 늙음이 슬프고 가여워서 가슴을 치는 적이 몇 번이나 있었던가.

 

내가 절망하거나 힘들어 하는 기색이 보이면, “걱정도 말아! 너는 다 잘 되게 되어 있어!”라고 장담을 하신다. 그 기를 받으면, ‘백세 노인의 저 기도를 하늘이 외면한다면 하늘도 아니다’라는 베짱이 생긴다. 그리고 나만의 비밀 한 가지. 육십이 넘어 할 일이 없어진 내게는 어머니가 일이요, 삶의 이유가 된다. 위로요 힘이 되는 건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보너스가 하나 더 있다. 형제들이 우리집으로 모여와서 놀다 가는 즐거움. 오늘도 어머니 덕분에 치킨과 피자, 전복죽을 맛있게 먹었다. 앞으로 더 자주 음식을 챙겨오겠다며 총총히 발을 옮기는 형제들. 핏줄의 정과 힘 또한 어머니 덕분이다.

 

그리고 교회 권사님이 전해 주는 ‘떡 하나 더’의 배려는 어떻고! 지난 주에는 남편을 장례한 아내가 팥고물 묻힌 시루떡을 나누더니, 이번 주에는 아기의 돌을 감사하는 부부가 온 성도들에게 백설기를 돌린다. 성도들에게 떡을 하나씩 전달하는 권사님이, 어머니에게는 은근슬쩍 하나 더를 붙여 주신다. 아, 이 노인을 향한 공경의 정신이여...

 

우리 어머니가 천국 가시면, 어머니가 제일 좋아하시는 절편, 송편, 침떡을 예쁜 상자에 담고, 어머니 평생의 18번 찬송가를 곱게 새겨서 드리자.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 하시니...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고.

 

부디 어머니의 이 여름이 ‘호랑이 장가가는 날의 비’처럼 얼른 지나갔으면 좋으련만...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서 제주의 가을이 귤림추색으로 익어갈 때, 우리 어머니 단풍처럼 고운 얼굴로 잠자리 날개치듯 천국으로 올라가게 하소서.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허정옥은?
= 서귀포시 대포동이 고향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뭍으로 나가 부산대학교 상과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하고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미국 볼티모어시에 있는 University of Baltimore에서 MBA를 취득했다. 주택은행과 동남은행에서 일하면서 부경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이수했고, 서귀포에 탐라대학이 생기면서 귀향, 경영학과에서 마케팅을 가르치면서 서귀포 시민대학장, 평생교육원장,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3년간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의 대표이사 사장과 제주컨벤션뷰로(JCVB)의 이사장 직을 수행한데 이어 제주평생교육장학진흥원장을 거쳤다. 현재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서비스 마케팅과 컨벤션 경영을 가르치고 있다. 한수풀해녀학교와 법환좀녀학교도 다니며 해녀로서의 삶을 꿈꿔보기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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