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어머니가 그렇게 기다리는 일요일이다. ‘죽어도 교회에 가서 죽겠다’는, 그 날이다. 어머니는 일요일을 ‘주일’이라 부른다. ‘주님의 날’이란 뜻이다. 어머니가 주일을 그토록 기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분명한 건, ‘일을 하지 않고 쉴 수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농사철의 농촌은, 그야말로 어린 아이의 조막손도 아쉬울 정도로 분주하기 그지 없다. 농사란 때가 있고, 그 때를 놓치면 한 해 농사가 소망을 잃는다. 일꾼(놉)을 빌어서 하는 ‘모내기’ 같은 경우는 집안의 대사다. 어떤 이유로든 물릴 수 없는, 이웃들과의 약속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머니가 이른바 예수를 믿게 되면서부터 일요일은 주일이 되었다. 성경에서 말하는 안식일, 쉬는 날인 것이다. 구약성경에 보면 안식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애굽기 20장 8~11절).’
대포 마을에서 교회에 다니는 집은 우리가 거의 유일하였다. 그 바쁜 농촌, 특히 농업과 어업을 겸하는 마을에서 일요일은, 아이들을 일꾼으로 동원할 수 있는 특별한 날이다. 더욱이 2남7녀를 두어, 동네가 부러워할 정도로 상시 일꾼이 많은 우리집에서, 그 황금같은 일요일을 쉬는 것은, 동네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요상한 일이었다.
게다가 어머니는 동네가 인정하는 일꾼이었다. 손이 빠르고 눈치가 있어서, 생산성이 보통 사람들보다 두 배는 높았다. 아마도 이 일을 하면서 저 일을 생각하거나, 나름의 요령을 터득해서 일의 순서를 정해 놓았을 것이다. 대학에서 생산관리를 배울 때, 어머니가 떠올라서 ‘피식’ 하고 웃었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는 나름대로 일의 노우하우(knowhow)를 터득했음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우리가 안식일을 문자 그대로 철저하게 지켰던 것은 아니다. 고구마를 썰어서 말린 절간이 다 말랐는데, 어쩌다 하늘에 시커먼 구름이 몰려들면, 일제히 밭으로 나가서 그것들을 주웠다. 목화가 다 익어서 허옇게 솜을 드러내면, 바람이 불어서 엉망이 되기 전에 급한 것들은 더러 뽑기도 하였다. 가급적 주일에는 쉬면서 집안일을 하였던 것 같다.
아버지는 우리가 쉴 때, 소도 쉬게 하였다. 특히 우리집 얼룩소는 동네가 다 부러월 할 정도로 일을 잘 하였다. 하기사 가축은 주인을 닮는 법. 소는 아버지를 닮아서 부지런하기 그지 없었고, 돼지는 어머니를 닮아서 새끼를 많이 낳았다. 얼룩이는 아버지가 쟁기를 끌고서 이끄는대로 보조와 리듬을 맞춰서 팀웤을 이루었다. 이따금 아버지가 목청을 높여서 ‘이랴, 이랴!’ 하고 소리를 치면, 느슨한 걸음을 다시 제게(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런 얼룩이를, 아버지는 친구처럼 대하였다. 힘든 것 같으면 같이 쉬고, 휴식 시간에는 간식(물이나 꼴)도 주었다. 이따금 주일날, 동네 사람들이 ‘삼춘네 얼룩이 좀 빌려줍서게!’라고 간청을 해도, 아버지는 정중하게 거절을 하였다. “미안허주만, 김생도 혼 식구라. 어떵 나는 쉬멍, 가이는 일을 허랜 해저게(짐승도 한 식구다. 어떻게 나는 쉬면서, 걔는 일을 하라 할 수 있겠나)”라면서 얼룩이의 체면을 지켜주었다.
어머니가 지금도 여전히 주일을 유독 강조하면서 의식있게 지키려는 것은, 아버지를 생각하는 마음이 아닐까 싶다. 17살에 이웃집에 사는 18살 총각과 혼인을 한 어머니는, 81세에 남편이 소천할 때까지 60여 년을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일심동체가 되어 생활을 같이 하였다. 처녀 때는 부산이나 강원도로 원정물질을 떠나기도 하였지만, 결혼을 한 이후에는 육지물질을 일체 그만두었다.
대포마을이 발간한 마을지를 보면, 아버지(허태행)는 1963년도에 어촌계장, 어머니(김성춘)는 1971년도에 해녀회장을 한 기록이 나온다(큰갯마을, 2001, p. 532-533). 내 기억에 아버지가 어업에 종사한 것은 여름철 태우를 타고 나가서 자리를 잡아오신 게 전부인 것 같다. 하지만, 어촌계장을 하셨다면 어머니 못지 않게 바닷일을 많이 하셨던 게 분명하다. 아니, 가을 아침에 눈을 떠보면, 밤새 아버지가 잡아오신 갈치들이 은빛도 푸르게 반짝이는 등을 내보이면서 잠들어 있곤 하였으니..., 아버지가 물고기를 잡는 일에 익숙하셨음에는 틀림이 없다.
아버지가 어업을 통해 가계소득을 올렸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지만, 1963년도라면 내가 겨우 서너살에 불과한 시기다. 어쩌면 그때는 아버지가 어부다운 역량을 발휘하셨을 지도 모를 터. 소를 끌고서 밭을 가시는 아버지의 모습도 멋있기 그지 없지만, 배를 타고서 물고기를 잡으시는 모습도 보고 싶은 풍경이다.
오늘도 이 글은 삼천포로 빠지고 있다. 요즘들어 나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목이 매일 때가 많다. 국가공인 ‘국민건강효도 자격증’이라는 요양보호사 표준교재(한국요양보호협회)에 의하면, 임종대상자는 ‘점점 잠자는 시간이 길어진다’는 게 수면양상의 변화로 적혀 있다. 교회 일을 마치고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오니, 12시가 되었다. 얼른 어머니 방으로 달려가 본다. 아직도 주무시고 계신다. 혹시나 싶어서 얼굴을 만져보고 코에 귀를 갖다대 본다. 숨을 쉬고 계신다. 아..., 다행이다. 1 시간을 더 기다려도 여전히 주무시는 어머니. 하는 수 없이 크게 작정을 하고서, 어머니를 깨운다. 더 주무시는 것보다 깨워서 무어라도 드시게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다행히 어머니는 일어나셨고, 늘상 드시는 삶은 계란 한 개와 보너스로 드리는 흰 죽을 조금 드셨다. 작은 요커트 한 개를 억지로 먹였고(지난 번 변비로 쌩고생을 하신 이후로, 어머니는 요거트를 변비에 좋은 약이라 하면, 순순히 드신다), 혈압약과 진통제(오랫동안 어머니가 드셔온 병원의 처방약. 의사는 습관성이 되어 좋지 않다지만, 이 약을 먹으면 아프지 않다는 신념을 가진 어머니에겐 만병통치약에 가깝다)도 드셨다. 약을 드실 때마다 ‘물이 보약’이라면서 억지로 물을 많이 마시게 한다. 어머니는 ‘보약’이라거나, ‘몸에 좋다’, ‘오래 산다’라고 하면, 음식이나 약을 거부하지 않으신다.
사는 게 무얼까? 어머니는 자리에 누워서 몸이 불편하거나 아니거니, 습관적으로(내 생각에는) ‘살려줍서!’라고 중얼거린다. 나는 매정하게 그 말을 교정한다. “어머니, 이제는 ‘살려줍서’랜 허지 말곡, ‘불러줍서’랜 허십서. 하나님 아버지가 부르시면, ‘아멘, 알아수다!’ 하고 천국 가서, 주님도 만나보고, 허태행 아버지도 만나민 얼마나 좋으쿠과? 아버지 보구정 안 허우꽈? 나도 이렇게 보고싶은디...”
그야말로 나는 어머니에게 ‘이제는 돌아가시라’고 말하고 있는 거다. 세상에! 이게 불효가 아니고 무엇이랴. 어머니를 보고 있으면, 그 불편하신 모습이 안타까워서 ‘이제는 평안하게 천국으로 가시는 것도 복이지..’ 싶다. 하지만 사회복지사 실습을 한답시고, 어머니를 두고서 일터에 가 있으면, ‘이게 무슨 일인가..., 얼마나 더 사실지 모르는 시한부 어머니를 두고서 잘 하는 일인가..., 내 인생에 가장 후회하고 땅을 칠 노릇을 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엄습한다. 그렇게 오전 시간이 지나고, 점심 때가 되면, 어머니를 향해서 부리나케 달린다. 자동차의 과속 페달을 밟으노라면, 마음은 벌써 집으로 가 있다. 어머니가 잘 계셔야 할텐데... 물론 사위가 알아서 어련히 지키고 있을 터이지만, 아무래도 어머니에겐 딸의 보살핌이 필요하다. 사위는 아무리 잘해드리고, 설사 백년을 함께 살아간대도, 영원한 손님이 아닌가.
“나는 메누리 손이 아니랑, 똘이영 곹이 사난, 막 복시러운 할망이여!”라는 어머니의 마음 속, 그 어딘가에, 딸에 대한 서운함도 더러 묻혀 있으리라. “어머니, 메누리도 메누리 나름이우다. 나라에서 부모 잘 모신댄 주는 상은, 다 메누리가 받읍니께. 우리 메누리도 미국이 아니라 여기 이시민, 어머니한티 잘 헐꺼우다...”
그래, 어쩌면 어머니 말이 진리인지 모른다. 딸이 어머니를 모시는 것은 인지상정이 아닌가. 요즘은 60이 넘은 딸이 90이 넘은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집이 드물지 않아 보인다. 젊어서는 열심히 일하고, 늙어서는 어머니와 함께 노년을 보낼 수 있다면, 이 또한 복이 아니고 무엇이랴.
문득, 처녀시절의 어떤 풍경 하나가 떠오른다. 직장 근처의 다방에서 동료들과 커피를 마시고 있으면, 허름하게 보이는 할아버지가 찾아와 손을 내밀곤 하였다. 500원을 받고서 손바닥 점을 쳐주시는 분이다. 벌써 몇 번째 마주한 분이니, 우리의 손금은 서로가 훤하다. “보아하니 아가씨는 부모복도, 남편복도, 자식복도 없네.... 다행히 열심히 자기가 벌어서 입에 풀칠은 하겠구만...” 지금쯤 그 할아버지를 만난다면,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다. “할아버지, 나이가 60이 넘어서 100세 어머니를 모시고 살 수 있다면, 어머니 복은 있는 거지요?”라고.
피천득 선생님은 당신의 수필, ‘어머니’에서 ‘어머니는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라 묘사하고 있다. 그렇다. 어머니와 함께 사는 건, 고향의 품에서 철 없이 뛰놀던 어린 시절을 계속 누리는 것과 같다. 지난 주 요양보호사 회의에서, 센터장이 전해주는 말이 떠오른다. “이번 주에는 108세 할머니께서 운명하셨는데, 그렇게 편안히 돌아가실 수가 없었어요, 온 자손들이 모여서 지켜보는 가운데, 그저 주무시듯 눈을 감으셨다는군요....” 그래, 우리 어머니도 이번 추석을 즐겁게 보내시고, 그 기쁨으로 크리스마스 성탄절도 맞으시고, 올 해도 평안하게 섶섬과 함께 송구영신 하시기를, 빌고 또 빌어본다.
가을이다. 부디 요양원의 모든 할머니 할아버지, 우리들의 어머니 아버지들이 힘을 내시기를.....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으며, 이 제주 땅 귤림추색의 아름다운 풍경-당신들이 공들여 땀흘려 만들어 놓으신 유산을 마음껏 누리시며 행복하시기를 기원해 본다. 허정옥, 너도 힘내라!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허정옥은?
= 서귀포시 대포동이 고향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뭍으로 나가 부산대학교 상과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하고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미국 볼티모어시에 있는 University of Baltimore에서 MBA를 취득했다. 주택은행과 동남은행에서 일하면서 부경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이수했고, 서귀포에 탐라대학이 생기면서 귀향, 경영학과에서 마케팅을 가르치면서 서귀포 시민대학장, 평생교육원장,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3년간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의 대표이사 사장과 제주컨벤션뷰로(JCVB)의 이사장 직을 수행한데 이어 제주평생교육장학진흥원장을 거쳤다. 현재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서비스 마케팅과 컨벤션 경영을 가르치고 있다. 한수풀해녀학교와 법환좀녀학교도 다니며 해녀로서의 삶을 꿈꿔보기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