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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100세 일기] 어머니의 장수비결 10가 중 한가지 ... 바다

1923년 3월 22일. 어머니의 생신이다. 막내딸 이름을 성춘(成春)이라 지으시면서, 외할아버지는 ‘봄을 이루어라, 봄이 되거라’고 기원하셨을까. 이제 내일 모레면 만 나이로 백 세가 되신다.

이웃들이 묻는다. 어머니의 장수비결이 무엇이냐고. 혹시 집안이 장수하는 가문이냐고..... 아니다. 어머니는 4남2녀의 막내인데, 형제분들 중 가장 오래 사신 경우가 80대 중반이다. 요컨대, 장수혈통은 결코 아니란 얘기다.

그럼, 무엇이 장수의 비결일까? 어머니와 함께 산 지 20년, 같은 방을 쓴 지가 10년 째다. 룸메이트로서 내가 경험하고, 관찰하고, 생각하는 어머니의 장수비결을, 10가지로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일, 2) 식사, 3) 병원, 4) 자녀, 5) 기도, 6) 바다, 7) 잠, 8) 딸, 9) 긍지, 10) 감사.

 

지난 번 일기에서 4) 자녀, 5) 기도에 대해 언급했으니, 이번에는 6)바다를 소개하고자 한다. 사실 바다는 해녀인 어머니에겐 일, 그 자체요, 식사의 비결(바다에 가면 모든 게 맛있어지는 걸 아시는지....)이요, 병원(건강의 비결)이자, 자녀들을 키워준 은인이요, 저절로 기도가 나올 정도로 위험한 곳이다.

 

1. 어머니의 바다 - 삶의 절망과 희망

 

다섯 살에 어머니는 함경환(咸鏡丸) 사건으로 아버지(나의 외할아버지 김광용님)를 여의었다. 함경환은 일제시대인 1918년부터 제주~시모노세키~오사카를 48시간에 걸쳐 운항하던 부정기 여객선이다.

 

제주시 산지항을 출항해서 조천·성산포·서귀포·중문·모슬포·한림·애월 포구 등을 돌면서 승객을 태웠다. 500톤급의 배를 접안시킬 시설이 없어서 중문 면에서는 자장코지 몰레바당(지금의 주상절리 동쪽)에 정박했다.

 

그날도 큰갯물(대포) 포구에서 지역주민 35명을 태운 종선(풍선)이 바람에 힘입어서 모선으로 향했다. 평소보다 많은 승객을 태운 배가 기우뚱거리면서 간신히 함경환에 닿는 순간, 갑자기 돌풍이 휘몰아쳤다. 바다는 아수라로 변했고, 풍선은 파도에 휩쓸려 뒤집히고 말았다.

 

다행히 외할아버지는 40대의 건장한 신체라, 헤엄을 쳐서 배에 오를 수가 있었다. 그런데, 아기를 업고 허우적거리는 동녘집 아지망이, “삼춘, 살려줍서, 우리 아기 받아줍서”라며 비명을 질렀다. 할아버지는 다시 바다로 뛰어들었고, 파도는 기다렸다는 듯이 허연 아가리로 세 사람을 삼켰다. 대포마을 설촌 이래 최고의 비극이었다. 이 사고로 32명이 사망했고, 한 집 건너 장례가 치러졌다.

 

시체도 없이 초상을 치르게 된 할머니는 식음을 전폐했다. ‘어떤 사람은 복도 많아서, 시신을 두고 영장을 하는고?’라는 통곡이 온 집안을 울렸다. 배가 고픈 8살짜리 오라방은 6살 누이를 데리고 이웃집 초상집에 가서 밥을 얻어 먹였다. “일본 강, 돈 하영 벌엉, 우리 성춘이 꽃신 상 오마, 이!”라며 새끼손가락을 걸은 아버지의 약속은 지금쯤 어느 하늘을 맴돌고 있을까.

 

빈 상여로 장례를 치르고 시신을 가슴에 묻은 외할머니는 화병이 들었는지 오래도록 아팠다. 열 살 무렵, 어머니는 스스로 물질을 익혀야 했다. 처음에는 얕은 물에서 돌맹이를 줍거나 물풀을 뜯어 올렸다. 맨눈으로 물속에 들어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다가 차츰차츰 좀 더 깊은 바다로 내려가서 보말을 잡기 시작했다.

 

열 두 살이 되자 이웃집 춘자어멍이 테왁을 만들어 주었다. 드디어 ᄌᆞᆨ은 안경을 쓰고 머리에는 수건을 질끈 졸라맸다. 마침내 구쟁기(소라)도 잡고 물꾸럭(문어)도 잡는 ᄀᆞᆺ좀수가 되었다. 눈만 뜨면 바다로 달려갈 정도로 바다가 좋았다. 어머니는 바람난 처녀처럼 여름내내 바다를 맴돌았다.

 

열입곱살이 되자 강원도 속초로 육지물질을 떠났다. 전주가 어리다며 데려가지 않으려 해서 해녀들의 아기업개로 따라붙었다. 현장에 도착해서는 아기를 보지 않고 다른 해녀들과 같이 우무(우뭇가사리)를 채취했다. 특별한 기술이 없어도 욕심과 부지런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돈을 벌 생각으로 열심을 내다보니, 상군 못지 않게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먼 바다로 배를 타고 나갈 때는 노를 저으며 노래를 불렀다. ‘칠성판을 등에다 지고, 목숨 걸고 이 물질해서, 어느 남편 먹여 살리자고, 자식 두고 타향살인가?’ 대부분 남편을 잃고 물질로 자식을 키우는 홀어멍들이라, 노랫소리가 몹시도 구슬펐다. 어머니도 왠지 슬퍼져서 함께 훌쩍이며 설움을 삼켰다. 육지 사람들은 그런 제주도 처녀를 며느리로 들이길 원했다. 다행히 결혼에 골인하게 된 사람들은 “밥통 봉갔져!”라며 크게 횡재를 한 듯 좋아하였단다.

 

그당시 해녀들은 남편이 죽으면 장례절차가 거의 끝나고 봉분을 다질 즈음에, 조문 온 동네 여자들과 장구치고 노래하며 춤을 추었다. 망자에 대한 슬픔에서 속히 벗어나 어서 빨리 삶으로 귀환하기 위한 의식이었다. 아, 제주여인들에게는 슬픔을 삭일 눈물의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원정물질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어머니는, ‘육지물질은 위험하다’는 오라방의 강권으로 한 동네 총각에게 시집을 갔다. 바야흐로 김종두시인의 ‘제주여인 1’을 방불케 하는 삶이 시작되었다.

 

‘시집 왕 보난 ᄃᆞᆯ랭이 ᄒᆞ나, 살아갈 일 생각ᄒᆞ난 귀눈이 왁왁ᄒᆞ여도, 우리 할망 살아온 시상 ᄀᆞ슴에 새기멍 살아수게. ’아명ᄒᆞ믄 못사느냐. 조롬 붙이지 마랑 탕근도 졸곡 물질도 ᄒᆞ멍 시집 어른 뜻받앙 살암시민 살아진다’(시집 와서 보니 작은 밭 하나, 살아갈 일 생각하니 귀눈이 캄캄하여도, 우리 할머니 살아 온 세상 가슴에 새기면서 살았습니다. ‘아무려면 못살겠느냐, 엉덩이 붙이지 말고, 탕근도 만들고 물질도 하면서, 시집어른 뜻 받아서 살다보면 살아진다’)

 

실제로 ᄃᆞᆯ랭이조차 없었던 어머니에게, 바다는 그야말로 무진장한 공짜밭이었다. 어머니는 한 번 눈으로 본 것은 남에게 주지 않는 상군잠수였다. 사실 물건을 많이 하는 것만으로 상군이 되지는 않는다. 잠수하는 바다부터 다르고 숨비는 깊이도 다르다.

 

상군은 열 두 발 깊이, 전봇대 길이만큼 잠수해 들어간다. 상군이 잡은 소라는 크기도 굵고 색깔도 벌겋다. 여름철에는 물에 들 때마다 망사리 가득 소라를 잡았다. 한 번 숨빌 때마다 양 손이 가득할 정도로 물건이 많았다. 서너 차례 물에 들고 나면 하루에 네 다섯 망사리가 되었다. 그런 날은 아버지가 구루마를 끌고 와서 실어가곤 하였다.

 

겨울에는 온 동네가 고요히 잠든 새벽 두 세시에 일어나 횃불을 들고 밤바르를 나갔다. 밤바르란 썰물이 잘 나가는 겨울밤에 바다에 나가서 해산물을 채취하는 일이다. 낮에는 물이 깊어서 잠수를 해야 하는 곳이, 밤이 되면 자갈밭처럼 마르게 된다. 그 위로 소라, 해삼들이 기어나와 고구마처럼 밟히기도 한다. 그저 비료포대에 주워담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눈이 허옇게 쌓인 밤바다에 매서운 하늬바람을 맞으며 나가기란 여간 끔찍한 노역이 아니다. 오직 밤낮이 없는 어머니만이 그 밤바르를 해냈다. 사실 어머니에겐 그 밤의 바다가 여간 고마운 게 아니었다. 그리고 그 풍성한 수확이 은밀한 비밀이요 하늘이 내려준 은혜였다.

 

사실, ‘배롱배롱(초롱초롱)’한 아이들 눈을 보면서 ‘죽는 것만큼 노력하면 살수 있겠다’ 싶은 희망을 준 것이 바다였다. 결국 그 바당이 아이들을 키워주었다.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시작한 물질인데, 그 물질로 집도 사고 밭도 살 수 있었다. 돌렝이도 없는 이들에겐 물질이 천직이요 축복인 셈이다.

 

사실은 친정보다 나은 게 물질이 아닌가. ‘물질을 안했으면 동녕바치가(거지)가 되었을 것’이라는 어머니의 마움 속엔, 아버지를 빼앗아간 바다에 대한 원망이 없다. 아니, ‘물질을 안했으면 죽었을 것’이란 고백 속엔 바다에 대한 애정이 스며있다.

 

어쩌면 어머니는 물질을 하면서 아버지를 찾아보았는지 모른다.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더 깊이 숨비질해 들어갔는지.... 그리고 ‘제주여자로 났으면 한 식솔은 너끈히 책임져야지’라고 속삭이는 음성을 들었는지도. 그러므로 바다는 아버지가 물려주신 유산이란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승길을 오가는 물질의 가열찬 괴로움을 그다지도 희망차게 견뎌낼 수 있었으랴.

 

 

2. 물질, 타고나야 하는 일

 

어머니는 천생 해녀였다. 어릴 적부터 눈만 뜨면 바다로 달려갔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바다였다. 왠지 바다에만 가면 가슴이 탁 트이는 자유가 느껴졌다. 외할머니가 처음으로 속곳(물소중이)을 만들어 준 날, 어머니는 그것을 입은 채 바다로 달음박질쳤다. 허옇게 이빨을 벌리며 달려드는 파도를 향해 힘차게 테왁을 집어던졌다. 그 테왁을 부둥켜안고서 수애기(돌고래)처럼 가슴 벅차게 바다를 휘저었다. 그렇게도 열망하던 상군들의 바다를 향해 마음껏 발을 차며 하늘을 보았다. 뭉게구름 뒤에서 더 하얗게 웃으시는 아버지의 미소를 보았을까. 드디어 비창으로 전복도 떼고 소살로 우럭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상군이 다 된 기분이었다.

 

이상하게도 물질을 가기 전에는 기운이 없다가도 바다에만 가면 새 힘이 솟구쳤다. 한 번 숨비질했던 곳이면 소라와 해삼이 있는 구멍을 거의 다 기억할 수 있었다. 물질만 갔다 오면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잤다. 그런 어머니에게 동네 사람들은 ‘물질은 타고 났으니, 큰 좀수가 되겠다’며 추켜주었다. 그 소리에 어머니는 한 껏 신바람이 나서 더 오래 숨비질을 하였다. ‘물질 가민 1등은 못해도 2등은 했져’라는 지금의 고백은 순전히 겸손한 표현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어머니야말로 대포마을에서 일등 가는 상군이었다.

 

대포마을의 역사와 생활을 담은 ‘큰갯마을’에는, 1971년도 제10대 해녀회장으로 ‘김성춘’이라고, 어머니의 이름 석 자가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난 해녀가 아니라 좀수여!’라는 어머니, 그 담대하고 당당한 김성춘 회장님의 족적이다. 실은,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닮고 싶은 제주해녀가, 우리 어머니 김성춘 여사다.

 

사실, 대포해안은 주로 파랑(波浪)에 의해 만들어진 해식애(海蝕崖)가 발달되어 있는 곳이다. 해식애는 파도의 침식에 의해 형성된 바닷가의 절벽으로, 주상절리가 그 전형이다. 대포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지삿개’라 부른다, 관광지로 유명해지면서 ‘대포·중문 주상절리’가 되었지만, 일대의 논밭은 대부분 대포 주민들의 경작지들이다. 속칭 너배기(넓은 들)인 이곳은 대포마을의 식량 주산지였다.

 

어머니는 너배기에서 밭일을 하다가 물때가 되면 지삿개로 내달렸다. 그곳은 수심이 깊어서 상군잠수들이 물질하는 바다다. 집어삼킬 듯이 달려드는 파도를 등에 업고, 어머니는 검푸른 바다 속으로 하염없이 들어갔다. 평균 1〜2분, 길어봐야 2〜3분의 숨비질이 간을 졸일 만큼 질기고 길었다. ‘혼백상자를 등에다 지곡, 가슴팍에 두렁박 차고’ 하는 게 물질이 아닌가. 드디어 테왁이 움찔거리고, 물 밖으로 나온 어머니가 ‘호오이, 호〜이’ 하고 숨비소리를 토해내면, 기다리던 나도 같이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그렇게 해녀를 배우던 대포바다는 상군을 그리던 내 어린 시절의 학교요 운동장이었다. 어쩌면 해녀의 딸들에게 바다는 영원한 어머니다. 고난이 파도처럼 밀려올 때면, 어머니를 생각한다. 어머니처럼만 살아간다면 이 세상에 두려울 게 무엇이랴.

 

여기서 여담을 잠깐 털어놓자. 내가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JEJU)의 5대 사장으로 취임하자 제주도내 신문들이 이러저런 우려로 수근대기 시작했다. 46세의 조그만 사립대학의 여자교수가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란 거였다. 지당한 평가요, 당연한 지적들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바로 그 자리가, 어머니와 아버지, 언니들과 함께 논일을 하던 곳이었다. 그렇게 내 일처럼, 우리집 논처럼 ‘진심과 열심으로 최선을 다하면 못할 게 무엇이랴’ 싶은, 남모르는 배짱이, 실은 비장의 카드로 내 가슴을 뛰게 했다.

 

취임식 날은, 대포마을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귀빈으로 초청했다. 그리고 그분들에게만 3층의 고급 식당인 델리지아에서 오찬을 대접했다. “아고, 이추룩 크고 좋은 집에, 우리같은 것들이 와도 되는 거라?” 하면서 품에 안아주고, 얼굴을 만져주고, 등을 두드려 주는 삼춘들.... 아, 그 사랑과 믿음을 가슴 가득 품으니, 내 안의 두려움과 어색함, 미안함, 자신없음 등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마치 비온 뒤에 하늘에 떠오르는 여름날의 무지개처럼, 중문면 체육대회에서 ‘대포 이겨라’를 외치던 마을분들의 뜨거운 응원이 함성처럼 나를 둘러쌌다. ‘그래, 우리 너배기 논에서 일하듯이, 주인정신으로 밤낮없이 뛰어보자. 어려서 일하던 그 땀을 열 배로 흘려보자. 안 되면 되게 하자!’라는 다짐이, 내 얼굴을 두껍게 만들어 주었다.

 

나의 자격 없음, 부족함, 무능력, 무지함, 좁은 발...을 다 넘어서, 사실 내가 일하는 동안에, ICC JEJU는 타지역 컨벤션센터들이 벤치마킹을 오는 제3의 장소, 서비스품질이 가장 좋은 곳으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한 번은 부산시의 시의원들이 방문해서, ‘지금 시설의 절반도 채우지 못하면서, 제2벡스코(BEXCO)를 짓겠다고 난리인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묻기도 하였다. 당연히 APEC(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 정상회담, 2005년 11월 18일〜11월 19일 동안 부산에서 개최됨)을 넘어서 ASEM(아시아-유럽 정상)과 같은 세계적인 회의들을 유치하려면 ‘지금보다 전시장과 회의시설을 2〜3배 더 키워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낮말은 새가 듣는다더니, 그 말이 부산으로 날아가 벡스코와 우리는 사이좋은 동지가 되었다. 당시 벡스코 사장은 지금도 서로의 안부를 묻는 친구로 남았다.

 

아, 그 거칠고 투박한 손들을 부여잡고 악수하던 느낌, 나를 그토록 아껴주고 믿어주는 마을분들의 축복과 지지를 업고서, 나는 대포마을의 대표선수가 되었다. ‘이 자리는 내가 일하던 곳이다. 그러니 그 누구보다도 잘 할 수 있다. 젖먹던 힘까지 다 모아서 남보다 2〜3배로 일해보자. 하늘도 스스로 돕는 자를 도와준다지 않는가.’

 

그렇게 3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마치 3월에 강원도로 올라가서 물질을 하다 보면, ‘피부가 얼어서 벌겋게 터질 것 같은 고통이 끔찍해, 날마다 따뜻한 고향바다를 그리는데..., ‘어두웠다 밝았다’를 반복하는 사이, 어느새 8월 명절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게 되더라’는 어머니의 처녀시절처럼.

 

어머니가 물질하면서 내는 숨비소리는 그저 나오는 게 아니다. 물질하고 나올 때 가슴이 터질 것처럼 숨이 끊어져서 자연스럽게 터지는 소리, 죽을 것처럼 힘이 들어서 ‘아이고 어머니!’를 부르는 비명 같은 거다. 물질하러 들어갈 때는 온 몸 가득 호흡을 불어넣기 위해 있는 힘껏 숨(산소)을 들이쉬는 소리, 물질을 하고 나와서는 가슴이 터지도록 숨(이산화탄소)을 내뱉고 다시 끊어진 호흡을 살리기 위해 숨을 들이쉬는 절규같은 거다.

 

어머니는 그렇게 ‘호오이 호오잇’ 하고 숨비소리를 내지르면서 목숨 걸고 물질을 해서 우리를 살리셨다. 그러지 않고서야 숨이 끊어지는 고통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었으랴. ‘아명ᄒᆞ믄 못사느냐, 싸는 물(썰물)이 이시민 드는 물(밀물)도 이신다. 밭을 폴 때도 있주만은 살 때도 이신다. 살당 보민 다 살아진다.’는 것이 어머니의 말씀, 해녀정신이다.

 

이제는 어느덧 백 살이 되어서, 그저 담담히 바다를 바라보고 계시는 어머니. 그저 햇살이 좋기만 하면 대문을 나와서 당신의 섶섬 앞 돌의자에 앉으시는 제주도 할망. 오가는 올레꾼들의 발걸음을 따라 지나온 인생길을 되돌아 보시는 듯, 어머니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번진다. 아, 백 년의 인생에 햇살이 비쳐들면 저렇게 다시 봄처럼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구나. 백세 노인의 주름진 얼굴에도 한 살 아기의 해맑은 영혼이 내려앉으면, 다시 눈부신 분홍빛의 아기가 되는구나. 더 이상 바랄 게 없다는 듯 얼굴에 스치는 봄바람에도 고마움과 만족함이 서리는 어머니의 저 얼굴. ‘이제는 다 살았다. 갈 날이 가깝다, 숨이 내려간다’는 어머니의 마음을, 바람이 다정하게 어루만지며 지나간다.

 

이제는 어머니가 걸어온 그 걸음처럼, 담대하게 인생을 살아내고 싶다. 해녀, 그 이름처럼 치열하게, 밀려오는 세파를 당당하게 견뎌내고저! (이 글은 제주문화예술재단의 ‘삶과 문화’, 2016년 봄호, Vol.60, p.46-51에 실린 ‘제주의 바다, 어머니의 바당밭’을 리메이크하였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허정옥은?
= 서귀포시 대포동이 고향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뭍으로 나가 부산대학교 상과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하고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미국 볼티모어시에 있는 University of Baltimore에서 MBA를 취득했다. 주택은행과 동남은행에서 일하면서 부경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이수했고, 서귀포에 탐라대학이 생기면서 귀향, 경영학과에서 마케팅을 가르치면서 서귀포 시민대학장, 평생교육원장,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3년간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의 대표이사 사장과 제주컨벤션뷰로(JCVB)의 이사장 직을 수행한데 이어 제주평생교육장학진흥원장을 거쳤다. 현재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서비스 마케팅과 컨벤션 경영을 가르치고 있다. 한수풀해녀학교와 법환좀녀학교도 다니며 해녀로서의 삶을 꿈꿔보기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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