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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100세 일기] 이제는 다 살았다 (5) 시어머니 무덤에서 한 살 아기처럼 웃으시는 어머니

구명물 밭. 우리 집을 대표하는 재산 제1호에는 할머니의 산소가 자리해 있다. 아, 우리 할머니……. 아버지는 당신의 서럽고 야속한 어머니를 이 밭의 가장 전망 좋은 곳에다 모셨다. 좌청룡 우백호는 아니지만 중문 마을을 병풍 삼고, 대포 마을의 주상절리를 바라보는 위치다.

 

 

중문 마을은 할머니의 남편이 살던 곳이고, 주상절리 일대는 대포마을 사람들이 ‘너배기’라 부르는 들판이다. 비교적 넓고 평평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한다. 그곳에는 할아버지의 논이 있었고, 멀지 않은 곳에서 아버지가 이웃의 논을 병작하고 있었다. 두 논 사이에는 제법 폭이 넓은 수로가 있어서 농로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동네 사람들도 이 지경에서는 지름길로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아들이 일하는 모습이 보이면 그 길을 에둘러서 먼 길을 돌았다. 중문마을과는 역방향인 성천포구로 내려가 배릿내오름을 올라서 산사람처럼 휘적거리면서 집으로 향했다. 아리랑 고개가 따로 없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러한 정황을 소문으로 듣는 할머니는 얼마나 가슴이 아프셨을까.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할머니의 일생을 생각하면 가슴이 싸〜 하게 썰물처럼 밀려간다. 울퉁불퉁한 바위와 거친 돌무더기, 무질서한 해초와 깊이 모를 웅덩이, 무수한 자갈들이 할머니의 가슴에 촘촘이 박혀 있다. 제주도 할머니, 제주여인들의 일생, 그 삶의 내면이 통상 그러하지만, 우리 할머니의 경우는 더 신산하여 몹시도 시리고 아프다. 그 기구한 삶에 접붙여져서 인생의 고단함을 같이 짊어져야 했던 어머니의 인생 또한 얼마나 가슴 저리게 서러운지…….

 

대포마을회가 2001년도에 발간한 ‘큰갯마을’이라는 향토지에는 공인종교를 대표해서 ‘대포감리교회’가 소개되어 있다. ‘대포교회는 1952년에 김현성 할머니의 집에서 방 한 칸을 빌어 교회를 설립하고 예배를 보면서 시작되었다’라고. ‘그런 가운데 김 할머니의 아들 허태행(당시 30세)이 예수를 믿게 됐다’고. ‘대포교회는 특별히 어려운 시대에 종교 보급뿐만 아니라 지역 사회를 위하여 한글학교를 열어 계몽운동에 최선을 다하였으며, 구호물자를 유치하여 자선활동을 하는 데도 심혈을 기울였다’는 미담까지.

 

할머니는 어쩌다가 대포마을 최초의 기독교인이 되었을까? 대포마을지를 보면, 양천 허(許)씨는 ‘입도조 손(遜), 입향조 지(池), 종손(용건,10대), 입향전 거주지 서호동’으로 기록되어 있다. 양천 허 씨는 서호동에서 대포동으로 이주해 왔다는 얘기다. 여기서 종손은 우리 집 장남을 일컽는다.

 

증조할아버지는 당신의 3남 중 장자의 처인 큰 며느리를 서호동에서 구해 왔다. 그녀는 갯마을인 대포동 처자들과 달리 피부가 하얗고 키도 훤칠했다. 아들도 어머니를 닮아서 얼굴이 희었다. 그 아들이 막 걸음마를 시작할 즈음, 할아버지는 일본으로 돈을 벌러 떠났다.

 

당시에는 집을 짓거나 전답을 사거나 혹은 부채를 가리는 데 목돈이 필요하면 일본행을 하곤 하였다. 제주도를 출발해서 2일 만에 오사카에 도착하는 군대환은 출항마다 최대 685명의 교포들을 실어 날랐다. 12엔 50전의 값비싼 요금을 내고도 앉을 공간이 없을 만큼 많은 인원이 그 배에 몸을 실었다. 약 20년간 제주도와 오사카를 잇는 군대환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급격한 발전으로 사람손이 부족한 일본에 노동력을 제공하였다(제주대 미디어, 2006.09.06.).

 

돈을 얼마나 벌었는지 모르지만, 할아버지는 군대환을 타고 귀향하는 길에 부둣가에서 한 처자를 만났다. 난전에서 장사를 하는 그녀의 얼굴은 까무잡잡하니 다부지고 도전적이었다. 운명은 그런 것일까? 첫눈에 반한 그녀는 대포마을 출신이었다. 물질을 하는 갯마을 기질을 가진 그녀와의 만남은 야누스의 두 얼굴이 되었다. 할아버지는 그녀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했고, 할머니는 버려지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중문동으로 올라가서 새살림을 차렸고, 버림받은 할머니는 대포마을의 섯동네 남의 집 방 한 칸을 빌렸다. 누에를 치면서 명주실을 잣거나, 무명천으로 갈옷을 지어서 생계를 이었다. 아버지는 종손이었으므로 증조할아버지 슬하에 보내졌다.

 

아버지가 동동네인 할아버지 집에서 섯동네인 어머니 집을 얼마나 자주 오갔는지는 물어보지 못하였다. 다만 짐작하기는, 마을의 동서쪽 끝과 끝을 오가면서 아버지 마음에도 할머니의 설움이 켜켜이 쌓이지 않았을까 싶다. 아버지는 할머니의 말이라면 검은 것을 희다 하여도 거스르지 않았다.

 

당시에는 우리 마을에 할아버지 같은 아버지들이 드물지 않았다. 또한 아버지를 중심으로 해서 어머니가 다른 아이들이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게 풍습 같았다. 조강지처를 큰어멍으로 해서 샛어멍 말젯어멍까지 있는 집안도 있었다.

 

참고로 1949년도 제주도의 남녀 성비는 여자 100명당 남자 82.1명으로, 뚜렷이 여다의 섬을 나타내고 있다. 6.25전쟁이 끝난 1953년에는 79.1명으로 남자의 비율이 더 떨어졌다. 1953년 당시 제주도 인구 24만8891명 중 여자가 13만8990명(55.8%)으로, 남자 10만9901명(44.2%)보다 무려 2만9089명이 많았다. 참고로 2021년도 현재는 여자 33만7582명, 남자 33만9177명으로, 남자가 여자보다 1595명이 많다. 남녀 성비가 100.5를 나타냄으로써 삼다도라 불리는 제주가 더 이상 여다의 섬은 아니게 되었다.

 

한편, 1950년 6.25 한국전쟁으로 피난민들이 대거 제주도로 들어왔다. 초기 피난민들은 대다수가 기독교인으로, 공산군이 들어왔을 때 가장 먼저 숙청이 예상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 피난민을 중심으로 1951년 1월에 월평교회가 시작되었고, 1952년에 강축생 전도부인이 대포마을에 복음을 전하러 들어왔다.

 

그 장면을 상상해 보면, ‘낯선 마을에 들어온 한 부인이 이집 저집 들러서 ‘예수님을 믿으면 복을 받는다.' 라고 전도를 한다. 그 이상한 소리에 사람들은 외면을 하거나 ‘나가라’고 내쫓는다. 그런데 그 말을 잠잠히 들어주고, 손을 붙잡고 기도해도 가만히 있는 사람이 있다. 바로 우리 할머니 김현성 여사다.

 

전도 부인은 더 열심히 할머니를 찾아온다. 그렇게 전도를 받아들인 할머니는 마침내 마을에서 유일한 기독교인이 된다. 사실 그즈음에 정신이 반쯤 나간 할머니는, 어쩌면 동네의 외톨이었는지 모를 일이다. 사람이 그리웠던 할머니는 당신을 인간적으로 대해주고, 자주 찾아주는 전도부인을 신뢰하고 의지하게 되었으리라.

 

사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성경말씀은, 우리 할머니처럼 가난·절망·염려·아픔·외로움의 짐에 눌려서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인생에게 주어지는 구원의 복음이다.

 

자연스레 대포마을의 제1호 기독교인이 된 할머니는, 일요일이면 월평마을까지 걸어가서 교회 예배에 참석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월평교회에 예배당을 신축하고 헌당식을 하는 큰 행사가 벌어졌다. 당시 제주도 전역의 감리교계를 책임진 감리사이자 이승만 대통령의 친구로 알려진 도인권 목사님이 강전도사에게 당부하여 아버지를 교회에 나오도록 하였다.

 

전도사님은 할머니를 통해 아버지를 월평교회로 불렀다. 교회에 가는 것은 내키지 않았지만 꿈에도 서러운 어머니의 부탁이라 월평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감리사님은 아버지에게 헌당식 잔치에 대접할 돼지고기를 총괄하는 도감을 맡겼다.

 

부지런히 돼지고기를 썰고 있는데, 갑자기 예배당으로 들어오라는 전갈이 왔다. 영문을 모르고 끌려가다시피 예배당 안으로 들어선 아버지에게, 감리사는 무슨 책인지를 읽고 기도를 드린 후에 “허태행씨를 우리교회 학습인으로 받읍시다”라고 선포하는 것이었다. 알 수 없는 카리스마에 눌려서 꼼짝 없이 받아들여진 일이었다. 더욱이 많은 회중들이 증인으로 서 있는 자리라, 오히려 ‘성도’가 되었다는 두려움과 책임감이 엄습하였다.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예수를 믿기로 약속했으니, 이제부터는 정말 잘 믿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당장에 술 담배를 끊고, 성경과 찬송가책을 사가지고 열심히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동네사람들은 아버지를 ‘예수쟁이’라 부르며 실컷 때린 후, 동네에서 쫓아냈다(기독교세계, 1961, PP36-38).

 

이렇게 파란만장한 과정을 거친 끝에 아버지도 할머니를 따라 당신의 이름을 마을회지에 교인으로 올리게 되었된 것이다. 어머니는 친정으로부터 ‘이혼하라’는 강압에 겨워, 낳은 지 보름밖에 안 된 핏덩이 셋째 딸을 안고서 도망치듯 집을 나갔다. 우여곡절 끝에 몸을 의탁한 곳이 제주시의 피난민 천막이었다.

 

그런데 참, 하늘이 쓴 시나리오였을까. 그 곳을 관리하는 기관이 도인권 감리사가 시무하는 교회였다. 결국 집으로 돌려보내진 어머니는 눈물을 머금고서 아버지와 함께 성도의 길에 들어섰다. 그리고 성경에서 배운 대로, 십계명 중 다섯 번째인,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는 말씀을 가슴으로 받아들였다. 그만큼 축복이 간절하였는지 모를 일이다. 어쨌든 어머니는 남편에게 버림받고 아들을 빼앗긴 충격으로 정신 줄을 놓아버린 시어머니를, 가슴 저리게 보듬어 안고서 눈물을 쏟으며 섬겼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할머니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를 갈라놓는 역할을 여러 가지로 하였다. 이를테면 닭죽을 쑤어서 고기는 자기들끼리 다 먹고 당신에게는 뼈다귀만 주었다는 식이었다. 사실인 즉, 닭 한 마리를 잡아서 12명이 먹으려면 몸통 전체를 잘 으깨어서 골고루 섞어야만 하였다. 그러고 나면 말이 닭죽이지 그저 냄새나 맛으로 보아 닭죽인가 짐작될 뿐의 닭목욕탕이었다. 닭의 형체는 눈을 씻고 찾아도 알아볼 수 없도록 액체가 되어 버렸으니 어쩔 것인가.

 

그래도 할머니의 성품을 잘 아는 어머니는 애쓰게 닭의 살이나 뼈를 찾아서 어떻게든 넣어드리곤 하였다. 그래봤자 혼자 사시면서 닭 한 마리를 통째로 드시던 할머니의 기대나 욕구에는 택도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일화를 수없이 창출하면서, 할머니는 끝내 심각한 치매상태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삶의 대부분을 어머니에게 의탁하게 되었다.

 

동새벽에 일어나서 어머니가 하는 첫 번째 일은, 밤새 할머니가 대소변으로 덧칠해 놓은 옷과 이불을 짊어지고 바다로 가는 것이었다. 김종두 시인의 ‘제주여인 6’에 등장하는 제주도 어머니들은, ‘어두룩헐 때 일어낭 물항 고득 물질어 나뒁, 솖아낸 보리밥 혼 적 뜨는둥 마는둥 갈중이 걸치멍 빌레왓으로 내돌아십주’만, 우리 어머니는 ‘어두컴컴헐 때 일어낭 서답 혼 구덕 등에 지곡, ‘게무로사 시어멍 허주사 내민 안 될 건디’ 저들어가멍, 엎어지멍 푸더지멍 큰개바당 나는물(용천수)로 부리나케 내돌았다.’ 혹여 남이 볼까 서둘러서 흐르는 물에 오물을 흘려보내고선, 물 허벅 사이에 솔째기 집어넣고서야 허리를 펴며 상지동산을 오르시던 어머니.

 

저만치 희끄무레하게 집이 보일 즈음이면,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며 할머니의 설움과 함께 한숨과 눈물을 함께 들이켰으리라. 해가 지고도 어두워져야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 먼 데서 불빛이 보이면 애가 타게 잰 걸음을 옮겨서는 서둘러서 할머니 방부터 열어보았다. 오물투성이가 된 의복 일체를 갈아입히고, 일일이 밥을 떠먹이고, 이부자리를 새로 펴서 깔아야 하는 일과. 아, 그것도 부족했을까? 할머니는 밤중에 옷을 벗은 채 동네를 돌아다니다가 남의 집 마당에 웅크려 있곤 하였다. 그러한 할머니가 누구보다도 서러운 어머니는, 딸들에게 ‘할머니 당번’이란 역할을 부여하였다.

 

어느 날은, 내가 당번이었는지, 아니면 촐람생이(촐랑대면서 주제넘게 남의 일에 끼어드는 사람) 기질이 발동한 건지, 할머니가 개탕지(‘탱자’의 제주 방언)를 드시는 게 내 눈에 붙잡혔다. 그 당시는 한참 감귤 밭을 조성하던 시기로, 탱자나무에 밀감나무 순을 접붙여서 감귤나무 성목으로 만들어 가는 일이 한창이었다. 할머니는 그 시큼하고 떨떠름한 게 뭐 그리 맛있는지, 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면서 내게도 하나 ‘먹어보라’고 건넸다. 아이고, 큰일 났다! 우리가 애써 따다 놓은 감귤묘목 종자를 할머니가 저렇게 다 드시다니……. 나는 할머니 곁에 가서 현장 확인을 제대로 하지도 않은 채 불굴의 신고 정신을 안고 숨이 넘어가게 밭으로 내달렸다. 아버지가 보이기 시작하는 데서부터 큰 소리로 외쳤다. “아버지, 큰일 나수다. 할머니가 애쓰게 모아 논 개탕지를 다 먹어부럼수다”라고.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버지는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으셨다. 어쩌면 그 시고 떫은 개탕지를 할머니가 드시면 얼마나 드시겠나 싶으신 건지..... 아니면 그런 것을 드시는 할머니가 안쓰럽고 언짢으신 것인지……. 고자질하는 내가 마땅찮으신 건지…….

 

그런데 조금 있다가 중학생인 언니가 마치 횡재라도 한 얼굴로 생글거리며 등장하였다. “아버지, 할머니가 미깡을 주셔신디, 정말로 맛좋아 마씸. 산물(진귤)이랜 허는 건디, 아버지도 하나 드셔봅서!”라며 붉고·노랗고·먹음직한 열매를 꺼내보였다. 세상에! 정말이지 어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얼굴을 들이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실인즉, 서호에 사는 할머니의 언니들이 아픈 동생에게 오면서 그 희귀한 산물을 선물한 것이었다. 알려지기로 산물은 조선시대에 임금님한테 바치던 토종 귤로, 크기가 아주 작고 단맛과 신맛이 강해 한약재로 쓰이는 것이다. 서호마을은 감귤농사가 비교적 우세한 곳인 만큼 토종 귤인 산물도 더러 있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이 사건은 오래도록 내 가슴속에 묻혀 있다가도 할머니를 생각하면 어김없이 꿈틀대며 올라와 부끄러움을 가르쳐 준다.

 

어쨌든 할머니는 밥을 실컷 드시고도, 아버지가 보이면 ‘배고프다’ 하시면서, ‘씨어멍 밥도 안 주는 메누리’라고 어머니를 타박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렇게 당신을 가슴 아프게 했던 시어머니를 장례하면서, 대포 마을이 소문나게 밥과 떡을 차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보리와 콩을 쌀보다 많이 넣어서 누리끼리 하던 영장집 밥을, 쌀과 콩만 넣어서 불그스레하게 대접하였다. 아, 할머니의 서러운 ‘여자의 일생’ 중 마지막 장을 어머니는 그토록 화려하게 마무리했다.

 

이제는 할머니의 무덤에서 당신의 삶을 짓눌렀던 고난과 설움, 아픔, 사랑마저도 다 내려놓고, 한 살 아기처럼 마냥 웃으시는 어머니. 부디 천국에서 시어머니를 만나시는 그날까지, ‘복되다’ 일컫는 인생의 마지막 장을 원 없이 한없이 살아가소서.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허정옥은?
= 서귀포시 대포동이 고향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뭍으로 나가 부산대학교 상과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하고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미국 볼티모어시에 있는 University of Baltimore에서 MBA를 취득했다. 주택은행과 동남은행에서 일하면서 부경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이수했고, 서귀포에 탐라대학이 생기면서 귀향, 경영학과에서 마케팅을 가르치면서 서귀포 시민대학장, 평생교육원장,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3년간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의 대표이사 사장과 제주컨벤션뷰로(JCVB)의 이사장 직을 수행한데 이어 제주평생교육장학진흥원장을 거쳤다. 현재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서비스 마케팅과 컨벤션 경영을 가르치고 있다. 한수풀해녀학교와 법환좀녀학교도 다니며 해녀로서의 삶을 꿈꿔보기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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