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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100세 일기] 어머니의 장수비결 10가지 중 한가지 ... 긍지

1923년 3월 22일. 어머니의 생신이다. 막내딸 이름을 성춘(成春)이라 지으시면서, 외할아버지는 ‘봄을 이루어라, 봄이 되거라’고 기원하셨을까. 이제 내일 모레면 만 나이로 백 세가 되신다.

이웃들이 묻는다. 어머니의 장수비결이 무엇이냐고. 혹시 집안이 장수하는 가문이냐고..... 아니다. 어머니는 4남2녀의 막내인데, 형제분들 중 가장 오래 사신 경우가 80대 중반이다. 요컨대, 장수혈통은 결코 아니란 얘기다.

그럼, 무엇이 장수의 비결일까? 어머니와 함께 산 지 20년, 같은 방을 쓴 지가 10년 째다. 룸메이트로서 내가 경험하고, 관찰하고, 생각하는 어머니의 장수비결을, 10가지로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일, 2) 식사, 3) 병원, 4) 자녀, 5) 기도, 6) 바다, 7) 잠, 8) 딸, 9) 긍지, 10) 감사.

 

 

1. 1등은 못해도 2등은 했다

 

어머니는 자타가 인정하는 제주해녀다. 제주국제컨벤션센터가 자리한 중문관광단지 일대를, 대포 사람들은 ‘너배기’라 불렀다. 아마도 넓고 평평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싶다. 너배기 앞에 있는 바다를, 우리는 지삿개라 불렀다. 지금은 ‘주상절리’라 불리며, 관광지로 유명해진 곳이다.

 

주상절리 앞에 관광상품을 판매하는 가게들이 공식적으로 지어지기 전에는, 대포 사람들이 난전을 펼치곤 하였다. 주로 집에서 재배하는 밀감들을 팔았다. 사실, 이제 와서 하는 얘기지만, 너배기를 강제 수용해서 관광단지로 만들었다면,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해당 주민들에게 대체 일자리를 제공하는 게 아닌가 싶다. 지금은 그렇게 개발사업이 진행되지만, 그때만 해도 공권력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던, 어두운 시절이었으니.....

 

그 너배기 일대를 어머니는 ‘인건이 기정’이라 불렀다. ‘기정’이란 게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계곡이 아닌가. 무슨 일로 그렇게 절망했는지 모르지만, 어머니는 그 인건이 기정에 떨어져 죽을 생각을 했었단다.

 

상상컨대 보릿고개가 있던 60년대에, 2남7녀를 낳아서 키우며, 시어멍과 시할망까지 모시고 사는 살림이라면, 하루에도 몇 번씩 죽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아니하였을까. 실제로 주상절리 일대를 내려다 보면, 죽을 수 있을 만큼 지대가 험악하고 수심도 깊어 보인다. 그곳에 떨어지면 넘실대는 파도가 얼른 삼켜서는 깊은 엉장(굴)으로 몰고 갈 터다. 더욱이 치마에 돌을 담아서 떨어진다면, 어느 누가 그 자취를 찾아낼 수 있으랴.

 

그렇게 험하고 깊은 만큼, 지삿개에서는 상군 해녀들만이 물질을 하였다. 어머니는 너배기에서 논일을 하다가 물때가 되면 지삿개로 달려가곤 하였다. 백 년이 넘도록 살아내신 지금도, 어머니는 지삿개의 소용돌이 치는 물거품과 시커먼 물속의 알 수 없는 깊이에 어깨를 움츠리며 몸을 떠신다.

 

그래도 ‘지삿개와 큰엿도(약천사 앞에 있는 바다)는 고마운 바당’이라는 어머니. 그저 ‘맨 몸뚱이를 던져서 금전을 벌 수 있는 게 어디냐’며, ‘그 덕분에 2남7녀를 굶기지 않고 키워낼 수 있었다’는 어머니는, 영락없는 제주 해녀다.

 

마치 큰바위 얼굴처럼 담담하게 웃으시는 어머니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어머니, 물질은 막 잘 헙디강?” “1등은 못해도, 2등은 했져!”라고 단번에 답하신다. 짖궂은 장난기가 발동해서, 다시 한 번 물어본다. “게민, 1등은 누게가 해수과?”라고. 그러자 주저 없이 “창수 각시!”라 하신다.

 

창수 각시는 대포마을 해녀회에서 제 13대(1975년) 회장을 지내신 분이다. 어머니보다 14살이 젊어서, 어머니의 입장에서 보면 넘사벽이 아니었을까 싶다. 체격이 좋은데다 식욕이나 욕심 등이 탁월해서, 그야말로 천부적인 해녀 기질을 타고나신 분이다. 참, 여기서 욕심은 분에 넘치는 탐심이 아니라, 해녀들에게는 필수적인 잠수기질 중 하나다. 어머니가 입에 담고 하시는 말씀이, ‘해녀는 욕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의욕, 경쟁심, 적극성, 성취감, 도전성 등을 총망라하는 의미일 게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어머니도 창수각시 못지 않게 물질을 잘했던 게 아닐까 싶다(혹시나 싶어서 양해를 구한다. 여기에서 ‘누구누구 각시’라는 표현은 그 당시 동네에서 관습적으로 사용하던 호칭이다). 큰갯마을의 553쪽을 보면, 제 10대 해녀회장에 어머니의 이름 ‘김성춘’이 새겨져 있다. ‘1923.3.22일생, 1971년, 해녀회장’이라고.

 

어머니가 해녀회장이었기 때문이었을까? 해녀분들이 잡은 전복을 까서 소금에 절인 다음 우리집 지붕위에서 바싹 말린 후, 일본으로 수출을 했던 게 기억이 난다. 새마을운동의 일환이었으리라. 당시 새마을 지도자이셨던 아버지께서, 초가집은 스레트 지붕으로 바꾸고, 쇠막(외양간)은 지붕을 콘크리트로 개조하셨다. 그 콘크리트 지붕위에다 내장을 뺀 전복을 소금에 절여서 통째로 널어놓았다(내장은 소라와 함께 젓갈을 담가서, ‘게웃젓’으로 팔았다). 마치 고구마를 썰어서 말려 빼때기(절간)를 만들 듯이, 소금물에 씻겨진 전복들이 허옇게 배를 내밀고서 드러누워 있는 진풍경이라니...

 

한 번은, 얼마나 맛있길래 일본 사람들이 비싼 돈을 주고 사먹나 싶어서 한 입 정도 배어먹어 보았다. 세상에! 짠 맛 뿐이었다. 좋은 약은 입에 쓰듯이, 전복은 워낙 잡기가 힘들고, 몸에도 좋으니까 보약으로 먹나 보다 싶었다. 참, 그당시는 소라도 얼마나 많이 잡혔던지, 해녀들이 소라를 몇 망시리씩 잡아 오면, 아버지들이 등짐으로 같이 나르던지, 구르마에 실어오곤 하였다.

 

그렇게 잡혀들어온 소라를, 여물은 까서 젓갈로 담그로, 껍질은 단추공장으로 보내서 2차 가공을 하였다. 대포마을에서 중문 오일장으로 가는 길목에 단추공장이 있었는데, 소라껍질이 큰 산을 이루었다. 요즘 해녀들 입장에서 보면, 꿈같은 일일 것이다. 지금은 소라가 잘 안잡히거나, 잡혀도 여물이 알차지 못한 것 같다. 바다가 오염으로 신음하는 탓이요, 해조류들이 녹아서 자취를 감춘 때문이리라.

 

 

요컨대, 어머니는 대포마을의 해녀회장으로서 해녀분들의 소득 증대를 위해 전복 절간 작업을 도맡아서 하신 것이다. 당시를 관찰했던 내가 보기에도, 어머니가 물질은 2등일지 몰라도, 해녀회장으로서의 역량과 업적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리라 짐작된다. ‘2등은 했다’는 말 속에는 자부심과 자긍심이 은근하게 스며 있다. ‘이왕지사 해녀가 되었다면 최선을 다해서 상군 반열에 올라야지!’라는 어머니의 결기가 느껴진다.

 

어머니 이후로 대포마을 해녀회장은 35대까지 기록되었는데, 모두들 어머니보다 열 살 이상 젊은 30대들이다. 해녀의 물질 기량은 ‘17세부터 35세까지’에 걸쳐서 절정을 이룬다. 40대 후반에 해녀회장을 하셨으니, 어쩌면 어머니는 2등이라는 ‘낮아짐’으로 남들보다 더 오래 그 실력을 유지하신 게 아닐까.... 조심스레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다. 어머니의 파란만장한 삶의 궤적을 대포마을회의 ‘큰갯마을’과 제주도청의 ‘숨비질 베왕 놈 주지 아녀’라는 해녀생애사 조사보고서를 들쳐보면서, 그 때 그 시절의 생활상을 물어보면서 말이다.

 

2. 나는 야학에 가서 한글을 깨쳤다!

 

어머니는 한글을 읽으실 줄 아신다. 더듬거리기는 하셔도 한 글자씩 짚어드리면 천천히 분명하게 읽어 내신다. 참 신기한 일이다. 대포마을에서 어머니 또래가 한글을 읽을 수 있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어떵해연 이추룩 글을 잘 읽엄수과?”라고 물으면, 얼굴이 발그레지면서 화안하게 웃으신다. ‘오라방들 몰래 야학에 나가서 한글 읽고 쓰기를 배웠다’는 어머니는, 당신 스스로도 자부심이 느껴지시는 눈치다.

 

“나영 종택이 어멍은 야학에 가서 한글을 깨쳤주만은, 큰오라방 각시는 이신 체 허멍 큰소리는 쳐도 한글을 몰라....”라며 어깨를 으쓱거린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고단하고 가난한 삶을 살아갔던 덕분이다. 잠시나마 우쭐거리는 모습이 아기처럼 천진난만해서, 가슴 속에서 묵직한 덩어리가 울컥 하니 솟구쳐 오른다. 가만히 어머니의 손을 잡아서 오래토록 토닥토닥 두드려 드린다.

 

가끔 자동차를 함께 타고서 시내로 나가면, 도로 표지판과 건물 간판 등을 큰 소리로 읽으신다. 천천히 발음하지만 또박또박 분명하신 게, 마치 춘원 이광수의 상록수에 나오는 아이들이 느껴진다. 목소리에 힘이 있고 긍지가 넘쳐난다. ‘나는 글을 읽을 수 있다’는 자부심으로, 어머니의 얼굴에 생기와 기쁨이 아른거린다. 그 때 선생님들은 누구이며,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실까?

 

보목마을을 벗어나서 제주시로 향하는 비석거리에 이르면, ‘성산포, 축협, 동홍동’과 같은 어려운 글자들이 등장한다. 오히려 도전감으로 목소리가 커진 어머니는, 스스로도 ‘잘한다’ 싶으신지, 의기양양하게 차창문을 여신다. 그리고 더 어려운 글자들을 찾아내서 더 큰 소리로 힘차게 읽으신다. 누군가 ‘세상을 향해 더 큰 소리로 외쳐보라’고 등을 두드려주었을까? ‘한라산, 컴퓨터, 에어로빅, 브레이크....’라며 한 글자 한 글자에 전신의 힘을 쏟아붓는 어머니에게, ‘최고!’라며 격려와 칭찬의 하트를 날려 보낸다. 오래 전, 그때에 받아보지 못한 사랑의 원자탄을 원 없이 한도 없이 마음껏 안겨드리고저.

 

우리는 어느새 한 목소리로 간판들을 소리쳐 부른다. 그 외침 속에, 어머니의 10대, 소녀시절의 꿈, 가고 싶던 학교, 2남7녀의 운동회, 자식들의 졸업식, 딸과 함께 갔던 대학교 캠퍼스가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백 년의 삶이 파노라마가 되어, 바람처럼 구름처럼 흘러 흘러 스쳐간다. 어머니의 백 세 인생이 햇볕에 반짝인다. 죽음의 순간 순간을 넘어서, 백 년을 지나온 삶이 참으로 엄숙하다. ‘어머니, 잘 살아내셨습니다. 수고 많이 하셨어요. 고맙고, 감사합니다!’

 

다시 한 살 아기가 되어 하루 하루가 낯설고 새로워진 어머니. 부디 김성춘, 우리 어머니의 삶이 사랑과 감사로 이어지기를.... 부디 지금처럼 찬송가의 글자를 하나 하나 짚어가면서, 낮은 목소리로 ‘날 사랑하심’을 노래하소서.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허정옥은?
= 서귀포시 대포동이 고향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뭍으로 나가 부산대학교 상과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하고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미국 볼티모어시에 있는 University of Baltimore에서 MBA를 취득했다. 주택은행과 동남은행에서 일하면서 부경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이수했고, 서귀포에 탐라대학이 생기면서 귀향, 경영학과에서 마케팅을 가르치면서 서귀포 시민대학장, 평생교육원장,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3년간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의 대표이사 사장과 제주컨벤션뷰로(JCVB)의 이사장 직을 수행한데 이어 제주평생교육장학진흥원장을 거쳤다. 현재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서비스 마케팅과 컨벤션 경영을 가르치고 있다. 한수풀해녀학교와 법환좀녀학교도 다니며 해녀로서의 삶을 꿈꿔보기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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