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방언으로 쓰신 김종두 선생님의 시집, ‘사는 게 뭣 산디’는 ‘제주여인’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무려 12편의 ‘제주여인’은 4.3을 겪은 어머니가 화자(말하는 이)가 되어 그 시절의 삶을 조곤조곤 들려준다. 그 중에서 ‘제주여인 10’은 자식들이 살아갈 4.3 이후를 이야기한다;
4.3 그 시절, 제주 사름이민 고슴 안 아픈 사름 어디 이서시냐. 동드레 가민 동엣 사름 혼맺힌 사연, 서펜드레 가민 서촌 사름 피맺힌 사연. 이제 왕 아명 도시려 봐도(이제 와서 아무리 얘기해 보아도), 어느 누게가 그 한을 씻어주코. 이 할망 고만히 살당 가크메, 호다 느네 도투지 말앙 살라. 나 죽엉 골총되어 불민 그 뿐. 이제 혼 두 해 더 지나믄 그런 일도 이서싱가 홀꺼여.
오죽하면 4.3으로 한이 맺힌 할머니가 ‘이제 4.3을 두고 더 이상 다투지 말라’고 하실까. 4.3은 이제 화해와 상생의 역사를 쓰고 있다. 2000년 1월에 공포된 ‘제주4.3사건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그 기초다.
이어서 8월 28일에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가 설치되어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결과 2003년 10월 정부의 제주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가 채택되고, 대통령의 공식 사과 등이 이루어졌다.
4.3특별법 제2조는 제주4.3사건에 대해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4.3특별법에 따라 제주 4.3평화재단이 설립되었으며,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명림로 430(봉개동)에 제주4.3평화공원이 조성되었다.
하지만 현기영 선생의 ‘순이 삼촌’을 떠올리면 가슴 저 편에서 목메는 슬픔이 여전히 솟구친다;
나이 스물여섯에 홀어미가 되어 삼십 년이란 세월을 수절해 오던 순이 삼촌이, 한평생 다 산 나이 쉰여섯에 끔찍하게도 스스로 목숨을 끊다니. ‘순이아지망은 죽어도 발쎄 죽을 사람이여. 밭을 에워싸고 베락같이 총질해댔는디 그 아지망만 살아났으니… 운동장에 벳겨져 널려진 임자 없는 고무신을 다 모아놓으민 아매도 가매니로 하나는 실히 되었을 거여. 그때 아지망은 정신이 어긋나버린 거라…….’라고 작은당숙이 말을 맺지 못한다.
그 검정 고무신은 박용우 시인의 글에서 ‘누이가 주워 가슴에 품고 가는 눈물’로 이어진다; 어린 동생이 끌려가던 길이었다. 따라오지 말라고 눈물로 던진 길이었다. 여기다, 여기다 하며 두려움이 떨어뜨린 길이었다. 누이가 주워 가슴에 품고 가는 길이었다. 견우와 직녀가 만난다는 칠석날, 까마귀도 종소리에 숨죽인 길이었다. 섯알오름에서 노을이 핏물처럼 흘러내리는 길이었다. 땅 밑에서 고구마가 굵어지고, 땅 위에서 고구마 꽃이 자주 빛 울음을 터뜨리는 길이었다.
오늘 따라 섶섬 앞 바다가 허옇게 이빨을 드러낸다. 4·3 당시 200명 넘는 주민이 목숨을 잃은 정방폭포와 지척이다. 그 섬을 바라보며 뜬금없이 ‘제이는 어디 가신 고, 이?’라며 조카를 찾는 어머니의 눈에 물안개가 서린다.
1948년 11월 19일 서청은 일부 주민들을 중문리 신작로 속칭 ‘대수구우영’에서 집단 학살했다. 중문·상예·색달·하원리 주민들이 희생되었는데, 대포리의 희생자는 김장⁕(23), 오성⁕(25), 이두⁕(27), 이승⁕(31), 임평⁕(30)이었다(큰갯마을, 대포마을회). 27세에 청상이 된 제이는 남매를 먹여 살리려고 목숨 건 물질을 하다가 바다에서 죽었다. 물에 젖은 어머니를 등에 업은 아들이 엉엉 울면서 마른 밭으로 올라갈 때 온 동네 해녀들도 통곡하며 뒤따랐다. 어깨를 들썩이며 바다가 울자, 하늘이 눈물짓고 한라산도 울먹였다.
제이는 어머니의 조카지만 두 살이 더 많았다. 그래도 어머니를 삼춘이라 부르며 많이 의지하고 따랐다. 아들이 어렸을 때는 아버지가 제이네 논밭을 갈아주었다. 아들은 아버지를 닮아서 인물도 좋고 공부도 잘하였다. 동네에서 몇 번째 안에 드는 대학생이 되었다. 나중에는 마을 이장도 하였으니, 아버지의 아들로서 어머니의 한을 조금은 풀어드린 셈이다.
하지만 워낙에 4.3 사건의 상처가 깊어서 그런지, 제이는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나중에는 술이 없으면 물질도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어머니는 그런 제이를 붙들고 달래도 보고 엄포도 놓았다. 가끔, 제이네 집에 가서 서로 발을 맞대고서 밤을 같이 지새우기도 했다. 손자 손녀들이 생기고, 과수원에 미깡도 잘 달리고...
이제 살만하다 싶을 때, 어이없게 죽었다. 얕은 물가였다. 망실이에는 빈 소주병이 뎅그러니 남아 있었다. 서쪽으로 넘어가던 해도 테왁에 걸려서 숨을 멈췄다. 눈을 감지 못하는 제이를, 어머니는 가슴에 꼬옥 안았다.
‘잘 살았저. 그만 허민 촘말로 잘 살았저. 우리 설운 제이야, 이제랑 펜안히 가라 이! 강 아방 만나지민, 아들이영 똘이영 손지들이영 막 잘들 사난, 솔째기 와부러수댄 허라. 아방이 경도 보구정 헌디, 이상허게 얼굴이 잘 생각 안 난... 더 이시민 얼굴 못촞으카부댄, 바당에 태왁도 내부러 돈, 어그라 이디로 와부러수댄 허라...’라며 제이를 달래는 어머니의 울음이 파도에 부서졌다. 아마도 제이는 오래토록 꿈꾸던 이어도로 갔을 거다.
1948년 12월 15일 마을에 들이닥친 토벌대는 강문*(19), 김서*(22), 원문*(20), 이동*(19), 임기*(29), 정복*(28), 강이*(23) 등을 서귀포로 끌고 가서 정방폭포부근에서 집단 학살했다. 정방폭포는 4·3 당시 200명이 넘는 도민이 목숨을 잃은 서귀포지역 최대 학살터였다. 정방폭포가 있는 서귀리는 서귀면뿐만 아니라 산남지방의 중심지였던 것. 면사무소, 남제주군청, 서귀포경찰서가 모두 서귀리에 있었다. 2연대 1대대가 주둔했고, 근처에 서북청년단 사무실도 있었다(CBS 라디오, 시사매거진 제주, 2021년 6월 19일 일.토).
1948년 12월 17일은 전도적으로 가장 참혹한 총살극이 벌어진 날이다. 2연대와 교체를 앞둔 9연대가 ‘마지막 토벌작전’을 벌인 것이다. 이날 토벌대는 정남*의 어머니 원경*(46), 3형제 정남*(25), 정재*(15), 정남*(12) 그리고 또 다른 가족 김술*(62), 고양*(61), 원봉*(27) 외에 60대 노부부 등을 집단 학살했다. 집안에 젊은 남자가 사라진 소위 ‘도피자 가족’이란 것이 총살 이유였지만, 무분별한 학살극이었다(대포마을회, 큰갯마을, p.226).
대포리 출신으로 당시 모슬포지서 순경이었던 이상봉은 “그날 내 친한벗이었던 김용*의 부모 김술*·고양*와 아내 원봉*도 충살됐습니다. 김용*이 입산 폭도라는 게 총살 이유였지요. 그러나 김용*은 입산한 것이 아니라 일본으로 피신한 상태였습니다. 난 1948년 서귀포에서 그를 만난 적이 있는데, ‘정국이 불안하니 일본으로 밀항하겠다’고 하더군요. 그의 가족이 총살되고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된 후에도 그가 입산한 것으로 추정한 경찰은 자꾸 그의 동생에게 찾아와 그의 행방을 따졌습니다. 그러던 중 그가 일본에서 내게 사진을 동봉한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사태가 무서워 일본으로 피신했을 뿐인데 부모와 아내가 희생돼 억울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쯤에서 ‘제주여인 12’를 읽어본다;
‘설룬 애기야, 어떵 고라사 내 살아 온 시상 알아 들으코./ 반 백년 지낭 봐도, 그때 일 생각호믄 중치멕형 고슴만 독근 거렴신예./ 아방은 무슨 죄를 지어신디 대창에 찔영 죽고, 아들은 무슨 죄를 범허영 총맞앙 죽어신지 아직도 컴컴이여/ 경 호여도 호늘이 도해싱고라, 대는 끈지말랜 느네 아방 유복자로 태어낭 내 설룬 애기 보암구나./ 설룬 내 애기야, 호다 이 할망 살아 온 시상 멩심호영 들었당 후제 느네 아들 크거들랑 잘 도시려 주라./ 아- 눈물의 세월이여, 제주의 아픔이여.’
4.3이 지나고 일주일 후 4월 10일에는 국회의원 총선거를 실시한다. 역대 투표율은 2008년 46.1%, 2012년 54.3%, 2016년 58.0%, 2020년 66.2%로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다. 벌써부터 투표율과 여·야 지지율의 상관관계를 논하는 기사가 등장한다. 후보들도 저마다 득표율의 유.불리를 계산하고 있을 터. 4.3 추념일 이후 전개될 7일간의 경주야 말로 가장 불꽃 튀는 경쟁이 될 것이다. 그간의 경향을 살펴보면 역사의 아픔과 상처조차 불쏘시개로 소환될 여지가 없잖다.
이제는 과거의 이념이나 역사적 논쟁을 떠나 미래를 논의할 때다. 출신 당의 오래된 공적을 마치 자신의 공헌처럼 부르짖는 수치는 사라져야 한다. 유권자 앞에서 고작 티격태격 하는 후보들은, 제발 상대의 티보다 자신의 들보를 깨닫기 바란다. 단상에서 핏대를 올리기보다 시장에서 고개 숙여 민생을 살피시라. 어머니의 거친 손과 할머니의 애타는 속을 여의도보다 더 간절히 보듬어야 한다. ‘제주에 산지 7년 차인데, 올해처럼 어려운 상황은 없다’는 이주민의 사정도 함께 아파하라.
유권자들 또한 후보들의 입이 아니라 삶을 똑바로 쳐다봐야 한다. 그동안 어떻게 살아 왔는지, 과연 국회에 가서 300명 의원들과 견주어 우리를 대변할 만한지를. 한국고용정보원에 의하면 국회의원 1인당 투입되는 국비가 34억원. 대기업의 고위직 다음 높은 소득이다. 우리는 동네 행사장이 아니라 여의도와 신문·방송에서 제주를 대변하는 진짜 리더를 보유하고 싶다. 제주의 4월은 지상에서 가장 서러운 봄이다. 그럼에도 다투는 건, 4.3의 할머니 가슴에 두 번씩이나 대못을 박는 일이 아닌가.
그러니, 이제는 우리 호다 도투지 말앙, 웃어 가멍 살 일이다. 내 얼굴이 어두룩헐 때마다 102세 어머니께서 하시는 말씀이, ‘살암시민 살아진다’이다. ‘싸는 물 이시민, 드는 물 있다’고.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허정옥은?
= 서귀포시 대포동이 고향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뭍으로 나가 부산대학교 상과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하고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미국 볼티모어시에 있는 University of Baltimore에서 MBA를 취득했다. 주택은행과 동남은행에서 일하면서 부경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이수했고, 서귀포에 탐라대학이 생기면서 귀향, 경영학과에서 마케팅을 가르치면서 서귀포 시민대학장, 평생교육원장,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3년간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의 대표이사 사장과 제주컨벤션뷰로(JCVB)의 이사장 직을 수행한데 이어 제주평생교육장학진흥원장을 거쳤다. 현재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서비스 마케팅과 컨벤션 경영을 가르치고 있다. 한수풀해녀학교와 법환좀녀학교도 다니며 해녀로서의 삶을 꿈꿔보기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