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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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방궁에 대한 중국학자들의 주장을 따라가 본다.
아방궁(阿房宮)은 진나라의 유명한 건축물이다. 서안(西安)시 아방(阿房)촌에 유적이 남아있다. 궁전은 시황제 35년(기원전 212)에 세우기 시작하여 진나라가 멸망할 때까지도 완성하지 못했다. 아방궁은 규모가 대단하다. “동서 5백보, 남북 50장, 만 명이 앉을 수 있었으며 아래는 5장의 기를 세울 수 있었다.” 진나라가 멸망할 때 항우가 불태워 없앴다. 지금도 거대한 땅을 다진 토대가 남아 있는데 높이가 7미터요 길이가 1000미터다.
진시황은 진(秦) 대제국을 건립한 후 황제의 지고한 권위를 수립하기 위해 극도로 사치스럽고 탐욕스러운 토목 공사를 자행했고 폭정을 일삼았으며 엄격하고 가혹한 형벌과 법령을 시행했다. 극단적인 혹정의 통치는 갈 곳을 잃고 유리걸식하는 피난민이 도처에 가득하게 만들어 백성들의 원망이 하늘을 찔렀다.
진시황이 6국을 병합하면서 나라 하나를 멸망시킬 때마다 도형을 찍어내 듯 해당 국가에 함양(咸陽)을 모방하도록 했다. 통일 후 원유(園囿)를 확대할 계획도 세웠다. 서쪽으로는 옹․진창(雍․陳倉 : 현 섬서[陝西] 봉상[鳳祥], 보계[寶鷄] 일대)로부터 동쪽은 함곡관(函谷關 : 현 하남[河南] 영보[靈寶])에 이를 정도로 면적이 동서 천 리나 됐다. 결국 진시황은 그런 원유를 건설하지는 않았지만 도처에 이궁과 별관을 지었다. 수도 함양 주변 200리에 궁전 270좌, 관중에 행궁 300좌, 관외에 400좌를 건설했다.
진시황이 세운 궁전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큰 것이 아방궁이다. 아방궁의 규모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어림잡지 못하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아방궁의 전당(殿堂)이 동서로 500보(6척이 1보), 남북 길이가 50장으로 궁전 내에 사람 만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궁전 앞에는 5장 높이의 깃대가 있었고 양옆에는 12개의 동인(銅人)을 세웠는데 24만 근이나 됐다. 자석으로 문을 만들어 무기를 숨기고 입궁하면 끌어당기게 만들었고. 주위 건각은 각 궁실로 통하게 만들었으며 그 길은 지세에 따라 남산에 이르도록 만들었다. 남산 정상에 궁궐을 지어 아방궁의 대문으로 삼았다. 또 이중 도로를 만들어 아방궁에서 위수(渭水) 북쪽 기슭까지 통하게 해 함양에 이르게 만들고 천극자궁(天極紫宮 : 북극성) 후 17성이 은하수를 가로지르게 해 궁실(28宿의 하나)의 천정(天庭)에 이르게 만들었다.
이런 방대한 궁전을 세우기 위해 진시황은 은궁(隱宮 : 궁형을 시행하던 장소)에 명령을 내려 죄인과 죄수 70여 만 명을 징발해 노동을 시켰다. 북산(北山 : 현 섬서 예천[禮泉], 경양[涇陽], 삼원[三原]과 순화[淳化] 경내)의 돌과 촉(蜀)나라와 초(楚)나라의 목재들을 건축용으로 관중(關中)까지 끊임없이 운반했다. 아방궁 건축 점유지의 범위는 함양에서 동으로는 임동(臨潼), 서로는 옹(雍 : 섬서 봉상의 남쪽), 남으로는 종남(終南)산, 북으로는 함양 북판(北坂)까지 가로 세로 300여 리에 달했다. 이외에 함양에서 함곡관 서쪽으로 궁전이 300여 곳에 이르렀고 함곡관 동쪽으로는 400여 개에 달했다. 많은 궁전은 일률적으로 조각해 단청을 입혔으며 오색찬란하고 웅장하고 화려했다.
아방궁 건축 공사는 자원을 모두 소비함으로써 인력과 재물을 낭비했다. 진시황이 사후 궁전은 완공되지 않아 아들 호해(胡亥) 때에도 계속 건축했다.
호해는 선제(先帝)가 함양의 조정이 작다고 생각하여 아방궁을 지었는데 궁전을 완공하지 못한 상태에서 붕어함으로써 어쩔 수 없이 공사를 중단하고 인력을 뽑아 먼저 여산 봉분을 마무리해야 했었는데 여산 봉분 공정이 끝나고서도 아방궁을 완성하지 않는다면 선제의 궁전 건축 공정이 잘못됐음을 시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방궁 공사를 계속하라 명령했다. 그리고 5만 군사를 징발한 후 함양에 주둔시켜 훈련하고 사냥에 동원하였다. 각 군현에 명하여 함양으로 군량을 운반하도록 명령하면서 운반하는 자들에게 자신이 먹을 양식을 가지고 오게 하고 함양 주변 300리 안에서 생산되는 곡물은 먹지 못하게 했다. 징발하는 양이 갈수록 많아지고 부역도 나날이 많아졌다. 아무 거리낌이 없이 제멋대로 징발하니 백성은 피폐해져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을 정도가 돼 버렸다.
오래지 않아 진나라가 멸망하고 초한(楚漢) 쟁패에 빠져들 때 항우(項羽)가 관중으로 들어와 진나라 궁전을 불태웠다. 100일 동안 계속해서 불탔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아방궁의 크기가 얼마나 됐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한 사람을 위한 궁전, 그 화려함은 만인의 분노에 의해 재로 화했다. 진나라 최대의 궁전이라는 아방궁의 여러 건축물들은 세상에서 사라졌다. 유적을 보면서 애석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아방궁의 욕망을 저주해야 할 것인가?
그런데 여기에서 의문이 남는다. 과연 아방궁을 항우가 불태웠는가? 역사 속에서 사실이라 인정받는 이야기에 대해 아직도 진행되고 있는 고고학 발굴의 최종 결과를 기다리지 않고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여러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니, 아방궁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은 그저 사족으로 받아들이면 될 것이다.
2002년 중국 고고학자들이 아방궁 연구 팀을 구성해 이미 재로 변한지 2000년이나 지난 아방궁 유적을 찾으려 했었다. 그러나 발굴한 결과 사람들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불에 탄 아방궁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천 년이나 지났으니 기나긴 만고풍상에 화재의 흔적이 사라져버린 것은 아닐까? 아니다. 참고할 예가 있다. 한(漢)대의 장락궁(長樂宮)이 서한의 수도인 장안에서 가장 화려한 궁전의 하나로 무제(武帝)의 어머니가 거주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어린 아교(阿嬌)가 같은 나이의 무제를 만난 ‘금옥장교(金屋藏嬌)’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생겨난 곳도 그곳이다. 동한 말년에 장락궁이 불에 타 파괴됐는데 화재의 흔적은 아직까지도 뚜렷이 남아있다. 아방궁과 한나라 장락궁의 건축 연대는 그리 차이가 나지 않고 화재라는 같은 원인에 의해 파괴됐는데 남은 흔적은 왜 이처럼 다를까? 하나의 가능성이 있다. 아방궁은 항우에 의해 불태워지지 않았다는 것!
“아방궁(阿房宫)은 원래 불타지 않았다.”는 설명은 중국 고고학의 논쟁을 불러왔다. 고고학 팀이 잘못한 것이 아니냐고 질책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그러나 고고학 팀은 전문가들이다. 사서의 기록에 의하며 아방궁을 짓기 위해 진시황은 많은 술사(術士)들을 불러 함양 부근에서 가장 풍수에 적합한 곳을 찾으라 했고 결국 주(周)대 두 도읍의 가운데에 위치한 지역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고고학 팀들이 발굴한 위치도 바로 그 범위 내에 있다. 그리고 그 지점은 전대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인정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사기(史記)』의 기록이 잘못된 것인가? 만약 아방궁이 불에 타지 않았다면 천 년 동안 가장 훌륭한 역사서라 칭송받는 『사기』가 틀린 것이란 말인가? 가능성은 있다. 사람들이 은상(殷商)의 역사를 해석할 때 비슷한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은상은 천 년 가까이 통치하여 역사상 가장 장수한 왕조라고 했다. 그러나 고고학 발굴에 근거하면 상나라가 멸망한 시대는 사마천이 기록한 시기보다도 빠르고 심지어 500여 년의 차이가 생긴다.
그렇다면 아방궁에 대한 『사기』의 기록도 오류가 있는 것은 아닐까?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자. 『사기』에 항우가 아방궁을 불태웠다는 기록은 없고 항우가 불사른 것은 함양의 궁전이라는 기록만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사기․항우본기』중 “마침내 함양을 살육하고 그 궁실을 불태웠으며……”, “진나라 궁실을 불태우자 3개월 동안 탔다.”고 돼 있을 뿐이다. 이 기록은 고고학 발굴에 의해 증명됐다. 다시 말해 『사기』에서 말한 ‘궁실(宮室)’은 불에 탄 진나라 도읍이었던 함양에 있는 궁전과 기타 진나라의 궁실이지 위하(渭河) 이남의 상림원(上林苑)에 있던 아방궁은 아니다. 후인들이 아방궁이라 얘기했을 뿐이라 보는 것이다.
아방궁이 불에 탔다고 말한 사람은 분명 있다. 당(唐)나라 저명한 시인 두목(杜牧)이 바로 그다. 『아방궁부』에서 “초나라 사람이 불을 붙이니 아까워라 초토가 되었구나.”가 그것이다. 오늘날 고고학 팀이 잘못된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이 근거로 삼는 게 바로 이 『아방궁부』다. 두목은 문학가로 아방궁을 불태웠다는 말을 지어내 풍자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어쨌든 두목은 문학가이지 고고학자가 아닌 것은 사실이다. 두목의 관점이 고고학적인 관점이 될 수는 없다. 그렇기에 항우가 아방궁을 불태웠다는 실질적 근거 자료가 될 수 없다.
아방궁이 불타지 않았다면 또 다른 문제가 남는다. 함양의 궁전과 병마용(兵马俑) 등을 불태운 항우는 왜 아방궁을 그대로 내버려 뒀을까? 고고학 팀은 선언적인 관점을 제기한다. 아방궁은 원래 건축되지 않았다고! 고고학 팀들은 3가지 의문을 제기했다.
첫째, 2003년 아방궁 고고학 팀은 아방궁 유적지의 북쪽 성벽에서 대량의 한(漢)나라 와편을 발굴했다. 한나라의 물건이 어떻게 진나라의 건축물 위에 있는 것인가? 아방궁이 한나라 때에도 존재했고 궁전으로 사용했다는 말인가? 이 와편은 아방궁을 수리할 때 사용했다는 말인가?
둘째, 아방궁 앞 궁전 유적은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고대 세계역사 상 가장 광대한 규모의 땅을 다져 만든 궁전의 토대라 한다. 50여 만 평방미터의 토대로 본다면 그러한 규모의 건축물은 당시의 수준에서는 완성할 수가 없는 것이다. 또 진시황 말년에서 진2세, 그리고 진 왕자 영(嬰)은 함양궁 혹은 망이궁(望夷宮)에서 정치 활동이 이루어 졌고 아방궁의 얘기는 없다.
셋째, 아방궁이 존재한다는 확실한 증거는 당시의 문자 기록과 실물인데 아직까지 실재한다는 물증이 존재하지 않는다. 궁전이 건축됐고 불타 훼손됐다면 진나라 함양의 궁전 유적처럼 1미터가 넘는 두꺼운 기와 무더기와 같은 것이 발굴돼야 하는데 아방궁 유적에는 없다. 만약 궁전이 건축됐다면 금은보화들이 모두 강탈당했다 하더라도 깨진 와편 조각 하나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와 동시에 문헌 자료도 아방궁이 확실히 건축됐다는 정보가 없다. 『사기』에서 진2세의 즉위 시 아방궁이 ‘아직 완성 되지 않은[未就]’ 상태에서 진시황이 죽자 아방궁 건축이 중지돼 70만 백성을 진시황릉 건설에 동원됐다고 했다. 4개월이 지나 ‘다시 아방궁을 지으려’ 했다고 돼 있지만 7월에 진승(陳勝) 오광(吳廣)의 봉기가 일어났다. 이 짧은 기간에 아방궁을 지을 수는 없었을 것임은 분명하다.
두목이 지은 유명한 『아방궁부』도 고고학 팀이 판단하기에는 작가가 본 적이 없는 궁전을 상상했을 것이라 본다. 명나라 이후 출현한 아방궁도도 두목의 상상에 근거한 것이고.
사실 역사상 아방궁은 지어지지 않았고 그 규모에 대한 묘사는 그림에서나 가능한 것일 뿐 실재하지 않았다고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 있었다. 예를 들어 남송(南宋)의 정대창(程大昌)은 『옹록(雍錄)』에서 설계된 모형은 그렇게 됐으면 바란 것으로 실행되지 않았다고 했다. 애석한 것은 그러한 주장에 대해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결국 역사상 아방궁은 건설되지도 않았고 불타지도 않았다고 감히 단정할 수 있다. 아방궁은 단순한 진시황의 꿈이었을 뿐이다. 역사상 지어지지도 않았으면서 전대미문의 아름답고 사치한 꿈속의 궁전이라며 ‘천하제일궁’이라는 명성을 얻었으며 전제군주의 악행의 결과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됐다. 아방궁은 역사적 개념으로 사람들 마음속에 자리 잡은 결과이리라. 그렇다면 존재하지도 않았던 아방궁을 불태웠다는 역사적 죄를 뒤집어쓴 중국 역사상 최고의 영웅이라 칭송받는 초패왕 항우는 억울할 따름일 터.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중국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